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이거 진짜 답 안 나오네.
뭐어? 되묻는다. 그러더니 냅다 짜증을 내며 웅얼댄다. 머리통을 다리 사이에 그렇게처박고 말하면 어떡하니.
요란하게 깜빡이는 호프집 간판 아래 파란색이 되었다 주황색이 되었다 하는 동그란 머리꼭지에 대고 비아냥
댔다. 여자애가 앉은 꼬라지하곤.
"지는 게이인 주제에."
"이 자식이 근데,"
하루종일 아무 것도 못하게 사람 속을 긁더니 이제 아주 대놓고 후벼파네. 속이 시끄러워 담배를 한 대 물고
거의 절하기 직전의 포즈로 몸을 수그린 녀석을 발로 툭 건드렸다. 일어나봐. 아님 고개라도 좀 들어봐, 어?
토 안 쏠리냐.
"건드리지마 미늉기이개이색끼야,"
이 게이 새끼라는 거야, 이 개-새끼라는 거야. ...근데 이 새끼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마셨다.
그래, 정호석, 이런 거를 소개팅에 데리고 나온 정호석을 탓해야 한다.
제대하고 복학한 뒤 한참이 지나도 여자 친구가 없었다. 당사자인 나를 뺀 영화연출과의 모두가 그걸 염려했다.
처음에는 내가 눈이 너무 높아서 그렇다고 몇몇이 말했다. 무용과 여신들과의 미팅에 끌려 나갔다. 재미가 없어
폭탄을 자처했다. 몇 번의 미팅이 펑 펑 지나가도 사람들이 포기를 몰랐다. 자꾸 누굴 만나라고 귀찮게 굴었다.
짜증나서 밤마다 클럽에 놀러가서 음악을 들었다. 대시해오는 여자들에게 몇 번 웃어주었다. 혹시 고자 아니냐
는 소문이돌았다. 클럽 죽돌이긴 한데 아무도 안 건드린다면서. 참 별 같잖은 소문들이라며 무시하고 촬영 장소
헌팅을 하러 갔다. 장소는 모텔이었고 동행인은 안 친한 동기 여자애 하나 뿐이었다. 카메라 앵글을 체크하는
내 뒤에다 대고 평소 본인이 쏘 쿨하다고 외쳐대던 여자애가 중얼거렸다. 차라리 너랑 오니까 맘 편하다. 너도
너무 우울해 마. 성욕 같은 건, 다른 걸로도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고. 뭐야 씨발? 까서 보여줄 수도 없고.
열 받았지만 누굴 잡아서 족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시험기간과 겹친 폭풍같은 과제 때문에 신경 쓸 겨를
도 없었다. 확인(?) 불가능한 소문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학교와 카페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게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촬영 계획을 보고하느라 과 조교인 석진이형과 새벽에 카페
에서 회의하는 것을 여자 후배가 몇 번이나 봤단는 게 소문의 시초였다. 하얗고 작은 나와 누가 봐도 잘생긴
석진이 형이 그들의 눈에는 퍽 잘 어울렸던 모양이다. 허리를 접고 웃었다. 근데 새벽에 잔뜩 꼴은 조교 형한
테서 전화가 왔다. 윤기야, 미안한데에, 난 아닌 것 같다.
형은 아닌 것 같다뇨? 우리 둘 다, 아니 일단은 나부터 아니거든요?
모든 사정을 전해들은 힙합 동아리 후배 정호석이 뒤집어져 웃다가 된통 얻어터지곤 자기가 진짜 좋아한다는
선배랑 자리를 마련해줬다. 빨간 체크무늬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커트머리 실용음악과 여자애.
소개팅 같은 건 질색이었지만 만나보니 나름 대화도 잘 통하고 지루하지 않아서 몇 번을 더 보다가 가까워졌다.
연인이기보다 아주 친한 친구처럼 두 달 정도 지냈다. 어느 날 걸려온 통화에서 녀석이 대뜸 그랬다. 사귈까?
장롱면허 주제에 운전 중이라고 뻥을 치고 전화를 끊었다. 나쁘진 않은데, 그렇다고 예스를 외칠 만큼은 아니
었다. 특별한 답변을 하지 않았고 상대 역시 나의 침묵에 대한 물음이 없었다. 얘도 그냥 던진 말이구나 했다.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갔다. 새벽에 침대에 누워있는데, 동그란 얼굴이 갑자기 스쳐갔다. 아 좀 아쉽나, 그래서
문자를 보냈다. 만나자.
