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OST- empty heart
경성 비밀결사대 21
written by 스페스
날이 추워질수록 해는 빨리 저물었다. 태형과 나란히 가로등이 켜진 대로변을 걸으며 지민은 쌀쌀한 날씨에 외투를 여몄다. 저녁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지는 게 머지않아 허연 입김이 나올 것 같았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늦가을에 입기엔 꽤 얇은 외투를 입고 잔뜩 움츠리며 걷는 지민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지민을 잠시 멈춰 세운 태형은 덜 잠긴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워주고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불현듯 곧 개봉하는 영화가 떠올랐다.
"지민아 내가 저번에 엄청 기다린다고 했던 그 영화 기억나? 내일 개봉이래. 같이 보러 가자."
"내일은 나 일하잖아."
"그래? 호석이 형한테 하루만 늦게 간다고 하면 안 돼?"
"안 돼."
지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거라는 것을 태형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지민은 쉬이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은? 스페스 쉬는 날이잖아."
"그 날은 따로 갈 데가 있어."
"어디?"
태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지민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태형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형에게 갈 계획이었다. 유해를 거두지 못해 뒷산 중턱에 흙을 긁어모아 만든 작은 둔덕이 형의 무덤이었다. 지민은 형의 생일이나 기일이 되면 종종 그곳에서 형을 기리고는 했다. 일을 시작한 이후로 자주 가지 못했으니, 지금쯤 풀이 무성할 테다. 잡초를 뽑고, 흙무덤 옆에 앉아 형에게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지금도 얼마나 견디고 있는지.
형에게 간다고 말할까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태형과는 함께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게 있어."
"넌 아직도 나한테 비밀이 있냐."
태형이 볼멘소리를 했다. 못 들은 척 바삐 걸음을 옮겼으나 지민은 그 말을 들은 이후 줄곧 마음 한켠이 답답했다. 종종걸음으로 지민을 따라붙은 태형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대로변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골목길 위로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부신 눈을 가리며 보았던 철창, 정원에 드문드문 켜진 조명과 그 끝에 이어진 2층짜리 주택. 태형의 집이었다. 지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긴장감에 손끝이 시렸다.
"네가 우리 집 놀러 온다고 하니까 기분 엄청 좋아."
태형이 아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자, 지민은 멋쩍게 웃었다. 달뜬 걸음으로 앞장서는 뒷모습을 보며 지민은 애써 씁쓸한 감정을 숨겼다.
철제 대문을 밀고 들어선 집 앞마당에는 검은 승용차가 줄지어 늘어섰다. 차에 문외한인 지민이 보기에도 경성을 활보하는 택시와는 급이 다른 차들이었다. 태형 또한 도열해있는 자동차를 보며 무언가 떠오른 듯 화들짝 놀랐다.
“아, 오늘 아빠 모임 있다고 하셨는데, 벌써 손님이 왔나 봐. 까먹고 있었다.”
순간 지민의 눈빛이 흔들렸다. 혹시 중대한 약속이 있어 오늘은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그냥 돌아가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민은 걸음을 멈추고 태형의 허락을 기다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속으로는 애가 탔다. 오늘은 반드시 태형의 집에 가야 했다. 그리고 앞마당에 줄지어 선 자동차들의 주인, 그 얼굴을 하나씩 확인해야 했다. 그것이 지민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였다.
* * *
꽤나 차가운 가을 날씨에 김이 모락모락 나던 커피도 금세 식었다. 윤기는 천변 카페 밖 풍경을 응시하며 쌈닭과의 맞선을 떠올렸다. 그 날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빠르게도 흘렀다. 대로를 따라 늘어선 버드나무에서는 어느새 말라버린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내일은 쌈닭에게 단풍 구경을 가자고 할까.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윤기였다.
“저기요. 민윤기씨.”
