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누나, 누나 나 봐요. 응?
아, 이진기. 진짜 그러지 마.
진짜 이뻐서 그래요. 응?
거짓말 하지 말고. 어서 안 내놔? 씁!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은 캠코더, 영상이 이리저리 흔들려서는 뿌연 얼굴로 남는다. 모자이크처럼 지지직,
근데 진기야 네가 나를 버려도 나는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는 너를 사랑해
02
-큰일입니다.
……
-무서운 녀석이에요.
…(입을 뻐끔거린다)
-이러다가는, 몇 달 이내에
…나는요. 선생님,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려구요.
-(입을 다문다)
그러니까 분명 그래야 하고, 앞으로도 그럴거에요.
진기야, 나…
03
꼼지락 꼼지락 거리는 손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꾸물꾸물 만지고 있어.
-좋아서 그래요, 좋아서.
…아 진짜
-그러게 누가 그렇게 이쁘래!
졸업을 앞두고 익숙한 네 뒷통수가 보였다. 너는 어쩜 그렇게 뒤통수도 이뻐, 하고 물으면 또 뒤 돌아서는.
-누나가 좋아해줘서 그래요! 내가 누나한테 잘 보이려고 뒷통수도 이쁘게 잘랐거든요!
여기 눈 보여요? 여기, 여기. 자신보다 작은 키를 배려해 허리를 굽히고 만져보라고 했던 그 머리카락. 너는 천사같은 머리카락을 내보이며 나를 향해 웃었어.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너만 모르기를. 조금씩 눈에 띄는 홍조에 웃는 너와 그런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나. 까칠한 나를 졸졸졸 따라다니며 꿍얼꿍얼, 아기들의 옹아리로 중얼거릴 때 마다 내 입술로 네 입을 살짝 밀어낼 때. 네 얼굴이 내 홍조를 모두 가져간 것 처럼 벌게졌다. 토마토인 이진기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어. 무엇보다도
-누나.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예뻐서 좋았어.
04
-누나 우리요,
네게 온 메세지들이 웅웅 울린다. 너는 내게 관심조차 두지 않은 체 저 멀리 떠나가려 해. 나는 이 상황을 알아, 겪어보지 않았지만 모두들 곁에서 한번씩 겪어본 일들을 내가 직접 겪으려 해. 나는 이 못난 두 귀를 막으려 애를 쓰고 귀벙어리가 된 듯 아무말도 하지 않으려고. 말해봤자.
네가 웃는다, 그렇게 나한테만 보여줬던 그 웃음들이 이제는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아. 전화를 받는 너는 그 해의 겨울과 같이 빛나지 않아. 너는 봄이 되고 나 혼자 겨울이 되어 겨울 중 봄이였던 기억을 맴돈다. -어 신혜야.
나 먼저 갈게.
-…아, 먼저요?
응.
어짜피 너는 잡을 생각도 없었잖아. 반짝반짝, 빛나는 내 겨울을 돌려줄 토끼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너 또한 나를 외면한 체.
나는 여전히 주머니에 낡아빠진 장갑을 끼고 있어, 출처인 그 사람은 기억을 하지 못해. 나한테 분명 언제나 춥고 외롭고 시린 그 겨울에 끼라고 손에 꽉 쥐어줬어. 근데 확실히 손 크기가 다르니까 엄지고 검지고 다 헐렁거리는데 나는 왜 아직까지도 버리지 않는 걸까. 구멍이 날 수도 없는 너무나도 큰 장갑은 손가락들이 서로 이어져 있지 않아.
그래서인가. 여전히 나 홀로 애 쓰는 행동은. 감기가 걸려서 콜록였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가 안 쓰럽게 봤어.
붉은 얼룩, 잘 안 지워지겠지만 어서 지우려고. 근데 이 흰 장갑은
05
-(이리저리 회전하는 영상, 여전히 뿌연 화면) 어떻게, 우리 누나 캠코더 진짜 맛이 갔나? (자신의 얼굴을 비춘다) 이 잘생긴 얼굴이 안 나오다니,
이진기 진짜, 남의 캠코더가지고 또 장난친다. 또 혼나봐야지?
