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성
14
完
원래 세계로 돌아갈거라는 민형의 말에 자리에도 앉지 못한 채 셋은 놀란듯 그를 쳐다만 볼 뿐이었다. 재현은 당황한 말투로 민형에게 다시 물었다. 자신이 지금 오자마자 들은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재현은 확인했다.
"내 마음 바뀌기 전에 이렇게 말부터 먼저 할게."
"민형아,"
"미안, 유타. 여주 보내줘."
유타는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그녀를 돌려보내는 순간 자신은 무너질 거라 생각한 유타였다. 이미 수년간 그래왔고, 다시 그 왕국이 얼음장같이 변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너무나도 따뜻해진 왕국에 새 생명들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고작 3일. 그녀가 온 지 3일 째 되던 날의 일이었다.
"나도 따라갈게."
"유타."
"더이상 오지 않을거란거 알고 있었어. 그럴거라면, 나도 하자드에 따라갈게."
"......."
"여주가 없는 곳에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아."
여주, 라는 이름을 내뱉자마자 울음 섞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늘 냉정히 그를 바라보던 태일도 안쓰럽다는듯 유타를 바라 볼 뿐이었다. 잠자코 지켜보던 재현이 민형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가버리면, 이 곳은 어떻게 되는거지?"
"사라질거야. 우리가 가버린다 하더라도, 도영이가 그렇게 할거야."
"무슨 소리야?"
"날 없애고 싶겠지. 그리고 다시 내가 하자드에 뛰어들거라는걸 걘 너무 잘알고 있어."
민형은 그 언젠가 재현에게 와달라 부탁했던 것처럼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믿는다는 눈빛이었다. 부탁한다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재현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갑작스러웠고, 시간은 부족하기만 했다.
"나도 갈게."
"........."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해보자."
"........."
"이 곳에 있는 우리들이 살아있을지 혹시 알아?"
떨리는 목소리, 늘 정확하던 태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 순간 만큼은, 그 선택만큼은 자신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이러나 저러나 여주는 없어지고, 구름성의 문은 닫힐거라면. 나의 처음을 열어 준 그녀를 따라 가는 것이 맞을 거라 생각했다.
"재현아, 너도 가자."
"............"
"여주 좋아하잖아, 너."
"......... 아니, 난 안갈거야."
"............"
재현은 완고했다. 분명 그녀는 다시 이 곳에 오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재현은 이 곳에 남길 원했다. 자기를 위해 지어 준 그 왕국에서, 오지 않을 그녀를 기다리면서. 늙지도 죽지도 않는 이 곳에서, 도영이 하나씩 쓰러뜨릴 이 공간 속 재현은 꿋꿋이 남길 원했다. 그것이 마지막, 재현이 바라는 마지막이었다.
"도영이는 내가 시간을 벌게. 너희는 얼른 그곳에 가."
"그래도,"
"민형아."
"..........."
"내일 눈을 뜨면, 여주한테 인사할 시간도 없을 것 같아."
"..........."
"전해줘, 여주한테."
'그냥, 그냥 서로 좀 많이 좋아했어요.'
"많이 좋아한다고, 내가."
+
Last day, Cloud Castle.
결국 날은 밝아왔다. 아침부터 각국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유타, 태일은 하자드로 떠나기 위한 채비를 마치고 일찍이 황국에 도착한 상태였다. 민형도 긴장되는 듯 계속해서 사소한 무언가도 놓치지 않고 확인했다. 재현은 평소와 같은 아침을 맞았다. 늘 그랬듯 아침부터 차를 마셨고, 멀리 보이는 황국을 바라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반짝거리던 황국이, 오늘따라 슬프게만 비추어졌다. 재현의 비서 하늘이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이곳에 남으시겠다 들었습니다. 정말, 그리하실건가요?"
"...... 나라도 여기에 있고 싶어요. 그녀의 상상 모든 것이 깃들어있던 이 곳의 문이 닫히는 그 순간도 함께하고 싶어요."
".........."
"그녀를 비롯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어야죠. 그녀는 몰라도, 나라도 알고 있어야죠."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신 재현이 찻잔을 놓으며 하늘을 향해 웃어보였다. 어느 때보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도영이에게 가볼까요? 그에게도 오늘은 특별한 날일테니."
그녀와 그들을 지키려는 재현의 움직임도 시작되었다.
=
"어?!"
"여주야!"
