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전정국
w. 정국학개론
정국 번외
너의 꿈의 대학에 드디어 합격했다. 추가합격 소식을 너에게 알리러 가기 직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익숙한 석자의 이름이 들리고, 내 꿈이 무너졌다.
아버지가 입원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호해야 했고, 동생들은 이제 겨우 초등학생이었다. 모아놓은 돈으로 병원비를 댔고, 앞으로의 병원비를 위해 일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추가합격 소식을 알려온 대학교에 등록포기를 알려야 했고, 외삼촌 공장으로 들어가 일해야 했다. 우리 가족에겐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운이 좋은 일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의 꿈인 된 너의 꿈을 힘들게 놓아야 했고, 한순간에 공돌이가 되어버린 나는 네 앞에서 당당할 수 없었다.
네가 찾아오리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오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집전화선을 뽑아버렸다.
" 무슨 일 있어? "
" ……. "
" 얼굴 안 좋아 보여. "
" ……. "
" 요새 통 연락이 없어서. "
" ……. "
너는 내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며칠 사이에 어두워진 얼굴을 눈치챈 것 같았다. 내 얼굴로 뻗는 네 손을 피하자 당황한 듯 손을 멈추고는 곧 거두었다.
" 대학은…… "
" 나 대학 안 가. "
" 어? "
" 안 간다고. "
그 말을 하기까지가 힘들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주먹을 꽉 쥐었고,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너와 나의 꿈이었는데. 우리의 미래가 펼쳐질 곳이었는데. 나는 지금 그걸 포기하고, 너 역시 포기할 각오를 하고있다.
" 정국아, 제발…… "
네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곧 울 것처럼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내 옷깃을 붙잡으려던 네 손을 살짝 피했다. 상처받은 듯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 나 대학 안 갈 거야. "
" 그러니까 왜 그러는데, 갑자기. "
" 그냥. "
" …그냥? "
여유가 없었다. 너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네 감정을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무거운 마음 안고 찾아왔을 너에게 상처를 줬다.
" 싫어졌어. "
*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공장으로 출근했다. 주간보단 야간이 수입이 더 짭짤하다는 말에 잠을 줄이고 웬만하면 주야간을 병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크게 힘든 일은 없었다. 같은 패턴으로 일을 했고, 한달 수입은 꽤 들어와서 병원비를 내기에 적절했다.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후 두달쯤 지났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는 내가 있는 곳으로 이사오기를 원했다. 고향에서 한 시간쯤 거리가 있는 곳인데, 공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있고, 제법 살 만한 곳이어서 이사를 진행했다.
친구들에겐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처를 굳이 바꾸려고 하지 않았지만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굳이 알리지 않았다.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자존심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병원비의 부담을 덜어내고는 공장일을 격주로 시작했다. 격주로 해도 충분히 먹고 살만은 했다. 신체검사를 일찍 받은 탓에 영장이 나왔고, 어머니에게 경제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받은 후에서야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생활에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나는 너를 찾았다. 네가 보고 싶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고, 네가 있을 대학교를 걸었고, 네가 공부하고 있을 건물을 구경했고, 어쩌면 네가 밥을 먹었을 식당을 들어갔고, 멀리서 너를 보았다. 남자친구로 보였다. 손을 잡고 걷진 않았지만 늘 너와 함께 있었고, 늘 너와 함께 걸었다. 좋아 보였다.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난 건 너를 쫓으면서부터였다. 너는 매주 같은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드렸고, 나는 그런 네 주위를 맴돌다 카페에 늘 정착해있었다. 딱히 할 일은 없었지만 네 주위에 있고 싶어 커피 하나를 시켜두고 가만히 앉아있곤 했다. 너는 예전의 너답게 주변에 관심이 없었다. 누가 널 쳐다보는지, 누가 네 주변을 맴도는지, 누가 널 쫓아다니는지.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한편으론 야속하기도 했다. 어쩌면 알아줬으면 싶었다.
