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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열 일방통행 

 

 

 

 

 

 

 

 

 

 

 잠에서 깬 내가 가장 후회하는 시간은 새벽 세 시에서 네 시 사이다. 지금은 새벽 세 시 사십 삼 분이고, 휴대폰 액정에 비친 통화 시간이, 삼 분 사십 삼 초에서 사십 사 초로 바뀌었다. 누군가는 잠이 들어 있을, 또 누군가는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을 깊은 새벽 어스름이, 나는 정말 싫다. 

 

 

"야." 

"어." 

 

 

 부질없이 시간을 흘려 보내는 중이었다. 아무 말 없이 통화 시간은 사 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설마 조는 건가 싶어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변백현을 불렀다. 어차피 변백현은 내가 인상을 썼는지 안 썼는지 모르겠지만. 수화기 너머가 아까부터 답없이 잠잠하던 걸 보면 변백현은 졸았던 것 같다. 슬슬 짜증이 나는 것 같아 입에 초콜릿을 물었다. 변백현은 늘어지게 대답하곤 소리 내어 하품을 했다. 

 

 

"내가 고민이 있는데……." 

"어." 

"좀 들어 줘." 

 

 

 변백현의 반응이 아까보다 빨랐다.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고, 내 몸을 차지한 혈액이 거꾸로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철과 철이 매끄럽지 못하게 마찰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사탕을 입에 문 듯한 변백현이 입을 열어 내게 물었다. 

 

 

"뭔데." 

"넘으면 안 되는 선이 있는데." 

"응." 

"그 선을 넘을까 말까 고민 중이야." 

 

 

 내가 할 말은 이게 아니었다. 변백현은 또다시 하품을 했다. 전혀 고민을 들어 주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울컥하는 기분에 초콜릿 하나를 더 입에 넣었다. 후의 나는 변백현과 통화하는 이 시간을 그리며 기뻐할 거고, 또 슬퍼할 거고, 돌이켜 후회할 게 분명하다. 예의 나 또한 그랬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변백현은 사탕을 으드득 씹었다. 이제 변백현의 입에 들어있던 건 사탕임이 확실해진다. 그리고 그 사탕은 포도 사탕임이 분명하다. 

 

 

"내용이 뭔데. 그걸 알아야지." 

"그 선을 넘으면 너랑 나는 친구가 아니야." 

"친구가 아니라고?" 

 

 

 한껏 마음을 가다듬고 말하자 변백현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내가 변백현에게 좋아한다고 하면, 내 성향을, 내 마음을 커밍아웃하면, 아마도 그렇게 돼 버릴 게 분명하다. 내가 변백현이 좋아하는 사탕의 맛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변백현이 알게 된다면, 변백현은 나를 떠나갈 게 분명하다고. 나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나는 변백현의 앞에서 최대한 덤덤하고 싶었다. 사랑하거나 좋아하던 누군가에게 차여서 우는 다른 모두와는 달리, 덤덤하게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어. 대답해 줘. 어떡할까?" 

"……그냥 넘지 마라." 

 

 

 변백현은 그렇게 말하고 사탕을 마저 씹어댔다. 왠지 예감이 불길해서, 나는 초콜릿 대신 손톱을 입에 물었다. 꼭 변백현이 나에게, 네가 싫다고 할 것만 같아서. 

 

 

"아, 그래……?" 

"어. 그래서 이걸 물어본 이유가 뭔데?" 

 

 

 말끝을 흐리는 내게 변백현이 또박또박 물었다. 아까에 비해 정신이 멀쩡해진 듯한 목소리였다. 차라리 변백현이 잠에 취해 있다면, 나는, 내일 아침이면 장난이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빼도 박도 못하게 그대로 사실을 말해야 할 상황에 놓여버렸다. 변백현이 의자를 움직였다. 곧 전화가 끊길 것 같아서 나는 다급하게 변백현을 붙잡았다. 

 

 

"잠시, 잠시만." 

"어. 천천히 말해." 

 

 

 변백현의 목소리에 나는 더 긴장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침 범벅이 된 손가락을 바지에 슥 닦고, 나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잔뜩 떨릴 것 같아서 헛기침도 한 번 했고, 아주 평범하게, 그렇게, 나는 변백현에게 고백했다. 새벽 세 시 사십 구 분이었다. 

 

 

"……나 너 좋아해." 

"너 도경수한테 물 먹었냐." 

 

 

 내가 뜸을 들인 것과는 달리 변백현은 즉답했다. 그리고 나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경수가 며칠 전에 나에게 고백한 건 맞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팔 할의 확률로 나와 경수 뿐이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여기서 경수가 왜 나와? 나는 그렇게 물을 뻔한 것을 애써 담아두고 덤덤하게 말했다. 

