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 아니라고
: 하지만 걘 나랑 결혼할 거야
매니저: 진아 넌 아무리 동생들이라지만 가끔은 좀 경계하고 싶지 않아? 탄소에 관해선
석진: 왜요?
매니저: ...아냐?
석진: 다른 사람이면 좀 걱정되는데 애들이잖아요 탄소가 애들한텐 절대 안 흔들릴 거 알아서 괜찮아요
매니저: ??? 그래???
석진: 제일 치대는 게 정국이랑 태형인데 형도 알다시피 걔넨 탄소랑 처음 봤을 때 고등학생이었어요 친동생을 거의 키우다시피 한 습관 때문에 완전 애처럼 느꼈을 건데 그 첫인상이 지금이라고 바뀌었을 것 같아요? 다른 애들은 말할 것도 없죠, 얘네만큼 붙는 것도 아니고
여유로운 반응을 보이는 석진. 말은 잘하지만 질투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일단은 믿어주기로 합니다. 진실을 모르는 매니저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네요.
석진: 다른 사람이어도 그 사람이 탄소보다 어리면 괜찮아요, 탄소는 동생 때문에라도 연하를 남자로 못 느끼니까
매니저: 아 하긴 탄소가 너랑 사귀기 전엔 계속 연상이 이상형이라고 했었지?
석진: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을 찾은 거겠죠
매니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면 네가 그런 역할을 잘 해주고 있는 것 같나봐?
석진: ...글쎄요, 그건 탄소만 알고 있지 않을까요?
심심하게 끝난 대화에 먼저 몸을 일으킨 매니저는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잘 만나라며 석진의 어깨를 토닥였습니다. 자리에 남은 석진이 살짝 웃는 얼굴로 작게 중얼거립니다.
석진: 이미 한 번 헤어졌던 사이에 뻔뻔하기도 하지
네가 없는 자리에서 말하는 순간 깨닫는다. 난 정말 무심했다고. 정작 나를 필요로 했을 때 외면했다고. 내가 손 내밀어주길 바랐을 네게 매정히 돌아섰다고.
석진: 미안해 탄소야
탄소: 뭐가?
석진: ...아, 놀랬잖아!
탄소: 그치만 지나가는 길에 니가 보인 걸 어떡해
석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탄소: 이거이거 수상한데, 너 솔직하게 말해봐 내 과자 또 훔쳐갔지
석진: ... ...
탄소: 지금 한국에 있는 것도 아니라서 과자 사올 곳이 없으니까 사과할 준비하고 있던거지? 예행 연습처럼
왜 우리가 다시 연애를 시작하지 않는건지 알고 있다.
탄소: 뭐야 뭘 얼마나 먹었길래 이렇게 애처로운 눈빛이야?
석진: 포카칩 두 봉지...
탄소: ...내가 다른 건 용서해도 포카칩은 건들지 말랬지...
내가 다시 멀어질 준비를 할까 무서운 마음에 부러 거리를 두고 지내자, 마음 먹은 너의 생각을 읽지 못한 건 아니었다. 진작 알아채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가깝게 지내다보니 정작 서로를 챙길 여유가 없었기에 멀어질 수 밖에 없었던 관계도 모르지 않아, 그 거리를 좁히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넌 내게 상처를 받아놓고 없던 일처럼 웃으며 안겨온다. 그건 사람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평생 가져가야 할 죄책감이라며 끊임없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을 막을 방패는 없었다. 애초부터 그럴 각오로 널 좋아하기 시작했으니까. 쉽지 않은 마음을 품게 되면서 얼마든지 무너질 준비를 했다. 네가 나를 욕하고 미워한들 묵묵하게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아파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렇게 아픈 건, 너의 원망이 아니라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는 네게서 받을 상처에만 대비해왔지 정작 나 자신이 입힐 상처엔 준비해오지 않았다. 안일했다. 널 사랑하는 만큼 날 원망하게 될 줄 몰랐다니. 넌 나를 끝내 용서한다. 미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나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는다. 너의 몫을 대신한 죗값을 요구한다. 아프길 각오했으면서 정작 널 아프게 한 잘못은 절대 이해받지 못할 일이었다.
탄소: 내가 진짜 김석진만 아니었어도 명치 때렸다
석진: 화난 거 아냐?
탄소: 너한테 화내는 순간은 딱 세 가지야 하나, 김석진이 나 말고 다른 여자한테 꽂혔을 때 둘, 갑자기 이 결혼 무르자고 할 때 셋,
석진: ...셋?
탄소: 내 앞에서 기죽은 모습일 때
석진: ... ...
탄소: 그리고 지금 네가 딱 그래보여서 화내고 싶은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부터 하게 돼, 이 정도면 진짜 중증이지
네가 쏘지 못한 화살을 대신 쏘았다. 과녁은 나였다.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너에게 사과하라고 날카로운 끝을 겨눴다. 화살을 막을 방패는 없었다. 더 이상 비겁해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네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너무 아껴줘서 너를 보는 마음이 아리다.