여자친구는 카페 알바생이었다. 딱히 커피를 마시러 오는 카페가 아니라 너를 보러 오는 카페였기 때문에 늘 가장 싼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그걸 기억한 여자친구는 가끔 케이크를 서비스로 제공해주었다. 그게 단순히 단골에 대한 호의였는지, 관심이 가는 사람에 대한 호의였는지를 구분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 나랑 만나볼 생각 없어요? "
" 네? "
" 나랑 만나볼 생각 없냐구요. 오늘 당장에라도. "
" 저 알아요? "
" 네, 우리 카페 단골. "
" 아, 여기서 일하시는구나. "
여느때와 다름 없이 과제를 다 마친 건지 노트북을 들고 네가 자리를 뜨길래, 조금 텀을 두고 따라 나서던 참이었다. 앞길을 막은 건 지금의 여자친구였다. 마침 알바가 끝난 건지 사복을 입고 가방을 매고있었다. 캄캄한 밤길이라 네가 위험할 것 같아서 데려다줘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다급한데, 나를 막고 서 있으니 조금 짜증이 났다.
" 죄송한데 제가 좀 바빠서요. "
" 그럼 연락처 줘요. "
" 저기… "
" 연락처 안 주면 나랑 지금 밥 먹으러 가든가. "
네가 조금씩 더 멀어지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충 번호를 불러주고 내 번호가 맞는지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붙잡혀있었다. 확인이 끝나고 나서야 너를 쫓을 수 있었다. 많이 멀어진 너를 따라 발걸음을 급히 옮기는데, 네 옆에 네 남자친구가 있었다.
조금 허무해졌다. 그동안 네 곁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 네 남자친구였는데, 왜 너에게 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이렇게까지 분주했을까.
지금의 여자친구 이름은 지혜다. 지혜는 내 연락처를 받은 이후로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카톡을 보냈다. 카톡 프사가 예쁘다느니, 오늘은 시간 있냐느니, 오늘은 뭘 먹었고, 뭘 했다며 사소한 일상까지 보고하는 그 애의 모습에 조금은 짜증이 나다가도 네가 떠오르기도 했다. 내 프사가 너무 많다며 어지럽다고 잔소리한 적이 있었는데,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데 놀러갈 시간이 어디 있냐고 잔소리한 적도 있었고, 오늘 급식이 맛없다고 학교 앞에 떡복이집이 급식업체가 됐으면 좋겠다고 할 때도 있었고.
지혜에게서 너를 찾았던 것도 사실이다. 외모도 성격도, 비슷하게 하나 없는 둘인데, 네 옆에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비참해서, 네가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괴로워서 지혜를 만났다. 지혜는 착했다. 재미있었고. 발랄했고 귀여웠다.
" 오빤 왜 나한테 오빠 얘기 안 해줘? "
" 또 무슨 얘기. 많이 해줬잖아. "
" 그냥… 가족 얘기라든지, 학교 다닐 때 얘기라든지… 아, 오빠 첫사랑 있었어? "
" ……. "
" 에이, 나 그런 걸로 상처받을 사람 아니야. 있었어? "
" 몰라. "
" 있었구나! 뭔데? 누군데? "
지혜와 만나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네 모습에 머리가 복잡했다. 지혜와 손을 잡고, 연인다운 데이트를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네 주위를 맴돌았고,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누굴 만나는지 알고 싶었다. 지혜가 일하는 카페에 가는 것도 그 이유였다. 지혜는 여전히 자기를 보러 온다고 생각했다.
네가 오늘은 카페에 못 보던 남자를 데려왔다. 익숙해질 때가 된 것 같은데,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주문했던 아메리카노를 채 마시지 못하고 카페를 떠났다. 알바 마치고 저녁을 먹자던 지혜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날은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셨고, 일어났을 땐 지혜의 자취방이었다. 양쪽 다 속옷만 입고 있는 모양새에 당황스러워 지혜를 깨우지 않고 자취방을 먼저 떠났다.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럴 리 없다며 나쁜 것은 기억하지 않으려 했다.
지혜와 끝을 생각한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예전부터, 어쩌면 지혜와의 시작부터 어긋나있었다. 난 끊임없이 너를 생각했고, 너만을 쫓았고, 너를 원했는데, 지혜에게서 너를 찾는 게 지혜에게 못할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귄 지 2년 반쯤이 지났을 때였다.
" 헤어지자. "
" …무슨 말이야? "
" 미안. 나 더이상은 못하겠어. "
" ……. "
" 미안하다, 지혜야. "
" ……."
" ……. "
" …나 임신했어. "
곧 일어날 생각이었던 내 발을 묶은 건 지혜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지혜가 그렇게 될 정도의 무언가가 우리 사이엔 없었다는 걸 나도, 지혜도 잘 알고있었다.