 

 

"아니. 진짜야." 

"장난 치지 말고." 

 

 

 변백현은 못됐다. 사람 마음을 몰라 주는 것에 모자라 무시까지 한, 변백현은 못된 놈이다. 변백현은 그렇게 말하고 사탕 하나를 더 꺼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 걸. 가능성조차 없던 걸, 아예 말조차 꺼내지 말 걸. 변백현은 여유로운 것 같았지만, 나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휴대폰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나머지 손으로 끌어안은 무릎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냥……, 누가 널 좋아했었는지 알아 두라고 하는 말이야. 나 먼저 끊을게." 

 

 

 나는 혼잣말하듯 변백현에게 내뱉고서,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았다. 변백현은 잠깐 사탕 깨 부수는 것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야, 너 우냐?" 

"아니. 나 잘 거야." 

 

 

 나는 분명히 울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다. 변백현에게 무시 당한 건 내 마음이 아니었다. 그저, 그저 아까 내뱉었던 말 몇 마디 뿐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 종료를 누르려 했다. 그 때 변백현이 말했다. 

 

 

"야, 잘 자라." 

"……너도." 

 

 

 통화 종료 버튼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변백현은 못된 새끼가 확실하다.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폰을 침대 위로 세게 집어 던졌다. 차라리 잘해 주지나 말지. 비극의 절정에도 비유할 수 있을 만큼 내 감정은 슬펐고 또 분노에 가까웠다. 

 

 

 

 

 

 

 그 뒤로 변백현은 나를 피했다. 경수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 궁금한 눈치였지만, 단 한 번도 입을 떼지 않았다. 확실히 경수는 인간이 좋다. 내가 잠깐 엎드려서 자는 동안 변백현과 경수는 나를 빼고 둘이서만 나가서 얘기했다. 그리고 둘이 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종대가 내 등허리를 마구 잡아 흔들어 깨웠다. 

 

 

"야, 너 쟤네랑 뭔 일 있냐? 아까부터 왜 저러는데." 

"아, 몰라. 꺼져." 

"뭐야. 너 존나 생리하냐?" 

"꺼지라고." 

 

 

 나는 생뚱맞게도, 종대에게 화풀이를 했다. 사실 내가 누구한테 화가 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 끝은 변백현이겠지만. 경수는 곧 교실로 들어와서 내게 웃어 보였다. 수업이 시작하고 한 교시가 끝 날 동안 변백현은 들어오지 않았다. 종이 칠 즈음부터 걱정에 시달리며 입술을 물어 뜯는 나를 보고 경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변백현 곧 와. 좀 그만 물어 뜯어라. 입술 걸레 되겠다, 찬열아." 

"……어, 어어." 

 

 

 변백현은 정말 하루 동안 내 눈 앞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정말 변백현이 내게서 등을 돌린 것 같이 비참해서, 화장실로 향했다. 변백현은 나쁘다. 이 와중에도 변백현이 어디서 뭘 하고 있을 지 더 걱정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지만, 변백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미안하다거나 생각이 좀 필요하다는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변백현이 나쁘다. 사람 헷갈리게 하는 짓은 다 해 놓고, 혼까지 다 빼 놓고, 정작 그 마음은 들어 주지도 않았다. 한참을 서럽게 울고 나니 눈가가 부은 게 확연히 느껴졌다. 곧 수업 종이 칠 것 같아서 문을 열고 나온 순간, 두통과 함께 나타난 건 흐릿한 변백현의 얼굴이었다. 

 

 

"야, 박찬열." 

"……." 

"너 울어?" 

"……." 

"살다 내가 너 우는 꼴을 또 보네. 야, 울지 마." 

 

 

 변백현은 몇 마디 하고서 골을 짚더니 내 머리통을 그대로, 고운 손으로 잡아 끌었다. 내 머리가 변백현의 어깨에 툭 걸쳐질만큼 세게, 변백현이 나를 끌어안았다. 변백현이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어 내렸다. 

 

 

"어제 그건 못 들은 걸로 할게." 

 

 

 잠깐 동안 이성을 되찾았던 마음이 다시 부서져버렸다. 변백현은 아예 난 네가 싫다고 못이라도 박듯 내게 막했다. 어쨌거나 변백현은 본성이 저런 게 분명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잘해 준다. 그래서 애매하고 또 이상하다. 차라리 분명히 미안하다고 했더라면 나았을 텐데.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변백현의 품에 안겨 있어야만 했다. 변백현의 마이에 밴 특유의 향 때문에, 아까보다는 훨씬 안정된 것 같아서. 

