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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전체글ll조회 654l

짧게, 여러번. 나를 관통했던 여자들에 대하여. - 1

이번 겨울, 불쑥. 학창시절 알고 지냈던 한 여자애가 떠오른다.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까 몸도 마음도 채 크지 못하던 초등학생 시절. 고작 몇 번 오고가며 만났던 여자애. 하나로 묶은 머리는 항상 단정했고, 드러난 이마는 하얗고 깨끗했던 애. 공부도 제법 잘 하고, 발표도 열심이었던 애. 체육도 미술도 음악도, 뭐 하나 빠짐 없이 잘났으나. 단 하나. 지독하게 가난했던 애. 그 단 하나의 이유때문에 학급에서 왕따를 당하고, 혼자 다녔던 여자애. 나는 요즘 종종 그 애 생각을 한다. 

너, 잘 살고 있어?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고, 희미한 웃음만 떠오르는 그 여자애가 무슨 이유로 떠올랐는지는 나도 알 길이 없다.

너무 가난한 탓에 수학여행도 못 왔던 애. 그것도 모르고 나는 너에게 미주알 고주알, 수학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벌려 놓았었지. 강원도로 가는 버스에 끝끝내 나타나지 않은 그 애가 궁금했으나, 나는 못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왕따, 왜 자꾸 챙겨줘? 친구의 물음이 따갑게 가슴을 후벼팠으나 나는 내색 조차 않았다. 2박 3일 들뜬 여행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왜 그 애가 살던 곳을 가보고 싶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여기였던가. 따닥 따닥 붙어있는 어두운 빌라촌을 헤집던 나는, 마침내 그 애의 집을 발견한다. 그 애의 집, 이라기 보다는 쭈구려 앉은 그 애를 본게 맞겠다. 울고 있는지, 숨을 죽여 꺽꺽거리던 작은 몸은 나를 발견하더니 멍해진다. 인사를 하지도, 도망을 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만 본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던 우리는, 나의 뜀박질에 의해 다시금 멀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한 겨울에도 철지난 얇은 가을 옷을 입고 있었으나 항상 깔끔했던 그 애의 옷은 다 찢어져 헤져 있었고, 늘상 곱게 올려 묶었던 머리도 엉망이었다. 수학여행이라고 이것 저것 챙겨준 옷들을 두껍게 껴 입고 있던 나는, 몇 달을 졸라서 얻어낸 비싼 잠바가 부끄러워져 집에 오는 길에 조금 울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멀어질 줄 알았으면, 너랑 뭐라도 더 해볼 걸 그랬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도 골똘히 생각한다. 그 애 이름이 뭐더라.... 연수? 현수? 지연? 아니야, 다 아닌데. 그러다가 신호등 건너편에 있는 롯데리아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래, 그 애. 나한테 햄버거를 사줬더랬지. 또 한번 불쑥, 기억이 차고 들어온다.

가는 길이 겹치는 하교길에 몇 번인가, 내가 먹던 불량식품을 그 애한테도 줬었다. 나만 먹기 민망해서. 단지 그 이유 뿐이었다. 그 애가 좋다거나, 불쌍하다거나. 그런 깊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처음에는 한사코 거부하던 애는, 내 주머니에서 나온 천원짜리 몇 장을 보고는. 너 부자구나? 그랬다. 퍽 웃기지도 않는 얘기지. 부자라니. 우리집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근데, 이거 오늘 다 써도 돼. 그 말에 아이는 해사하게 웃었던 것 같다. 그래, 그 웃음. 진짜 예뻤잖아.

그렇게 우리는 친구... 라기에는 부족한, 하교길 메이트 정도가 됐다. 몇 번을 가던 길을 공유하던 그 애와 나는 제법 말이 잘 통했다. 그 애는 목소리도 예뻤고, 말 하는 투도 예뻤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 애는 다소 고양된 목소리로 나에게 햄버거집에 가자고 했다. 돈이 어디서 나서 저러나, 의구심이 들었으나 나는 잠자코 그 애의 손에 이끌려 시장길 초입에 있는 단 하나 뿐인 햄버거 집에 들어갔다. 나를 자리에 앉힌 그 애는 가방을 뒤적여 과자각을 꺼냈다. 그게 뭐야? 내 질문에 그 애는 자랑스럽게 뒷면을 보여준다. 아주 작은 글씨로, 당첨이 되면 데리버거 세트를 준다는....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것만 같던 이벤트였다. 이거, 내가 당첨 돼서. 그리고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달려간다. 점원조차 생소하다는 듯이 다 찢어져있는 과자각을 바라본다. 나는 조금 부끄러워지려던 찰라에, 그 애가 햄버거를 들고 나에게 온다. 하나 뿐인 세트를 나에게 밀어준 그 애는 아주 자랑스러운 얼굴로 나를 물끄럼- 쳐다봤다. 너 먹어.

염치는 없으나 눈치는 있던 나는 그 애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햄버거를 반으로 나누어 먹었다. 소스 맛이 강하게 나던 작은 햄버거를 둘이서 맛있게 나눠먹었던 기억이, 10년이나 더 지난 지금에서야 갑작스레 스친다. 그 과자각을 발견하고, 당첨이 되어 날 듯이 기뻤을 마음. 그리고는 이내 내 얼굴을 떠올리고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내어주던 그 작은 마음. 나는 아직도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 하겠는걸. 

여지껏 평생 잊고 살다가, 지금에서야 이렇게나 자세하게 떠오를건 뭐람. 그게 못내 미안했던 걸까. 덕분에 요즘 나는, 그만한 나이의 작은 여자애들이 웃으며 지나가는 걸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으로 질질 끌려 되돌아온다. 너, 잘 살고 있니? 어디에다가 대고 외쳐야 할 지도 몰라 그저 이 곳에 대고 묻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너가 잘 살고 있느냐고. 

나는 너와 성별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의 사랑을 지나쳤던 것 같아. 넌 어떻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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