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 변경)
열어줘
"..."
남준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워 그저 허공만 바라보며 고기를 오물거렸다. 윤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태형도 식사는 아까 다 마쳤으며 정국과 남준도 거의 다 먹은 듯 했다. 아직도 신기하기만 한 집의 주방을 눈으로 이리저리 훑는데, 뚜벅 뚜벅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식사를 시작할 때 없었던 두 남자다.
"보호막 보고 왔어?"
"어. 멀쩡한데, 이상하네."
"..."
태형의 물음에 한 남자가 나를 힐끗 보며 대답한다. 옆에서 남준이 저 사람은 정호석이에요.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를 가려주는 역할을 하죠. 하고 작게 설명해준다. 남준의 목소리가 들렸던 건지 내가 호석을 쳐다보자마자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내가 당황하자 부드럽게 웃으며 이름이 뭐에요, 하고 묻는다. 냉큼 김여주라고 대답하려는데, 내 앞에 놓여있던 물컵이 혼자 스르륵 움직이는 모습에, 김여주..으엑? 말하다 말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놀랐다.
"아, 미안해요. 귀찮아서."
"..괜찮,"
"저 형 능력 짱이지? 내가 보기엔 저게 최고인 것 같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젠틀함을 뽐내는 것 같은 남자가 나에게 가볍게 사과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힘을 들이지도 않고 저 멀리의 싱크대에서 수저와 접시를 휙휙 자신의 앞으로 가져다 놓는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인 태형이 부러운 투로 말한다. 저게 염력 같은 건가? 내 생각을 또 읽어버린 태형은 응. 다들 그렇게 말해. 하고 대답해준다. 저 남자의 이름은 김석진이라는 말과 함께.
"태형아. 이 형님의 잘난 외모와 너무 잘 어울리는 능력이지 않니?"
고기를 야무지게 썰어 먹던 석진은 한껏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하더니 별안간 손키스를 날린다. 뭐지, 원래 저런 성격인가.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눈만 도르륵 굴리는데,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익숙한 듯 자기 할 일을 한다. 잠시 입을 비죽이던 태형이 갑자기 씩 웃더니 나에게 뭔가를 속삭인다.
"저 형이 너 예쁘대."
"..."
귓속말 치고는 꽤 컸던 목소리에 나는 물론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태형은 석진의 벙찐 모습에 꺄르르 웃으며 방으로 올라갔고, 난감해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배도 찼겠다, 접시를 정리하려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로 향하는데 석진과 남준의 대화가 얼핏 들려왔다.
"남준아, 규칙 추가하면 안 되냐?"
"네? 무슨 규칙이요?"
"서로한테 절대 능력 쓰지 않기."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웃음이 터졌다.
*
2층에는 침실이 3개가 있다. 제일 왼쪽은 호석의 방, 계단을 지나 가운데는 남준, 그 옆으로는 내 방까지. 그리고 그 세 방들 밖으로는 소파와 TV가 있는 2층 거실이 있다. 카펫이 깔려 있고 쿠션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1층은 온통 대리석 바닥에, 무식하게 넓기만 한 공간들이 많아 회의를 하거나 모일 일이 있으면 대부분 이 곳을 이용한다고 한다. 오늘도, 두 달 동안 여기서 살아가야 할 나를 위해 모두 2층 거실에 모였다.
"피곤하지는 않아요?"
"아, 네."
남준은 약간 멍한 표정의 나를 보고 걱정스레 물어왔다. 이 사람은 날때부터 다정했나.. 나랑 같은 시공간에 살았다면 남녀노소에게 모두 인기가 많을 스타일이었다. 내 앞에 놓인 쿠션 하나를 끌어안고 고개를 드는데, 석진과 눈이 마주쳤다. 약간 어색한 듯 내 눈을 피하더니, 허공에 손을 휙 흔들어 옆에 있는 큰 창에 커튼을 친다. 여덟 명이 동그랗게 둘러앉으니, 이질적이지만 수학여행 같은 느낌도 나고, 아무튼 그랬다.
"이 집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활 규칙이 있어요."
"규칙이요?"
"네. 그것만 지켜주시면 딱히 싸우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에요."
내 오른쪽에 앉은 호석이 규칙에 대해 말하며 허공에 손을 뻗더니 컴퓨터 화면 같은 게 나타났고, 거기에는 〈생활 규칙> 이라는 제목의 글이 정갈하게 쓰여져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하나, 서로 존중한다. 둘,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한다. 셋, 서로에게 해가 되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넷, 시간을 엄수한다. 세 번째 규칙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네 번째 규칙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시간을 엄수하라는 거지?
"우리는 항상 같은 시간 속에 있다고 했던 거 기억나지?"
"네."
"우리가 두 달마다 시간을 돌려서 그래."