황자가 도착했다는 말에 급히 준비하고 밖에 나갔더니, 그 말고도 유타 태일이 날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유타는 날 보자마자 뛰어왔다. 어쩌면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다 싶어, 날 안은 그의 등을 토닥였다. 과거의 나도 이랬을까. 그를 보며 이렇게 달래줬을까.
"이제 가요."
"... 근데 셋이 가는거에요?"
"따라 가기로 했어. 여주 너랑 같이 있을거야."
"유타, 그건 ..."
"괜찮아."
"......."
"정말 괜찮아."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만 같은 그의 목소리에 태일을 쳐다보니, 태일도 아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더 말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민형의 손을 잡고 하자드로 가는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이젠 정말 구름성과 작별해야 할 시간이었다.
+
"왕자님, 재현 님 오셨습니다."
"........ 무슨 일로."
"창조주님에 대해 논의하실, ..."
"......... 바쁘다 전해."
도영은 마리의 말을 자르자마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앞으로 2시간. 2시간만 지나면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터였다. 재현 정도는 무시해도 좋았다. 조용히 창 밖 하자드의 문이 열리는 모습을 보려는데, 뒷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이면 돼. 내 말 들어, 김도영."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 지 어느정도, 아니 충분히 파악하고 있던 도영이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아직 완벽하게 마음까지 독해져있는 자신이 아니었기에, 재현이 말하면 말할수록 약해질 거란걸 잘 알고 있었다. 제발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길 바랐다. 그래야 모든게 생각한대로 흘러갈 수 있으니까.
"여주 그냥 보내줘."
그래, 넌 그 말을 할거란걸 알고 있었다.
"그게 여주를 위한거야."
"그럼 나는."
"......."
"나를 위한건 뭔데?"
울분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늘 그녀에게 있어서 1순위는 이민형이었으니까, 그 1순위를 그가 아닌 나로 바꾸고 싶다는데 그건 여주를 위한게 아니라고 해버리면. 나를 위해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라는건지. 외로움을 느낄 시간도 없이 이 순간 하나만을 보며 살아왔다. 난 이민형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꿈 속에서 깨어나도 이민형은 여주를 만날 수 있다. 걔는 실재하니까. 나같은 허상이 아니니까. 잊으면 그만인, 그런 존재가 아니니까.
"말릴 생각 하지마."
".... 도영아, 안돼."
"너도 그렇잖아. 너도 원하잖아."
그렇다 말해. 한 명이라도, 제발 한 명이라도 이 쪽을 봐 줘.
"아니."
제발.
"난 여주가 민형이랑 있을 때 행복하다면, 그걸로 만족할거야."
날 혼자 두지 마.
+
"저게 하자드예요?"
"이제 내려갈거에요. 괜찮겠어요?"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본 하자드의 모습에 살짝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난 도대체 저기에 어떻게 들어간거지?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어떡해야 하는거지. 괜찮겠냐는 말에 아무 답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보던 민형이 내 손을 잡아왔다.
"같이 갈거니까. 걱정마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전용기의 문이 열렸다. 있는 힘껏 그의 손을 잡고 문에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자마자 무언가에 휩싸이며 계속해서 밑으로 떨어졌다. 이미 민형의 손을 놓친 지는 오래였다. 곧 바닥에 떨어지려는 찰나에 누군가 허리를 잡아 올렸다. 고개를 돌리니 도영, 바로 그였다. 차가우면서도 어느 날 새벽에 봤던 그 슬픈 얼굴로 그는 말했다.
"너는 날 버리지 말아줘."
'먹구름이야, 누나.'
먹구름. 그의 모습에서 정말 러러가 말했던 대로 먹구름이 보이기 시작한 때였다.
갑자기 검은 물이 밀려오더니 곧이어 도영과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물에 당황하자, 도영은 고개를 기울여 내 얼굴을 확인하곤 씩 웃어보였다.
"곧 하자드의 문이 닫힐거야. 그러면, 이제 나는 너의 첫번째가 될 수 있어."
민형에게 들은 그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난 그를 사악하다고 생각했을거다. 근데 알고 있으니까. 그가 이러는 이유를.
"....... 이게 원하던거야?"
"생각났어? 이제 존댓말 안하네."
"이게 당신이 원하던거냐고. 이 곳의 문이 닫히고, 모두가 다 사라지는게?"
도영은 내 말에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한번만이라도, 너의 첫번째가 되고싶어."
"그게 다야."
"그거면 돼."