석진: 사랑은 공평해야 하는데 너는 왜 을이길 고집할까 생각했어
나한테 아픈 기억을 만들고선 그럼에도 갑이길 원치 않는 네가 이해되지 않았어. 그런데 이해할 수 밖에 없더라.
석진: 넌 나를 너무 사랑해서 너만큼 아프질 않았으면 하는 거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또 너만 감당하려고
탄소: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그건 나도 잘못한 부분이 있었던 일이잖아, 서로 별개의 문제인데 왜 같이 묶어서 생각하려고 해
석진: 내가 너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야?
탄소: 그런 눈으로 말하지마
석진: 너도 모르는 네 생각이라고 나까지 모를 것 같았어?
목이 콱 막혀오는 기분에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입술을 꾹 깨무는 것까지 보고 나니 그 위로 시선을 향하는 게 무서웠다. 네가 울고 있을까봐 겁이 났다. 난 너를 웃게 하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더라. 넌 나를 만난 후로 몰라도 됐을 감정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상실과 이별. 미련과 권태. 좋지 못한 흔적만 남겼다는 생각은 사실로 돌아와 사람을 덮쳤다.
탄소: 네가 하는 방식이 공평이라면 내가 하는 방식은 갑과 을일 수도 있잖아
석진: 왜 혼자 다 안고 가려는 건데
탄소: 그만큼 너한테 받은 게 많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어
석진: 난 해준 게 없는데 넌 항상,
탄소: 말했잖아 너만 있으면 더 바라지 않는다고
용기가 부족한 나 대신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네가 물기 어린 눈동자로 시선을 겹쳤다.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는 정도는 개의치 않는 너에게 주체 못할 애정이 샘솟아 왈칵 끌어안는다. 어느 누가 날 위해 이토록 헌신적일 수 있을까. 얼마나 사랑하면 자기가 다치는 것도 감수하고 가겠다며 을이길 자처할까. 어떻게 된 사랑이기에 좋은 것만 보던 사람이 아름답지만은 않더라도 너 있는 길이라면 상관없다 곁을 채워줄까.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는 이유야 많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이유없이 사랑하고 있어. 너라는 사람을 있게 한 모든 이유에 감사하고 질투하며 한편으로 네 시선 끝에 닿은 사람가 나라서 다행이야.
석진: 무슨 일이 있어도 너에게 이유를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널 좋아하는 이유를 만들지 않을게
그 이유가 훗날 닳고 닳아버려, 너를 사랑한 시간을 잃지 않도록. 언제까지고 좋아하는 마음 그대로 안고 갈 수 있도록 조건 없이 애정할게. 아무 이유 없이 좋아할게. 너의 전부가 뒤바뀐대도 사랑할 수 있도록.
탄소: 네가 그러면 내가 뭐가 돼
석진: 가끔 내가 질리면 다른 사람하고 연애하다 와도 돼
탄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석진: 그래도 네 처음과 마지막은 내가 될 테니까
스스로를 향해 화살을 쏘는 멍청한 짓은 관두기로 했다. 그걸 지켜보는 너에게 더 큰 상처가 될 것임을 알았으므로. 죄책감 또한 덜어내기로 했다. 엄한 감정에 정작 내 진심이 가려지는 건 바라지 않았다. 네 옆에 있는 이유가 죄책감 때문이라 믿는 너를 위해 가면을 벗고 못난 맨얼굴을 말갛게 드러냈다. 지금은 숨고 싶지만 이마저 익숙해지면 나아지겠지. 널 사랑하며 나도 사랑하는 것에 적응하겠지.
내 불안으로 너마저 불안하게 만드는 멍청이는 그만 둘 생각이다. 웃게 해주고 싶은 얼굴을 더 이상 아픈 감정으로 물들이고 싶지 않으니까.
석진: 그렇지?
탄소: ... ...
첫만남부터 여린 모습을 보였던 네가 기특하게 눈물을 참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을 오늘에 마음이 저렸다. 앞으로 정말 행복하게 만나자, 우리.
석진: 첫 눈에 반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만큼 오래 보고 갈 사이잖아
두 번 보고 세 번 스쳐가며 스며든 관심이 네 번 반복되고 다섯 번 부딪쳐서 애정 어린 호감이 되면 그때부터 우린 천천히 녹아들었어.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고. 그러니까 우리 오래 갈 거야. 미리 아팠으니까 이젠 행복해지자. 아주 먼 미래에 모두의 앞에서 고백하는 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석진: 얘만큼 저를 위해주는 사람 없고 얘보다 저를 가까이서 봐준 사람 없어요
함께 산 지도 오래 됐고 얼굴 본 지도 한참인데, 근데 아직도 좋은 걸 보면, 더 같이 살고 싶고 더 자주 보고 싶은 거 보면 앞으로도 사랑하겠구나. 정말 김탄소가 아니면 아무도 못 만나겠구나. 그래서 결혼하려고요. 전 이제 얘가 없는 일상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됐어요.
탄소: 그게 언제 하게 될 말인줄 알고...
석진: 너 없는 일상을 상상하지 못하는 건 예전부터 늘 그랬어
석진의 절절한 고백에 안심한 탄소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고마워. 나 없이 괜찮지 않을 거라 말해줘서. 표현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