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에서 과일을 맛나게 먹는 루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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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혼자서 이걸 다 들고가긴 무리겠지...
만만한게 백현이라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백현씨- 저 지금 회사 지하주차장인데, 간식 좀 사왔거든요. 다 들고가기엔 많아서.."
"제가 내려갑죠!! 좀만 기다리세용 싸모님~"
'자기 뭐해요? 일 열심히 하고있어?'
톡톡- 휴대폰 액정만 두드리며 답장을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은채 백현이 도착했다.
"근데 백현씨, 물어볼게 있는데..."
"네네!"
"지금 회사 분위기 별로죠. 요즘 오빠 기분이 그렇게 좋지가 않아서..."
"아.. 네, 뭐 조금.. 근데 그렇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구요! 음, 어...걱정하지 마세요!"
".......여튼, 오늘은 그냥 갈게요. 오빠한테 저녁 꼭 챙겨먹으라고 전해주세요, 수고해요 백현씨-"
"가시게요? 사장님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지..... 그럼 힘 나실텐데."
"회사일 바쁜데 뭘 그렇게까지 해요. 저 괜찮으니까 얼른 들어가봐요- 맛있게 먹고."
"네, 그럼 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사모님!"
백현답게 밝게 인사하며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오늘따라 강남 일대가 왜 이리 막히는지.
몇 번째 신호인지, 또 신호에 걸려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아, 그냥 자야겠다. 씻기는 뭘...
침대로 쓰러져버린 그녀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여보...! 자기야, 일어나 봐. 내 말 들려?"
"....우으... 오빠...? 이 시간에 왜 여기있어요..."
"하 진짜... 또 몸살 났구나.
열이 엄청 나네.. 루루 어린이집 선생님이 전화 오셨어.
"........루루, 루루는?????"
"루루, 아빠가 남자는 우는거 아니랬지, 뚝."
"...루루야,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우리 루루, 미안해..... 엄마가 루루 못 데리러 가서 미안해....
"...흐끅..엄마가아- 루루 안데리러와서...흐으..."
엄마 괜차나...? 안 아파...? 하며 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는 것을 보고 집이 떠나가라 울었지만 뭐.
우리 둘 다 진정되고 나서, 옆에 든든히 서서 우릴 토닥여주던 루한에게 눈을 돌렸다.
"...고마워요, 진짜.."
"고맙기는, 남편한테. 당연히 내가 해야 될 일인데."
"나 약 먹어야겠다, 요즘 몸살이 더 심해진것 같애.. 나 약 좀 갖다줄래요...?"
루루를 샤워시키려 준비를 하며 루한에게 감기약을 가져다달라고 했더니, 멀뚱하게 서서는 갸웃거리다 말했다.
"ㅇㅇ아, 약 안좋으니까, 허브차 끓여줄게. 그거 먹고 좀 쉬어- 나 잠깐 회사 들렀다 금방 올게. 알겠지? 약 먹지 말고."
"알겠어, 안 먹을게. 다녀와요-"
여전히 내 품에 꼭 안겨 떨어지지 않는 루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내게 여러번 뽀뽀를 한 뒤 루한은 회사로 돌아갔다.
"루루, 엄마랑 씻고 낸내하자. 만세-"
"...만셰-"
"옳지 이쁜이, 엄마 뽀뽀해주세요"
촉-
눈물이 갓 마른 볼에 아이의 서툰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입술에다 여러번 입을 맞췄다.
욕조에다 물을 받고, 루루가 좋아하는 배쓰볼로 거품도 내고, 백현삼촌한테 선물받은 오궁이도 띄우고 아이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루루, 오궁이 어디갔지, 오궁이?"
"오구이 엄마 디에!!"
"오구오구 내 새끼- 오궁이 엄마 뒤에 있는건 어떻게 알았어, 아구 똑똑해."
"배켠쌈톤이 루루한테 오궁이 줘써! 배켠쌈톤 됴아- 헤-"
"엄마는 루루 좋아-"
"루루도 엄마 됴아!!"
