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weeks OST - Two weeks memories
경성 비밀결사대 19
written by 스페스
밖으로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툭툭. 창문을 때린 빗방울은 금세 유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창밖의 네온사인은 물감처럼 자욱하게 번졌다. 화려한 도시의 풍경과는 달리 택시 안에 앉은 두 남자는 침묵했다. 차가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두 사람 또한 나란히 흔들렸다. 자동차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만이 낯선 침묵을 메웠다. 정국은 말없이 창가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았다. 가끔 어두운 골목을 지날 때면 창문에 반사된 제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벌겋게 부어오른 뺨과 터진 입술. 그리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 정국은 애써 그 모습을 외면했다.
그 옆에 나란히 앉은 남준은 두 눈을 감은 채였다. 바로 전 상황이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종로서로 뛰어갔는지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디딘 것처럼 혼이 나간 채였다. 남준이 제대로 기억하는 순간은 발걸음을 돌려 총독부로 향했을 때부터였다. 제아무리 친일 신문 편집장이라도 정국을 빼올 수는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비로소 마비되었던 이성이 돌아왔다.
남준은 총독부 앞에 멈춰 서 입구 철장을 잡은 채로 망설였다. 정국을 데리고 나오겠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상황은 마치 시소 같았다. 정국에게로 마음이 기우는 순간 그동안 애써왔던 수많은 것들이 무게를 잃고 공중으로 흩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외면하든지, 앞으로 나아가든지, 어떤 식으로든 내딛는 걸음은 무게를 싣는 것과 같다는 것을, 남준은 알았다. 고로 양립은 불가능했다. 정국을 비호했다는 이유로 지금껏 애써왔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으므로.
그러나 신문사 앞에 찾아왔던 소년의 표정을 떠올리는 순간, 남준은 멈출 수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 했다.
출입구를 지나 드넓은 총독부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내내, 남준은 애써 입가에 힘을 주었다. 머릿속으로는 차곡차곡 할 말을 정리했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으나, 총독부로 발을 내디딘 순간 모든 결심을 끝낸 것과 같았다. 남준은 부경감의 방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데스크에 선 여직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놓인 일정표와 남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부경감의 스케줄에 남준과의 접견은 없었다. 조심스레 방문을 노크한 여자는 당황한 얼굴로 남준이 왔음을 알렸다. 부경감은 일곱시 즈음 식사 약속이 잡혀 있었다. 상대는 남준과 경성역 카페에서 인터뷰를 했던 그 고위 관료였다. 안 그래도 약속 장소에 가려고 외투까지 갖춰 입은 부경감이었다. 그러나 오 분이면 된다는 남준의 말에 부경감은 출입을 허락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이 문지방을 숱하게 넘나들었음에도, 오늘처럼 떨리는 순간은 없었다.
소파에 앉은 부경감이 남준을 향해 미소 지었다.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얼굴이었으나, 남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눈앞에 닥친 숙제를 풀어야 했다. 부경감이 남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냐는 물음이었다.
“잡혔다고 들었습니다. 사건의 주동자.”
부경감이 껄껄 웃고는 손에 걸린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러게 앓던 이가 드디어 빠졌네.”
남준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애써 입가를 끌어올려 웃었다.
“정말 잘 됐네요.”
"자네가 잘 도와준 덕분이지 뭐."
"사건이 이렇게 빨리 해결될 줄 몰랐습니다. 역시 총독부 능력이 대단합니다."
남준은 부경감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가진 마지막 승부수였다. 미궁 속에 갇힌 사건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해결되었냐는 물음이었다. 자신의 추측이 맞기를. 남준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만일 부경감이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 사활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진범을 찾아야 한다고. 취임식 날 행사에 온 관료들, 우리에게 협조적인 조선인들은 건드려 봐야 좋을 게 없다네."
생략되어있던 뒷말은 굳이 들리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온 사람들 중 걸고 넘어저도 문제가 없을 만한 사람들이, 이 계획의 타겟이 되었으리라. 남준이 속으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다행히 사선을 넘을 필요가 없어졌다. 벼랑 끝에서 부경감이 제 속내를 터놓은 덕이다.
“부경감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늘 신뢰하고 있습니다.”
자세를 고쳐 앉은 남준이 반대편의 남자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자네가 그렇다는 게 생각한다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그런데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건 지, 제 동생 녀석이 연행된 것 같습니다.”
