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남편
숲이 보였다.
짧은 문장 하나를 한글 파일에 적어놓고 여주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신경질적으로 백스페이스를 여러 번 눌러 문장을 지웠다. 도무지 뒷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주는 태형과 결혼 전, 베스트 셀러를 세 권이나 낸 유명 작가다. 감성적인 글과 시적인 표현들이 히트를 쳐 아직까지도 많은 수량이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태형과 결혼한 후 여러가지 일들로 감정을 잃어가며, 마치 글 쓰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여주에게 치명적이었다.
[작가님! 제가 다음 달부터 인사발령이 다른 부서로 나서, 이제 담당자가 바뀔 것 같아요. 유명하신 분이니까 잘 대해주실 거에요!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여주는 노트북을 그대로 켜놓고 뒤로 벌러덩 누웠다. 잠시 멍하게 있는데, 노트북 옆에 놓아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려 몸을 일으키고 문자를 확인했다. 2주에 한 번씩 보는 출판사 직원은 언제나 여주의 말을 잘 들어주며 밝게 대해주었다. 문자 말투에서도 그 성격이 드러나는 듯 했다. 여주와 계약한 출판사는, 고맙게도 2년 째 아무런 작품이 없는 여주와 계약을 이어가고 있었다. 뭐, 워낙 여주의 책들이 아직도 잘 팔려서일수도 있지만. 재촉을 하지 않아서 고마웠다.
"..."
결국 여주는 오늘도 다섯 시간동안 한 문장만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다섯 시간이 넘어가는 순간, 노트북에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오늘도 글렀구나, 싶었다.
"..이사님?"
태형은 비서의 부름도 듣지 못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오늘도 단정히 정리된 머리와, 깔끔한 수트를 입은 태형은 살짝 인상을 쓰고 한 손에 잡은 펜으로 서류를 툭,툭, 건드렸다. 점차 검은 잉크가 번져가는 결재서류에 비서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여 부르자, 그제서야 반응한 태형이 일부분이 검게 물든 서류를 보고 비서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다시 뽑아오는 건, 비서의 일이라.
비서가 서류를 다시 프린트 하기 위해 이사실 밖으로 나가고, 태형은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하고 나서부터 태형은 일에 집중을 하다가도 문득 여주의 아침 모습이 떠올랐다. 약간 부은 눈으로 자신을 앙칼지게 쏘아보던 모습, 자신의 잠버릇에 이불을 뻥뻥 차버리던 모습. 처음 보는 모습이라 그런건지, 자꾸만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집중력이 떨어졌나, 싶어 서랍에 든 안경을 꺼내 썼다.
어느새 저녁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밤이 찾아왔다. 태형과 여주는 둘 다 각자의 일 때문에 지쳐 있었다. 긴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여주가 냉장고에서 캔 맥주 하나를 꺼내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넓은 소파만큼 TV도 상당한 크기였다. 리모컨으로 전원을 누르니 고요하던 집이 TV소리로 조금 채워지는 것 같았다. 요즘 재밌다던 예능을 틀어놓고 맥주캔을 땄다. 한 모금 들이키자, 시원한 느낌이 몸에 퍼지며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
여주가 술 기운에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고, 몸도 나른해지기 시작할 때 쯤 태형이 집으로 들어왔다. 일이 많았는지 아침의 정갈한 모습과는 다르게 넥타이가 조금 풀어져 있고, 소매도 걷어 올려져 있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은 듯 했지만 서로 금세 눈을 돌린다. 다녀왔다는 짧은 인사조차 없는 사이라는 것이 다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금세 씻고 나온 태형이 머리를 털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여주는 여전히 맥주를 마시며 TV를 보는 중이었고. 방으로 들어갈 줄 알았던 태형이 소파에 앉으니 의아해진 여주가 태형을 바라보니, 조용히 리모컨을 가져가 채널을 돌리는 태형이다. 바뀐 화면에는 2018 월드컵 국가대표 평가전이라는 자막이 떴다. 보고싶은 게 있어서 그런거구나. 역시나 대화 없이 내린 결론이다.
"..야."
맥주도 꽤나 마셨겠다, 술기운이 조금 오른 여주가 시선은 TV에 고정하고 태형을 불렀다. 참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태형이 대답 대신 여주를 바라보았다.
"너는 왜 나랑 결혼했냐."
"..."
"왜 하필.. 나야."