"..."
"두 달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가게가 열려. 우리는 가게가 닫히기 전에, 시간을 돌려서 두 달 전으로 돌아가야 하고. 가게가 닫히면, 시간을 돌릴 수도 없고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할 수도 없어."
"..."
"그리고 오늘 아침이 시간을 돌리는 날이었는데, 시간을 돌리고 가게가 닫히자마자 네가 여기로 들어온거야. 시간을 돌릴 땐 보호막을 이중으로 만들어놔서 아무도 볼 수가 없고 들어올 수도 없어서 놀랐던거고."
태형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아까 다들 왜 그렇게 놀란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럼 난, 두 달 뒤에 가게가 열리면 다시 아빠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거다.
"근데 왜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걸 가게라고 불러요?"
"우리한테 시간을 돌리는 법을 알려주신 분이 있는데, 그 분이 shop이라고 불렀어. MAGIC SHOP. 그래서 우리끼리 가게라고 부르는거야."
"아.."
아주 기본적인 호기심은 얼추 해결이 됐다. 왜 시간을 돌려야만 하는지와 같은 깊은 질문은 굳이 오늘 알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 속으로 삼켰다. 앞에 놓인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남준이 더 궁금한 것은 없냐고 물었다. 아, 한 가지 깜빡한 게 있었다.
"다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
"..."
내가 못 할 질문을 한 건가? 나이를 묻는 내 질문에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않는다.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윤기를 제외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남자들의 눈동자를 따라 나도 열심히 눈을 굴렸다. 그러다 딱 눈이 마주친 태형에게, 네? 하고 다시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태형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한다.
"몰라."
"네? 왜 몰라요?"
"여긴 시간이 흐르지 않는 걸. 안 세어본 지 꽤 됐어."
"..."
두 달을 주기로 매번 같은 시간으로 돌아가는 이 남자들에게는, 나이가 아무 상관이 없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평생 여기서 산 건 아니지 않은가. 특히 정국은, 동글동글한 외모와 아직 남아있는 젖살이 나보다 동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읍, 소리를 내며 남자들을 훑어보던 내가 말했다.
"그럼 시간을 돌리기 전에는 몇 살이었는데요? 여기 말고, 저-기. 밖에서 살 때."
"그게 무슨 소용이야."
"왜요? 그 때부터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거니까, 그 나이가 지금 나이잖아요."
자꾸만 나이 이야기를 꺼내는 내가 거슬리는지 윤기가 인상을 쓰고 무슨 소용이냐며 툭 뱉는다. 이제 슬슬 윤기의 그런 태도에 적응이 되어가고 있는 나는 아랑곳 않고 대답했다. 내 말에, 다들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말이 없다. 애초에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는 일이었다. 같은 시간 속이니, 나이도 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스물 일곱이었나?"
"나는 스물 넷."
"나도."
그러니까 정리해보면, 석진은 스물 일곱, 윤기는 스물 여섯, 남준과 호석은 스물 다섯, 태형과 지민은 스물 넷, 정국이 스물 둘. 이었다. 딱 스물 셋인 내 나이는, 나에게 여섯의 오빠와 하나의 남동생이 생기게 만들었다. 태형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말을 쓰길래, 혹시 나보다 어리면 나도 바로 말을 놓아버리려고 했는데, 딱 한 살이 많았다. 약간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남준아, 나 네 앞에 과자 좀."
"여기요."
"지민이형. 좁아요."
잠깐 살펴보니 다들 동생에겐 반말을, 형에겐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태형은 달랐다.
"형. 이따 형 방 놀러 가도 돼?"
"안돼."
"아 왜! 형 방에 있으면 시간 진짜 잘 간단 말이야!"
"시끄러."
저렇게 차갑게만 반응하는 윤기에게 반말을 틱틱 써대며 웅얼대는 모습이, 역시 유별났다. 싫다고 거절하는데도 계속해서 달라붙어 잉잉대는 태형에 조금 짜증난 듯 한 윤기가, 한숨을 작게 내쉬더니 조용히 남준을 부른다.
"준아."
"네?"
"얘 좀."
"아."
윤기가 남준을 부르는 생각보다 굉장히 다정한 호칭에 한 번, 금세 태형을 떼어 놓는 남준의 모습에 두 번 놀랐다. 뭐라고 귀에 속삭이더니, 태형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만족한 듯 웃으며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는 남준이다. 지민에게 호기심의 눈빛을 쏘아대니, 윤기 형이랑 남준 형이 이 집에 제일 먼저 들어와서 좀 각별해요. 하고 친절히 말해준다. 점점, 이 남자들의 관계가 파악되는 느낌이다.
이 남자들, 귀엽다.