-아 누나아
항상 불리하면 말 끝을 흐리더라. 우리 진기는
-…우리 진기라고 했어요? 응? 누나!
끌어안고 아이 다루듯이 코를 부비적거려, 나는 부끄러워 죽겠는데 정작 행동하는 본인도 부끄러운 지 홍시야. 이홍시, 조용히 마음속에서 부르던 또 다른 너.
귀여운 네 모습이 얼마나 좋았던 지. 나의 열아홉은 네 열여덟을 온전히 가진 것 같아서 더 이상 떼를 쓰려고 하지 않았어.
어쩌면 그래서 네가
06
-아직도 걔랑 찍은 영상을 봐?
…
그 낡아빠진 캠코더로?
최진리
-너 자꾸 왜 그래.
…
-이제 이진기는 더 이상 열 여덟이 아닌 거 알잖아.
하지만,
-정신 차려. 나는 네가 아픈 거 제일 싫어, 알잖아. 나는 네 친구인데, 가끔은 내가 아닌 이진기가 네 곁에 남아있다면 만약에…
만약에는 없어 진리야.
나도 알고 있어, 더 이상 진기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나는 추억에 매달리고 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캠코더 바꿀 걸 그랬어, 그 캠코더, 우리 돌아가신 외삼촌꺼잖아.
물려줄 게 이것밖에 없어서 마지막까지 미안하다고 하셨던 캠코더. 좀 더 화질이 좋았다면 나는 더 울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이 편이 제일 나아. 뿌연 화면 사이로 웃는 진기도 꽤 이뻐서 나는 그냥 웃지. 담배 있어? 오늘 좀 땡긴다, 뭐 어때. 이제 죽어가는 사람이 한 대 핀다는데. 어라, 없다고 지금 우는 거 아니지?
07
-누나 담배도 펴요?
…아, 이건 미술적 영감을 위해서
-영감이고 뭐고, 키스할 때 담배냄새 나면 나는 좀 그런데.
…미안
-그래도 누나니까
갑작스럽게 이어졌다. 입술과 입술로 숨이 연결되는데 탯줄같아, 라고 말하려고 했어 사실. 그러면 너는 또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보일 테니까. 그날따라 마지막인 것 처럼 키스하고, 담배맛도 잊을 만큼 너만 보고. 너만 그리고. 너만 찍었어. 입술과 입술 사이로 체온이 오고가는데 나쁘지 않더라. 내가 처음 한 키스는 너무 거칠어서 싫었는데 막상 또 이렇게 하니까 너무 좋아서 계속 하고 싶었어. 그러면 네가 또 웃지. -누나는 나보다 밝힌다, 어우 변태. 그거 알아 이진기?
나는 네 말 하나에 움직여. 그래서 네가 나를 좋아했던 걸까. 치지직, 또 끊긴다. 캠코더가 원망스러워. 삼촌, 거기는 행복해요?
08
-최악이에요
…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
-누나 나는,
그만
-누나
그만해
-누나를 증오해요
어쩌면 알고 있는 지도 몰라, 그래서 고개를 들지 않았나봐. 익숙하게 자주 왔던 카페에는 단골들 사진이 걸려있는 폴라로이드가 붙어있어.
나의 졸업식에 탈색을 한 너와 어색한 화장을 한 내가 같이 어깨동무를 한 체 있어. 그 긴 줄에 빽빽히 박혀있는 단골들 중에, 나의 이진기가 거기 걸려있어. 메뉴판을 보면서 웃는 네가 아닌 빨리 가고 싶은 의무적인 네가 보여. 나를 보며 웃던 너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부들부들 떨려. 지금 내가 그래, 어떻게 해야 마땅하게 받아들어야할까.
밀크티랑 그린티라떼, 플레인 베이글.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 줄 알아, 입밖에 내기도 힘든 거 알아. 당연하지, 우리가 이제 -우리 벌써 오년이에요. 우와 벌써 오년씩이나, 어색하게 뒤 끝을 올려도 너는 여전히 웃지를 않아. 그러고 보니 참 차갑다. 이렇게 차가운 얼굴일 수도 있구나 우리 진기.