앞에 앉은 여자의 목소리에 윤기가 고개를 들었다. 금세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여자를 응시하다가 일부러 피곤한 척 하품을 했다. 이쯤 했으면 일어서자고 몇 번이나 눈치를 주었지만 여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귀밑으로 바짝 자른 단발머리와 그 위로 푹 눌러쓴 클로슈가 인상적이었다. 고매하신 화신상회 둘째 따님의 차림치고는 지나치게 모던했다. 그러나 여자의 옷차림보다 더 인상적인 건 단 한 번도 피하지 않고 줄곧 자신을 응시하는 당찬 눈빛이었다. 여자는 커피잔을 들던 손을 멈추고, 가벼운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요?”
윤기가 미간을 구겼다. 애초에 장소가 미쓰코시 4층 천변 카페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흥미로울 것 없는 만남이었다. 파투 난 맞선을 다시 잡은 숙부에게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이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는 어쩔 수 없이 나온 윤기였다. 대충 마무리 지으려 했던 선 자리인데, 상대가 이리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윤기는 피곤한 듯 제 얼굴을 쓸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꼭 답을 들어야겠어요?”
“해주면 더 좋고요.”
“말 안 해도 어차피 알지 않나. 피차 시간 끌 거 없이 이쯤 하죠.”
자리에서 일어난 윤기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예의상 목례를 하고 자리를 뜨려던 그를 붙잡은 건 여자의 이어진 말이었다.
“왜요? 정인이라도 있나 봐요. 민윤기씨.”
윤기가 뒤돌아 여자를 응시했다.
“표정 보니 맞나 보네. 그런데도 맞선 자리에 나온 거 보면 가족한테는 소개 못할 사람이고.”
놀리기라도 하듯, 여유가 묻어나는 말투가 윤기의 심기를 건드렸다. 잔뜩 날카로워진 윤기의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여자가 덧붙였다.
“윤심덕, 김우진 알죠? 워낙 경성 바닥에 유명했던 소문이니 모를 리 없을 테고."
평소 소문에 무감한 윤기조차도 두 사람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윤심덕, 김우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 현해탄에 투신해 버린 두 남녀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유명 삼류 잡지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경성을 뒤덮어 버린 애정사는 카페 스페스에서도 단골 안줏거리였다.
“나는 사랑 때문에 현해탄에 몸을 던지지는 않을 거예요. 어리석잖아요. 남편은 남편이고, 애인은 애인이죠. 윤기씨도 애인이 있나 본데, 그럼 이게 훨씬 현명한 판단이라는 건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는 왼손을 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약지에 걸린 반지가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정인을 운운하기에 잔뜩 날이 서 있던 윤기가 헛웃음을 뱉었다. 남편은 남편이고, 애인은 애인이라. 제 애인과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하자는 건가. 기가 찼다. 여자를 무시하고 다시금 걸음을 옮기려는 윤기를 여자가 다시 불러 세웠다.
"우리 아버지 욕심 때문에 난 누구와든 혼인해야해요. 나한테 마음도 없고 따로 애인까지 있는 민윤기씨. 당신 만한 상대가 없는 것 같아서요. 혼인, 아니 불편하면 거래라고 생각해요."
윤기의 코트를 붙잡은 여자의 손끝이 거셌다. 당당하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허공에서 마주친 눈이 꽤 절박했다. 윤기는 코트를 털어내고는 자리에 착석했다. 귀찮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진짜 좋아해요? 당신 애인? 그럼 이런 제안 쉽게 못할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난 거랜지 뭔지 그런 거 흥미 없어요."
윤기는 가방을 들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뭐 저런 사람이 있나 생각했다가 조금 지나서는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붉은 카펫이 덮인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방금 전 이야기가 쉬이 잊히지 않았다. 그 여자는 처음부터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겠다고 결심했을까. 몇 번의 투쟁 끝에 노선을 달리 한 건 아닐까. 남일에는 하등 관심 없는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껄끄러움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계속 생각날 것 같았다.