열어줘
# 02
두런두런, 남자들과 약간은 쓸데 없는, 약간은 어이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시계는 밤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긴장이 풀어져, 몸이 나른해져 왔다. 하품을 하며 쿠션을 꼭 끌어안자, 금세 졸려하는 나를 눈치 챈 남준이 이만 자러 갈까? 하고 자리를 정리하려 한다. 다들 금세 수긍했고, 다들 각자 방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나도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여주씨."
"네?"
"잘 자요."
"...아, 네!"
순간 설렐 뻔 했다. 와, 저 보조개는 사기다. 잠시 멍하다, 정신을 차리고 남준 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하니 싱긋 웃고 방으로 들어가는 남준이다. 나도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였다. 불을 끄고,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켰다. 은은한 주황빛 불이 내 주위를 밝히고, 그 옆에 놓인 핸드폰을 꾹 눌렀다. 내가 현실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통화권 이탈이라는 문구가 화면 상단에 떠 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포근함이 느껴졌지만 막상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다.
"..."
왼 쪽으로 누웠다가, 오른 쪽으로 누웠다가. 이리저리 뒤척대기만 몇 분, 결국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걸려 있는 내 옷을 보다가, 지금 입고 있는 큰 옷을 바라보았다. 아까 건네 받은 남준의 트레이닝 바지와 맨투맨이다. 키가 커서 그런지 팔과 다리가 다 길었다. 차곡 차곡 롤업해 입고, 방 밖으로 조용히 나왔다. 갑자기 아까 봤던 정원이 떠올라서.
"..."
지민이 닫아 놓아 안 보이면 어떡하지? 조금 걱정하며 향한 곳에는 아까처럼 예쁜 정원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밤이 되어 이곳 저곳 조명이 켜져 있는 정원은 낮보다 좀 더 나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잔디 밭 위에 올려진 넙적한 돌 다리를 따라 걸으니, 작은 분수가 보였다. 밤인데도 맑은 소리를 내며 물을 뿜어낸다. 차가운 물에 손을 대보기도 하고, 분수를 따라 한 바퀴 돌아보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한 곳을 바라보면,
"..."
나를 바라보고 있던 지민과 눈이 마주친다. 순간 너무 당황해서 어버버하며 인사를 했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허공에 팔을 휘적대며 변명을 하고 이상한 행동을 반복했다. 으, 화난 거면 어떡하나 싶어 아무 말도 없는 지민의 눈치를 슬금 슬금 봤다.
"그, 제가 잠이 안 와가지고.. 아까 잠깐 봤는데 여기가 너무 예뻐서!"
"..."
"마음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죄송해요."
내 입장에선 아무 말도 없는 게 더 고역이라, 결국 시무룩한 얼굴로 사과를 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지민은, 작게 웃더니 근처의 벤치로 가 앉는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입술만 꾹꾹 깨물다, 아무래도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슬쩍 걸음을 뗐다.
"잠깐만,"
"..."
"앉았다 갈래요?"
집으로 향하던 걸음은 어느새 벤치로 향하고 있었다.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민의 눈빛을 보니 앉아야 할 것 같아서. 나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뭔가, 외로워 보였다. 조용히 다가가 앉았다. 지민은 아무 말 없이 머그 잔에 담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긴 왜 오신 거에요? 막, 밤에도 나무 키우고..그러세요?"
"잠이 안 와서요. 여주 씨 처럼."
"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우리 둘은 아무 말이 없었고, 간간히 지민이 머그컵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근데, 정말 아무것도 안 통하나 봐요."
"네?"
"여기에 들어온 밖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정원은, 제가 아까 잠궜고."
"..."
그런 것들은 나도 신기했기에, 잠자코 있었다. 시간이 꽤 흐른 것인지, 선선하던 밤 공기가 쌀쌀해졌다. 티 내지 않으려 팔짱을 끼고 몸을 살짝 움츠렸지만, 지민은 눈치를 챈 건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들어갈까요? 추우니까."
"..네."
우리는 금세 집 안으로 들어왔고, 나란히 계단을 올라갔다. 다들 자는 것인지 집 안은 고요했고, 지민과 나의 발소리만 조용히 들렸다.
"저.."
"..."
"정원 가끔 구경해도 돼요?"
조용히 지민을 불러 물으니, 지민은 그렇게 하라며 웃는다. 감사해요, 하고 인사하니 아니라고 손을 한 번 흔든다. 잘 자라고 인사를 하려는데, 지민이 조금 더 빨랐다.
"좋은 꿈 꿔요."
방으로 들어온 나는, 아까보다 더 나른한 기분에 눈을 꼭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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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자님들!
남주를 몇 명으로 추리려고 했는데..
잘 안되는 것 같...
ㅎ..
이게 재미있는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남주는 점차 추려질 거에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암호닉 신청은 [암호닉]
■ ♡ ■
글읽다 돌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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