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남자 OST- 두려움
경성 비밀결사대 22
written by 스페스
얼떨결에 한자리 차지하고 앉은 태형은 꽤 신중하게 패를 골랐다. 저만 보이게 세워놓은 마작패를 훑는 눈이 제법 날카로웠다.
지민은 태형의 뒤에 서서 벌어진 판을 관망했다. 룰은 하나도 몰랐지만 식탁에서 느껴지는 기류만으로 누가 승기를 잡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만만했던 만큼 태형은 꽤 선전 중이었다. 소년에게 자리를 내어준 그의 친부 또한 담배를 물고 흥미롭게 게임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이따금 남자의 눈은 안경 너머 지민에게로 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노골적인 시선에 지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예상을 뛰어넘는 태형의 실력에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민은 때를 놓치지 않고 다섯 사람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안경을 쓴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태형의 아비, 그리고 그 옆에 앉아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넘긴 사내, 손에 금반지를 끼고 연신 위스키를 비우던 또 한 사람,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유독 큰 풍채 있는 남자까지. 지민은 그들의 얼굴과 인상착의, 뿐만아니라 그들이 했던 말을 줄줄 읊을 정도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양장을 입은 남자들의 손목에는 하나같이 값비싼 시계가 걸려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속이 쓰렸다. 경직되는 얼굴을 풀어보려 애써 미소 지었지만 쓴웃음이 배어났다.
지민이 친일파 인사들을 곱씹고 있는 사이 두 남자가 패를 던지며 포기를 선언했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금테 안경을 쓴 사내와 태형뿐이었다. 게임은 점점 박진감을 더했다.
“아드님이 유학 가서 공부를 안 한 모양입니다.”
태형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손에 쥔 마작패를 굴리며 말했다. 사람들이 껄껄 웃어버렸다. 지민 또한 갑작스레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허나 태형만은 예외였다. 여전히 패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민하는 모습이 답지 않게 진지했다. 게임을 포기한 남자 중 하나가 태형의 뒤로 걸어가더니 그의 손에 들린 패를 보고 말했다.
“텐파이.”
어리둥절한 지민의 표정을 보고는 그가 룰을 설명했다. 간단히 말해 앞으로 패 하나만 잘 고르면 태형이 승리한다는 뜻이었다. 남자가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고는 짧게 손뼉을 쳤다. 순식간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얘가 이기면 뭘 해줄 건가.”
그가 태형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소년의 상대가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질 것 같나?”
“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뭐라도 걸어보게나.”
태형은 제 뒤에선 남자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번갈아보았다. 게임에 집중할 때와는 달리 얼굴 가득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이기면 뭐 해주 실 거예요?”
“뭐든 말해 봐.”
“진짜로 다 들어 주시는 거예요? 진짜?”
"그럼. 곧 작위와 함께 광산 채굴권도 받을 테니. 들어줄 수 있고말고."
순간 지민의 심장이 바닥끝까지 곤두박질쳤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게임이 워낙 흥미로운 탓에 임무는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어버린 지민이었다. 그러나 작위.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시에 제게 임무를 전해주던 석진의 비장한 표정이 눈앞을 스쳤다. 지민의 얼굴이 금세 긴장으로 물들었다.
“다음 달이었던가? 작위 받으러 동경 가는 날이.”
“다음 달 말일이네.”
“꽤 시간이 걸리는구먼. 광산 채굴권 받기 전에라도, 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네.”
태형이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지민은 태형의 어깨에 올려두었던 제 손을 내려뜨렸다. 친일파 부호에게서 무엇을 받을지 기대하는 태형과 그들의 얼굴을 기억해야 하는 자신, 둘 사이의 거리를 느낀 탓이다.
태형은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남자와 태형, 차례로 순서가 오갔다. 사람들은 숨죽인 채로 두 사람의 손끝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테이블 위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패를 가져온 남자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저만 보이게 놓은 열네 개의 패 중 하나를 버리고는 새로운 조각을 그 자리에 끼워 넣었다. 그때였다.
“론”
태형이 손을 든 채로 외쳤다. 태형은 열넷 중 하나를 손으로 튕겨내고는 남자가 버린 패를 빈자리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모두가 보이도록 테이블 위에 마작패를 눕혔다. 사내들이 고개를 내뺀 채, 소년의 패를 훑었다. 완벽한 태형의 승리였다.
