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그리고
㈜솨솨
늦은 밤, 아주 고요하고 늦은 밤이었다. 모든 집들의 불이 꺼져있었고 사람 한 명 없는 골목길은 달빛과 가로등 빛 하나에 의지해야 하는 그런 시간 새벽 3시. 모두가 잠들어야 할 시간이지만 과제에 찌든 나는 황금 같은 주말이라고 이 시간을 즐기자는 이유로 몰려오는 잠을 꼭꼭 참은 채 티비 예능을 시청 중이었다. 이제는 방영하지도 않는 옛날 예능들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었다. 다 늙어 빠진 예능과 마른 오징어 다리와 맥주 한 캔. 이미 다 본 내용임에도 흥미로워 오징어 다리를 물으며 웃고 있자니 별안간 들리는 초인종 소리.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다시 한 번 더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티비 소리도 낮췄다. 휴대폰을 들었다. 무기 같은 거였다.
"나야, 아미야."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 따듯하고 친근한 목소리. 그리고 어딘가 꼬인 듯한 발음. 한숨을 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익숙한 네 얼굴과 상기된 두 볼이 보였다. 뭐가 좋은지 실실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네 모습에 나 역시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내 웃음에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또 술 마셨어?"
"조오금 마셨어. 간만에 동창들 만나서... 진짜 쪼오금..."
나를 지나쳐 익숙하게 내 집에 들어오는 네 행동에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숨을 내쉬며 거실 소파에 앉은 너는 내게 물을 달라했고 나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네게 건네었다. 티비에는 여전히 예능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풀린 두 눈,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베어나오는 담배 냄새가 너의 상태가 어떤지 보여주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너의 앞에 쪼그려 앉아 너를 위로 쳐다보았다. 요새 통 못 먹었는지 살도 좀 빠진 듯 했다. 과제 때문에 많이 바쁜가 보네. 놀기만 하는 놈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가 싶기도 하고...
"담배 냄새 나. 내가 피지 말라고 했지."
"알겠어... 안 필게..."
"술도 적당히 마셔. 이게 뭐야. 정신도 못 차리고."
"알겠어... 안 마실게..."
"밥도 좀 먹고 다니고. 살 빠졌잖아."
"알겠어... 먹고 다닐게..."
내 잔소리에 주눅이 든 듯 너는 고개를 숙이고 오리 입을 내밀었다. 꼴에 그래도 대답은 꼬박 꼬박 한다고 오리 입이 오물거리는 것이 귀여웠다. 가지런히 모은 너의 두 손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 거 같은 너의 손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너는 내 두 볼을 잡고 짧게 입을 여러 번 맞췄다. 술과 담배가 섞인 맛이 났다. 너의 손을 때렸다. 담배 싫어 진짜. 실실 웃으면서 알겠다 알겠다 하는 너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 뭐라도 좀 먹이고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텅 비어있었다. 맥주 몇 캔과 김치, 계란. 너 혼낼 처지가 아니었지, 참. 조류 알러지가 있어 계란은 못 먹으니까 김치랑 식은 밥으로 대충 김치 볶음밥을 만들었다. 내 김치 볶음밥 되게 좋아하니까. 너는 조용히 티비에서 나오는 예능을 보고 있었다.
"밥 먹어."
내 말에 너는 식탁으로 달려왔다. 김치 볶음밥이라고 아이마냥 좋아하는 너는 숟가락을 들고 한 숟갈, 두 숟갈 씩 먹었다.
"근데 저 예능 우리 되게 많이 봤던 거 아냐?"
"어, 맞아. 우리 맨날 저거만 돌려 봤잖아."
"마지막 회인가 봐. 다들 울어."
"그래? 우리도 마지막 회 보면서 울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주책이라고 웃었다. 너는 금새 그릇을 다 비웠다. 배가 부르다며 배를 두들기고 화장실로 향했다.
"자기야, 내 칫솔 어딨어?"
"버렸지."
"그럼 자기 거 써야지."
익숙한 듯, 내 칫솔을 들고 양치를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설거지를 했다. 내 설거지가 끝나니 너의 양치도 끝이 났고 집으로 가려는지 너는 코트를 챙겨 입었다. 나 역시 삐뚤어진 너의 넥타이를 고쳐 매 주었다.
"집에 가기 싫다. 그냥 자기 집에서 잘까?"
"뭘 우리 집에서 잔다고. 일어나서 후회 말고 집 가서 주무세요."
"우응. 자기 뽀뽀."
입술을 내밀길래 그냥 짧게 입 한 번 맞추려고 했을 뿐인데 네가 내 뒷목을 잡으면서 점점 길어졌다. 오랜만에 하는 키스였다. 너는 점점 내게 파고 들었고 나는 그런 너를 피하지 않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질척이면서 나는 너의 목에 팔을 감았다. 숨이 가빠오는 걸 눈치 챘는지 잠깐 입술을 뗐다가 다시 붙였고 시간이 꽤 지난 후에 안 떨어질 거 같은 입술이 떨어졌다. 분위기가 이상했고, 자고 갈까? 라며 묻는 너의 질문에 혹 했지만 그냥 가세요~ 하면서 너의 등을 떠밀었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연 너는 내게 해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잘 자 자기야. 연락할게."
"응, 조심히 가."
뒤를 돌아 빌라 계단을 내려가는 너를 붙잡았다. 네가 뒤를 돌자 센서등이 켜졌다.
"지민아, 이제 우리 집 오지 마."
"......"
"우리 헤어졌잖아. "
고요한 정적을 깨는 건 예능이 끝나 흘러나오는 삐 소리와 꺼진 센서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