부경감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남준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희뿌연 담배연기를 뱉었다. 남준의 얼굴 앞으로 연기가 흩어졌다.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지내던 녀석입니다. 동경 유학을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폭파 사건 현장에 있었는데, 그 일도 제가 권유했던 겁니다. 제국에서 크게 일하고 싶다던 녀석인데, 갑작스레 연행되는 바람에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남준은 입가에 힘을 주었다. 여유를 잃지 말기. 다급해 보여서는 안될 것. 흥분은 금물.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말을 끝낸 남준은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부경감을 응시했다. 그의 손에 들린 담배처럼,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래?”
부경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착오가 있다면 정정해야지. 그 누구도 아니고 편집장 부탁인데.”
그리고는 곧장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를 타고 몇 마디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는 귀에서 수화기를 뗀 부경감이 남준에게 물었다. “직접 가겠나?” 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준의 뒷모습을 보며, 부경감이 껄껄 웃었다. 곧이어 걸걸한 목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눈물겨운 우애일세."
* * *
볕이 들지 않는 반지하 방은 습했다. 곰팡이가 눅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아직 가을이었으나 지민의 방은 냉골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몰려오는 냉랭한 기운에 두 사람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곧 방안에 들어온 태형이 시린 발을 꼼지락거렸다. 지민은 멋쩍은 얼굴로 방 한구석에 놓인 화로를 꺼내들었다. 오랜 시간 피우지 않은 탓에 하얗게 남은 재가 화로 위로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곧이어 지민은 한쪽 구석에 접어둔 이부자리를 급하게 펴고는 태형에게 말했다.
"추우면 일단 올라가 있어."
이부자리에 올라앉아 무릎을 감은 채 몸을 웅크린 태형이 지민의 등을 바라보았다. 분주한 뒷모습이 화로에 불을 붙였다. 비로소 온기가 스며들자 태형은 화로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평소에는 안 켜고 지내?"
"응. 추위를 별로 안 타서."
지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제야 방안을 둘러보는 태형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 하나,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나무 장롱, 낡은 책상. 이렇다 할 살림살이가 없었다. 지민은 방안 곳곳 머무르는 소년의 시선에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 누구야?"
화로 앞으로 자리를 당겨 앉은 태형이 책상 위에 놓인 액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형."
태형은 무릎을 꿇은 채로 기어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액자를 집어 들어 사진 속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지민의 맥박이 빨라졌다. 액자 틈에 태형의 사진을 숨겨놓은 탓이었다. 혹시 형의 사진 뒤로 태형의 얼굴이 비치지는 않을까. 지민은 긴장감에 숨까지 참으며 태형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러나 찰나의 긴장이 무색하게, 태형은 손에 든 액자와 지민의 얼굴을 비교해보며 아이같이 웃어버렸다.
"별로 안 닮았다."
"그치."
그리고는 액자를 다시 올려놓는 태형의 행동에 그제야 참았던 숨을 뱉는 지민이었다.
"형 되게 잘 생기셨다."
"그치. 우리 형... 야! 김태형. 형이랑 나랑 안 닮았다며!"
지민이 억울한 듯 소리를 치자, 웃음을 참지 못한 태형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태형은 그 순간 자신을 보며 씩씩거리는 지민의 모습에, 기분이 조금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늘 어딘가 모르게 벽을 쌓던 지민이었다. 곁을 주는 듯했지만 완전히 내어주지는 않던 녀석. 그러나 어느새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같아서 태형은 순간 울컥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약간 그 잘생긴 게 이체 다 다르게 생긴 그런 것도 있고. 아니야. 너 멋있어. 박지민.”
“....그래?”
이내 지민은 눈이 접히도록 웃었다. 이렇게 활짝 웃는 지민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 여기 달력에 동그라미는 뭐야?”
액자를 내려놓은 태형은 벽에 걸린 달력으로 시선을 옮겼다. 숫자 위로 그려진 동그라미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표시된 날짜는 바로 며칠 후였다. 지민은 순간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어?”
“누구 생일이야? 설마 네 생일?”
“아니. 어……. 그게, 그러니까 우리 형 생일이야.”
“형 생일도 챙기고, 착하다.”
애써 둘러댔지만 지민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금세 속이 답답해졌다. 태형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내가 괜히 물어봤다. 형 보고 싶을 텐데.”
태형은 입술을 문 채로 지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소년의 모습에, 지민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대충 둘러댄 말을 철석같이 믿고 도리어 자신을 걱정하는 태형이 마음에 걸렸지만, 진실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자꾸만 서글퍼졌다. 벗이 되는 것이 총 한 발 쏘는 것보다 더 힘든 거라는, 석진의 말이 더욱 실감나는 요즘이었다.
