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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남편, 최고의 사업 파트너, 김준면.
6
ㅇㅇ은 술 냄새를 풍기며 외투부터 치마까지 주섬주섬 벗어 던지며 잠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잠에 들지 않은 준면은 숨 쉬는 소리 조차 내지 않은 채로 잠든 척을 했고, 편한 복장으로 다 갈아 입고 나서는 습관처럼 수면제 약통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잠든 줄만 알았던 준면이 눈을 감은 채로 협탁 위에 놓인 약통을 잡은 제 손목을 거머 쥔 것은.
"과음했잖아, 수면제 먹지 마."
"…."
ㅇㅇ은 슬픈 얼굴로 준면을 내려다 보았다. 당신은 내가 죽던 말던 상관 없잖아, 왜 이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ㅇㅇ은 입을 달싹였다.
"왜, 죽기라도 할까 봐?"
"응."
"나 죽으면, 울어 줄 거야?"
준면은 말이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 두 사람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고, 마침내 준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를 매우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니."
준면은 조용히 거머쥔 ㅇㅇ의 손목을 놓았다.
준면은 끝까지 솔직했다. '아니'. 그 한마디를 들은 ㅇㅇ은 조용히 약통을 내려 놓았고, 차가운 손으로 준면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항상 솔직하네, 내 남편은."
"…."
"현주씨가 죽으면, 울어 주겠지? 그렇겠지?"
침을 꿀꺽 삼킨 준면은 애써 자신이 뱉고싶던 말까지 삼켜 버렸다. 준면은 발코니에서 보았던 ㅇㅇ의 웃는 모습을 찬찬히 떠올렸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리고 지난 밤…, 소리 없이 조용히 울던 그녀의 모습도.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제 머리칼을 매만지며 나직한 목소리로 내가 죽으면 울어 줄 거냐고 묻는 지금의 그녀는 준면의 마음을 형용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때아닌 술주정을 부린 ㅇㅇ은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 머리카락을 축 늘어뜨리며 준면이 누운 침대 옆 자리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누군가가 봤다면 음침하면서도 가엾다고 여길 게 분명한 모양이었다.
"여보."
"응."
"사랑해."
ㅇㅇ은 며칠만에 준면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재차 했다. 준면은 마치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고마워도, 사랑해도 아닌, 그저 고요한 침묵의 지속이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남편, 최고의 사업 파트너, 김준면.
다음날 나는 뼛 속 깊숙히까지 숙취를 느꼈다. 깨질 것만 같은 머리, 체내에서부터 알코올이 생성되는 듯한 찌뿌드드함, 그 묵직함들을 강직히 이겨 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나는 와이셔츠를 꺼내려 옷장을 뒤적이는 맨몸의 준면을 보았다. 드문 드문 보이는 잔근육들은 그 어떤 여자라도 놰쇄의 빠지게 할만큼 매혹적이었고, 빛살이 일어난 부드러운 연갈색 그의 머리카락은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있을 법 했다. 그래서 여자들이 당신한테 환장하는구나, 새삼 느낀 나는 그의 목에 새겨진 키스마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얼마 안가 내 차가운 맨 발로 향했다. 더 이상 보기 싫다. 다른 여자의 흔적들,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추고 왔던 그 더러운 입으로 내게 말하고, 키스하고, 다른 여자를 안고 온 품으로 나를 안았던 당신의 품이, 나는 너무나도 가증스럽다.
"여보, 출근 안 해?"
"오늘은 안 해, 일주일에 세 번만 나가."
"집에서 많이 답답할 텐데."
"괜찮아."
그는 아침 식사도 하지 않은 채 현관 앞으로 뚜벅 뚜벅 걸어 갔다.
"아침 안 먹고 가려구?"
"응, 오늘은 아침부터 급한 일이 있어."
나는 그 순간 속으로 꽤 놀랐다. 언제 부터 그가 나에게 일정의 시작 따위를 보고했었던가, 평소 같았으면 그냥 '응.'하고 말았을 사람이.
