오늘헤어졌어요
w.알았다의건아
"...미안해."
다니엘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들었고, 천천히, 하지만 정신없이 숨 가쁘게 내뱉은 말에 나는 다니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순간 멍해졌다가 내가 들은 게 맞은거였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을 때는 숨이 탁 막혔다.
이제 난 어떡하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리컵 속에 담긴 얼음은 다 녹아서 찾아볼 수 없었고 유리컵 밖에 맺힌 물방울은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흘러내렸고 이내 컵 바닥 주변이 흥건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손끝만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고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댄 다니엘은 아무 말이 오가지 않은 이 상황이 지루하기만 한지 창밖을 내다보기도, 핸드폰을 만지기도, 하품을 하기도 했다. 너의 마음은 이제 정말 아닌걸까. 난 이대로 너를 보내기엔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우리 여기서 그만하자.”
“왜 그래.. 내가 더 잘할게. 응?”
“..더는 이제 자신이 없어.”
“지금 너 상황, 너 마음 안 좋은 거 다 알아. 내가 더 이해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 여기서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두 달 전 그때도, 그리고 두 달 만에 만난 지금도, 여전히 넌 너 혼자 결정을 내렸고 나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 년 넘게 만나면서 나는 너에게 항상 충실했고, 네가 그만하자고 말한 그 순간에도, 기다리는 그 시간동안에도 나는 너에게 충실했다. 하지만 이젠 정말 아니구나. 다니엘의 마음에서 나는 이미 스쳐지나간 사람이었고 다시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너랑 사귀면서 널 많이 힘들게 했니.”
“아니, 너무나 잘해줬고 나한테 너무 과분했어.”
“근데 왜..”
“너 외로움 많잖아. 근데 내가 그 외로움을 다 보듬어 주지 못할 것 같아.”
“......”
“나 이제 4학년이야. 취직 준비도 해야 하고, 논문도 쓰려면 더 바빠져.”
잔인하다.
“자신이 없어. 이제.”
잔인하다. 나는 보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너는 끝끝내 차가운 말만 내뱉는구나.
그런데도 신기한건 눈물이 나질 않는다. 그동안 많이 울어서 그런건가. 네 앞에서 그런 쓰디쓴 말을 들어도 눈물이 나질 않는다. 아니, 그래도 아주 예상에는 없었던 상황이 아니라서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지도 모르겠다.
힘들겠지만, 또 다시 오랜 걸음을 혼자 걸어야겠지만, 이젠 나도 보내줘야지.
“좋아. 네 마음이 그렇다면 더 이상 잡지 않을게. 그래도 오늘 저녁은 같이 먹자.”
다니엘은 고개를 젓는다. 뭐가 그렇게 싫은걸까.
“원래는 너랑 저녁도 같이 먹을 생각으로 나온 건데 내가 계속 너랑 같이 있으면 미련 남을 것 같아서 가야할 거 같아.”
“그 감정은 내가 알아서할게. 그래도 두 달 동안 너만 기다린 사람한테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해?”
최대한 차분하게, 그럼에도 단호하게 말했다. 마음이 약한 다니엘 너는 내 말에 곧 수긍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알겠다고 대답한다.
“저녁 뭐 먹고 싶어?”
“술 마실거야.”
“술은 무슨 술이야.”
“진탕 마시고 너한테 화내려고.”
“그럼 두고 가야지.”
밉지 않게 노려보며 투정부리듯이 말하니 다니엘이 조그맣게 웃는다. 그래. 그거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웃어주기만 해도 좋은데, 뭐가 그렇게 넌 자신이 없어서 날 놓으려고만 하니.
시계를 확인한 다니엘은 지금 밥 먹기에는 시간이 이르니까 우리집 쪽으로 가자고 말한다.
“우리 집은 왜.”
“너 발목 부러지면 나 그냥 갈거야.”
눈은 아래로 내려서 내 발을 향하더니 고개짓을 하며 무심하게 내뱉지만 그럼에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밤에 혼자 집 들어가면 위험하니까 항상 데려다 주거나 그러지 못한 날에는 항상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들어갈 때까지 연락해주던 따뜻했던 마음. 가끔씩 구두 신을 때마다 힘들어 하던 날 걱정했던 그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 마음을 아는 척 할 수 없었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먼저 일어난 나를 보더니 다니엘도 뒤따라 일어난다. 오랜만에 네 옆에 서보니 새삼 또 두근거린다.
**
“갈아 신고 와. 앞에서 기다릴게.”
다니엘의 말대로 시간이 이른 탓에 우리집까지 와서 나는 신발을 갈아 신고 나왔다. 한결 편해진 스니커즈처럼 내 마음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가벼워진 듯하다.
“다시 쪼끄만해졌네.”
“너가 큰 거야.”
조금 전에 헤어짐을 이야기하던 무거운 분위기와는 반대로 시끌벅적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소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킨 채 먼저 나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럼에도 다니엘과 나의 표정은 아까보단 한결 편했다. 뒤이어 소주가 먼저 나왔고 나는 소주병을 들어 거침없이 뚜껑을 땄고 다니엘의 잔을 채웠다. 채워진 자기의 잔을 보고선 나에게 술병을 받아가 내 잔에도 소주를 채워주는 다니엘이다. 짠. 하고 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났고 우리는 바로 잔을 비웠다. 소주는, 역시 쓰다.
“한 병만 마시자.”
“무슨 소리야. 진탕 마실거라니까.”
“취하면 그냥 간다니까?”
“업어다 줄 거 다 알아.”
또 작게 웃으며 내 잔을 채워주는 다니엘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여전히 길쭉한 손은 예뻤고 그 손을 잡고 싶은 마음 억누르느라 혼났다.
나 지금 술 괜히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