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7월 7일, 흔히들 '칠석' 또는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고 부른다. 견우와 직녀한테는 그저 좋고 설레는 그런날이겠지만 나한테는 조금 다르다. 칠석, 내 '전'애인 민윤기를 만나는날. 물론 설레지않는다거나 만나기 싫은것은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가는 곳곳마다 칠석을 표시해둘리도 없었을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또 마냥 설레는 날은 아닌게, 내 '전'애인 민윤기는 이미 한 가정의 가장이고 이제 더 이상 날 사랑하지않는다. 사랑했다면 결혼은 안했겠지. 그저 내가 힘들어서, 애원하고 애원해 딱 하루 얼굴만 볼 수 있게 허락된날이 칠석이었다. 그냥, 윤기가 결혼하고나서 되돌릴수없는일이라는것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달라고 무릎꿇고 애원하던날, 하필 그날이 음력 칠석이었던거다.
" 왔어? "
" 많이 기다렸지, 차가막혀서… "
윤기가 걸어들어온다. 여전히 마른몸에, 흰피부에, 꽃물이든듯 분홍빛인 팔꿈치와 손끝. 이제 내년이면 서른이면서, 그놈의 콩깍지는 사라지지도 않는지 차가 막혀서 좀 늦었다며 웅얼거리는 그 입이 마냥 귀여워보인다. 맞은편에 털썩 앉은 윤기의 몸에서 아기 분내가난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윤기의 아내가 첫째를 낳았다는 소식을 대학 동창회에서 들은것 같기도하고…, 윤기의 눈가 피부가 피곤하게 부어오른것을보니 고놈 참 고생 많이 시키나보다.
" 첫째 낳았다며, 아들이야? "
" 딸이야, 어떻게 알았어? "
" 얼마전에 동창회 갔다가 들었어. "
" 아, 벌써 그렇게 소문이났구나. 다행히 아내닮았더라고, 되게예뻐. 코도 오똑하고, 입술은 오밀조밀한게 엄청 예뻐. 나 닮았으면 큰일날뻔했지."
아쉽다, 너 닮았으면 더 예뻤을거야 윤기야. 목젖까지 저도 모르게 차오른말을 힘껏 삼켜내고 말없이 입을 동그랗게 모아 웃어댔다. 윤기는 내 웃음을 좋아했다. 입모양이 하트모양이라 그게 참 귀엽다나 뭐라나, 그 이후로 괜시리 의식하게되는 바람에 윤기의 앞에서는 입을 동그랗게 말며 웃는다. 어색한듯이 넥타이를 조물조물 거리다가 딸 얘기가 나오니 그제서야 자연스럽게 달싹인다. 항상 중얼거리듯 말하는 윤기와 그걸 잘 듣기위해 최대한 테이블 가까이 몸을붙여 경청하는 나, 연애시절에는 이게 좋은건줄도 모르고 왜 너는 매일 중얼거리냐며 짜증도냈었다. 지금은 과거의 그런 사소한것에 짜증만 부린 애같은 내가 미울뿐이다.
" …래서 말인데, "
" 어? "
윤기가 곤란한듯 입술을 축이더니 내 눈치를 살핀다. 잘못한걸 고백할때 자주 저런표정 지었었지, 전화를 안받았다거나 허락없이 담배 피웠을때.
" 그만 만나. "
고개를 푹 숙인채 웅얼거리던 윤기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는 표정이 제법 진지하다. 그만 만나는건 이미 그만 만났는데, 무슨 의미지?
" 그만 만나긴 예전에 그만 만났지, 무슨소리야? "
" …그니까, 나, 애도 생겼고, 전 애인, 그것도 남자를 계속 만나는건 좀… "
" 일년에 한번도 안돼? "
눈앞의 하얀얼굴이 입을 꾹 다문채 끄덕거린다. 이제 나에겐 일년의 단 하루도 허락되지않는다. 억지부리고 싶어.
" 이거 말하려고 온거야, 미안해. "
" …아니야. "
후회된다, 대학교 1학년때부터 졸업,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내내 윤기의 사랑이 당연한듯 못되게 굴었던 내가. 그리고 끝내 사법고시를 합격한뒤엔 괜히 여자도 만나보고싶은 마음이 들었고, 술을 진탕 퍼마신날 내 집에, 아니, 윤기와 나의 집에 보란듯 여자를 데리고왔다. 소개할게, 같이사는형이야 하면서. 한번이 두번이되고, 두번이 세번이되다보니 어느새 윤기와 나는 연인이 아닌 말그대로 같이사는 형동생사이가 되버렸다. 그렇게 물흐르듯. 윤기가 어느날 붉게부은눈으로 자신의 짐을 챙겨 홱하고 집을 나가버렸을땐 이미 윤기에 대한 애정은 언제 사랑했냐는듯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 …이젠 진짜 끝이야. 연락도 하지말고, 동창회엔 그냥 가끔 나갈게. "
" 그럼 동창회날…! "
" 아니, 가급적이면 안봤으면해. "
" 갑자기 왜이래 윤기야, "
" 갑자기라니, 니 업보야. "
윤기의 목소리끝이 떨리게 들려오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참 오랜만에듣는, 아니 처음듣는 윤기의 절박하고 원망스러운 목소리였다. 잡고싶은데, 끈적하게 젖은 손가락이 어째선지 테이블에서 떨어질생각을 안한다. 니 업보야, 하는 윤기의 가시돋힌 마지막 말이 가슴을 후벼파는것만 같다. 그래, 내 업보다. 여지껏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게나 날 사랑해줬는데 약간의 애정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것이라는 자만심과 오만함이 만들어낸 내 업보. 항상 등을 돌리는건 내 쪽이었다, 그 마저도 방황하다 지쳐 다시 뒤돌아보면 항상 미소를 짓는 윤기가 있었다. 그랬는데, 이번엔 윤기가 등을돌린다. 아마 지쳐 돌아보는일은 없겠지, 오히려 뒤돌아보지않는편이 편할것이라는걸 난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다. 인정하기 싫었을뿐. 정말 바보같은 소원이지만 윤기와 윤기가 사랑하는 그녀의 아이를 한번 꼭 안아보고싶었다. 그 작은 얼굴안에 사이좋게 자리잡은 윤기의 모습과 그녀의 모습을 비교하며 미소를 지어보고싶었다.
" …비오네, "
유리창에 비로 만들어진 빗금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내 방울방울져 마구 쏟아지기시작했다. 창밖의 불빛들이 형태를 잃어가며 그득히 일렁였다. 견우와 직녀가 너무 오랜만에 만나 감격해 우는것이라고 했던가. 시덥지도 않은 전설에 괜히 감정이입이되어 매년 칠석을 함께 보내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나는 지독한 가해자였고 윤기는 피해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습에 지쳐 떠난 윤기가 먼저 결혼하자 억울한건 나라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더러운 소문을 낸건 나 자신, 김태형이었다는것을 이제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