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님, 우리 연애 할까요?
(부제: 미쳤나?)
BGM:썸남썸녀-케이윌,마마무
05
"이사님, 최종 수정 파일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런칭 기획 자료들이요."
김이사는 꼼꼼한 눈치로 내가 건넨 노란 종이 파일을 열어재껴 서류들을 훑으며 확인했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는 서류를 넘기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딱딱해 보였다. 능글능글거리던 평소 모습과는 달리, 매우 사무적이고 근엄하게. 그렇게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땀을 훔치며 긴장한 채로 서 있는 나를 흘끗 거리며 보다가, 이내 슬몃 고개를 끄덕거리던 김이사는 파일을 탁 덮고는 날 보며 웃었다.
"이르네요, 시간이."
"그럼요, 이르죠. 이사님 일처리를 빨리 해야한다고 하셔서 제가 지금 몇 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출근한 줄 아십니까?"
"내가 평소 열 한 시에 출근하는 걸 감안하지 못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니, 사람이 말이야, 저를 위해서 일찍 일어나고 천근만근한 몸으로 회사까지 와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면서, 그렇게 언제 올지 모르는 저를 기다렸는데! 한치의 미안함과 고마움도 안 든다는 말인가? 거기다 한다는 말이, 열 한 시에 출근하는 걸 감안하지 못 할 정도의 바보? 기가 차서 원. 거기다가 어깨까지 으쓱이며 눈썹까지 꿈틀거린다. 내가 뭘 어쨌다고? 하는 뉘앙스 폴폴 풍기며. 나는 거기에 열이 받아 가재미 눈을 뜨고 김이사를 대놓고 노려 봤다.
"아니, 이사님 때문에 지금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예?! 씻고 준비하고 출근하고!! 예?! 제가 얼마나 개고생을 하신 줄 아시면 그런 말씀 못 하실 겁니다!!!"
"왜, 난 좋은데. 사무실 적적하고, 조용하고."
"사무실이 적적하고 조용한 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어휴, 도대체 분통이 터져서야 말이지. 나는 가슴을 두어번 쳐대며 눈을 부릅떴다.
"저 진짜 화나면 싸이코 되는 거 아시죠? 막 지랄발광할 텐데, 뒷감당 가능 하시겠어요?"
"ㅇ사원 발광하는 거 재밌어서 그럽니다. 더 하라고."
"벽 보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에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며 머리를 부여잡는 나를 본 김이사는 끅끅대며 웃었다. 정말 사람 기분 나쁘게, 아니 근데 이상한 건, 또 그런 모습 하나하나에까지 설레냐고, 나 호구야 진짜? 그런 거야?! 눈썹을 꿈틀거리며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쪽으로만 온전한 그의 시선을 무시해버리기란 역시 예상한 바와 1%의 오차도 없이 어렵다. 너무 어려워. 왜 자꾸 보는데, 하는 따끔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자 그는 여전히 싱글벙글인 얼굴로 내게 말한다.
"이런 거, 누구랑 보기가 좀 꺼려져야 말이지, 너무 귀엽고 웃긴데, 진짜."
이 인간이 미쳤나 진짜...
이사님, 우리 연애 할까요?
마카롱을 주워먹으며 기웃기웃, 런칭쇼라고 바빠서 연회장 안을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상사들을 동그마니 앉아 보고만 있자니 무안해져 시작한 짓이었다. 솔직히 말 하자면, 준비를 거치는 그 수많은 과정들 속에선 내가 열심히 땀을 흘리며 뛰어 다니고, 내가 뛰어서 전달한 서류와 파일을 찬찬히 건네 받는 그들의 모습 밖에 기억이 나질 않아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콕 박혀 있지만, 나 같은 쭈그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괜히 한 번 멀뚱멀뚱 당황한 척 하는 거지. 그리고 얼마 안 가 런칭쇼가 시작 되었다. 높은 분들이 하나 둘씩 내빈석에 앉고, 테이블을 둘러 싼 의자에 많은 사람들이 착석을 하자 커다란 스크린에 이번 프로젝트명이 떠올맀다. 어휴, 이번 사업설명은 김이사님이 하신다는데, 왜 내가 다 떨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실수 하면 안 될 텐데, 하는 내 생각과는 달리 김이사는 시작과 함께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 10대 소녀들의 사랑스러움과 풋풋함을 중점적으로 그리던 이전과는 한층 더 성장한 여성의 성숙미와 우아함을 중점으로 뒀습니다. 항상 모든 연령층에게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던 저희 회사였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20대 연령층의 여성분들께 더욱 전폭적인 인기를 얻을 것으로 예상 됩니다."
"이걸 누가 기획했다? 김종인이 기획했다."
"이걸 누가 만들었다? 바로 제가. 늘 그래 왔듯 믿으셔도 됩니다."
아주 쐐기를 박는구나, 쐐기를. 설명회마저 김이사스럽달까... 재치있고 능청스러운 그의 말로 인해 사람들은 모두 하하호호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적당히 무게감 있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재미가 있는 런칭쇼는 마무리가 되었다.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내 눈은 항상 김종인 이사를 좇고 있었다. 지금같이 내빈석에 가서 한 분 한 분 악수를 하고 있는 쓸 때 없는 사무적인 모습에서도.
"반갑네. 자네 고등학생 때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세월에 이렇게 컸어?"