“그럼 네 생일은 언제야?”
태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민은 당황한 듯 어버버거렸다.
“나? 생일?”
“응. 네 생일.”
“아, 생일.... 시월 십삼일.”
“어? 곧 이네. 근데 네 생일은 왜 달력에 없어?”
태형은 의아한 얼굴로 빈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곧 지민의 생일이었다. 경성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생일을 챙긴 적이 없었다. 첫해에는 경황이 없어 그냥 지나쳤고, 다음 해부터는 제 단칸방에서 형의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 것으로 축하를 대신했다.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어머니의 미역국. 둘러앉은 가족들. 제게 쏟아진 따뜻한 눈빛들. 형이 가져온 선물 꾸러미를 펼쳐놓고 재잘재잘 떠들던 날들. 점점 희미해지는 그 기억의 끝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그럴 때면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서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같이 축하하자! 아, 지민아! 스메끼리 어딨어? 나 약간 손톱 많이 길었지?”
태형이 양손을 내밀고는 지민을 향해 말했다. 슬쩍 내려다 본 지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사진. 달력. 생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수많은 생각들이 지민을 쿡쿡 찔러댔다.
“지민아, 쓰메끼리 어디 있냐니까?”
“아, 저기 서랍에.”
태형은 무릎을 꿇은 채로 다시 책상을 향해 기어갔다. 낡은 서랍이 잘 열리지 않았다. 힘껏 서랍을 열어 재낀 태형이 이내 놀란 듯 큰 소리를 냈다.
“우와! 매일신보네. 너 우리 신문 읽어?”
“어?”
“오, 여기 우리 편집장님 이름 있다.”
신문 뭉치를 든 태형이 흥분한 듯 소리쳤다. 반면 지민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마작관 거사를 벌이기 전, 타켓트의 얼굴을 외울 요량으로 모아둔 신문 뭉치였다. 순간 지민은 태형을 집에 데리고 온 것을 후회했다. 방 곳곳에는 지금까지의 흔적이 여실했다.
태형은 이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을수록 지민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늦은 시간이 되었는데도 태형은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집에 어떻게 갈 거냐는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나 자고 갈 건데."
그리고는 시간이 늦었다는 핑계로 천연덕스럽게 지민의 이부자리를 차지했다. 태형은 베개를 끌어안고는 이불에 누워 천진하게 웃었다. 그런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태형의 옆으로 자리를 마련하는 지민이었다.
지민에게는 오늘은 유독 피곤한 하루였다. 의도치 않게 내내 긴장한 탓이었다. 반지하 밖으로 이어진 슬레이트 지붕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가 또렷했다. 투둑투둑. 규칙적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정겨웠다. 곧 잠이 들것처럼 재잘재잘 떠들던 태형의 말투가 점점 느려졌다.
그러나 지민의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까만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태형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애써 잠들지 않으려고 눈을 껌뻑이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김태형."
"응?"
잠에 취한 태형의 목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왜 매일신보에서 일해?"
"... 아빠가 시켜서."
발음이 뭉개지는 것이 곧 잠에 빠져들 것 같은 태형이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태형아."
"....."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그건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이래. 우리 형이 그랬어."
"....."
태형은 답이 없었다. 아마도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 거겠지.
"그러니까, 나는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진실을."
태형이 쌔근쌔근 숨을 내쉬었다. 잠에 빠져든 태형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지민 또한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지민에겐 유독 길고 긴 밤이었다.
* * *
“도착이요.”
택시운전사의 목소리였다. 남준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요금을 지불했다. 차 문을 열고 나가던 정국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걷어차인 다리가 욱신거리는 탓이었다. 다리를 절뚝이며 걷는 정국과 반대편 문을 열고 택시를 빠져나온 남준, 두 사람 모두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았다. 정국은 절뚝거리며 문이 닫힌 상점 앞 처마 밑으로 향했다. 쏟아지는 비에 얼굴이 젖어 들었다. 코앞에 내리는 비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느새 새까만 밤이었다.
“지금쯤 주무시고 계시니. 어머니?”
등 뒤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상점으로 걷던 정국이 뒤를 돌아보았다. 잔뜩 부어오른 정국의 뺨을 보고 남준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눈앞이 젖어 가는데도, 정국은 오롯이 남준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한참 끝에 입을 뗐다.
“형이잖아. 나 구해준 사람. 지금도, 연회장에서도. 형 맞잖아.”