" 장난치지 마. "
" 진짜야. 나 임신했어. 오빠 애야. "
" 지혜야. "
" 아무 일도 없었다고? "
" ……. "
" 오빠 술 엄청 마시고 우리 집 온 날. 오빤 기억 안 나지. "
" ……. "
심장이 두근거렸다. 천천히 땀이 차오르는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급격히 밀려오는 피곤함에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두 눈을 감았다. 지혜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울고있었다.
*
" 임신했대. "
소주잔을 채우던 박지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웬 황당한 소리냐는, 의문이 가득한 눈이었다.
박지민은 유일하게 내가 꾸준히 연락해온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학교 다닐 당시에는 너와 붙어다니느라 엄청나게 친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내가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는지, 왜 대학을 가지 않았는지, 왜 너와의 마무리가 좋지 않았는지 전부 알고있었다. 내가 바쁜 와중에도 굳이 서울에 와서 네 주변을 맴도는 것도, 여전히 널 그리워한다는 것도 잘 알고있었고, 내가 어떻게 지혜를 만나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지혜를 대하는지도 모두 알고있었다.
그래서 더 복잡한 듯했다. 나도, 박지민도. 내가 지금 무슨 심정인지, 어떤 기분인지 박지민은 알 게 분명했다.
" 어떻게 할 건데. "
박지민은 항상 많은 걸 묻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박지민은 왜 그랬는지, 어쩌다 그랬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머리가 복잡할 내게 술을 따라주며 내 계획을 물었다.
" ……. "
" ……. "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결론이었다. 지혜는 결혼을 생각했고, 난 다른 선택을 할 여력이 없었다. 지혜에 대한 내 본심이 어떻든 나는 책임을 져야 했다.
술만 들이키는 내게 박지민은 화난 눈치였다. 그런 실수를 한 나를 탓하는 눈이었다. 그날의 실수로 난 모든 기회를 빼앗겼다. 너에게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마저 달아난 것 같았다.
" 나 많이 미워하겠지. "
" ……. "
" 아, 아니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구나, 걘. "
" 병신. "
" 내가 결혼하는 것도 모르겠지? "
" ……. "
" 조금 밉다. "
*
아마 마지막 동창회가 될지도 몰랐다. 지혜는 내가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올해는 극도로 싫어했다. 결혼 소식을 알리러 가는 거라며 지혜를 겨우 설득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평소보다 차가 많이 막혔고, 그 때문에 동창회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었다.
도착해서도 차 안에서 수십 번을 고민했다. 말해야 할까. 말해야겠지. 동창들의 귀에 들어가면 네 귀에도 들어가게 될까.
네가 동창회에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4번의 동창회 동안 너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내 탓이 컸다. 졸업한 후에 네가 모든 짐을 싸버리고 간 후에 단 한 번도 고향에 내려오지 않았다고 세희에게 들었다. 분명 너는 나 때문에 오지 않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이 잘못해서.
동창회는 늘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호프집 문이 낯설었다. 조금 낡은 나무로 되어있는 문을 열자 무거운 소리가 났다. 문 위에 붙어있는 종이 부딪히며 쨍한 소리가 울렸고, 한창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동창들이 보였다. 반가운 얼굴들을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훑어보는데, 거짓말처럼 네가 있다. 잠시 눈을 마주쳤다, 먼저 피해버렸다. 왜 하필 오늘은 네가 있을까.
반갑지 않았다. 옆에서 난리를 치며 너와 나를 엮는 정호석도, 마치 고등학생인 것처럼 매년 나를 놀리던 김현석도, 여전히 예쁜 너도.
네게 다가갈 수도 없었고, 동창들과 지난 추억을 즐겁게 얘기할 수도 없었다. 누구에겐 기쁜 소식이지만 나에겐 가장 암울하고 슬픈 소식인 내 결혼 소식을 알리기가 두려웠다. 넌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게 될까. 아니, 넌 날 그리워는 했을까. 한참을 맥주만 들이켰다. 연속으로 세 잔 정도를 들이킨 것 같은데, 띵하지도 않고 멍하지도 않은 맑은 머리를 붙잡고 인상을 찡그렸다. 괜히 울컥하는 기분에 한숨을 한 번 쉬고 내뱉어버렸다.
" 나 결혼한다. "
조용해졌다. 그렇게 시끄럽던 호프집이. 남녀 가릴 것 없이 시선은 내게 향했고, 적막을 깬 건 김남준이었다.