"최사장님 위엄은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리 후들거려서 못 서있겠습니다."
"하하! 재밌군 재밌어, 재민이 녀석은 나이가 들어도 도통 재미가 없어 재미가, 자네같은 아들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래."
"과찬이십니다."
"참, 자네도 내년에 서른이지? 애인은 있나?"
"성격이 하도 지랄맞아서 여자가 없나 봅니다, 선을 봐도 다 퇴짜더라구요. 얼마 전엔 정강이까지 차였습니다."
눈동자가 은근 슬쩍 내 쪽으로 향한다. 완전히 눈이 마주쳐버린 상황 속에서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마시고 있던 물을 잇새로 흘리고 말았다. 블라우스 위에 물이 튀어버린 탓에 축축했다. 저 사람이 진짜…. 안면 근육이 꿈틀거림과 함께 암묵적인 눈빛을 보냈다. 먼저 변태같이 군 양반이 누군데!
"자네 성격 지랄 맞은 건 김사장 닮아서 그래, 그 양반 탓이야, 젊었을 적엔 따라올 자가 없었지. 내 생각엔 자네가 일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것 같은데, 아닌가?"
지랄, 화수목 출근하는 회사원은 아마 우리 회사, 아니 우리나라에 단 한 명, 김종인 이사밖에 없을 거다. 일 욕심? 물론 처리 속도가 확연히 빠르고 실용적인 것은 사실이나…, 일에 대한 열정적인 마음과 적극적인 태도 따위는 전혀 엿볼 수 없음은 확실하다. 그냥 월요일 아침에 어기적어기적 출근하는 나나 저 양반이나 다를 게 없지. 나는 화장실로 향하려 몸을 비틀었다. 순간이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와 아주 크게 부딪힌 것은.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고, 내 뒤에 있던 진열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콰장창 유리 부서지는 소리가 연회장을 울렸고, 쓰러지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도 내가 곧 몸이 다친다는 생각보다 일쳤다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해왔다. 그대로 뒤로 나자빠진 나는 검은 양복의 사내가 으… 으악! 하는 괴성을 치며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 저 개새끼가…. 나는 아려오는 등을 그 때서야 눈치 채고 달려와 나를 일으킨 주위 사람에 의해 엎어졌다. 사실은 힘 없이 고꾸라졌다는 사실이 더 정확할 것이다. 손가락으로 등 부근을 조심스레 쓸어 보았고, 예상한 바와 같이 피가 묻어 나왔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엎어져 있는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고, 아파서 눈물 찔끔 짜던 나는 쪽팔리니 제발 꺼지라는 생각을 간절하게 하기 시작했다. 입술을 깨물며 쪽팔림에 탄식을 뱉고 있을 때였다.
"잠시만 비켜주시겠습니까."
둘러싼 사람을 마구 헤치며 다가 온 남자는 바로 김이사였다. 아니 제발 꺼지라니까 왜 내 앞에 나타나는 거에요 대체, 나는 당황스러움과 쪽팔림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내 팔을 잡아 일으킨 김이사는 업히라며 제 등을 내주었다.
"뭐 합니까? 안 업히고."
"이사님 저 어떡해요...ㅠㅠㅠ"
"업혀요 얼른."
"저 잘려요? 네? 아니 그것보다 제가 업히면 이사님 옷에 피 묻을 텐데... 아니 그 전에 저 무겁단 말이에요ㅠㅠㅠ"
"괜찮아, 응?"
"아녀 안 괜찮습니다ㅠㅠㅠㅠ"
"괜찮아, 괜찮다고 전부!!"
김이사의 독촉에 나는 어기적 어기적 걸어가 업혔다. 나를 업고 뛰기 시작하는 김이사의 행동에 내 머리카락마저 휘날렸다. 청춘은 이미 가는 중인데 왜 이렇게 고달프고 아픈가, 아아, 내 인생이여!! 나는 한숨과 함께 철렁 내려앉던 마음에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울음은 응급실에 엎드려서 이송되는 시간까지도 똑같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김이사는 대체 왜 우는 거냐며 미치겠다는 투로 몇 번씩 물어 왔다.
"대체 아까부터 왜 우는 겁니까."
"저 잘리면 어떡해요?"
"미쳤군, 지금 미스코리아 못 나가게 생겼는데 그딴 걱정이나 하고 앉아있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저 진짜 이번에 잘리면 독거노인으로 살다 죽어야해요..."
"이 바보같은 여자야, 넌 지금 네가 다쳤는데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어?! 아주 세상 살기 참 편해 져서 어째!"
"아니, 시집 못 가면 어떡하냐구요 진짜, 아니 그것 보다는 나 밥줄 끊기면…."
김이사는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정말 후환이 두려운데, 당신같이 낙하산으로 높은 자리 앉은 사람들은 당연히 나를 이해 못 할 것이다. 김이사는 눈을 잠시 치떴다가 내게 일종의 경고와도 같은 말을 했다.
"걱정하지 마, 내 친구 중에 성형외과 하는 애들 많아, 다 소개시켜 줄게. 그것도 싫으면…."
"…."
"나도 괜찮고."
땀 범벅이 된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김이사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미쳤나 진짜. 나 지금 밥줄 끊기는 거하고 아픈 게 문제잖아, 근데 왜 이렇게 심장이 아까보다 빨리 뛰는 거야. 나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계속해서 심호흡을 했다. 미친 게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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