윤심덕, 김우진이 어리석었다고 표현했지만, 어쩌면 그 여자가 몸을 던질 현해탄은 사랑 없는 결혼이 아닐까. 그리고, 그리고 어쩌면 그건 숙부 밑에 살고 있는 제 미래이지 않을까. 알 수 없는 불쾌함, 그 근원지를 발견한 윤기는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 * *
태형의 손에 이끌려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지민은 점차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정원 끝에 위치한 저택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임무를 전해주던 석진의 말에 의하면 다섯 명쯤 모일 텐데, 매달 십일 경 그 중 한 집에 모여 모임을 갖는다고 했다. 이번에는 태형의 집이었다. 최근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친일파 조선인 다섯. 그 다섯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야 했다. 지민은 긴장감에 머리가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에 앉아있던 여인이 걸어 나와 태형을 맞이했다. "도련님 오셨어요." 태형은 씩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지민을 이끌었다. 태형의 등 뒤로 등장한 지민의 얼굴에 여인이 난색을 표했다. 그리고는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며 안절부절했다.
“오늘은 중요한 손님들이 오셔서요.”
“괜찮아요. 제 방에서만 놀 거예요.”
소년이 천진한 얼굴로 대꾸했다. 신발을 벗고 먼저 거실에 들어선 태형이 지민을 기다렸다. 지민은 우물쭈물 서 있다가, 뭐 하냐는 태형의 목소리에 그제야 주섬주섬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두었다.
“도련님. 인사는 하고 올라가실 거죠?”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장 지민의 팔을 이끌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걸걸한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지민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일제에 부역한 친일 조선인의 음성이라는 데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침착해야 했다.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됐다. 정확하게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게 임무였다. 침착하자. 몇 번을 되뇌어도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저 왔어요. 어? 안녕하세요.”
태형이 고개만 배꼼 내밀고 인사를 건넸다. 식탁에 둘러앉은 중년 남성 무리가 일제히 태형을 쳐다보았다. 한창 마작을 하고 있었는지, 천을 깔아놓은 테이블 위로 네모난 패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남자들은 패를 맞추던 손길을 멈추고 태형을 응시했다. 동경에서 얼마 전에 돌아온 그 아들이구먼, 아비를 닮아 참 잘 생겼네. 식탁 위로 몇마디 대화가 오고갔다. 그 와중에 태형이 순진한 얼굴로 “전 엄마 닮았는데요.”하는 바람에 모두 껄껄 웃어버렸다. 태형은 기둥 뒤에 초조하게 서 있는 지민의 팔을 끌었다.
“제 친구예요. 오늘 저랑 제 방에서 놀다 갈 거예요.”
지민은 고개를 들고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중 가운데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태형의 집에 왔을 때 사진으로 봤던 태형의 아버지였다. 사진보다 더 마르고 날카로워 보였다. 그가 안경 너머 노골적인 시선으로 지민을 훑어보았다. 이윽고 잘 놀다가라는 말을 덧붙였다. 지민은 순간 놓칠세라 다른 이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금 패를 집어든 몇몇이 비스듬히 앉은 바람에 옆모습만 보일뿐, 명확하게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속이 탔다. 그때 태형이 지민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올라가자.”
다시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올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첫 임무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저들이 고개를 들도록 해야 했다. 초조해진 지민이 태형을 불러 세웠다.
"김태형 너도 마작 할 줄 알아?"
"마작? 내가 좀 하지."
두 소년의 목소리에 둘러앉은 남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지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패를 쥔 채로 태형에게로 모여든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그중 동백기름을 발라 한껏 머리를 넘긴 남자가 태형에게 손짓했다.
"그럼 이쪽으로 앉아봐. 너도 오고."