둘 다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아까 우느라 기운이 다 빠졌을 루루를 낮잠 재우고, 일찍 올 루한과 같이 먹을 저녁을 준비하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보이는건 보온병에 든 허브차와 쪽지.
'요즘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하네
속상하니까 아프지말고!!
고맙고, 사랑해♥'
"....이런건 또 언제 써놨데-"
휴대폰 케이스 안에 쪽지를 고이 접어 넣고, 싱글싱글 웃으며 식탁에 앉아 허브차를 마셨다.
남편이 해준거라 더 향이 짙게 느껴지는건, 내 착각일까.
한참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있다가 퍼뜩 든 생각.
'.....조개가 있으려나..?'
어려도 주부는 주부여서,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의 끝은 항상 집안일, 우리 루루, 그리고 우리 남편이었다.
루한이 좋아하는 봉골레를 해줄 생각이었다.
아직은 오일파스타를 싫어하는 루루에게는 토마토 스파게티와 미트볼을.
그리고 오늘은 아이스크림도 먹여야지. 루루 대견해서 상 줘야겠다.
허브차 덕분인지, 목욕 덕분인지, 한결 나아진 듯한 몸과 기분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에서 조개를 찾아 소금물에 담궈놓고 루한의 와이셔츠를 다리고 있었다.
내 남자, 어깨도 넓어.
흐뭇하게 웃으며 반듯하게 와이셔츠를 다렸다. 내가 다리고 내가 단추를 채워준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내 남편, 루한이 생각나 입가에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
"어우, 나 오늘 조울증인가봐.."
얼마나 웃었던지 아려오기까지 하는 광대를 꾹꾹 눌렀다.
"...엄므아.."
"어? 루루 깼어요? 이리 와, 엄마한테-"
좀 더 자지. 옆에 내가 없어서 그랬던건지 잠든지 두시간도 안되서 깨버린 루루를 꼭 안고 다시 재웠다.
제 아빠를 닮아 콧날 하나는 진짜 예쁜 우리 루루. 한참을 안고 토닥거리고 있는데, 루한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 왔어요. 루루 자네?"
"응, 루루 자. 아 맞다, 아까 나 백현씨한테 샌드위치하고 아메리카노 줬는데, 잘 나눠 먹었어요?"
"어- 우리 여보 덕분에 내가 회사에서 기가 살아 진짜.
이쁜아, 그니까 아프지좀 마. 응? 속상해 죽겠어."
"허브차덕분에 다 나았어. 오늘 봉골레 해줄게. 루루 잠깐만 안고있어줘-"
남편에게 루루를 맡기고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기야-"
"어후 놀래라, 루루는?"
"루루? 루루 여기!"
".....아 뭐야- 귀여워!"
요리를 하고있는데 허리를 감싸는 손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루루때문에 정장도 못 갈아입은 루한이, 루루가 갓 태어났을 때 썼던 포대기를 꺼내 루루를 등에 업고 있었다.
이 무슨 언밸런스함인가.
루루는 아빠 등에 볼이 눌려서 안그래도 통통한 볼이 더 빵빵해졌고.
"자기 요리하는데 뒤에서 꼭 붙어있으려고 꺼냈어. 나 잘했지?"
"어, 진짜 귀여워요. 완전, 너무너무. 나 사진 한번만-"
사진을 찍으려 휴대폰을 들이미니 옆으로 돌아서서 날 보고 싱긋 웃는 루한.
내가 아니고 여보가 엄마같다.
"그거 꺼낼 생각은 어떻게 했대-"
까치발을 들고 길게 입술을 맞댔다가 떼자 나를 내려다보며 설레게 웃는다.
오늘따라 더 잘생겨보이는 내 남편.
"아까 말했잖아, 자기 안고있으려고."
