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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는 분명히 말했다. 책임지지 못할 짓은 하지 말라고.

확신에 찬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종현을 믿은 자신이 병신이라고 진기는 생각했다.


종현은 진기에게 행복은 언제가 가까이 있다고 말했다. 아니 그건 말보다 세뇌수준이었다

종현은 시도 때도 없이 진기에게'너의 행복은 가까이 있어그리고 그 행복은 바로 나야' 라고 말했다.

데이트를 하면서도 밤에 전화를 할 때도 영화관에서도 말이다. 그래서 진기는 자신의 행복의 전부가 종현 인줄 알았다.


온 세상이 붉어지기 시작할 때 갑작스레 종현은 진기를 찾아왔다.

-잠시 집 앞에 와줄래

갑작스레 울린 핸드폰을 바라보니 새벽 3시였다, 진기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너의 차가운 눈빛이 나의 스포일러'

요즘 유행하는 힙합노래의 가사처럼 억지로 무시하고 못 본 척했던 종현의 그 수많았던 스포일러들이 진기 자신에게 이젠 끝이 날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진기는 나가지 않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더라도 종현은 분명히 자신에게 끝을 말할 것이었다.

끝을 알고 향하는 발걸음이 당연히 가벼울 리 없었다

진기는 종현이 좋아하던 분홍색 후드를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엘리베이터를 탄 뒤 1층을 누른 진기는 다시 새로운 층을 눌렀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홀로 8층에서 멈춰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진기는 문을 여는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었다. 진기는 종현과의 이별은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본홍 후드를 입고 내려온 진기를 종현은 그저 멍하니 바라만 봤다

기억나니 종현아. 우리를 이어준 이 후드진기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놀랐어 갑자기 무슨 일이야?”

진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종현에게 물어봤다.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말해줘

쌀쌀하다. 왜 이렇게 얇게 입고 왔어?“

종현은 진기의 마음도 알지 못한 체 무심히도 말했다.

종현아. 이 후드 때문에 널 만나게 됐는데 우리 사랑의 끝도 이 후두와 같이 하는구나

진기는 자신의 분홍후드 팔을 자신의 팔보다 길게 뺀 뒤 작은 손으로 소매를 꼭 잡았다.

그러길래. 가을 다 끝났다 보다. 우리 이번 가을엔 단풍도 제대로 같이 못 봤네. 내일 남산갈래?”

말을 하면서도 진기는 종현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예전의 너였으면 얇게 입고 온 나에게 너의 외투를 벗어줬겠지. 예전의 너였다면 누구보다 먼저 내 손을 잡고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아 라고 말했겠지

미안 진기야

진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아니 종현의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아니 종현의 수많은 차가웠던 스포일러들을 봤을 때부터 수 백 번 수 천 번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말이었다.

?”

있지 하 일단 미안하다

“...”

진기야

됐어. 너한테 미안하다는 얘기 듣고 싶어서 새벽 3시에 나온 거 아니야

진기야

뭐가 미안해? 너 혼자 마음정리 다하고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하는 거? 아니면 새벽3시에 불러서 할 말이 그거밖에 없는 거?”

“....”

종현아

“....

잘가. 고마웠어. 행복했어. 이게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말들이야.”

진기는 민호가 자신이 한 말을 들으면 쿨 몽둥이로 맞을 새끼라고 소리 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기야

됐어 가

진기는 종현보다 먼저 돌아섰다. 종현과 헤어지면 당연히 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과 달리 눈물이 나지 않았다. 사실 종현과 헤어졌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터덜터덜 슬리퍼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에 들어온 진기는 종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종현은 언제나 그랬듯이 뒤를 돌아 진기의 방을 올려다봤다. 진기의 눈과 종현의 눈이 차가운 허공에서 마주쳤다. 진기가 자신의 눈을 돌리기 전 종현은 둘의 사랑을 떨어트렸다. 항상 종현의 4번째 손가락을 차지했던 은색의 링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바닥에 나뒹굴어졌다. 잔인하게도 종현는 진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진기는 자기도 모르게 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종현은 진기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컬러링으로 설정해놨었다. 진기가 자신에게 맨날 전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는 의미에서였다. 종현은 진기를 바라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새벽 3시에 나한테 나오라고 해서 차는 것 까지 이해할게. 근데 반지 주워가. 주워가서 너 다음 애인을 주던 금은방에 팔던지 마음대로 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하지만 종현은 끝내 반지를 주워가지 않았다. 사실 진기는 종현에게 하고싶은 말이 많았다.

왜 내가 싫어졌니?내가 뭘 잘못했던 거니?’

하지만 진기는 이 전화를 끝으로 종현과의 사이가 완전히 끝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


종현과 헤어진 지 1주일째 되던 날 진기는 민호를 불러 술을 마셨다. 민호는 진기와 종현의 사이를 아는 얼마 되지 않는 친구 중 하나였다.

민호야 나 종현이만 바라보면 가슴이 두근거려

사랑이네

내가, 종현이를, 사랑한다? 내가, 종현이를 사랑한다!’

민호는 진기가 종현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진기의 먼지 쌓인 감정에 조심스레 붓질을 해주고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오라고 꺼내준 것도 민호였다.


민호는 자신의 앞에서 소주만 먹는 진기를 팔짱을 끼며 화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야 이진기 말을 해봐. 너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인지 알아야 위로를 해주던지 욕을 하던지 할 것 아냐"

사실 술을 좋아하는 진기가 아니라 민호는 그저 가벼운 술친구를 해주기 위해 왔었다. 근데 진기의 상태가 영 아닌 것이었다.

