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아침, 나는 왠지 모르게 일찍 눈이 떠져 조심스럽게 다니엘의 품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아릿하게 느껴지는 허리 통증에 입술을 꽉 깨물며 겨우 소리를 참은 나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다니엘을 밉지 않게 노려보다 이내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는 거실로 나왔다. 몸이 절로 떨리는 쌀쌀한 공기에 보일러 온도를 조금 높여두고는 설거지, 빨래 등 밀린 집안일을 하고 간단히 먹을 아침까지 준비했더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집에 혼자 있을 토니가 떠올라 대충 다니엘의 겉옷을 챙겨 입고 그의 차키를 가지고는 밖으로 나섰다. 집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적응도 제대로 못 했을 텐데 옆에서 돌봐주지는 못할망정 혼자 놔둘 수는 없었다. 주말 아침이라 그다지 차가 밀리지 않아 10분 정도 걸려 집에 도착했더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집 안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거실 바닥엔 갈기갈기 찢긴 휴지로 가득했고, 식탁 위에 있던 꽃병은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었다. 이 사단을 일으킨 주인공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도도하게 캣타워 정상에 앉아 멀뚱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토니야…” 말도 통하지 않는 고양이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난 그저 화를 꾹꾹 참으며 어질러진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휴지조각을 모두 모아 버린 뒤 티슈를 아예 테이블 서랍 속으로 숨겨버렸고, 깨진 꽃병과 그 안에 담겨 있던 조화도 그냥 함께 버려버렸다. 장식할 만한 소품 다시 사러 가야겠네. . . .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서둘러 다시 다니엘의 집으로 향했다. 나는 토니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정작 내 아침은 챙겨먹지 못해 무척 배가 고팠다. 다니엘은 아직도 자고 있으려나. 벌써 9시가 다 되어 가는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몰다 보니 어느덧 다니엘의 집에 다다랐다. 아침부터 드라이브를 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져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더니 현관 바로 앞에 서 있는 다니엘과 마주쳤다. “어, 너 어디가?” “…어디 다녀와?” “아, 나 집에 잠깐… 토니 혼자 있어가지ㄱ…” 나는 왠지 모르게 화난 얼굴을 하고서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괜히 움츠러들었다. 다니엘은 내가 그의 눈길을 피하며 신발을 벗고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날 꽉 안아왔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몸을 뗀 그는 나지막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 했잖아, 말도 없이 사라져서. “미안해. 얼른 다녀오려고 했는데 토니가 사고 쳐 놓은 바람에…" “나 깨워서 같이 가지.” “너 피곤할 텐데 뭐 하러- 아, 나 배고파! 밥 먹자!”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띄웠다. 아무래도 다니엘은 내가 또 자신을 떠날까봐 아직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내가 미리 만들어 놓았던 볶음밥을 대충 데워 먹으며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나른한 몸을 소파에 뉘였다. 딱히 하는 것 없어도 그저 딱 붙어 앉아 서로의 손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하며 평화로운 주말을 보낸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행복했다. 나는 지금 이 행복이 절대 깨지지 않기를, 앞으로는 다니엘과 다시 헤어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 * * * * * 한 달 후, 행복하고도 평화로운 일상은 여전했다. 난 매일같이 카페로, 다니엘은 회사로 출근하고 저녁엔 번갈아가며 서로의 집으로 퇴근하고. 아, 다니엘은 얼마 전 부사장이 됐다. 그날 밤, 깜짝 발표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직원들이 그를 환영해주었다며 다니엘이 신이 나서 말해주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주관적인 생각이라 내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회사 내 분위기가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추위는 더욱 더 기승을 부렸고, 매일같이 날카로운 칼바람이 불어댔다. 몸이 둔해지는 듯한 느낌이 싫어 곧 죽어도 패딩을 입지 않고 코트나 무스탕 같은 아우터만 고집하던 나였는데, 올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워서 결국 몇 년 동안 옷장 속에 갇혀있던 롱패딩을 꺼내 입고 카페로 출근했다. 시간은 어김없이 빠르게 흘렀고, 날은 일찍 어두워졌다. 연말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거리엔 반짝이는 불빛으로 가득했다. 내 카페 정중앙에도 어느새 트리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말 다했지. 하루 종일 따뜻한 히터 바람 아래에서 편하게 일한 덕분에 살짝 노곤해진 나는 문득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져 다니엘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날이 오고 있나보다, 또.
