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학교."
반쯤 풀어진 채로 헐렁하게 매달려 있어야 할 넥타이가 웬일로 바른 모양새였다. 그렇게 챙겨 다니라던 명찰도 제자리에 얌전히 꽂혀있었고 입이 닳도록 속상하다 말했던 얼굴의 상처는 여전했으나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다. 조금 비뚤어진 걸 봐선 누군가 붙여주기 보다는 평생 해본 적이 없다던 제가 직접 거울을 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것이 모두 단 하루만에 일어난 변화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유가 무엇이든, 타이밍이 한참을 빗나갔든 간에. 적어도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며칠 전까지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박지훈이 맞다면 그는 이 변화를 겪기까지 꽤 많은 고민들을 곱씹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성격에, 자존심에, 고집에. 결코 쉽지 않았을 그 결정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학교 가자니까. 여주야.
우리는 삼천 개가 넘는 하루를 함께 지새운 팔 년지기 친구였다. 어릴 적부터 서로가 곁에 있는 게 당연한 사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랬던 우리는 그 중에서 가장 가까운 몇 개월 동안 서로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속삭이며 남부럽지 않은 연인이 되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관계의 끝을 부정하려 애쓰는 이도 저도 아닌, 차마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멍청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지난 사흘의 공백을 무시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등교를 하자며 손을 내밀고 있는 박지훈도, 그토록 돌아오길 바랐던 예전의 모습으로 절 찾아왔음에도 차마 알았다는 대답을 할 수 없는 나도. 우리는 둘 사이에 있었던 많은 일들이 사라지기라도 바라는 듯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야, 박지훈."
"늦겠다. 너 지각하는 거 싫어하잖아."
우리는 어제 헤어졌다. 이유는 아마, 많은 게 달라진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 정도일 테다.
* * *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한 달 남짓한 시간이었다. 우린 남부럽지 않은 서로의 연인이었으며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오랜 친구였다. 아니,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믿고 싶었던 게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박지훈을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그 착각의 여파가 생각보다 거셌다는 것. 정확한 사실은 그게 전부일 테다. 문제의 사건이 발생하던 날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는 하루였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지 않아 빗질을 했고 박지훈의 손을 잡고 등교하는 일상. 수업 시간엔 졸린 눈을 비비며 잠과의 사투를 벌였고 점심 시간에는 급식 메뉴가 별로라는 이유로 건너뛴 채 매점으로 향했던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 문제라면 그 다음이었을까. 유난히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을 수가 없어 보건실에 다녀오겠다며 손을 들고 교실을 나온 게 잘못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곧비로 보건실로 향할 것이지, 성치도 않은 몸을 이끌고 괜한 오지랖을 부리며 보건실의 바로 옆에 위치한 학생 휴게실에서 들리는 둔탁한 파열음을 무시하지 못한 채 조금 열린 문틈으로 그 사이를 바라보았던 것일까.
"뭐야?"
문틈 사이로 마주친 서늘한 눈빛에 절로 몸이 굳어버렸다. 야, 너 뭐냐고. 눈이 마주치던 순간 보건실로 도망쳤어야 하는 건데. 하다 못해 고개라도 떨어뜨려 시선을 피하기라도 했어야 하는데. 정작 너무 놀란 탓인지 생각이 가득찬 머릿속과 다르게 몸은 손끝 하나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급한 욕설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언젠가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차가 달려오는데 피하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무기력한 주인공의 모습이. 이해할 수 없던 그 장면을 몸소 체험하게 되자 헛웃음이 터졌다. 예상치 못한 일에서 오는 두려움이란 사람을 이렇게나 멍청하게 만드는구나. 휴게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동시에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한 남학생이 잔뜩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파악 안 되냐?"
"…뭐?"
"똑같은 꼴 나고 싶은 거 아니면 기회 줄 때 나가라고."