-오년이면 됐잖아요.
…개새끼
-알아요. 미안해요.
…개새끼
자켓을 다시 입고는 일어서, 나는 끝나지 않았는데 너는 자꾸 끝나려고 해.
-그만 좀 꽁꽁 싸매요, 겨울도 아니잖아요.
그러게, 겨울이 아닌데. 자꾸 춥다, 지독한 한기가 나를 덥쳐와 진기야. 어쩌면 나는 아직도 열 아홉의 겨울인 것 같아. 따뜻한 것들로 채워도 모자랄 판에 다시 추워지고 있어.
모질고 아프고 힘들고 쓰러지고 싶어. 저 멀리 하나의 점이 될 때 까지, 너는 빠르게 움직이고 나는 그냥 앉아 있어. 나라고, 뛰고 싶지 않았겠어.
이렇게 아픈 걸 너만 몰랐으면 좋겠었는데, 힘들어.
09
아아, 잘 들려요? 이놈의 캠코더, 내가 겨우겨우 빌려왔는데 또 이상하게 맛이 가는 건 아니겠지.
누나, 생일 축하해요. 그리고 졸업 축하해요. 나도 이제 일년 남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사귄지 일년도 넘고 내가 엄청나게 들이댄 거 기억나요?
나 우리 예고 날라리였는데 누나가 나 딱 보고 지도부한테 얘는 날라리 같은 애 될 상은 아니라고 말해줬잖아요.
나 엄청 감동 먹었어요, 누구도 나한테 그렇게 말해준 적 없거든요. 내 친구 민호는요, 예고를 갔다고 했었는데 꼴통이냐고 물어봤었어요.
우리학교 이름 댔더니 막 미친새끼하면서 웃더라구요. 그래도 상관 없었어요. 나는 힘들게 여기왔지만 여기 와서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누나가 자꾸 나를 끄집어요. 미친놈에서 이진기를 꺼내요, 아 부끄럽다. 이 말은 이따가 잘라야지.
너는 꼴통이 아니야, 인재야. 재능이 있어. 좀 더 열심히 하자. 남들이라면 그냥 보통 툭 던질 수 있는 말이 어쩜 누나가 하면 그렇게 이쁘고 진짜인 것 같던지
누나가 졸업하면 나 어쩌지 누나 없이 어떻게 살죠? 누나처럼 나를 토닥이고 이해해주려는 사람은 없는데 말이에요
누나, 사랑해요 그리고 나를 더 사랑해줘요
10
“너는 어쩜 그렇게 모질어.” 진리가 진기의 뺨을 때렸다. 멍하게 주춤거리는 진기, 눈이 흔들리며 엎드리고는 엉엉 운다.
“네가, 뭘 잘했다고 우는 건데.”
“다, 다 잘못했어요. 누나”
“…안 돌아올 거 아는데 누구한테 애원하는 건데”
“…누구는 알았냐구요!”
“끝까지 숨겼어.”
“……”
“끝까지 몰랐어.”
“하지만 난”
“끝까지 너를 위했어.” 진리가 울음을 참고 새까만 구두를 바라본다. 너보다 더 새까맣게 탔던 내 친구는, 누가 보상해주는 건데.
古人이라는 글자를 누가 이 어린 나이에 가지고 싶었는데, 누가 끝까지 살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몰라.
정말 잘 숨겼어, 너. 화장기 없는 진리가 엉엉 운다. 열 아홉 같이.
10. 5
하늘이 이뻐, 어쩜 연분홍이랑 연보라를 휘섞었을까. 휘핑크림보다 더 달 것 같아.
바닥에는 바스락거리는 검은 모래알들이 있어.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야. 내가 걸을 때 마다 검은 모래알들이 우수수 떨어졌거든.
뛴다는 거, 처음 알았어.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이야. 쉴 틈없이 달려도 숨이 안 차올라. 기분이 좋아.
좋아해, 누구를 좋아해. 좋아해? 응,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