‘다니엘 대답하시오 –오후 7:26’
‘왜? 무슨 일 있어? -오후 7:30’
‘이따 닭발 사와! -오후 7:31’
‘아 나 오늘도 좀 늦을 것 같은데 –오후 7:40’
‘또 야근이야? -오후 7:42’
‘응. 한 10시까지는 있어야 할 듯 –7:45’
‘미리 말 못해서 미안 까먹었다ㅠ 먼저 집에 가 있어ㅜㅜ –7:45’
‘미안해 내가 데리러 가야되는데.. –7:46’
‘알았어 그럼 내일 먹지 뭐 –7:47’
‘괜찮으니까 조심히 와 –7:47’
…뭐지, 이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은? 나는 괜한 불안감에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못된 생각을 지워냈다. 아니, 진짜 바쁜 거겠지.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니 그 만큼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나는 최근 들어 별 거 안 해도 쉽게 피곤해지기도 하고 손님이 예전보다 줄어든 감도 없지 않아 있어서 마감시간을 2시간 정도 앞당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모르게 피로가 쉽게 풀리지 않았고, 집에 들어가면 바로 씻고 잠들기 바빴다. 어제도 그래서 다니엘 얼굴 제대로 못 봤는데. 오늘도 못 보게 생겼네. 8시가 되어서야 카페 마감을 마친 나는 곧장 집으로 가 토니의 식사를 두둑히 챙겨 놓은 다음, 옷가지를 챙겨 다시 나와 다니엘의 집으로 향했다. “으, 피곤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왔다갔다 거렸더니 꽤나 피곤했다. 나는 얼른 씻고 넓은 침대에 드러누워 뒹굴거리다 이내 이불도 제대로 덮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늦은 새벽, 누군가 내 목 끝까지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며 따뜻하게 감싸 안는 느낌이 들었지만 잠에서 확 깨지는 않았다. 그저 익숙한 듯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더 깊은 잠에 빠져들 뿐이었다. - 일주일 새 다니엘의 야근이 벌써 4번째였다. 전날 밤, 웬일로 일찍 들어왔나 했더니 내일 또 야근이라는 말을 전해오는 그를 보며 도저히 참다못한 나는 다니엘의 뒤를 밟기로 마음먹었다. 도대체 뭘 하기에 매일 늦게 들어오는 건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또 일어난 건지, 불안한 마음을 가진 채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카페 앞까지 데려다 준 그를 배웅했다. 하루의 절반이 조금 덜 지난 시각, 저녁 시간대에 맞춰 다니엘의 회사로 가기 위해 카페 문을 일찍 닫은 나는 집으로 가 내 차를 몰고 다시 도로 위로 나왔다. 그의 회사로 가는 길에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던 나는 애꿎은 핸들만 툭툭 때려댔다. 나는 회사 주차장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쉽게 다니엘의 차를 찾을 수 있었고, 그의 차가 잘 보이면서도 그의 눈에 잘 띄지 않을 구석진 곳에 주차한 뒤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이십 분 쯤 흘렀을까, 아침에 입고 나간대로 롱코트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다니엘이 보였다. 역시, 야근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의 차가 시동이 걸리는 걸 보며 함께 시동을 걸었고, 그의 차가 빠져나가길 기다렸다 곧장 뒤로 따라붙었다. 도로 위로 나온 후로는 혹시라도 그가 날 알아챌까 조금의 거리를 둔 채로 뒤를 쫓았다. 나는 미행을 하면서도 혹시나 내게 사실대로 말하기 위해 연락이 오지 않을까 벨소리를 최대로 올려두었지만 내 휴대폰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한참 그의 뒤를 따라 가다보니, 점점 갈수록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 여기…?” 다니엘의 차는 한 주택가로 들어섰고, 조금 가다보니 어느덧 멈춰 섰다. 나는 그의 차를 그대로 지나쳐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돌아왔다. “헐…?” 다니엘의 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시동이 꺼진 채로. 운전석에 있어야 할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진짜 여기 들어간 거야? “미치겠다, 강다니엘….” 나는 다니엘의 차 바로 뒤에 딱 붙여 주차한 후에 차에서 내려 한 주택을 올려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다니엘이 여기 있단 말이지? * * * * * * “야, 내가 진짜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아냐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그건 네ㄱ… 아니, 그니까…, 아씨, 몰라!” “둘 다 그만해- 어쨌든 오해 잘 풀었으면 됐잖아.” “그래, 여주야 너 강서방 그만 몰아세워. 얘도 얼마나 놀랐겠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나쁜 년이었다. 다니엘이 퇴근하자마자 온 이곳은, 바로 우리 집이었다. 내가 혼자 사는 집 말고, 우리 집. 내 친정. 다니엘은 내게 말 한 마디도 없이 혼자서 일주일 동안 우리 부모님을 설득하려 매일 찾아왔다고 한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누가 봐도 나 당황 했어요- 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퍽 귀여웠다. “누가 이런 깜찍한 짓 하래? 말도 안 하고.”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지. 