오랜만에 마신 술에, 요즘들어 우울한 기분이 자극된 듯 했다. 평소의 무표정하던 얼굴과 다르게 지금 여주의 얼굴에는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났다. 지침, 우울감, 무기력함, 그리고 슬픔. 왠지 더 보지 못할 것 같아 태형이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매일 감정 없던 얼굴이 저렇게 변하는 건 태형에게 어색하고 낯선 모습이었다. 태형은 말없이 여주가 마신 맥주 캔 들을 바라보았다.
"..전에 말했는데."
"..."
"서로 아무 감정이 없으니까."
"..그랬네. 맞다."
2년 전, 왜 자신과 결혼해야 하는지 묻던 여주에게 태형은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라고 대답했었다. 그 정도로 서로에게 아무 감정도 없기 때문에. 있더라도 나쁜 감정이기 떄문에. 그 때는 몰랐다. 태형과의 생활에서 여주 자신의 감정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리게 될 줄. 순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루었다. 예전의 기억들이 떠올라 여주가 씁쓸히 웃었다. 슬펐다. 슬픈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먼저 잔다."
마음대로 울지도 못 하는 게 또 슬펐다. 취기가 오를수록 더 울적해지기만 하는 기분에 여주는 작게 말하곤 먼저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아침에 갖다놓은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잠이 올까 싶었지만, 적지 않게 마신 술 덕분인지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여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야."
"..."
"일어나."
여주는 아침부터 들려오는 태형의 목소리에 서서히 잠에서 깼다. 점점 또렷해지는 목소리와 함께 머리도 깨질 듯 아파왔다. 어제 마신 술의 여파인 듯 했다. 천근만근인 눈을 떠보니 바로 앞에 태형의 떨떠름한 얼굴이 있었다. 소리도 못 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더니, 두통에 인상을 확 찡그리는 여주다. 왜 또 팔베개를 하고 태형을 껴안고 자고 있던 거지? 황급히 어제 가져왔던 인형을 찾으니 잠들 때 까지만 해도 품에 고이 안겨 있던 인형이 침대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
"..미안."
"오늘 저녁에 모임 있는 거 알지. 시간 맞춰서 와."
여주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자, 대수롭지 않게 일어난 태형은 욕실로 들어가며 말한다. 아, 잊고 있었다. 오늘은 태형의 회사와 거래처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가 있는 날이다. 깜빡하고 그렇게 술을 마시다니. 어제의 행동이 후회되는 여주였다. 안 그래도 숨막히는 곳인데, 이렇게 속도 좋지 않은 상태로 가야한다니. 몇 시간 뒤가 걱정이었다.
태형은 매일 아침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눈을 떴다. 자신도 모르게 여주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껴안은 자세였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여주의 얼굴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 여자가 잠버릇이 또 발동했구나, 싶어 금세 차분해졌다. 한편으론 웃기기도 했다. 이제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며 인형을 가지고 올 땐 언제고, 그 인형은 지금 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깨워야 하나 고민하다가 시간을 확인하곤 야. 하는 다정하지 않은 말투로 여주를 깨웠다. 태형의 아침 일상에, 여주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H호텔 로비, 차에서 내린 여주가 직원에게 인사를 받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며칠 전 시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할 때보다 배는 더 공들인 모습이었다.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와 반짝거리는 소재의 원피스, 그 때보다 더 높은 구두와 더 화려한 귀걸이. 여주는 한참 전에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자꾸만 울렁거리는 속에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안에서 얼마나 또 웃는 기계가 되어야 할지 두렵기까지 했다. 천천히 로비로 걸어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태형이 다가왔다.
"늦었잖아."
"차가 막혀서."
"빨리."
태형은 여주에게 팔 한쪽을 내밀었다. 팔짱을 끼라는 소리였다. 남들에게 태형과 여주는 완벽한 부부였기에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연기를 해야만 했다. 팔짱을 낀 태형과 여주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대형 룸에 나란히 들어섰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들 사이로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여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김이사! 오랜만이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그래그래. 이번에 기획한 사업 살짝 봤는데, 꽤 괜찮던데? 조금만 다듬으면 매출 꽤나 올리겠어."
"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옆에서 많이 가르쳐주셔서."
사탕발린 말들이 오고가고, 태형도 그 사이에서 고군분투 하는 중이었다. 여주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분위기에 벅차한다면, 태형은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었다. 태형과 여주 모두에게 힘든 공간이었다.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태형의 옆을 여주가 열심히 따라다녔다. 농담이 오고가면 싱긋 웃기도 하고, 안부를 묻는 말에는 상냥히 대답하며.
"야. 나 잠깐만."
"어디 가는데."