* * *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맞선을 끝내고 윤기가 향한 곳은 단성사 앞이었다. 손에는 여성복 상호가 적힌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맞선에 나온 여자의 두툼한 자줏빛 코트가 눈에 밟혔던 탓이다. 이제는 좋은 걸 보면 쌈닭의 얼굴부터 떠오르는 윤기였다. 갑작스레 조선호테루 쇼윈도에 걸린 원피스를 사서 사은품이라 쥐여주고 오던 날이 떠올라 윤기는 웃음이 났다. 이제는 그럴싸한 이유를 대지 않고도 쌈닭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극장 앞에는 영화가 상영 중이라는 팻말이 붙었다. 윤기는 웃돈을 얹어주고라도 몰래 들어갈까 하다가, 일을 끝나고 나오는 쌈닭을 놀래키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영화관 건물 벽에 기대선 그가 팔짱을 낀 채로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로등으로 제법 환해진 골목길을 오갔다. 잔뜩 멋을 부린 모던 걸, 모던 보이. 그리고 수많은 연인들. 그러다 자줏빛 코트를 입은 채 남성의 손을 붙잡고 지나는 여자를 보았다. 맞선에 나온 그 화신상회 둘째 딸인가. 가까워지는 여자를 주시하던 윤기는 얼굴 생김새가 다른 것을 확인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요즘 저게 경성에서 유행하는 패션인가. 다 비슷비슷하네.
그러다 생각은 여자와 나누던 대화로 이어졌다.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는 혼인할 수 없다는 여자의 말.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일 쌈닭을 소개한다면, 숙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고 할까. 그렇다면 그때 내가 투신 할 현해탄은 어디일까. 3류 지라시처럼 사랑의 도피를 감행 해야 하나. 윤기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단성사의 문이 열렸다. 관객들이 들뜬 표정으로 쏟아져 나왔다. 윤기는 무의식적으로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제는 무슨 핑계를 댈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쌈닭을 만날 생각에 괜스레 가슴이 뛰는 까닭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지막 손님까지 문을 열고 나오자, 윤기는 빈 극장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몇몇 직원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윤기는 단번에 1등석에서 화로를 치우는 쌈닭을 발견했다. 윤기의 시선이 내내 그녀의 움직임을 따랐다. 쌈닭이 먼저 자신을 알아채길 바랐다. 내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뒷정리에 집중하느라 고개 한번 들지 않는 여자 때문에 윤기가 먼저 걸음을 뗐다. 복도를 가로지르자 나무 바닥에 윤기의 발소리가 울렸다. 화로를 들던 쌈닭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제게로 웃으며 걸어오는 윤기의 모습에 놀란 여자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윤기 또한 입이 귀에 걸릴 듯 웃었다.
“어쩐 일이에요?”
“보고 싶어서.”
평소라면 부끄러워 쉽게 하지 않을 말이 술술 나왔다. 윤기는 여자 손에 들린 화로를 빼앗아 들고는 여자와 나란히 영화관 복도를 가로질렀다.
“방금 말 못 들었어요. 뭐라고요?”
“글쎄. 내가 뭐라고 했더라.”
생각나지 않는 척하는 윤기의 장난에 여자가 입술을 꾹 물었다. 윤기는 영화관 뒤편 간이매점에 화로를 내려놓고, 이제 퇴근해도 되는지 물었다. 여자가 출입문 앞을 가로막고 윤기에게 말했다.
“대답 안 하면 여기서 못 나가는데요.”
“무슨 대답?”
“아까 했던 말이요. 나 못 들었다니까요.”
자꾸만 웃음이 나는 윤기였다. 부끄러운 듯 자신의 얼굴을 쓸다가, 쌈닭을 가만히 응시하던 윤기가 입을 달싹거렸다. 귀까지 빨개진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보고 싶었다고.”
낮은 목소리가 영화관 안을 울렸다.
윤기는 제게로 걸어오는 여자를 보며 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다. 절대 저 손을 잡고 현해탄에 빠지는 일은 없을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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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백개라도 할 말 없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완결은 제가 죽기 전에는 쓸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