"사랑해."
"…."
나는 오늘도 사랑한다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내 턱을 조심스레 잡아 당겨 입을 맞췄다. 끝까지 '나도 사랑해.' 가 아니었지만, 그 침묵이 왠지 긍정과 부정의 경계인 것만 같아서, '고마워.' 그 딱딱한 세 음절 보다는 덜 매정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아무 말 말아줘. 나는 눈을 굼뜨게 감았다 떴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에도, 나는 그저 멀뚱 멀뚱 서서 닫힌 현관문을 주시 할 뿐이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남편, 최고의 사업 파트너, 김준면.
화장대에 앉아 한참을 얼 빠진 이처럼 거울에 비친 초라한 내 모습을 바라 보았다. 매번 바짝 치키고 있던 입꼬리, 생글생글 얼굴에 띠우던 눈웃음, 그것은 이제 더이상 내것이 아니었다. 결혼식 날, 수 많은 취재진과 기자들, 그리고 명성이 자자하다는 대한민국 대기업 총수들 앞에서, 그렇게 애써 웃음을 자아냈던 그 날, 그리고 그 이후로 그와 이 집에 살게 된 이후에 동창회에서 찬열을 맞닥뜨렸던 어제. 그렇게 딱 한 번 행복함에 웃었다.
요즘 들어 약혼 시절 김준면의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나 사랑하는 사람 있어.'
'준면 오빠….'
'어쩌겠어, 우리가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걸. 사랑까진 장담 할 수 없지만 잘 해 줄게.'
잘 해주겠다던 당신의 약속…, 그것은 쌔까맣게 타 버려 재가 된 듯 하다. 사실 나만 바라봐 주는 건 기대 따위도 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갈증 나도록 원한 것은 조금이어도 좋겠다는 '사랑'이란 사실앞에 그것은 핑계가 된다. 그런 진력 나는 사실들에 오늘도 망연자실한다. 기업간의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에서 그의 전부가 된다는 것을 바라는 일이 사치스럽고 바보같은 일인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바싹 마른 사막처럼 내 마음은 자꾸만 자꾸만 매말라 간다.
잡 생각을 떨쳐내려 평소처럼 화장대의 서랍을 열었다. 평소처럼 윤택을 내며 나열 돼 있는 목걸이가 먼저 눈에 띄는 게 순서인데, 오늘은 내 눈이 잘못 된 건가 의심을 할 정도로 익숙한 헛 것이 보인다.
바로 일주일 전 즈음 발견했던 남색의 목걸이 케이스. 그것이 왜 내 화장대 서랍에, 그것도 장신구 보관함에 있단 말인가. 나는 남색의 목걸이 케이스를 천천히 열었다.
그 속에는 작지만 영롱하고 환하게 빛나는 보석이 달랑거렸고, 빛살이 길게 일은 금색의 목걸이 줄이 고스란히 있었다.
분명 코트 속에 넣어 놓은 준면의 목걸이 케이스였다. 갈 길을 잃은 것 마냥 헤메어 일주일이란 시간이 걸려 내게 돌아왔다기엔 모두가 비웃을 게 분명했다.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가.
나는 보나마나 마음 없는 선물일 것이 분명한 목걸이 케이스를 고즈넉히 덮어 화장대 위에 올려 두었다. 당신에게 생일 때도 못 받아 본 선물에도, 나는 감흥 없는 얼굴로 그것을 빤히 내려다 볼 뿐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남편, 최고의 사업 파트너, 김준면.
'사모님, 사장님께서 귀가 하실때까지 절대로 퇴근 하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일주일 전 즈음, 내가 그를 늦은 새벽까지 기다린 게 많이 거슬렸나보다. 그게 아니면 툭 하면 도우미를 퇴근 시키고 미련을 떠는 재수 없는 내 태도가 싫었다던가. 나는 그런
도우미 아주머니의 말에 묵묵히 수긍했다.