“이야 김 사장님 아드님 대단하네.”
웃으며 손뼉을 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태형은 입이 귀에 걸릴 듯 미소를 지었다. 담배를 태우고 있던 태형의 친부 또한 흡족한 표정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뒤에 선 남자가 태형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그래서 바라는 건 정했나?"
“음…….”
태형이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무엇을 말할까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한참을 망설이던 태형이 입을 열었다.
“돈이요. 돈 주세요.”
지민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건 태형의 친부도 마찬가지였다. 잠자코 있던 태형의 아비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나."
"음. 많이요. 아주 많이."
* * *
대문을 열고 들어선 집안은 컴컴했다. 이맘때라면 보통 불이 켜져 있을 정국의 방도 어둠뿐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다 평소 늦게 잠드는 녀석을 생각하자니,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아직 안 들어온 건가. 막내의 방으로 걸음을 옮기자, 부엌에서 나온 어머니가 내 앞을 막고 섰다.
“아픈 것 같더라. 종일 이불 속에 박혀서 나오지를 않어. 물어봐도 대답 않고 그냥 두라 하고 방에도 못 들어오게 하고.”
“끼니는요?”
“생각 없다더라. 요즘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가, 내일 날 밝으면 약방이라도 다녀와야 쓰겄다.”
어머니를 뒤로하고 들어와, 옷걸이에 외투를 걸어놓으면서도 의문은 가시질 않았다. 평소 병치레를 하는 일도 드물었지만, 아주 간혹 아플 때조차 뜨거운 국물에 밥 한 그릇 말아 먹고 나면 너끈히 일어나는 정국이었다. 그런 녀석이 얼굴도 안 보여주고 골골거릴 정도면 많이 아픈 건가. 걱정되는 마음에 녀석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으려다 불현듯 떠오른 순간이 있었다. 석진오빠가 방문했던 날. 갑작스런 기시감에 맥박이 빨라졌다. 다급하게 미닫이 문을 열어젖혔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누워있는 막내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왜 들어왔어.”
“아프다며.”
“감기 옮아. 가.”
이불을 더 높게 끌어올린 녀석이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
“어디 아픈지 봐야 약을 지어오지.”
“감기라니까. 옮기 전에 나가.”
이부자리 옆에 앉아 이불을 들추려 하자, 녀석이 완강하게 이불 끝을 잡아챘다.
“아 누나 좀.”
“전정국. 너 무슨 일 있지.”
“아무 일도 없어.”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한참이나 실랑이가 이어졌다.
"어머니 모셔온다."
끝내 어머니를 운운하자 녀석이 이불을 놓아줬다. 어둠 새로 드러난 몰골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잔뜩 부어오른 얼굴과 터진 입술. 찢겨 나간 채 여기저기 피가 묻은 셔츠.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녀석이 고개를 떨군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무슨 일이야.”
“그냥 친구랑 싸웠어.”
“누나는 못 속이는 거 알지.”
“학교에 일본군이 왔었어.”
“근데 왜 널 이렇게.”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입술이 터져 입을 열기도 힘든 듯, 녀석은 드문드문 인상을 썼다. 침착하려 했지만 자꾸만 언성이 높아졌다.
“얼마 전에 총독부 신임 인사 취임식에 갔었어.”
“뭐?”
총독부 취임식에서 벌어진 폭파 사건은 경성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대서특필 되었던 그 사건의 현장에 정국이가 있었다니. 대체.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내 표정을 보고 정국이가 다급히 덧붙였다.
“일. 일하러 간 거야.”
“내가 그만하랬지. 너. 누나가 말했지. 왜 말을 안 들어?”
“월사금 벌려고 간 거라니까.”
“그냥 일하러 간 건데, 왜 잡혀가!”
“……. 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나를 끌고 갔는지.”
“김석진이야? 너 또 끌어들인 사람이?”
“아니라니까. 누나.”
화를 내려는 찰나, 정국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누나.”
대화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고개를 든 정국이었다.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가 안쓰러웠다.
“심문 당하고 있는데, 날 구하러 왔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준이 형이 왔었어.”
“뭐?”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녀석이 다시금 덧붙였다.
“남준이 형이 와준 덕분에 풀려난 거야.”