명찰을 봐선 우리보다 두 학년이나 아래인데. 신입생이 벌써 담배나 물고 있다니. 어디서 그런 깡이 나왔는진 모르겠지만 순간 내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절대 겁을 먹지 말 것. 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휴게실의 안쪽에서 여전히 멈추지 않고 들리는 파열음과 욕설들에 심장이 뛰어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서 눈을 치뜨자 남학생은 코웃음을 치며 내 손목을 잡아 나를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등교하는 길에 삐었던 발목에 거센 손길이 더해지자 나는 저도 모르게 중심을 잃었고 그가 이끄는 쪽으로 나앉게 되었다. 졸지에 패대기까지 쳐진 셈이었다. 사라지지 않은 현기증에 이마를 짚으며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는데.
"김여주. 괜찮아?"
저급한 욕설들이 난무하던 그 상황 속에서 나는 왜 네 얼굴을 마주봐야만 했을까. 야, 얘 네가 이렇게 만들었냐? 방금 전까지 나를 패대기치던 녀석이 박지훈의 말에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밖에서 지켜보고 있길래. 나름의 변호를 해대는 녀석을 깡그리 무시한 채 박지훈이 나를 일으켰다.
"여주야. 네가 왜 여깄냐니까."
"지훈아."
"어."
"그거 내가 해야 할 말 아니야?"
"잠깐만, 여주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는지 박지훈이 내 손목을 붙잡아왔다. 순간 이곳으로 날 밀치듯 거칠게 몰아세우던, 지금은 바로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남학생의 손길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박지훈의 손이 내 손목에 닿자마자 두 상황이 겹쳐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화들짝 놀라며 팔을 빼내자 박지훈은 내게로 다가오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티가 날 정도로 멈칫하는 모습에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난 그제서야 휴게실에 있던 모든 시선들이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거 아니야."
"야, 박지훈."
"내가 나중에 다 설명할게. 어?"
"너라면."
"……."
"네가 나라면 그 말 믿을 수 있을 거 같아?"
매캐한 담배 연기를 오래 맡고 있었던 탓인지 뒤늦게 기침이 났다. 눈물이 고이는 건 낯설고도 불쾌한 그 냄새에 눈이 따가웠기 때문일 거다. 절대 이 상황에 대한 억울함도, 박지훈에 대한 배신감도, 내가 믿고 있던 것들에 대한 혼란 때문도 아닐 것이라 믿고 싶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참아가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두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지?"
"……."
"너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
"미안."
달갑지 않은 사과였다. 차라리 내 오해여도 좋으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며 박지훈이 내게 화라도 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생각보다도 훨씬 더 잔인했다.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일진이란 무리에 박지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 사실을 감쪽같이 숨겼다는 것. 오늘 이러한 우연이 겹치지 않았더라면 박지훈은 그 사실을 계속 숨기려 했을 거란 점.
"갈게.
등을 돌리지마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망이라도 치듯 휴게실의 문을 닫고 뛰쳐나갔다. 그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던 순간의 두려움. 그와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 지금껏 내가 좋아한다 말했던 남자 친구라니. 박지훈이 곧바로 뒤따라 나오기라도 했는지 휴게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지던 발자국 소리를 더 들을 수는 없었다. 깊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끝으로 수업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쳤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물을 슥슥 닦아내곤 무작정 박지훈의 반으로 향했다. 그다지 사교적인 편이 아니었기에 남자 반엔 들어갈 일도, 만날 사람도 없다 여겼던 내가 제 발로 그곳을 찾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시끌벅적한 교실 속에서 나는 언젠가 반장이라 들은 적이 있었던 그에게 박지훈과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다. 반장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입을 열었다.
"걔네 지금 담배 걸려서 교무실에 있을 텐데."
"…진짜?"
"처음 듣는 눈친 거 보면 그다지 친한 사이는."