어두운 골목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정국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들었다.
“전정국. 신문사 앞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해?”
“......”
“네가 정말로 그 일에 가담한 거라면 널 밀고했을 거라고.”
정국의 머리칼을 타고 빗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근데 왜 구하러 왔어?”
“네가 말했잖아. 그저 월사금 벌러 간 거라고.”
“아니. 형은 봤어."
"....."
"그 날, 연기 사이로 보인 사람."
"....."
"형이었잖아.”
내뱉은 소년의 목소리가 잠겼다. 끝끝내 참아보려 애썼지만 눈물이 차올랐다. 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대체 뭘 숨기는 거야. 형.”
“숨기는 거 없어. 그건 네 바람이겠지. 옛정이야. 너희 형들, 아버지. 그렇게 가셨는데 너까지 연행되었으면 너희 어머니는....”
남준은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비를 닦아냈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져 지폐를 꺼내들었다. 정국에게로 다가간 남준이 손에 억지로 쥐여주고는 말했다.
“어머니가 네 얼굴 보시면 걱정하시겠다. 치료라도 받아.”
남준은 말을 마치고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새까만 어둠 새로 걸어 들어갔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에도 정국은 남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국의 어깨가 들썩였다. 참지 못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정국은 엉엉 울었다. 거칠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울음소리를 삼켰다. 부어오른 뺨, 그 당시 느꼈던 모멸감, 취조실에서 몰아친 공포보다도 끝끝내 진실을 말할 수 없는 남준의 뒷모습이 더 아렸다.
* * *
운전대를 잡은 윤기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같은 골목을 걸었더라. 좁은 골목을 지나 쌈닭을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설라치면, 반대로 여자가 윤기를 배웅하겠다며 따라나섰다. 왕복으로 다섯 손가락을 채울 즈음, 두 사람은 아쉬운 안녕을 했다. 쏟아져 내리는 빗 길을 달리면서도 윤기는 내내 여자 생각뿐이었다. 그런 자신이 우스워, 자꾸만 헛웃음이 났다.
이윽고 집에 도착한 윤기가 차 시동을 껐다. 늦은 시간인데도 거실 불이 밝았다. 태형이가 방금 들어왔나? 세 남자가 사는 집에서 귀가가 제일 늦은 사람은 윤기였다. 보통 이 시간에 집 조명은 꺼져있기 마련이었다. 자동차 창문으로 거실을 바라보던 윤기가 이내 차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손으로 대강 머리를 가린 채, 꽤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현관에 도착해서 옷에 묻은 빗방울을 털고 있을 때였다.
“귀가가 늦구나.”
생각지도 못한 음성에 윤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던 숙부가 안경을 고쳐 썼다.
“아직 안주무셨나 봐요.”
거실에 들어선 윤기가 멋쩍은 듯 말했다.
“너도 그렇고, 태형이도 그렇고 집에 들어오질 않으니 영 걱정돼서 말이다. 태형이 녀석은 어디서 뭘 하는지.”
혀를 끌끌 찬 숙부가 신문을 접어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제 방으로 향했다. 윤기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윤기가 계단을 오르려고 할 때였다.
방으로 들어가던 숙부가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내일 오후에 시간 비워 놔라.”
일방적인 통보에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숙부를 흘끗 보았다.
"다시 잡아놨다. 선 자리 말이야."
황당한 얼굴을 한 윤기가 걸음을 멈췄다. 그런 윤기를 보고는 숙부가 다시 끌끌 혀를 찼다.
“너도 언제까지 그렇게 고집부릴 게냐. 이번에는 맞선 장소 착각하지 말고. 미쓰코시, 천변 카페에서 여섯시다. 그때 그 화신상회 딸이니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지 마라. 이 애비도 얼굴 좀 들고 살아야지.”
From. 스페스 (더보기가 안 되는 바람에 밖으로 끌고 옵니다.)
안녕하세요. 스페스입니다.
항상 남겨주시는 댓글들 잘 일고 있습니다. 정말 정성스럽게 써주시는 감상평들, 응원의 글들 읽으면 큰 힘이 됩니다.
일일이 답댓을 달아드리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가끔 제가 제대로 글을 쓰는 건 지 의구심이 들 때마다, 정성스레 달아주시는 댓글 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정주행하시면서 써주시는 귀여운 댓글들도 잘 보고 있습니다. :)
암호닉은 거의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조만간 공지로 찾아뵙겠습니다.
스페스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