너 괜히 피곤한데 나 따라온다고 나설까봐 말 안 했어.” “참나…” “어쨌든 넌 오해 풀었고, 우린 강서방 허락했고. 됐지?” “어? 엄마 허락 했어? 아빠도?” “처음엔 본 척도 안 했어. 매일같이 찾아와서는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데 별 수 있어?” “그래, 대신 또 헤어지면 그 땐 둘 다 나한테 죽어. 알았어?” “아이, 하나뿐인 딸한테 죽어가 뭐야…” “그러니까 둘이 이젠 좀 잘 살아. 저녁은 먹었어?” “아니! 배고파!” 나는 어찌됐든 다니엘 덕분에 오랜만에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더군다나 오해를 말끔히 씻어버리기도 했고. 엄마, 나 진짜 이젠 행복하기만 할 건 가봐. - “닭발 먹자고! 닭발!” “아니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서는 뭔 소리야- 너 원래 저녁에 많이 먹지도 않잖아. 아까 밥도 많이 먹은 거 같은데…?” “몰라, 난 지금 당장 닭발을 먹어야겠어.” 친정집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내가 혼자 사는 집으로 온 우리는 잠시 게으름을 부리다 이내 자연스럽게 잘 준비를 했다. 그렇게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다 갑자기 닭발이 먹고 싶어진 나는 벌떡 일어나 다니엘을 졸랐다. 나도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른다. 그저 지금 당장 매운 게 먹고 싶을 뿐이었다. “…여주야.” “응?” “…아니야.” “아, 왜 불러놓고 말을 안 해?! 뭔데?” “…아니, 너 혹시 그… 임신… 한 거 아닌가 해서…” “뭐?!” “아, 아니! 그냥… 너 요새 부쩍 피곤해하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먹성이 좋아진 것도 그렇고. 보통 여자들 임신하면 그러지 않나…?” 다니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최근 들어 내 몸이 보이는 증상은 임신 초기 증상과 비슷하긴 했다. 아니, 그래도 갑자기 이런 일이 닥쳐오니 내심 불안해졌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 “잠깐만 있어봐, 내가 당장 테스트기 사올게!” “어? ㅇ, 야!” 다니엘은 내가 붙잡을 새도 없이 이불을 뻥 걷어차고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니… 이 시간에 문 안 닫은 약국이 있긴 해? . . . “엄마…” “자기야, 어때! 한 줄이야, 두 줄이야?! 어? 말 좀 해봐! 자기야? 여주야?” 다음 날 아침, 나는 전날 밤 다니엘이 용케 구해온 테스트기를 가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에 있는 작은 달력을 보니 그 날이 지나긴 했다. 평소에 주기 계산을 잘 하지 않는 나는 그저 항상 그랬듯 그 날이 다가오면서 매운 걸 먹고 싶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조심스레 테스트기를 확인하니, 너무나도 선명하게 두 줄이 보였다. 엄마… 이젠 내가 엄마 되나봐… “여주야, 나 문 열어도 돼? 말 좀 해봐!” “어휴, 저 화상… 좀 기다려봐!!” 아가야, 네 아빠가 저렇게도 참을성이 없다. 넌 제발 저런 성격 닮지 마.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사람인 척 하는 큰 대형견 한 마리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꼬리도 보이겠다. 나보다도 더 떨리는 얼굴을 한 다니엘에게 손에 들린 테스트기를 건넨 나는 그의 반응을 살폈다. 선명한 두 줄을 확인한 그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나를 꽉 껴안기도, 볼에 뽀뽀를 퍼붓기도,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면서 말이다. “진짜, 진짜, 진-짜 사랑해 이여주! 아, 어떡하지 진짜?” “진정해, 시끄럽다고 신고 들어오겠다.” “지금 그게 문제야? 아아, 어떡하지? 여보야 우리 오늘 애기 옷 보러 갈까? 아니지, 일단 넓은 집부터 사고… 아, 병원부터 가야하나?” “천천히 하자, 천천히. 진정 좀 하세요 다니엘씨.” 나는 한껏 좋아하는 다니엘을 보니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내심 걱정했는데, 이렇게 내 곁에서 그 누구보다 나와 아기를 아껴주고 좋아해줄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나도 감사했다. 내 뱃속에 자리 잡은 이 아기는 돌고 돌아 결국 내 답은 다니엘이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그래, 앞으로는 정말 행복하기만 하자. 나는 다니엘에게 들리지 않을 말을 마음속으로 전하며 그의 품에 안겼다. 새해가 시작된 지 한 달이 겨우 넘은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선물이 내게, 아니, 우리에게 다가왔다.작가의 말 |
안녕하십니까 녤루임미다!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현생이 너무나 정신없어서 이제야 찾아뵙게 됐네요ㅜㅜㅜ 녜리와 여주가 사고를 쳐버렸네요 (?) 헤헤헤 이제 진짜 엔딩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남은 이야기도 많이 사랑해주세용 진짜 항상 말씀드리지만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럼 독자님들 모두 행복하게 주말 마무리 하시고, 새로운 한 주도 화이팅 하세요! +) 7화는 심지어 초록글 첫페이지에 떴더라구요ㅠㅠ 진짜 감사하다는 말 밖에 못 하는 제가 너무 송구스럽네요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ㅠㅠㅠㅠㅠ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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