목걸이의 여운은 잔잔하고도 길었다. 오랜만에 백화점을 들러 그를 위한 옷을 사고, 장거리를 봐 퇴근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 손에 들려 보낼 때까지.
"어서오십시오, 사모님."
4층 여성 의류 매장으로 올라왔다. 최근 들어 백화점에서 내 물건 하나 제대로 사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나를 위해 썼던 시간들을 모두 그에게 바치고, 나를 위해 먹었던 모든 건강 식품들이 모두 그의 입으로 들어 가고. 그런 미친놈에게 그런 내조를 하는 미친년이 또 어디 있을까, 우스운 생각들에 절로 비소가 나왔다. 문득 쇼윈도에 진열된 마네킹을 훑고 있는데, 나풀거리는 치마 하나가 내 이목을 끌었다.
"새로 입점 했나 봐요, 여기 원래 다른 브랜드 매장이었는데."
"예, 얼마 안 됐습니다. 구경 하시겠습니까, 사모님."
"구경은 됐고, 저 치마로 하나 주세요."
가끔 여기 직원들은 대단하지 싶다. 모든 사람의 얼굴을 달달 외우고 다닐 정도로 암기력이 천재적인 건지, 보는 사람마다 사모님 사모님. 부담스러운 그 호칭에도 익숙해진지 오래다. 또각 또각 구둣발로 매장 안을 들어간 나는 곧 직원이 건네는 '14만 7천 원입니다.' 하는 가격 통보와 함께 쇼핑백을 받고 카드를 건넸다. 결제가 끝난 후 매장을 나서려 쇼핑백을 꼭 쥐는데, 어디선가 높은 어조의 여자 목소리와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섞인 소리가 내 귀를 파고 들었다.
"오빠, 나 진짜 필요 없다니까?! 오빠가 저번에 사 준 거 많아!"
"그래 놓고 또 나중가서 서운해 할 거면서."
"정말? 정말이지?"
"그래, 너 사고싶은 거 몇 개 골라."
고개를 돌려 발견한 그들은, 아침까지만 해도 내게 입을 맞추며 집을 나서던 김준면과, 현재 김준면의 내연녀인 현주라는 여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었다. 날카롭고 무거운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띵 울리는 듯 했다. 준면은 여태껏 나에겐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미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 여자는 신이 난 듯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을 뒤적 거렸다.
옷을 고르는 당신의 내연녀,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는 당신.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당신의 옆에 천천히 다가갔다.
"당신 애인이야?"
당신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다가, 난감한 듯 눈을 피했다. 차라리 평소처럼 뻔뻔하게 나오거나, 뜻 밖의 장소에서 불륜 장면을 들켜 화들짝 놀라는 진부한 드라마속 남자같은 흉내나 내 줬으면 뺨이라도 한 대 걷어 붙이고 아무 말도 안 했을 텐데, 넌 왜 끝까지… 아무 것도 아닌 반응을 보이는 걸까. 원망스러운 낯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기도 구역질이 난다. 문득 그의 시선이 내 목에 가 박힌다. 낮에 발견한 목걸이를 차고 간 게 부끄럽고 창피했다. 나는 목걸이를 꼭 쥐었다.
"…."
"이거, 당신 애인 줘."
나는 다른 손으로 들고 있던 쇼핑백을 준면에게 건넸다. 준면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것을 건네 받았고, 나 또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런 그를 한참 주시할 뿐이었다.
"고마워."
그 여자가 탈의실로 들어 간 사이, 너는 내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따 집에서 봐, 자기야."
"…."
"오늘 화장 예쁘다."
난 그런 당신의 모습에 소름이 돋고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목걸이의 보석 부분을 꼭 쥐고 입술을 박박 문지르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다. 당신은 미쳤다. 나또한 미쳤다. 마음속으로 당신을 찌르고 또 찌른다. 내 독이 진득하게 묻은 칼로. 상상속의 너는 객혈을 한다. 그러면서도 웃는다. 내가 저를 찌르면 찌를 수록 저보다 더 몸을 비틀어대는 고통속에 괴로워 할 걸 아는 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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