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남편
"어서 와, 새아가. 잘 지냈니?"
"네, 어머님. 덕분에요."
"태형이는 여주 잘 챙기고 있는 거지?"
"그럼요. 애교가 얼마나 많은지, 귀여워요."
여주는 지금 이 공간 속, 자신만이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온 사방에서 고급스러움이 묻어나오는 호텔의 레스토랑 룸 안, 원형 테이블에 둘러 앉은 중년 부부와 태형, 그리고 여주. 언제나 다정히 여주를 대해주는 태형의 어머니에게 싱긋 웃어보인다. 이제는 미소까지 완전히 가식적으로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태형은 다정함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여주를 챙겼다. 애정이 넘치는 둘의 모습을 태형의 부모님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가,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으니? 어디 아픈거야?"
"아뇨, 아까 점심 먹은 게 소화가 잘 안 되나 봐요."
"그래? 무리하지 말고. 몸 건강은 잘 챙겨야 해."
"네. 신경쓸게요. 저.. 잠시 화장실 좀.."
몇 번 들지 않은 식사지만 벌써부터 얹혀오는 게 느껴져 여주는 잠시만이라도 룸을 빠져나왔다.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은 여주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세 시간 전부터 관리받은 머리, 몸매를 드러내면서도 단정한 분위기를 내는 원피스, 화려하게 반짝이는 귀걸이와 잘 마무리된 화장. 전부 자신에게 버거운 것들이었다. 새로 꺼내 신은 구두도 발 뒷꿈치를 쓰라리게 했다. 쉼호흡을 하고 화장실 밖으로 나서자, 태형이 벽에 기대 서있다.
"연기력이 줄었네."
"..."
"예전엔 잘 웃기라도 하더니."
"..."
"그렇게 티를 내면, 내가 곤란하지."
태형은 아까의 부드러운 미소를 싹 지워버린 얼굴로 여주에게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처음 들었을 땐, 손 발 끝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무서울 정도로 적응해버린 여주가 아무런 미동 없이 태형을 바라보았다. 덤덤한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태형과 지내며 변했다면 변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닭살돋는 소리 들으니까 좀 울렁거려서."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나? 꽤 많이 했던 말인데."
"들을 때마다 새로워. 나쁜 기억은 잘 잊혀지니까."
"..."
아까의 그 예쁜 미소를 지으며 태형에게 한 방 먹이는 여주를, 태형이 여유롭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30세가 되기도 전에 온갖 일을 다 겪은 태형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여주의 말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태형이 여주의 옆으로 다가가 나란히 섰다. 모르는 사람이 보는 둘의 모습은,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잘 어울렸다.
"조금만 참아, 이 짓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
"표정 좀 풀고."
"치워."
태형의 부모님이 계신 룸 앞에서, 여주의 턱 끝을 손으로 살짝 건드리는 태형의 행동에 여주는 무표정 그대로 태형의 손을 쳐내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태형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곧 뒤따라 들어갔다. 태형이 이런 식의 달갑지 않은 말이라도 걸지 않는다면, 둘 사이에는 침묵만 이어질 것이다. 다시 마주보고 앉은 네 사람은, 여주의 컨디션을 고려해 슬슬 식사를 마무리하려 하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손을 닦던 여주는 태형 어머니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버렸다.
"아이 생각은 아직 없니?"
"..."
"엄마."
"2년이나 안 물어봤어, 아들. 나도 많이 참았다고."
여주는 2년 만에 처음으로 듣는 질문에 잠시 표정관리가 안 되었다. 태형 앞에서 이렇게 당황한 건 처음이었다. 여주를 힐끔 바라보고 눈치를 살핀 태형이 어머니를 말렸다. 그러나 태형이 막아도 정말 많이 궁금했던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 태형의 어머니다. 그 사이에 재빨리 평정심을 되찾은 여주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운다.
"죄송해요, 어머니. 아직은 둘이 지내는 게 좋아서요."
"..그래, 너희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뭐 문제 있는 건 아니고?"
"그럼요. 저희 둘 다 건강해요."
여주가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물음에 더 밝게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여주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하던 태형의 어머니는 여주의 살가운 말 한마디에 금세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태형은 의외로 잘 대처하는 여주의 모습에 제법이네, 속으로 생각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곧 대화가 마무리되고, 네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형의 부모님을 배웅하자, 호텔의 로비에는 둘만 서있었다. 두 사람 앞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멈춰섰고, 키를 건네받은 태형이 지친 표정의 여주를 보며 가볍게 묻는다.
"타고 갈래?"
"아니."