" 야, 뭔 결혼이야. "
맥주잔을 꽉 쥐었다. 그 이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너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매년 너를 찾아오는 나를 뻔히 아는 너희는 그랬다. 이상할 법도 했다. 특히나 오늘은 네가 있는데. 내가 그토록 가까이서 마주하고 싶었던 네가 있는데, 나는 지난 4년처럼 너에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일부러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고, 여기저기서 축하한다는 인사가 쏟아졌다. 축하할 일인데, 축하를 받기가 힘들었고, 너희도 그래 보였다. 네 앞에서 내 결혼을 축하해주는 게 쉬울 일이 아닐 터였다.
지혜에게 전화가 왔다. 삼십 분에 한 번씩 카톡을 달라던 지혜의 말을 깜빡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밖으로 향했고, 전화를 받기 위해 호프집 옆 골목으로 옮겼다.
" 카톡도 안 주고. "
" 미안. 정신이 없었어. "
" 뭐래? 오빠 결혼한다니까. "
" …축하한다고 하지. "
" 그치? 결혼식은 온대? "
" 그거까진 안 물어봤는데. "
" 치, 언제 들어갈 거야? "
" 곧 들어갈 거야. "
" 곧? "
" 응. "
" 너무 늦어, 오빠. "
" 아직 여덟 시야, 지혜야. "
" …여자 옆에 앉은 거 아니지? "
" 여자 옆에 안 앉았어. "
" 여자 옆에 앉으면 안 돼, 오빠. "
" 응. "
" 진짜 그럼 혼나. "
" 그래. "
" 술 적당히 마시고. 들어갈 때 연락하고. 또… "
" 들어갈 때 연락할게. "
지혜는 말이 긴 편이었다. 내가 딱히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말을 길게 하는 재주가 있었고, 그래서 통화는 기본 한 시간을 넘곤 했다. 그래서 일부러 말을 짧게 했다. 지혜와의 통화가 길어지는 게 불편했다. 특히 오늘은 더 그랬다.
통화 끝에 지혜는 항상 그렇게 말하곤 했다.
" 오빠, 사랑해. "
" ……나도. "
" 나도 뭐? 자꾸 그렇게 수동적인 대답만 할래? "
" ……. "
지혜는 바라는 게 많았다. 얼마 전까지 이별을 통보했던 나를 전부 끌어안고 가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복잡한 마음에 몸을 돌리는데, 네가 보였다. 꼭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있더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 앞이 아득해졌다. 미지의 어떤 곳을 떠도는 느낌. 그런 기분.
" 오빠? "
지혜가 나를 불렀고, 나는 그 순간에도 너를 보고있었다. 항상 말하고 싶었다, 너에게. 너와 행복했던 그때부터 네가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을 지난 4년동안 나는 항상 말하고 있었다.
" …사랑해. "
너는 몸을 돌려 사라졌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너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내가 우리의 지난 시간을 추억으로만 간직할 수 있을까.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골목을 벗어나는데, 네가 호프집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아있다. 네 앞에 서서 네 작은 머리통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오랜만에 보는 네 얼굴, 조금이라도 오래 보고 싶은데. 끝내 머리통만 보여주는 네 앞에서 한숨을 쉬고는 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너와 똑같은 모양새로 앉아 예전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다.
네게서 진한 술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네가 술이 약한 걸 알고있다. 술에 취한 채 남자친구에게 업혀오는 걸 여러 번 본 적 있고, 가끔 자취방 근처 놀이터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져 노래까지 부르는 너를 본 적이 있다. 오늘은 몸에서 술냄새가 벨 정도로 많이 마셨다. 네가.
" 술도 못하는 게 뭘 그렇게 많이 마셨어. "
" 시끄러. 내가 술 못하는지 니가 어떻게 알아. "
" …그냥. 그럴 것 같아서. "
너는 모른다. 내가 지난 4년 동안 너를 얼마나 쫓았는지.
" …사랑해? "
" 어?"
