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생활은 따분했다.
생각 했던 것 보다 말은 더 통하지 않았고 원체 느긋한 성격이라 느린 걸음걸이는 항상 누군가의 방해였다.
한국에 가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가족이 보고 싶은 건, 글쎄. 아니라고 볼 수 있었다.
미국에 도착하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엄마나 아빠에게 온 연락은 끽해야 문자 두, 세 통이 다였고 그나마도 답장이 필요 없을만한 내용의 그리 길지 않은 문자였기에 나는 그대로 연락을 꼭꼭 씹어 기억 어딘가에 묻어 버렸다.
이모는 엄마보다 훨씬 나를 살뜰하게 챙겼고, 나는 늘 딸이 갖고 싶었다며 수줍게 웃는 그 얼굴이 좋아 한국에 있을 엄마 생각은 잘 하지 않기로 했다.
이모부 또한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고, 동혁은 내가 저와 같은 학교에 같은 학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에 신이나 이것 저것 알려주려 끊임없이 쫑알거렸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 정말이지 완벽한 이방인인 나재민은 나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스며 들었다.
첫 날 부터 오늘 까지 나재민은 매일같이 이 집에 출석 도장을 찍듯 학교가 끝난 동혁이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고, 가끔은 동혁이 보다 먼저 문을 열기도 했다.
오자마자 동혁이 보다 더 자연스럽게 이모에게 마구 애교를 부리다가 부산스럽게 가방을 열고 그 날 해야 할 숙제를 꺼내는 모습은 이제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동혁이 말을 들어보면 학교에서도 되게 인기 많은 것 같던데. 하긴, 얼굴을 보면 인기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근데 이상한건, 이동혁 왈 모든 사람에게 좀 귀찮다 싶을 정도로 치대고 친한 척 하는 걸 즐기는 나재민이, 나 한테는 일주일 째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횟수로 말을 건다는거.
처음 며칠은 나도 어색하니까 그냥 인사만 하는 정도로 지냈는데 이동혁이 엄청나게 의아한 눈으로,
"너...처음 보는 사람이랑도 20분 만에 베스트 프렌드 먹으면서 여주 누나한테는 왜 그러냐...누나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하는 걸 보고 그냥 재민이가 날 피하는 구나...라는 걸 알게 됐다.
당연히 기분은 더러웠는데 나재민도 걔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까 날 피하는 거라고 생각 하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힘드니까.
게다가 지금은 나재민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애써 그 쪽엔 관심을 끄기로 결심했다.
"여주, 내일이 첫 등교지? 이모가 같이 가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에이, 괜찮아요. 동혁이 있잖아요."
"어휴, 쟤는 내가 영 못 미더워서..."
동혁이 다 들으라는 듯 대놓고 한숨을 폭 내쉬는 이모에 거실에 있던 동혁이가 뭐라뭐라 투정을 부렸지만 쿨 하게 듣고 씹은 이모는 내 손을 꼭 붙잡고 그 손을 쓰다듬었다.
"어린 것이 혼자 외국에 와가지고, 어휴. 너네 엄마도 아닌 척, 걱정 많을 거야."
"...네."
"알아. 나도, 우리 언니가 좀 많이 무뚝뚝하지. 그래도 겉으로 티를 안낸다 뿐이지 니 생각은 많이 해. 언니가 널 많이 믿고 있어서 그래."
"...네."
"혹시 학교에서 누가 괴롭히면 꼭 말 하고. 학교에 동양 애들이 많이 다녀서 차별이나 그런 건 없을 거야. 그래도 동혁이랑 잘 붙어 다니고."
"알았어요 이모. 너무 걱정 마세요. 동혁이도 있고...재민이도 알잖아요."
내 앞에만 서면 애매하게 시선을 피하던 얼굴을 떠올리며 이모가 걱정하지 않게끔 입꼬리를 더 올려 웃었다.
Saint Paul Private School (세인트 폴 사립 학교).
학교는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조금 더 컸고, 조금 더 복잡했으며 사람이 많았다.
미드에서 보던 학교는 깔끔하고 학생들도 즐거워 보였는데, 학교는 어딜 가든 같은지 학생들의 표정은 졸음으로 가득했다.
동혁은 원래 처음 오는 사람들은 길을 잘 잃는다며 내 옆에 딱 붙어 오피스와 교실을 안내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학생이 이동하며 수업을 챙겨 들어야 하는 시스템이라 교실을 잘 기억해야 한다며 하루 종일 나를 보필하던 동혁은 미스 브라운의 문학 수업이 끝나자 난처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누나. 나는 지금 컴퓨터 수업 들으러 가거든. 근데 누나는 음악 수업이지."
"아...혼자서 가지 뭐. 너무 걱정 하지 마, 내가 애기도 아니고."
"그래도...아, 야! 나잼!"
타이밍도 기가 막히지. 하필 그 때 멀리서 다가오던 재민을 불러세운 이동혁은
"얘도 누나랑 같은 음악 수업 들어. 둘이 같이 들으면 되겠다. 야. 누나 좀 부탁해."
라는 말을 남기곤 쏜살같이 사라졌다.
둘이 남아서 솔직히 어색함에 질식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재민이가 처음 만난 날 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가요, 늦겠다. 라고 하는 통에 내색은 안하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누나."
"ㅇ, 어?"
"제가 누나 피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빴죠."
내가 느끼던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는 점에 아주 잠깐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재민의 그 꽉찬 돌직구에 아니라는 형식적인 대답을 하긴 싫어 나 또한 솔직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쪼금...?"
내 대답에 한번 소리내 웃은 재민이 눈을 맞춰왔다.
순하게 휘어진 눈에 속눈썹이 엄청 길어서 꼭 사슴 한마리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미안. 앞으론 그런 일 없어요."
"아니 뭐...난 괜찮아..."
"누나 같은 사람은 처음 만나서 그랬어요."
그게 무슨 의미지?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어느새 음악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에 도착 해버려서, 나는 선생에게 나 대신 내 소개를 하는 재민의 등을 멀뚱히 올려다 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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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초록글 이라니!!!
그냥 재민이 글이 읽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건데, 이렇게 좋아 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 달아주신 한분 한분, 정말 감사해요.
이 글은 그냥 가볍게 쓰려고/읽으려고 시작한 글이니만큼, 빠른 전개가 예상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충동적으로 쓴 글이라 그 어떠한 것도 확신은 없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