둘에겐 '함께'라는 것이 없었다. 매몰차게 거절하곤 뒤이어 들어온 택시에 타는 여주다. 태형도 형식상 물은 것이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차에 타 시동을 걸었다. 같은 집에 살아도, 같이 움직인 적은 없는. 남들 앞에 서기 한 발자국 전, 가식적으로 타이밍을 맞추는. 룸메이트보다 못한 사이. 결혼 2주년 기념일의 짧은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먼저 출발한 태형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온 여주는 현관에 놓여있는 태형의 신발 옆 여자 구두에 멈칫했다. 아무리 남보다 못한 사이라지만, 여자를 데려온 적은 없었기 때문에. 잠시 멈춰있던 여주는 여자와 있더라도 그냥 무시해야지 생각하곤 갑갑했던 구두를 벗어 신발장에 가지런히 넣어 놓았다. 평정심을 유지하던 여주의 감정은 거실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있는 태형과 시어머니의 모습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이제 오니?"
"...어머니."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구나."
잠시 뒤, 여주와 태형은 나란히 무릎을 꿇고 태형 어머니 앞에 앉았다. 다리가 슬슬 저려오기 시작할 때 쯤, 아무 말 없던 태형의 어머니가 슬픈 표정으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이십대 후반의 아들을 둔 여자라고 하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의 고운 손에는 태형이 사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반지를 발견하고 잠시 뜸을 들이던 태형이 입을 열었다.
"며칠동안 좀 다퉈서 그랬어요. 오늘 화해하려고 했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같이 있다가도 따로 귀가하는 게 부부라고 할 수나 있는 거야?"
"..조금 심하게 다퉜거든요, 어머니. 저는 들를 데가 있어서 조금 늦게 들어온 거에요."
태형과 여주는 각자 열심히 어머니를 설득하고 있었다. 여주는 평소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던 태형의 어머니에게 죄송스러웠다. 정도 쌓였고, 시어머니에게 태형은 소중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여주의 마음을, 어머니는 조금 다르게 이해하신 듯 했다. 주눅든 여주를 바라보던 태형의 어머니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어머니!"
갑작스런 침실 검문이었다. 어머니가 들어간 큰 방은 태형이 쓰는 방이다. 누가봐도 남자 혼자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깔끔한 단색의 침대와 이불, 테이블에 놓인 남성용 화장품, 게다가 드레스룸에는 태형의 옷만 가득. 여주와 태형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소 감정이 실린 손길로 태형의 방을 살펴보던 어머니가 잠시 말이 없더니 새아가 방은 어디니, 하고 차분하게 물었다. 곧 여주의 방까지 모두 확인한 태형의 어머니는 굳은 표정으로 다시 소파에 앉았다.
"..너희,"
"..."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니?"
"...죄송합니다."
다시 태형의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곤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2년이나 자신을 속여왔다는 사실이 태형의 어머니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까의 그 다정한 모습도, 여태 보여준 모든 것들도 전부 진짜라고 믿어왔기에 배신감은 당연히 어마어마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여주는 생각 정리를 하려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제 가짜 부부였던 것도 들통나고, 태형과의 생활도 끝일 것이다. 하지만 여주의 이런 생각은, 태형 어머니의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마무리 짓지 못했다.
"둘이 오늘부터, 무조건 같은 침대에서 자도록 해."
"..네?"
"엄마. 그게 무슨,"
"부부는 아무리 다퉈도, 항상 붙어있어야 해. 그래야 싸우든지 화해하든지 전부 할 수 있는 거야."
"...어머니."
"난 너희 절대 이혼 못 시켜. 새아가를 위해서라도 절대. 예고없이 와서 확인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태형의 어머니는 둘이 단순히 사랑 싸움을 심각하게 했다고 오해하신 듯 했다. 자연스레 너희 서로 사랑하긴 하니? 와 같은 물음이 들려오겠구나 했는데. 폭탄 발언을 던져놓고 그대로 집을 나가버린 태형의 어머니에 여주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강제로라도 이 생활이 좀 더 일찍 끝나길 바랐는데. 태형도 아무 말 없이 그 자리 그대로 서있었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사실 언제든지 각방을 써도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만, 들켰다간 추진력 최고인 어머니가 무슨 일을 벌이실지 모르는 것이었다. 머릿 속이 복잡해진 여주는 말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몸을 씻어내고 나면 엉켜버린 생각들도 씻겨 내려가길 바랐다.
자신의 방에 있는 욕실에서 씻고 나온 태형이 침대에 앉아 있는 여주의 모습에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행동을 멈췄다. 진짜로 여기서 자려는 건가. 여주는 젖은 머리를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태형을 담담하게 마주보았다. 품에는 자신이 쓰던 베개를 안은 채.
"말 잘 듣네. 엄마 말이라서 그런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니 말 대로."
"..."
"그러니까 너도 협조해."