"알겠어, 면만 볶으면 끝나니까 좀만 있다가 루루 깨워줘-"
관자랑 조개를 넣어 파스타를 만들고, 식기 전에 루루 줄 토마토 스파게티도 만들고 있는 내내
루한은 뒤에서 나를 꼭 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내 정수리에 턱을 콕 찍기도 하고, 양쪽 어깨 번갈아가며 머리를 기대고, 우리 둘 까르르거리는 소리에 깨울 필요도 없이 루루가 깼다.
"우음....아쁘아...."
"루루, 잘 잤어요? 우리 아가, 오구오구-"
"흐이.. 이거 머야....? 루루 내려주세요오..."
"알겠어, 잠깐만-"
오랜만에 세 식구가 마주보고 저녁을 먹고, 루루에게 아이스크림도 먹이고.
한참 셋이서 놀다가 루루가 점점 잠이 오는것 같자 루한이 얼른 안아들고 토닥였다.
"우리 애기, 자자- 아빠 뽀뽀-"
"우응...뽑뽀..."
잠이 와서 눈도 못 뜨는데 그 와중에도 아빠한테 뽀뽀는 해주겠다고 입술을 쭉 내미는데
그걸 본 루한이 가만 있을리가. 루루의 얼굴 전체에 마구 뽀뽀를 퍼붓고 생글거리며 아이를 재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루루 아빠,"
"응..?"
"나도 오늘 재워주나...?"
"당연하지- 들어가서 얌전히 누워있어. 아빠가 큰 아가 재워줄게-"
그게 뭐냐며 한참을 둘이서 웃고는 나는 안방으로, 루한은 루루 방으로.
세수를 끝내고 화장대 앞에 앉아 크림을 펴바르고 있는데 루한이 들어와 내 주위를 맴돌며 머뭇거리더니
서류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네 조심스레 나한테 내밀었다.
"....? 이게 뭔데?"
"....임신 테스터기."
"........ㅇ,에?"
"얼른 하고 나와봐, 그냥 내가 요새 꿈 꾼것도 있고, 그냥.. 느낌이 이상해서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요 근래엔 관계를 가진 적이 없..... 아, 있구나.
변기에 앉아 테스터기 포장도 뜯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루한이 문을 두드렸다.
"아직 멀었어...?"
"아냐, 잠깐만. 아직 안했어."
작은 그의 한숨소리가 들려와 그의 떨림이 나에게까지 전달되는 듯 했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테스터기를 뜯어 테스트를 하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마 볼 수 없어 두 손에 꼭 쥐고 한참을 있었다.
똑똑- 루한이 두번째로 문을 두드렸다.
"응, 자기야, 나가요.... 잠깐만-"
"빨리....."
떨리는 마음을 애써 붙잡으며 테스터기를 확인하는데,
엄마. 두 줄이면 임신 맞죠....?
우리 둘, 루루, 그리고 양가 부모님들 모두가 원했던 둘째였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기야, 아직 멀었어??"
세번째로 문을 두드린 루한.
얼른 이 소식을 전해줘야겠다 싶어 얼른 뒷정리를 하고 나가 루한에게 덥석 안겼다.
"루한...자기야..."
"응, 응, 왜, 어? 왜 그래- 자기야. 잠깐만, 나 테스터기 줘봐. 어?"
다급한 루한에게 떨리는 손으로 테스터기를 건네주자,
테스터기를 받아들고는 떨리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루한.
한참을 서 있다가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기에 다시 꼭 안겼다.
".....나는 너 고생만 시켜서 어떡하지, 미안해서.. 근데 너무 고마워.."
작게 떨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4년 전 루루를 가졌음을 그에게 처음 알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는데, 내 등을 토닥이는 그의 큰 손.
"내가 더 잘할게, 진짜 열배로. 다 줄게, 다 가져가. 고마워, 루루 엄마."
눈물 섞인 미소를 짓는 루한에 나도 그를 마주보고 웃었다.
우리에게, 드디어.
두번째 천사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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