***
지민은 태형의 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품에 감기는 이불의 감촉이 포근했다. 침대 옆으로 은은한 조명이 켜져 밤인데도 방안 곳곳이 선명하게 보였다. 자신의 방에 비해 족히 서너배는 될 텐데, 생각과는 달리 제법 단조로웠다. 책상 위에는 젊은 여인의 흑백 사진 하나와 수동 사진기가 여러 대가 놓였다. 태형은 지민의 시선을 따르며 덧붙였다.
“카메라는 이제 내가 신문사 다니니까 사진 찍어야 된다고 아빠한테 조른 건데, 기사 사진은 하나도 안 찍어. 사실 촬영부는 따로 있거든.”
아비를 속여 카메라를 얻어낸 스스로가 대견한지, 태형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조명에 말갛게 드러난 반쪽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따라 웃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태형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근데 너, 아까 마작 이겼을 때 왜 돈 달라고 한 거야? 그것도 엄청 많이.”
“그건 비밀”
“네가 그랬잖아. 친구 사이에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냐고.”
지민이 볼멘소리를 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보며 장난스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곧, 아니 내일 알게 될 거야.”
***
날이 밝자마자 신문사를 찾아갔지만 남준은 없었다. 직원의 말에 따르면 조선극장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있을 거란다. 남준이 명예기자로 선정되어 수상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냥 신문사 앞에서 기다릴까 했지만 마음이 급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정국의 마지막 말이 걸음을 부추겼다.
‘혹시 형이 정말 변절한 게 아닐 수도 있을까’
답을 알아야 했다. 마냥 기다리고 있자니 일분 일초가 수년처럼 느껴졌다. 급하게 전차를 타고 도착한 극장 앞 전차역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정거장 앞으로는 널따란 회백색 계단이 이어졌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큼지막한 건물이 차츰 눈에 들어왔다. 외벽에는 ‘대일본제국 명예시민대상'이라 적힌 새하얀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꼈다. 남준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일제에 부역한 조선인을 수상하는 행사장에 오다니. 그야말로 역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막 행사가 끝난 건지 사람들이 삼삼오오 계단을 내려왔다. 손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혹여나 놓칠세라 정신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지만 남준은 보이지 않았다. 길이 엇갈린 건가. 계단 끝으로 이어진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왼손에 꽃다발과 상패를 든 채 출입문을 빠져나오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진갈색 코트를 입은 남준이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광장을 가로지르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자리에 멈춰 섰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남준 또한 느린 걸음으로 내게 걸어왔다. 그리고는 상패와 꽃다발을 들고 있던 손을 어정쩡하게 떨어뜨렸다. 정국의 말을 들어서인지, 왠지 오늘은 남준이 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건 아주 희박한 확률에 거는 기대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김남준”
“어쩐 일이야?”
“너 만나려고 일부러 찾아왔어.”
남준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상 받았나 보네.”
남준은 손에 쥔 상패를 어색하게 들어 올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미소 끝엔 씁쓸함이 남았다. 변절한 조선인, 일제에 부역한 기자. 상패에 적힌 ‘명예기자’ 네 글자는 실로 지독한 불명예임을, 나는 남준 또한 알길 바라고 또 바랐다. 한참의 침묵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남준이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 중년의 남성이 남준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김기자 님.”
남준이 먼저 그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축하한다는 인사가 뒤이었다. 그때 남자의 등 뒤로 또 한 사람이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모습에 눈을 의심했다. 민윤기. 그 또한 나를 발견하고 놀란 듯 보였다. 그의 눈길이 내게서 남준에게로 옮겨갔다.
“민윤기씨. 오랜만이네요.”
남준이 먼저 윤기에게 인사했다. 윤기는 의례적으로 남준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줄곧 나를 향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정신이 없었다.
“효자 아들을 두셨네요.”
“효자는 무슨. 김기자 같은 아들 하나 있으면 좋겠구먼,”
“늘 아버지 곁에서 보필하는 모습 보기 좋네요.”
남자가 껄껄 웃으며 남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태형이는 잘 하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 녀석이 기자님 밑에서 잘 배워야 할 텐데.”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윤기에게 입모양으로 물었다.
‘아버지?’
그가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차 제 입술을 무는 것이 꽤 초조해 보였다. 그리고는 남준을 향해 턱짓을 했다. 아마도 왜 남준과 같이 있냐는 뜻 일 테다. 대답을 하려는 찰나 남준과 남자의 대화가 끝을 맺었다. 자리를 뜨려던 윤기의 아비가 나를 보고는 남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김기자 님.”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윤기는 남자를 따라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윤기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이상했다. 순식간에 몰아친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뭔데.”