마지막이라도 좀 원만하게 끝내자.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말한 여주는 태형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등을 돌리곤 침대 한 켠에 눕는다. 요즘 여주는 로봇과도 같았다. 사람과 로봇을 구분하는 한 가지 요소, 감정이 없다시피 행동했기 때문에. 태형은 속으로 남은 계약기간을 가늠해보며 보조문을 닫고 머리를 말렸다. 드라이기 소리가 우렁차게 공간을 울렸고, 얼마 되지 않아 드라이기를 내려놓았다. 머리를 덜 말리고 잠에 드는 건, 습관같은 일이었다.
"..."
매일 혼자 누워 잠에 들던 침대에 누군가와 함께 누워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태형은 슬쩍 여주가 누워있는 왼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봤지만 잠에 든 건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혼자 너무 예민한가 싶어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똥말똥한 눈만 꿈뻑이는데 옆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주가 자세가 불편했는지 아예 반대쪽으로 돌아 눕는다. 그러니까 이제, 태형을 바라보고 누운 것이다. 정말 금세 잠이 들었는지, 차갑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편안한 표정이다. 다시 말하면, 태형을 의식하지도 않고 정말 마음 편히 꿀잠을 자고 있다는 소리. 태형은 뭔가 진 기분에 허, 하는 짧은 숨을 뱉었다. 그러다가 또 여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지내는 2년 동안, 이렇게 편안한 표정은 처음이었다. 웃음이 별로 없어 날카로운 인상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면 순한 얼굴이다. 자연스레 태형도 여주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고, 점차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꼈다. 합방 첫 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잠에 빠져들었다.
여주는 점점 느껴지는 낯선 촉감과 향기에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가만히 눈만 깜빡이는데, 점점 선명해지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이 지금 꿈을 꾸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게 마주보고 누워있는 태형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곱게 감겨 있는 긴 속눈썹과 매끈하게 떨어지는 콧대가 새삼 참 잘생겼다 싶은 얼굴이다. 어제 밤부터 같은 침대를 쓰게 됐다는 것 까지 기억해낸 여주가 익숙치 않은 느낌에 슬며시 고개를 돌리니, 베개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태형의 팔이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밤새 태형의 팔베개를 베고 잔 것이다.
"..으악!"
여주는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머리가 부스스하든 얼굴이 부었든 상관할 게 아니었다. 태형은 여주의 비명에 잠에서 깨 스르륵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자 마자 보인 것은, 이불까지 꼭 끌어안고 자신을 변태 보듯이 바라보는 여주였다. 흔들리는 시선이 태형의 팔과 눈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난 또 뭐라고. 여주의 작은 소란의 이유를 알아챈 태형이 여기저기 뻗친 머리로 기지개를 쭉 폈다. 여주와 다르게 세상 여유로운 행동이었다.
"나 뚫어지겠다."
"미쳤어?"
"누가 누구한테."
"밤새 이러고 있었어?"
여주가 충격받은 얼굴로 자신에게 따지든 말든 태형은 늘어지게 하품을 해대며 부시시한 머리를 정리하기 바빴다. 그런 태형의 행동이 여주를 더 자극시켰다. 태형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원망섞인 눈빛에 어이없단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억 안 나나 본데, 어제 나 끌어안고 품에 파고든 건 너야."
"..."
원망과 충격이 공존했던 여주의 얼굴에는 당황과 수치심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뭔가를 꼭 끌어안고 자야 하는 자신의 잠버릇을 어제는 미처 이야기할 여유도, 생각도 못했다. 잠결에 끌어안은 게 하필 태형이라니! 여주는 태형 몰래 속으로 온갖 절규를 다 하는 중이었다. 그 덕에 얼굴이 온통 붉어진 것도 모르고. 태형은 붉어진 얼굴로 생각에 빠져있는 (절규하는 중인) 여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은 어제 밤에 본 잠든 표정 다음으로 보는 생소한 모습이다.
"..그거 내 잠버릇인데, 오늘부터는 인형 하나 가지고 올 테니까,"
"..."
"..뭐, 그렇다고."
민망함과 수치심에 중얼거리듯 말하던 여주는, 옆으로 누워 자신을 빤히 보는 태형의 모습에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태형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형이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여주는 침대에 드러누워 소위 이불킥이라는 행동을 먼지나도록 힘껏 행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작은 목소리로 자책하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태형의 목소리에 잽싸게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맞다. 야 너.."
"..."
태형은 여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방금의 그 바보같은 행동을 본 것인지 잠시 말을 잃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관리를 해보지만 이미 태형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다 읽었다. 한심하다는 저 표정. 2년동안 어떻게 관리해온 이미지인데, 이렇게 한순간에 다 까발려지다니. 여주는 어제 밤과 오늘 아침이 절망스러웠다.
"..눈곱 꼈다고."
"..."
..정말 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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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하세요 여러분!
새작으로 돌아왔습니다 ㅎㅎ
새로운 이야기도 많이 관심 가져주세요..!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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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로 받는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