반장의 말이 끊긴 건 그 아이의 뒤통수를 치며 등장한 또다른 남학생 덕분이었다. 모르면 입 좀 닫아라, 진짜. 쟤 박지훈 친구잖아. 정리가 되지 않는 상황에 어색하게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반장의 뒤통수를 치며 등장했던 그 아이의 말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특별히 마주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했다. 내가 원하지 않던 터라 박지훈은 제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한 적도 없었고 제 생각에 내가 불편하게 여길 것 같은 일들을 만들어주지 않은 것이었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자 그 아이는 내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끼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매낀한 콧대가 제법 부럽다는 생각이 들 즈음 그 아이가 입을 열었다. 이래도 나 기억 안 나? 정말로 본 적이 없는 얼굴인 것 같아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안 나면 어쩔 수 없지."
"……."
"그런데 너 박지훈이랑 사귄다며. 닳는다고 얼굴도 안 보여주던 여자친구란 사람이 김여주, 너라며."
"지훈이가 그런 말도 했었어?"
"너는 뭐 아는 게 하나도 없냐."
"…미안."
"나한테 사과할 필욘 없고. 그래서, 네가 우리 찾는 이유는 뭔데?"
그 아이는 나를 제 책상 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넌 박지훈 오면 뒈지겠다. 반장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로 말이다. 담배…. 박지훈의 친구들과 그것의 관계성을 내가 알아버린 것과 반장이 난처한 상황에 빠지기라도 한 듯 탄식을 내뱉는 게 서로 연관이 있다는 건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조금 있으면 쉬는 시간 끝나니까 빨리 말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면 얘기할 테니까. 대체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꺼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 아이의 교과서에 적힌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박우진? 제 이름이 들리자 박우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코웃음을 치는 듯 들리기도 했는데 그럴 법도 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러니까 박우진은 몇 년 전, 박지훈에게 큰 사고가 있었을 때 그 옆을 꾸준하게 지켜주었던 친구였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는데….
"그래서. 네가 우리 반까지 온 이유가 뭐냐고. 너네 뭔 일 있냐?"
"휴게실에서 지훈이 만났어."
"너 그거 오해야."
"나 아직 아무 말 안 했어. 그냥 만났다고만 했잖아."
"헤어지자 말하고도 남을 표정인데 거짓말을 잘도 한다."
박우진은 여전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마음을 척척 집어내는 솜씨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박지훈의 병문안을 가서 엉엉 울고만 있던 작년의 내게, 좋아하면 좋아한단 이야기를 하라며 나도 모르던 내 감정에 정의를 내린 것 역시 박우진이었다. 그랬던 그는 언제나처럼 흔들리고 있는 현재의 내 마음도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박지훈이 다른 여자와 있는 장면을 보는 게 나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일진은 내게 있어서 그런 존재였다. 정말 끔찍하고, 상상하기도 싫고, 잘못한 것도 없는 친구를 괴롭히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합리화를 해대는, 꿈에도 마주치기 싫은 존재들. 그런데 지훈이가. 박지훈이 그 사이에 끼어있었을 줄이야. 다시 생각해봐도 믿기지 않는 순간들이었다. 야, 김여주. 박우진이 다시금 나를 불렀다. 괜히 박우진의 얼굴을 보자 머리만 더 복잡한 것 같아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거 오해라고 했어. 네가 본 게 전부가 아니니까 함부로."
"편 들어주는 거 봐라. 야, 나 감동 받았어."
박우진의 말을 막은 건 수도 없이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였다.
"여주야. 네가 생각하는 거 다 맞는데. 나한테도 변명할 기회 한 번만 주라."
"……."
"그것도 싫어?"
"미안."
"……."
"우리 헤어지자."
쉬는 시간의 끝마침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다시금 박지훈을 두고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왔고 어제 일어난 일은 이것이 전부였다. 나는 뒤섞인 진실을 알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알던 박지훈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좋았을까. 우리는 어제, 이렇게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