그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를 듣는데,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에 대한 기억은 이제 하나도 없다. 그에 대해 떠오르는 기억은 단 한가지도 없었다. 민형의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그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아한다는 그 말을 듣고 싶었어."
그가 바라는 그 한 마디면, 모든게 끝이 나는걸까. 뭐에 홀린듯 그가 바라던 그 말을 한 자씩 읊조리기 시작했다.
"... 나는,"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직전, 머릿속에서 무언가 빠르게 책장이 넘어가듯 기억나기 시작했다.
'도영아, 왜 자꾸 나보러 안 와?'
'응?'
'난 너가 좋은데. 정말 좋은데, 왜 안오는거냐구.'
'이건 너만 주는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된다?'
'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거. 이런건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는거랬어.'
'낮엔 파란 하늘인데 해가 질 때 쯤이면 분홍색이 돼. 하늘색은 분홍색을 좋아하나봐.'
'그건 무슨 의미야?'
'음, 나는 하늘색을 좋아하니까 도영이가 좋다는 뜻이야!'
'좋아해, 도영아.'
'난 너를 좋아해.'
그에 대한 사소한 기억들 하나하나, 이 곳에서 있었던 일 하나하나가 내 머릿속에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기억이 나자마자 목 끝 직전까지 밀려들어오던 검은 물이 점점 밑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도영은 당황한 눈치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며 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기억, 기억 나."
"... 여주야."
정말 하나씩, 기억들이 생생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도영이를 보았을 때, 그리고 마지막 내게 입맞췄을 때까지. 기억 난다는 말과 함께 그 다음으로 내가 그에게 건넨 말은, 그 언젠가 그와 나눴던 대화 중 일부의 이야기였다. 과거에도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던, 그리고 다시 기억 난 지금도 진심을 담아 다시 얘기하는 말이었다.
"널 좋아했어."
"........."
"물론, 그 때도 지금도."
".........."
"널 좋아해."
여전히 날 붙잡은 채 흔들리는 눈빛으로 날 보는 그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잊지 못할 기억이었는데, 그깟 주문 때문에 왜 잊어버렸던걸까. 그리고 그런 주문을 건 넌 얼마나 괴로웠을까. 한참동안 우리 둘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 때 추억이 떠올랐다. 혹시 그 일이 발화점이 된 건 아닐까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
"... 화관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해."
도영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날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풀었다. 무언가 탁, 하고 풀린 느낌과 함께 뒤에서부터 강력한 무언가에 휩쓸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라지던 하자드의 문을 도영이 다시 열어버렸다. 거의 끝나가던 그 주문을, 도영 스스로가 풀어버렸다.
"김여주!!!"
그리고 그 뒤편 너머로 민형이 날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도영이 날 잡아버린 순간, 민형과 태일 유타는 하자드 안으로 휩쓸려 간 모양이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내 앞에 있는 도영이 사라질까 겁이 났다. 점점 뒤로 가는 몸을 억지로 버티며 섰다. 도영에 손을 뻗었다. 있는 힘껏 뻗어도 닿지가 않았다.
"도영아, 이대로 날 보내지마. 이러지 마, 제발."
"...... 내가 어리석었어."
"아니니까, 그런거 아니니까!!!"
"여주야, 그만."
결국 민형이 날 붙잡았다. 뒤에서 날 안은 채로 귓가에 말했다. 이렇게 보내기엔 미안한게 너무 많았다. 이렇게 끝나는건 그에게 못할 짓이라 생각했다. 그런 날 보며 도영이 잔잔히 미소지었다. 늘 날 보며 짓던 그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온 도영이었다. 보면 너무나도 편해지는 그 미소였다. 지금은, 근데 지금은.
"잘가, 사랑하는 여주야."
"도영아, 도영아!!!!!"
내 기억 속 너무나도 아픈 미소가 되어버렸다.
+
햇빛이 사라졌다. 나뭇잎이 떨어진다. 꽃이 시든다. 바람도 불지 않는다.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황폐하다. 재현은 이미 사라졌는지 흔적 조차 남지 않았다.
너는 너가 있던 그 세계로 돌아갔다. 나는 아직 너의 상상 속, 너의 세계 속.
"마법도 안되네."
있는 힘껏 마법을 써 봐도 주인 없는 이 곳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다. 허탈한 웃음이 났다. 그래, 아무도 없는 너의 세계는.
"나 하나로 족해."
