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교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괜히 일찍 나온 건가 싶으면서도 어젯밤 태형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 잘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있을 거야, 계속.'
그 애는 왜 필요없는 말을 해서 사람을 놀래키는 건지.
어디 앉을 곳이 없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어제 들려보지 못했던 별관이 떠올랐다.
누구도 별관에 대해서는 얘기를 해주지 않아서 내가 직접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계단을 내려와 본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선 옆에 바로 세워져 있는 별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나갔다.
산을 깎아 만들었다던 남학교는 좋은 경치와 멋진 건물로 많은 민심을 가져왔었다.
이 건물을 다 누가 세운건데, 땅을 뺏긴 조선인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지은 건물이 바로 이 학교다.
하긴, 누군들 알까. 이 멋진 경치에, 건물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그들의 피눈물을 직시하지 못한다.
잠겨 있을 줄 알았던 별관은 다행이 열려 있었다. 별관 안은 그야 말로 또다른 예술이었다.
자연을 좋아한다는 교장이 정성껏 꾸민 별관 중앙은 각종 화초로 구비되어 있었고 바닥 또한 나무바닥이 아닌 대리석이었다.
밖이 훤히 보이는 통유리에 샹들리에까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곳을 고작 별관이라 지칭한다니.
이곳 사람들의 생각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아름답게 가꾸어진 화초들을 구경하던 찰나, 입구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호랑이, 그러니까 코타로우가 들어왔다.
코타로우는 주위를 둘러보다 화초 속에 숨어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아, 들켰다.
저 애에게 잘못 걸리면 모든 것이 힘들어진다는 것은 느낌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코타로우는 계속해서 나를 주시했다. 코타로우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파고들자,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화초 속을 나와버리고야 말았다.
"말해."
"뭐, 뭐를."
"여기에 숨어있는 이유."
아, 그 이유.
"그, 그러니까 아침 일찍 교실에 가있으려는데 문이 잠겨 있어서……."
"숨어있는 이유."
"수, 숨어있는 이유가……."
"……."
"무서워서……."
"뭐?"
"……그 쪽이 무서워서."
분명 나이가 같을텐데,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쓰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지 코타로우가 더욱더 삐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도 신경쓰인다.
나는 대리석 바닥을 바라보며 손을 꼼지락 거렸고, 내 행동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코타로우는 다시금 내게 말을 걸었다.
"단추 제대로 잠가."
"네?"
"단추."
"아, 다, 단추."
더듬거리며 풀어 놓은 첫 번째 단추를 잠그자 코타로우는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코타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저래 참 불편한 아이같았다.
같은 반, 옆자리면서 오늘이 첫 대화라니. 나는 애꿎은 단추만 괴롭히다가 별관을 획 나와버렸다.
앞으로는 아침마다 별관에 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소오조오.
윤기는 창조라 적혀있는 동아리 실 문 앞에 섰다. 창조라, 이런 꽉 막힌 학교에서 창조를 꿈꾸다니.
누구의 생각인지 참 거창하다고 생각했다. 주머니에서 총괄 열쇠 꾸러미를 꺼내 소오조오 실의 잠겨 있는 문을 열었다.
이것저것 많이 꾸며져 있는 다른 동아리 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책꽂이에는 책 밖에 넣어져 있지 않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쓰레기통에 넣어져 있는 피묻은 셔츠 같은 것만이 있을 뿐이었다.
교장의 명령이었다. 조선인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부실이란 부실은 다 들어가 뒤져보라는 명령.
수십 개의 부들 중 조선인들로 이루어져 있는 부실은 이곳 밖에 없었다.
윤기는 작은 크기의 교실을 훑어보다 어느 낡은 책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빼내었다.
[유예]
바른 조선 글씨로 적혀있는 제목 밑에 세 사람의 이름이 보였다.
김남준, 김석진, 민윤기. 세명이 머리를 맞대어 엮은 첫 번째 시집이었다.
이게 아직도 존재했다니. 윤기는 떨리는 손으로 색이 바랜 시집 표면을 어루만졌다.
시집을 만들자 제안했던 남준과 책이란 걸 읽어본 적 없는 석진, 그리고 글을 읽을 줄 몰랐던 자신.
남준은 그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시와 글을 알려주고 가르쳐주며 도와주었었다.
우린 그렇게 작은 조각에 불과했던 꿈들을 이 시집에 적었다.
쉽게 시집에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윤기는 그것을 자신의 품 안에 넣고 서둘러 동아리 실을 나왔다.
그리곤 뛰었다. 새벽의 푸른 빛만 가득한 복도를 있는 힘껏 뛰었다.
뛰는 동안 공허한 무음이 아닌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윤기야!"
윤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천진한 아이처럼 웃고 있는 남준과 석진이 있었다.
*민사재판*
다음 편은 민윤기 과거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