멍청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너를 사랑하는지 묻는 건지, 지혜를 사랑하는지 묻는 건지, 주어 없는 물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 나 보고 싶었다며. "
" ……. "
" 나는 너 하나도 안 보고 싶었어. 4년 동안 니 생각 한 적 한 번도 없어. 진짜야. "
" 그런 것 같더라. "
" 진짜로. 나 과씨씨도 했어. 헤어졌지만… "
" 그래. "
" 그리고 나… 나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 "
" 그랬어? "
" 학원 다니다 만난 사람인데 잘생겼어. 서울 남자라서 되게 다정해. "
" 그래. "
" ……. "
" ……. "
모두 내가 아는 얘기들 투성이었다. 내가 너를 진득하게 쫓아다니긴 했구나. 내가 본 네 모습이 전부이긴 했구나. 네가 잘 지낸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네가 나를 생각하지 않은 게 조금은 미웠지만 네가 나를 그리워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서, 새로운 만남을 가질 수 있어서, 그 모든 인연이 내가 만들었던 구멍을 메꿔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잠시 뜸을 들였다.
" 그래도 나는 결혼은 안 했어. "
" ……. "
이어지는 네 말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너는 나를 질책하고 있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너는 그랬다. 할 말 없냐고. 지난 4년 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 많아 가슴에 응어리가 져있는데, 정작 널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꼭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너는. 나는 너와 눈을 맞추고 있었고, 다음에는 입을 맞췄다. 우리의 마지막 입맞춤이었다.
*
지혜는 결혼 준비로 바빴다. 식장을 알아보고 날짜를 잡아야 한다며 분주했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고 상견례 날짜를 잡았다. 지혜 아버지는 내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어린 딸 잡아먹는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틀린 말은 아니라 굽신거리다 나왔다.
나는 별로 바쁘지 않았다. 외삼촌께서 공장 임원직 자리 하나를 주신 덕분에 요새는 더 그랬다. 정해진 시간에 초과근무 없이 적당히 회의만 하고 생각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일이 끝나면 지혜와 통화했고, 지혜가 오늘 뭐했는지 들어주다 잠드는 게 하루 일과였다. 늘 똑같은 일상 속에서 네게 연락이 왔다.
인사 이외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와는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너도 아마 그렇게 생각해서 내게 연락한 거겠지.
고향까지는 한 시간이었다. 끝을 얘기하러 가는 자리가 분명했는데도 난 들떠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액셀을 세게 밟았고,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 호프집에 앉아 떨리는 마음으로 너를 기다렸고, 너는 동창회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들어왔다.
" 일찍 와있었네. "
" 어, 뭐. 조금 긴장돼서 세게 밟다보니. "
너를 만나고 내가 솔직하게 뱉은 유일한 말이었다.
적막이 찾아왔다. 네가 가방을 옆 의자에 두고 코트를 벗을 때까지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렸다. 너는 자리에 앉자마자 맥주와 감자튀김을 시켰고, 아마 맥주가 올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사이에 아무 말이 없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아무 말이 없던 적이 없었고, 아무 말이나 던져도 늘 맥락이 되었고, 스토리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는 스토리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은 최대한 간결하길 바랐다.
" 잘 지냈어? "
내 물음에 너는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그래서 조금 재촉했다.
" 잘 지냈지? "
" …응. 너는? "
" 잘 지냈지. "
거짓말은 생각보다 쉬웠다.
" …음, 어디 살아? "
" 그냥, 근처에. 여기서 한 시간쯤 걸리는 곳. "
" 학교는 다녀? "
" 아니, 안 갔어. 일하고 있어. "
" 무슨 일 하는데? "
"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버는 일. 별로 말할 정도로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서. "
" …그렇구나. "
너는 꽤 의외의 것을 물어봤다. 우리의 지난 추억이라든지 내 결혼이라든지 지혜에 대해 물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넌 내가 준비하지 않은 것들, 그리고 쉽게 답하기 어려운 것들을 물었다. 네가 묻는 것들은 내 치부였고, 너를 떠난 이유였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 결혼은 안 물어? "
" ……. "
" 묻고 싶은 거 그거 아니야? "
" ……. "
" 얼마나 됐는지, 결혼은 언제 하는지, 뭐 이런 거. "
" ……. "
" 아닌가. "
직접적인 내 물음에 너는 당황한 듯 기침을 했다. 눈물이 맺힐 정도로 콜록거리다 진정이 된 너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 안 궁금해, 그런 거. "
" 아, 안 궁금해? "
" 궁금해한 적도 없고, 궁금해할 일도 업어. "
"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
" 난. "
" ……. "
한마디를 툭 뱉어놓은 네가 망설이는 게 눈에 보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는데,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미리 정리하고 나온 나와는 다르게 너는 아직 정리가 덜 된 모양이었다.
" 잘 못 지냈어. "
" 어? "
너는 예상 외의 대화를 시작했다.