힘없이 황폐한 이 곳에 쓰러졌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원하던 말을 들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때의 기억들을 말했다. 정말 이만하면 됐는데, 충분한데 왜 우는건지 모르겠다. 그냥 너 생각만 났다. 너로 가득찼다.
'잘가, 사랑하는 여주야.'
그 말 한마디 하는게 뭐 그리 어려워서.
"... 잘가, 도영아."
마지막으로 맺혀있던 눈물이 살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를 생각하며 흘렸던 마지막 눈물이었다.
+
"여주야, 여주야."
"........... 민형이야?"
"정신이 좀 들어?"
도영이를 애타게 외치다 쓰러진건지, 난 민형이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있었다. 겨우 눈을 뜨고 일어나, 주위를 바라보는데 온통 새하얀 곳이었다. 유타와 태일은 어디로 간건지 보이질 않았다.
"유타랑 태일이는?"
"... 나도 정신차리니까 없었어."
"그럼 여기는 어디야?"
"선택의 문. 너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어."
선택의 문이라 말하는 민형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민형이는 일어나 내 손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그대로 손을 잡고 민형이를 뒤따라가니, 온통 하얀색의 공간 속 하늘색 문 하나가 놓여져있었다.
"그럼 이제 이 문 열면,"
"... 응. 돌아가는거야."
"우리가 있던 곳으로."
그 말은 곧 한동안 민형과는 볼 수 없게 된다는 뜻이었다. 한동안은 물론, 아마 평생동안. 내게 남은 평생은 너무나도 짧을텐데, 만날 수 있을까? 속으로 질문했지만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모르길 바라니까.
"마지막으로 나 안아줄래?"
말해 무엇하냐는 표정으로 민형이는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다가 온 민형이를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우린 알고 있었다.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좋아하는지를, 아끼는지를. 그러다 먼저 민형이 운을 뗐다.
"우리 만난 적이 있었을까?"
"... 글쎄."
"꿈 속 사람들은 자기가 언젠가 한번 쯤은 만났던, 혹은 만날 사람들이래."
"그래?"
"난 널 만났던 것만 같아."
".........."
"그냥 그렇게 느껴져. 앞으로 만날 사이가 아닌, 만났던 사이같아."
민형의 이야기를 듣다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도 날 내려다보며 내 볼을 어루어만진다. 꿈이 아닌 것만 같다. 너무 생생해서, 아닌 것 같아.
"고마워. 날 첫 왕자님으로 만들어줘서."
"........."
"약속 지킬게."
".......우리 만날 수 있을까?"
"걱정마. 시간이 걸려도 너한테 갈게."
말을 마치자마자 민형이와 눈을 맞추며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를 돌리며 이 모든 순간들을 만들어준 그 누군가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잊지 않게 해달라고, 기억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들을 다시 보게 해달라고.
2018, 12. 한국.
"문 아나도 그 책 읽어봤어?"
"아, 이 책이요?"
"요즘 그 책 난리던데."
"... 좋던데요. 책 내용."
"그래? 나도 읽어나볼까. 아, 이제 방송 들어가지? 수고해."
인사를 마친 태일이 걸어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한번 보곤 들고 있던 책의 제목을 조용히 읊었다. '구름성'. 오늘 방송의 첫 소식으로 나갈 책이었다. 김여주. 작가 이름을 보던 태일이 씩 웃으며 힘차게 스튜디오의 문을 열었다.
"방송 10초 전입니다!"
"........ 시한부 작가."
씁쓸한 표정으로 눈으로 프롬프터를 읽던 태일이 온에어 빨간 불이 켜지자마자 눈빛을 바꿨다. 낯설지 않은 이름, 그리고 보고싶던 얼굴인 그녀의 소식을 전했다.
"시한부 작가로 알려진 김여주 작가가 오늘 캐나다에 도착했습니다. 김작가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인터뷰를 가질 예정입니다. 김작가는 자신이 겪은 꿈 속 이야기를 생생히 풀어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특유의 몽환적인 필체로 세계에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첫 소식, 이태용 기자가 전합니다."
"김여주 작가에 대한 관심도가 뜨겁습니다. 책 출간 2주 만에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들을 알리고 싶었다는 김여주 작가는 ..."
평소같았으면 바로 다음 소식에 대해 검토했을 태일이지만, 오늘만큼은 첫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화면으로 보이는 여주의 얼굴에 태일은 잔잔한 미소를 띄었다.
"꿈 속보다 여기서 더 예쁘네."
그의 나름대로 그녀를 찾은 순간이었다.