남준의 목소리가 귀에 왕왕 울렸다.
“어……. 일단 김남준. 국수 먹으러 가자. 오늘은 네가 사.”
삼십 년이 족히 넘은 가게 안으로는 구수한 멸치 육수 냄새가 풍겼다.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김남준과 나는 익숙하게 잔치국수를 주문했다. 낡은 나무 탁자 위에 꽃다발과 상패를 내려놓은 남준이 턱을 괸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호기롭게 김남준을 데려왔지만 어떻게 말을 시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때마침 정갈하게 고명을 얹은 국수가 우리 둘 앞에 놓였다.
"이거 기억나?"
젓가락으로 국수를 휘적이던 남준이 내게 물었다.
"쌈짓돈 모았다가 한 번씩 먹으러 왔잖아."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소회를 털어놓는 녀석이 조금은 낯설었다. 겨울철이 되면 유독 떠오르던 게 이 집 국수였다. 책방 한가운데 켜진 난로에 옹기종기 모여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노라면 어느새 배가 고팠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꼭 이 국숫집을 지나쳐야 했는데, 가게에서 풍겨나는 국수 삶는 냄새가 늘상 발걸음을 붙들었다. 그럴 때마다 남준은 내 손을 이끌고 들어가 국수 한 그릇을 사주고는 했다. 뜨끈한 국물을 먹고 나오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남준이 유학을 간 뒤, 혼자서도 종종 국숫집을 찾았지만, 둘이 먹었을 때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 발길을 끊었던 곳이었다.
고개를 박고 면발을 한껏 들어 올린 남준이 입김을 후후 뱉었다. 그리고는 하얀 면발을 입에 넣으려다가 눈을 들어 나를 살폈다. 탁자 위에 놓인 젓가락, 여전히 그대로인 내 국수 그릇을 본 녀석이 면발을 먹으려다 말고 내 눈치를 살폈다.
"안 먹어?"
"...... 정국이한테 들었어. 네가 도와줬다고."
녀석 또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팔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왜?"
"만약 네가 나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지금 내 사상이, 노선이 어떻든 정국이는 여전히 나한테 좋은 동생이고, 너도 마찬가지야."
"정국이가 거기 왜 간 줄 알아?"
"월사금 벌러 갔다고 들었어."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정국이는 단순히 돈을 벌러 간 거라고 했지만, 분명 다른 목적이 있었을 테다. 남준 또한 알았을 것이다.
"그래. 이유야 어쩄든 네가 정국이 풀어주는데 일조하는 건, 그 잘난 노선인지 뭔지 지키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월아."
"정국이가 그러더라. 비 내리는 날, 네가 지었던 표정이 잊히지가 않는다고 네가 말은 아니라고 하는데, 얼굴은 그게 아니더래."
남준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기가 사라졌다. 녀석은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국수를 휘휘 저어댔다. 그리고는 테이블 한 쪽에 두었던 상패를 내 눈앞으로 옮겨놓고 말했다.
"이 상패 받기 위해서 애썼어."
"......"
"학업에도 열중했고, 귀국해서는 기사도 열심히 썼어."
"김남준."
"그리고 너나 정국이가 날 모질게 대하는 건 좀 아팠지만, 어쨌든 각오는 했으니까."
"....."
"근데 월아."
"....."
"나는 이 상이 자랑스러워. 그럼 대답 됐어?"
"김남준. 너 정말 끝까지"
남준은 국수 그릇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국수를 먹고, 그릇째 국물을 마셨다. 그런 그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아무리 종용해도 원하는 답은 듣지 못할 것이다. 정말 노선이 변했든, 아니면 만에 하나 기대처럼 진실을 은폐하고 있든.
얼빠진 나를 앞에두고 녀석이 불현듯 말했다.
"나도 잘 대해줘,"
"넌 그런 말이 나와?"
녀석이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물었다.
"내가 변절해서? 그럼 민윤기씨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조선극장 앞에서 만난 부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친일파 아버지와 그런 행사를 따라 나온 민윤기. 윤기를 만나야 했다.
From.스페스 |
오랜만에 나타났는데도 환영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조금 루즈한 감이 있지만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느리다는 말로는 감당 안 될 연재텀이지만,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는 것은,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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