잘 못 지냈다고, 네가 그랬다. 그럴 리 없는데. 내가 너를 쫓는 내내 본 네 모습이 잘 못 지낸 모습일 리가 없는데. 아니, 그래선 안 되는데.
" 잘 지낸 적 없었어. "
" ……. "
" 네가 그지같이 만들었잖아. "
" ……. "
" 너 나한테 왜 그랬어? "
" 야, 김여주…… "
" 나한테 왜 그랬냐고. 나 너한테 묻고 싶은 거 많아서 보자고 한 거야. 근데 하나만 묻자. 너 나한테 진짜 왜 그랬어? "
" ……. "
동창회를 했던 그날, 그날의 눈으로 너는 나를 보고있었다. 나를 질책하던 그 눈. 내가 미워서 죽겠다는 그 눈. 잔뜩 상처받은 그 눈. 너는 나에게 또 내가 대답하기 힘든 것들을 묻고있었다.
나는 그날 내가 너에게 큰 잘못을 한 걸 알고있다. 너를 꾸준히도 좋아하는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고, 너에게 거짓말을 했다. 너와 같은 대학을 가는 게 싫어졌다고 말했고, 그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열아홉살의 나는 아버지가 아프다는 무거운 짐을 너와 나누고 싶지 않았고, 가고 싶지만 대학을 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고, 걱정하는 눈으로 보는 네가 나를 동정하는 눈으로 보게 될까 봐 무서웠다.
스물넷의 나는 달랐다. 내가 결혼을 결심하게 되기 전까지는. 네가 없이 자존심은 무너진 지 오래였고, 조금이라도 너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조금 덜 한심한 내가 되어서 네게 다가가고 싶었다. 지금에서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너와 함께 만들 수 있는 미래가 없는 걸 아는데. 더이상 노력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걸 아는데. 네게 지난 과거를 말해봤자 너는 당시 내가 짊어져야 했던 짐을 나눠진 채 스스로를 질책하고 울 게 뻔했다. 스물넷의 나는 달랐지만 여전히 네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 이런 거 이제 와서 말해 뭐하냐. "
" …뭐? "
"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술이나 한잔 하고. 기분 좋게 가자, 어? "
" ……. "
네 눈빛에서 잠시 비참함이 스쳐지나갔다. 곧 의자에서 코트와 가방을 들었고, 나는 그런 너를 붙잡으려 했다.
" 나 갈래. "
" 야, 김여주. 나 너 보려고 한 시간 왔어. "
내 말에 너는 코웃음을 쳤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빨개진 눈을 하고 너는 나를 돌아봤다.
" 아, 너 그건 알아야 해. "
" ……. "
" 나한테 가벼운 마음 가지지 마. "
" ……. "
" 내 생각 하면 우울했으면 좋겠고, 슬펐으면 좋겠어. 지나간 과거 붙잡는 미련한 애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는데, 난 니가 그랬으면
좋겠어. 그리고… "
" ……. "
" 결혼 축하한다. "
마지막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난 4년 동안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어떻게 사는지 굳이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지난 과거를 추억하지 않은 채, 친구로서 술 한잔 하며 털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는 나를 너무 잘 알고, 나는 너를 너무 잘 아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 그 이상일 때가 있었으니까.
내 생각과 너는 많이 달랐다. 네가 변한 게 아니었다. 눈이 그랬다. 너는 여전했는데, 내가 변했다. 옛날에도 먼저 변한 건 나였고, 지금도 먼저 변하는 건 결국 나였다.
내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네 앞에 조금 더 일찍 나섰다면 우리의 마지막이 달라졌을까.
//////////사담//////////
제가 저번 주에 안 올린 사실을 방금 알았어요 뭐죠(?)... 깜짝 놀랐네 그래서 오늘은 두 편을 올립니다 (ㅠㅠ)
저 요새 이것저것 뭐 한다고 컴퓨터 켤 시간이 별로 없어요 ㅠㅠ 완결까지 내용을 더 생각하는 바람에 써야 할 내용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제가 시간이 없다보니 글을 자주 못 씁니다 ㅠㅠ 그래서 이번 두 편 올리고 연재 시기를 조금 늦춰야 할 것 같아요 힝 죄송합니다 ㅠ 앞으로는 비정기적으로 갑작스럽게 뽝 올 예정이에요 틈틈히 조금조금씩 써서 최대한 빠르게 다음 편 업뎃 하겠습니다 제성합니다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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