2018, 12. Osaka.
"くもじょう?" (구름성?)
[雲城]. 유타는 그 책을 한 번 들고 책장을 쭉 훑다 다시 내려놓았다. 분량도 많고 고작 꿈 판타지로 범벅인 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은 안들어서였다. 책을 놓고 고개를 든 유타 눈 안으로 책의 작가 소개가 들어왔다. 김여주.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잊기엔 너무나도 아픈 이름이었다.
"誰だっけ?" (누구였지?)
분명 자신과 관련이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녀를 지나가다 만났나? 그건 아니었다. 그녀는 한국인인걸. 그럼 난 그녀를 어디서 본거지?
"くもじょう."
놓았던 그 책을 유타는 다시 들었다. 구름성. 희미해진 기억이 다시 시작되려는 때였다.
2018, 12. Canada.
"........"
어제 호텔 방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다 못 푼 채로, 책에 대해 얘기하는 방송들을 찾아봤다. "시한부 타이틀" 을 걸고 책을 출간하기로 마음 먹었던건 모두 그 날 그 꿈에서 깬 순간부터였다. 내가 기억하고 싶었고, 또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그를 위한 것이었다. 책을 쓰고 발간하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그 시간이 하나같이 너무 소중하고 간절했다. 이렇게 방송에도 나오고, 캐나다까지 인터뷰도 왔는데. 아직 그는 날 못찾은 것 같았다.
"여주씨, 10분 뒤에 나오시면 돼요!"
"아, 네!"
이 몸 상태로 이러기까지 절대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야위어가고, 이젠 제대로 서있는 것 조차 버거울 때가 많았다. 그래도 이 순간이 인생의 끝자락이라면.
"Hello, Nice to meet you."
"Nice to meet you."
절대 포기할 수는 없었다.
"I heard you wanted to find someone through this book." (듣기로는 책을 통해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서요?)
인터뷰의 첫 질문을 받자마자 웃음이 지어졌다. 한국에서 인터뷰를 하면서도 듣지 못한 질문 중 하나였다. 누군가 이 질문을 해주길 바라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I'm looking for a man in my dream."
"Oh, really?"
꿈 속에 나온 남자. 그 사람을 찾아요.
그 말을 하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에 그 사람을 찾는다고 말하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 인터뷰를 보게 된다면, 그가 한걸음에 달려와 날 찾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는 늘 받던 질문들이라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때쯤, 꿈 속 남자를 찾는다는 내 말이 인상깊었는지 인터뷰어가 다시 그 이야길 꺼냈다.
"What would you say if you found him?"
"..........."
거기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순간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냥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지 어떤 말을 건넨다는건 생각하지 못했다. 몇 초간 뜸을 들이다, 그가 내 눈 앞에 있는 상상을 하며 말을 꺼냈다.
"I'll say, "I waited for you.""
기다렸어. 그 한마디 밖에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엄마와 근처에 산책을 하러 나갔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공원에 아기를 데리고 나온 부부들이 많이 보였다. 아기가 꺄르르 웃으며 걸어가는걸 보던 엄마가 운을 뗐다.
"사실 여기 처음 온 게 아니야."
"여기?"
"응. 말했잖아, 아빠 출장 때문에 캐나다 놀러갔었다고."
"... 그게 여기였나."
엄마의 시선을 따라 나도 아기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뭘 발견한듯 엄마가 저걸 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거는 아직도 하고 있네?"
"뭔데?"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기다란 밧줄을 나무에 묶어놓곤 그림들을 하나씩 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치원생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흥미가 생겨 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다양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지금 서있는 이 공원을 그린 것부터, 가족들을 그린 그림, 너무도 아끼는 장난감을 그린 그림까지. 주제가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다양한 그림들이 줄을 따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림들을 하나씩 보다, 어떤 그림 하나에 잊고 있던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넌 또 하늘색 그림이니?"
".... 어?"
"어릴 때도 여기 그림들 보면서 하늘색 그림 앞에 멈춰 섰으면서."
"내가 그랬었나."
"그랬다니까는. 엄마 저기 카페가서 커피 좀 사올게. 잠깐 있어."
"응, 여기 있을게."
엄마의 말에 점점 그 추억이 떠오르던 찰나, 그림의 주인으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내 옆으로 달려와 눈을 반짝였다. 내 그림에 관심 있어요? 하는 눈빛으로 칭찬해달라는 눈빛이었다.
[Mark Brown, 6]
"Are you Mark?"