만나서 말했다. 니가 좋은 사람인 것도 알겠고 충분히 사귈 수도 있는데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좀 기다려줄 수 있겠냐고.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근 조근 풀어놨더니 침착하게 듣고만 있던
녀석이 아주 사근하게 대답했다.
- 좀 닥치지?
- ?
- 너 게이야?
- ????????
- 니네 과 조교가 그러던데?
아니 이 조교 형님새끼가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거야. 애저녁에 접힌 소문이 녀석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오는 걸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정색을 하고 받아치려는데 녀석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 게이든 뭐든 상관없어. 근데 운전도 못 하는 주제에 내 전화를 그딴 식으로 끊고 잠수를 타? 그러고 다짜고짜 불러내선 뭐라고?
- 아니, 그기 아이고,
당황해서 완벽하게 고쳤다고 자신한 사투리가 삐져나왔다. 녀석이 눈썹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내뱉는다.
- 그 대단하신 마음의 준비 혼자 평생 해라.
이게 그러니까 오늘 오후의 이야기다.
" 악!!!!왜 때려!?!!"
" 누님이 말씀하시는데, 쓰으, 대답 안 해?"
" 아, 마시지도 않던 술을 처먹고 이 난리야. 뭐라 캤는데!!!"
" 무슨 생각하냐고오"
" 내가 왜 여기 있지, 그 생각했다, 왜."
씨, 뒤통수가 얼얼하다. 반쯤 태운 담배를 내던지고 녀석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이가 없다. 그렇게 휙 가버릴
땐 언제고, 밤에 걸려온 전화에서 녀석은 이미 멍청해질 정도로 취해 자기를 데리러 오지 않으면, 으로 시작해
고래고래 소리를 쳐댔다.
- 나쁘은, 밀가루 가튼 미늉기 너 내가 다아 퐁로할, 앗, 제성함다, 너어 퐁로할거, 아이고,
제성함다아, 퐁로할거야아!!!!!!!!
폭로할 것도 일단 없고 그딴 게 무섭지도 않았지만 수화기 너머로 사람들과 자꾸 부딪히는지 연신 죄송하다고
읊는 꼬인 발음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디야, 너. 물으니 술집 이름은 또 얌전히 댄다. 대충 지갑만 들고 집을 나섰다. 사람들이 모조리 뻗어 있는
큰 테이블의 구석에 엎드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녀석을 끄집어냈다. 나를 알아 본 녀석이 마구 욕을 해댔다.
녀석의 입을 틀어막고 겨우 호프집 바깥으로 나왔다.
이건 그러니까 30분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
" 왜! 왜 그런 생각하는데에?! 너 내가 싫으냐??"
" 너 같으면 좋겠냐."
" 왜에!! 니가 게이라서?"
" 썅,"
" 아님, 내가 남자가 아니라서?"
" 아악 너 진짜 왜 그러냐???"
돌아버리겠네, 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녀석이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든다. 똑바로 마주한 눈이 번들거렸다.
잠긴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아냐?
"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
녀석의 눈이 부어오른다.
" 끝까지 개새끼네."
" ..."
" 그럼 어떡해야 되는데?? 내가 어떻게 포기해야 되는 건데!!"
" 야, 너,"
" 왜 게이가 아니야????날 좋아하지도 않을 거면서, 니가 왜!! 흐어어엉!!!"
빵, 하고 부은 두 눈에서 눈물이 터진다. 발간 얼굴이 순식간에 젖는다. 그 엉망인, 그 못 생긴, 그 신경쓰이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데,아랫배부터 허벅지가 저릿, 했다. 너무 오래 쪼그려 앉아 있었나? 굽힌 다리를 펴기도
전에 녀석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울음소리가 가까워지다 순간 아득히 날아간다. 마른 입술에 짠내 술내가
가득 묻어났다. 굳어있던 녀석이 버둥거렸다. 결국 뒤로 주저앉아버리는 녀석의 턱을 한 손으로 쥐고 고개를
틀었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파고든 혀에 콱 엉켜든다. 다시 저릿, 한다.
너 아냐?
나는 눈이 높은 것도, 고자도, 게이도 아냐. 그냥 변태인가 봐. 어떡하지, 젠장.
/
술 취한 사람이나 우는 사람 앞에서 의외로 냉정하지 못할 것 같은 윤기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개롭혀서 미안...(더불어 호석아 석진아 미안해요....)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