 

 

 

 

 

 

 결국 하교는 경수와 함께 했다. 변백현과 함께 하던 길을 처음으로 경수와 걸었는데, 길을 가다 보면 속속들이 나오는, 변백현과 함께 

갔던 가게들이 보였다. 변백현은 그렇게 모진데 경수는 이렇게 착하다. 경수가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찬열아, 편의점에서 라면 먹고 가자. 내가 살게." 

"아, 진짜? 고마워." 

 

 

 경수는 내 손을 놓지 않은 채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라면 코너를 찾아 들어온 경수가 잠깐 고민하더니 삼양라면을 집어 들었다. 

 

 

"넌 뭐 먹을 거야?" 

"나는 이거." 

 

 

 경수에게 안성탕면을 흔들어 보이자 경수가 씩 웃었다. 그럼 계산하자. 경수가 말했지만 왠지 경수에게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콜라 두 캔을 집어 들고 경수의 뒤를 따라가 계산했다. 경수가 그런 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밖에 나가서 먹을래?" 

"어, 그러자." 

 

 

 어색한 감이 맴돌았다. 내가 라면 껍질을 떼 물을 붓는 것까지 경수는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고서 온수기에서 손을 뗐다. 뗐는데, 뜨거운 물이 내 손으로 확 튀었다. 뜨거운데, 그래서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 어제 변백현이 한 말이 물처럼 튕겨와 머리가 어질했다. 야, 괜찮아? 귓가를 웅웅거리며 맴도는 목소리와 함께 옆에서 경수가 휴지를 뽑아 내 손을 닦아내는 게 느껴졌는데, 내 머리는 편의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더 잘 들었다. 

 

 

"야, 도경수……. 박찬열?" 

 

 

 변백현이 우리를 보고 의아한 듯 말했다. 여긴 변백현과 내가 자주 오던 편의점이니까, 변백현이 있어도 내가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 변백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까 데인 상처가 더 화끈거렸다. 데인 마음도 데인 상처도 보이고 싶지 않아 변백현 쪽으로 등을 돌리니 변백현이 나를 되돌려 세웠다. 

 

 

"너 나랑 말 좀 하자. 나와." 

 

 

 변백현의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변백현은 성큼성큼 코너를 돌아 생수를 한 병 샀고, 그동안 나는 휴지를 정리해 버렸다. 변백현이 내 데이지 않은 손목을 잡고 편의점 밖으로 끌었다. 

 

 

"할 말이 뭔데. 난 할 말 없어." 

"손 줘." 

 

 

 부러 차갑게 말했더니 변백현은 정색하고 내 앞에 큰 손을 내밀었다. 그 위로 내 손을 겹치자 변백현이 생수 뚜껑을 따 내 손 위로 뿌렸다. 아까보다 훨씬 덜 아프다. 데인 상처가. 변백현이 내 손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네기 할 말 없다고 해도 난 할 거야." 

"……뭐." 

"I just realized I'm slowly falling in love with you." 

 

 

 변백현은 생수를 뿌리던 걸 멈추고 내 데인 손에 손을 겹쳤다. 지금 변백현이 하는 말이 과연 진심인지 헷갈렸다. 변백현이 이번엔 내 눈을 똑똑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미안.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아까는, 미안." 

"진짜야?" 

"어." 

 

 

 변백현은 곧바로 대답하고 시계를 봤다. 나는 변백현이 무슨 말을 할 지 예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새벽의 그 모진 느낌은 절대 아니다. 변백현이 입을 뗐다. 

 

 

"지금 세 시 사십 삼 분이다. 박찬열, 나랑 사귈래?" 

 

 

 세 시 사십 삼 분의 기분 좋은 설레임이 나를 찾아왔다. 변백현은 생수 뚜껑을 닫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는 곧바로 변백현에게 대답했다. 

 

 

"어." 

 

 

 변백현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경수는 편의점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인 마음도, 데인 상처도 모두 나았다. 변백현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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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와.. 진심으로 문장 하나하나에 몰입해서 봤네요. 이렇게 좋은 글은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신알신 하고 가요. :3
9년 전
독자2
으아ㅠㅠㅠㅠㅠㅠㅠㅠ취향저격 ㅠㅠㅠㅠㅠㅠㅠㅠ♡♡백열 사랑합니다ㅠㅠ
9년 전
비회원153.112
고맙습니다! 잘 읽었어요.
9년 전
독자3
잘봤습니다!!!! 정말 백열은 사랑인거같아요~~~ 찬열인 백현이 옆이 젤 어울려요~~
9년 전
독자4
아 ㅠㅠㅜㅜㅜ한손으로는전화기를들고 한손으로는 무릎을끌어안고 눈물만뚝뚝흘리는게 너무슬펐어여ㅜㅜㅜㅜㅜㅜ아ㅜㅜㅜ 도경수도안타깝고ㅜㅜㅜ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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