"Yes, mine."
"Nice drawing, Mark. Very good. I'm impressed."
그 눈빛을 받은 만큼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자, 마크는 기쁜듯 활짝 웃어보이며 그림을 걸고 있던 선생님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마도 칭찬받았다는걸 선생님에게 제일 먼저 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바로 그 때, 떠오르던 추억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15 years ago, CANADA.
자세한 기억은 안나지만, 어렴풋이 그 때의 잔상들은 떠오른다. 한적했던 공원, 기타 소리, 가느다란 밧줄에 걸려있던 아이들의 그림들. 그 때의 난 어떤 그리믈 보고 푹 빠져있었다. 온통 하늘빛의 그림. 엄마의 옷자락을 끌며 저것 좀 봐달라 애원했었다.
"엄마, 저거 봐봐!"
"어머, 그림 전시하네!"
"이거 예뻐."
"우리 여주는 하늘색 정말 좋아하네?"
하늘 빛 성 뒤로 그려진 무지개. 그 그림을 빤히 쳐다보던 내 옆으로 누가 걸어와 말을 걸었다.
"This is my picture. Do you like it?"
뭐라고 하는 지도 모른 채, 아는 영어라곤 하이! 하나 밖에 없던 그 때의 나는 나보다 몇 살은 더 많아 보이던 그 남자애에게 외쳤다.
"Hi!"
"........ Hi."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은 그 남자아이는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걸 눈치를 챘던건지 서투른 한국어로 말해왔다.
"이거, 좋아해?"
"응! 좋아!"
"어, 그럼 줄게."
처음보는 애한테 정성스럽게 그렸을 그림을 준다니. 그 당시의 나는 몰랐을거다. 그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아무 마음 없이 준 건 아니었을 거란 걸.
"아, 내 이름은 ... 이야."
사실 그 때 그 아이의 이름은 기억 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그저 날 보며 웃어주던 미소와, 눈빛을 기억한다. 그 때 풍겼던 가을 냄새, 살짝 추웠던 날씨 정도.
"이름이 뭐야?"
"여주! 김여주!"
"여주, 이름 예쁘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불렀던 목소리까지.
"김여주."
"............!"
갑자기 뒤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에 바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낯선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여기서 몸을 돌리면, 보일 얼굴은. 그 얼굴은.
"..........."
"...... 맞네, 여주."
눈을 떴던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찾았던 그 얼굴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다. 살짝은 변한 분위기에, 늘 입던 황자의 옷이 아닌 갈색의 코트를 입은 그 사람은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았다. 내가 찾던 이민형이었다.
"기다렸잖아."
"......."
"기다렸단 말야."
그리고 보자마자 내가 한 말은 기다렸다는 말이었다. 역시, 그 말부터 나왔다.
그 다음 내가 한 행동은 날 찾아준 그에게 달려가 안기는 일이었다.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이 세상 어딘가 너가 있을거라 믿어왔다. 그리고 언젠가 넌 날 찾아올거라 믿어왔다.
그리고, 넌 이 곳에 있었고, 결국 날 찾았다. 이제보니 그에게서 그 아이가 느껴지는 것 같다. 무의식 속 잠들어있던 그 때의 잔상들을 그가 떠올리게 만든다. 날 불러주는 모습에서, 목소리에서, 그리고 다시 돌아온 이 가을 냄새로부터.
"미안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완벽하게 그와 맞닿아있는 것 같다.
"아니, 괜찮아. 이제라도 왔으면 됐어."
내게 주어진 마지막을 그와 같이 할 수 있다면. 그 끝자락을 잡고 그와 걸을 수 있다면.
"보고싶었어."
지금이 마지막이어도 좋다. 지금 눈감더라도 후회는 없다. 다른 누구도 모를 오직 그들과 나의 이야기를 봤으니까.
"응, 나도."
처음과 끝이 같은 원이기에,
새로운 끝은 다른 시작이라 했다.
끝이 훤히 보이는 시작이지만, 두려울 건 없다. 그와 있으면 맞설 수 있겠다 생각했는걸.
구름성 이후, 현실 속 만난 그와 또 같은 꿈을 꿀거다. 두 번 다시 잊히질 않을 그런 이야기를 또 써갈거다.
"해줄 이야기가 많아."
"너보다 더 많을걸?"
"아니, 오늘 하루를 다 써도 모자를텐데?"
환히 웃는 그와 내 사이 속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오던 순간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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