‘.......’

답답하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하는 민호에게 진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벌컥벌컥 소주잔만 들이킬 뿐이었다.

"혼자 소주를 몇 병째 마시는 거야. 김종현이랑 싸웠냐?"

"...헤어졌다"

헤어졌다는 말과 함께 진기의 고개가 함께 숙여졌다. 자신의 입으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둘이 사귄 2년이라는 시간동안 민호는 한 번도 둘이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 그둘은 희대의 사랑꾼에 꼽힐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이진기와 김종현이 헤어졌단다.

마셔라. 안주 뭐 더 필요한 거 없냐? 그리고 청승맞게 소주가 뭐냐. 양주 마실래?’

"......"

"이모. 여기 오뎅탕이랑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

민호는 자신이 진기에게 그렇게 큰 위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진기의 유일한 약은 김종현이었다. 진기는 이제 스스로 치료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

"이진기 우냐? 울지 마라. 너가 뭐가 아쉽다고 울어. 김종현 개새끼 진짜. 개같이 생겨가지고"

"너 종현이 욕 할 거면 저리 꺼져"  

"지랄 진짜 열녀 나셨네."

"........민호야 나 진짜 종현이 없이 어떻게 살아"

결국 진기는 민호를 붙잡고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종현과 헤어지고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민호는 큰손으로 진기의 여린 등을 두드렸다.

"야 괜찮아. 차라리 잘됐어"

손에 얼굴을 묻고 창피함도 없이 큰 소리를 내며 우는 진기의 목소리가 포장마차를 가득 채웠다.

"어휴 총각. 시련이라도 당했어?"

포장마차 이모는 우는 손님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다 그런거야. 여기서 실컷 울고 내일부터는 열심히 살아. 그게 최고의 복수여’"

그 짧은 순간에 진기는 종현이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민호야 나 종현이한테 복수하기 싫어. 강아지처럼 예쁜 애한테 복수를 어떻게 해 할 데가 어딨어"

포장마차 이모의 말이 감정의 증폭제가 되어 진기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아오 미친새끼"

!

진기는 민호의 욕을 듣기도 전에 테이블에 입술을 비볐다.


진기는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다. 어제 먹은 술 때문에 쓰린 속을 달래러 진기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2시간 남짓 남았지만 진기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종현이와 같은 수업을 피하기 위해 진기는 전공 수업을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종현이와 마주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이 우는 것보다 자신 때문에 종현이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더 두려운 진기였다. 그렇게 다시 침대에 누운 진기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무미건조한 핸드폰 진동소리였다.

어 종현아

진기는 다시 한 번 습관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항상 자신을 깨워주고 데리러 오던 종현이의 전화를 한순간에 잊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친 두부새끼야. 나 그 개새끼 아니거든? 속은 괜찮냐

아 민호야. 응 방금 다 토했어. 어지러워

수업가야지

안가 너 혼자 가

미친 사랑꾼 이진기야. 1시간 뒤에 갈 테니 까 빨리 준비해. 나는 너 씻든 안 씻든 무조건 수업 데려 갈 거다

진기는 포기를 모르는 민호의 성격을 알았다. 민호라면 정말 1시간 뒤에 자신의 집으로 올 것이었다. 진기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다 터덜터덜 화장실로 들어갔다.


띵동 띵동

미친 술 쟁이 두부야 빨리나와 학교가자

정확히 한 시간 후 민호는 진기의 집에 도착했다. 그때 막 진기는 자신의 잃어버린 전공책을 찾느라 분주하게 이리저리 자신의 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민호야 잠깐만 기다려봐

미친 야 너 사랑 때문에 정신도 잃었냐? 어떤 교수님 시간인데 나보고 기다리래. 나 들어간다

민호는 자신의 집처럼 익숙하게 진기의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도어 락이 풀리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야 두부 너 왜 그러는데

민호야 나 전공 책 어따뒀지?”

진기는 울기 직전의 목소리로 자신의 책에 행방에 대해 물어봤다.

민호는 금방 뭔가 생각난 듯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소리를 냈다.

?”

너 그거 김종현 빌려줬잖아


민호의 손에 끌려 강의실 앞까지 온 진기는 수업이 십분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호와 실랑이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종현이 한테 책 어떻게 받아

당연히 받아야지. 뭐 어때. 너희 부모님은 땅 파서 돈 버시냐? 이 교수님 전공책 없으면 나가라고 하는 거 알지? 고딩처럼 쪽팔리게 강의 도중에 나가지 말고 책 받아서 수업 들어라


결국 진기와 민호는 실랑이를 벌이느라 수업시간에 약 10분 늦게 들어갔다. 전공 수업은 작은 강의실에서 진행돼 수업에 늦게 들어오면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진기와 민호도 시선집중을 피할 수 는 없었다. 특히 학생들에게 관심 많은 교수님은 진기의 이름을 콕 집어 불렀다. ‘이진기. 4학년이 코 앞인데 아직까지 인생이 여유로운가봐?’ 진기는 자신에게 몰린 눈빛들이 부담스러워 빨리 자리에 앉으려고 빈 좌석을 살펴봤다. 진기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종현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사랑하던 시절 자신을 바라보던 눈망울과 하나 달라진 게 없는 종현의 눈빛에 진기는 다시 슬퍼졌다.

이진기

진기는 자신을 부르는 교수님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빨리 앉아서 198p 읽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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