"화장실."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자, 여주와 태형은 태형의 부모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거래처들이 함께 진행하는 사업에 대한 발표를 들었다. 이제 막 중반부를 넘겼을까, 여주는 자꾸만 메스꺼운 속에 태형에게 작게 나갔다 온다 말하곤 좋지 않은 표정으로 룸 밖으로 나왔다. 곧장 화장실로 향하는데, 높은 구두 때문에 머리가 더 아파오는 듯 했다. 조금씩 휘청거리며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속에 든 것을 게워냈다. 물을 내리고, 휴지로 입을 닦곤 잠시 앉아 있는데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야. 김이사님 부인 봤어? 진짜 예쁘더라."
"어. 실물은 이번에 처음 보는데, 예쁘긴 하더라. 근데 좀.. 뭐라고 해야되지. 이상하지 않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여자들의 목소리에 여주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진정된 속이지만 당장은 일어날 힘이 없었다. 여자들은 화장을 고치는 듯 달칵거리는 소리를 내며 여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했다. 당사자가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뭐가?"
"뭔가.. 웃어도 웃는 게 아닌 것 같아."
"아, 나 알 것 같아."
"그치. 감정이 없는 느낌? 기계적인 느낌이 나."
여주는 심장이 철렁했다. 스스로만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사람에게도 드러날 정도라니.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약점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요 며칠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무감정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날카롭게 쿡쿡 박히는 듯 했다. 여자들은 금세 화장실을 나섰고, 여주는 한참동안이나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두려웠다. 자신의 감정 없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될까봐.
한동안 그대로 있다, 시간이 오래 흐른 걸 확인한 여주가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밖으로 나왔다. 발표는 모두 마무리 되었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여주가 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손목을 잡는다. 피부에 닿는 따뜻한 느낌에 돌아보니 태형이 아침에 본 것 처럼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
"..속이 좀 안 좋아서."
"부모님 기다리셔."
태형은 여주의 손을 잡고 호텔 로비로 향했다. 언제나 사이가 좋은 태형의 부모님은 서로 예쁘게 미소지으며 대화를 하고 계셨다. 그러다 여주를 발견하곤 걱정스럽게 물으신다. 몸이 많이 안 좋냐며. 지친 내색을 애써 지우며 여주가 살짝 웃어보였다. 괜찮다는 대답에도 태형의 부모님은 걱정을 쉽게 거두지 못하셨다. 부모님을 배웅 하려는데, 먼저 가라며 태형과 여주에게 손을 흔드신다.
"너희 가는 거 보고 갈게."
"아.."
며칠 전의 일이 신경쓰이셨던 건가 보다, 하고 여주는 생각했다. 태형은 비서에게 차를 대기시키라 연락하고, 곧 태형의 차가 로비 앞에 도착했다. 여주가 태형의 부모님을 한번 더 쳐다보자, 먼저 가라며 손짓하신다. 태형이 여주 곁으로 다가와 조수석의 문을 열어준다. 처음 받는 매너있는 행동에 어색하게 태형을 바라보자, 남들 앞에서 언제나 그랬듯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타. 한다. 여주와 태형이 모두 차에 타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
"..."
여주가 처음으로 타 본 태형의 차 안에는 적막만이 맴돌았다. 태형이 운전을 하며 깜빡이를 켜는 소리, 신호를 기다리며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나마 차 안이라는 걸 상기시키는 듯 했다. 여주는 몸도 마음도 지쳐 그저 멍하게 창밖만 보고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자신만 그 자리에 멈춰있는 것 같았다. 그런 여주를 힐끔 본 태형이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로 여주를 부른다.
"확인을 하던가, 끄던가."
"..아."
여주가 미처 듣지 못했던 핸드폰 벨소리와 문자 소리가 태형은 거슬렸다. 자신이 말해주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핸드폰을 켜는 여주의 행동에 태형이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오늘 여주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 앞에서는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항상 긴장하고 완벽하려 노력하던 사람이었으니.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침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부재중 전화 1통
[작가님, 내일부터 제가 작가님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시간 괜찮으실 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보시면 연락 주세요.]
모르는 번호로 받은 문자에 여주는 답장할 기운도 없이 화면을 껐다. 내일은 출판사와의 정기적인 만남이 있는 날이었다. 내일은 또 어떻게 변명을 해야할지, 머리가 또다시 지끈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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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남주가 등장할 때가 되었군요
오늘 너무 우울한가요...
이렇게 무겁게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쓰다보니...
ㅠㅠ.. 좀 더 밝게 해야하나..
어때요 독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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