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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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을 몸에 돌돌 감은 느낌을 좋아했다. 부드러운 감촉을 자랑하는 이불을 사서 몸에 돌돌 감고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불은 부드럽기도 하고 두껍기도 해야 했다. 색은 노란색. 그걸 덮는 것 말고 몸에 감고 잠을 잤다. 여름에도 얇은 이불 말고 그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잤다. 그건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노란 이불을 꽁꽁 두르고 잠을 잤다. 태풍이 올 거란 소식에 창문에 엑스자로 테이프도 붙이고 잠을 잤다. 당연히 잠갔다. 잠갔는데. 녀석이 들어왔다. 창문으로.
왜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나. 깊게 자다가도 섬뜩한 느낌에 눈이 번쩍 떠질 때. 예를 들어 공포 영화를 보고 잔 날이라던가. 여튼 딱 그 느낌이었다. 눈이 번쩍 떠지면서 잠을 깼다. 밖에서 난리를 쳐대던 태풍 탓인 줄 알았다. 창문이 번쩍거리고 천둥소리도 들렸으니.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은 건 창문 앞에서 아른대는 사람 형체를 본 순간이었다. 놀라서 숨도 못 쉬고 그 형체를 바라보고 있자 녀석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정신이 잠깐 들었을 때 든 생각은 좀 더 비싼 자취방을 구해야했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겠지만. 보안이 좀 더 튼튼하고 제대로 된 경비원이 있는 그런 집으로. 지금 떠올리니 너무 놀라 핀트가 나간 모양이다. 생각한 거 하고는.
가까스로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찾으려는데 하필이면 그 날이 딱 그 날이었다. 잘 때 옆에 핸드폰을 두면 깊은 잠을 잘 수 없으니 되도록이면 핸드폰을 멀리 두고 수면을 취하라는 뭐 그런 걸 실천한 날. 하던 대로 옆에 두고 잘 것이지. 썩을. 침대 옆 탁자에 올린 손에 잡히는 건 수면등 밖에 없었다. 뭐라도 해보고자 수면등을 켰다. 어둡고 은은한 빛에도 녀석은 짜증을 냈다.
“꺼!!”
덕분에 난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내 방에 미친 변태 새끼가 들어왔다는 거. 마음속으로 셋까지 센 다음 밖에서 치는 천둥보다 큰 비명을 내지르려고 했다. 둘까지 세었을 때 녀석은 무드등을 단번에 꺼버리고는 침대 위로 왔다. 아무 소리도 없이. 내 노란 이불 위로 녀석이 올라탔다.
“찾았다.”
찾긴 뭘 찾아. 이 미친놈아. 자취한 지 한 달 만에 집에 변태 새끼가 들어왔다는 걸 들키면 그 즉시 다시 정호석이랑 같이 살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이대로 있자니 말 그대로 큰일 날 것 같고. 2층말고 3층으로 가야했어. 계단 한 층 더 오르내리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나마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자는 습관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불 덕분에 쉽게 무언갈 하지는 못할 거란 안심이 들자 나름대로 머리가 차분해졌다.
“저기... 이거 범죄거든요?”
녀석이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섭긴 했다. 무섭긴 한데 언뜻 언뜻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무섭다기 보단 좀 귀엽게 생긴 듯했다. 요새는 범죄자들이 멀쩡하게 생긴 걸 넘어 잘생겼나보다. 미친. 잘생긴 건 잘생긴 거고. 범죄는 범죄다. 넌 이제 인생 종쳤다. 변태 새꺄. 머리를 베개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녀석의 이마에 내 머리를 갖다 박았다.
으. 골 울려. 내 이마와 부딪힌 충격으로 녀석의 힘이 풀린 사이 재빨리 침대 밖으로 나와 엄청난 속도로 112를 눌렀다. 내 생에 이렇게 빨리 움직인 적이 있었나. 행동을 빨리한 만큼 말은 더 빨리 나왔다.
“여기 어떤 변태 새끼가 집 안으로 들어왔거든요? 가택 침입?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무서워 죽겠으니까 빨리 좀 와주세요. 아저씨이!!!!!”
우는 건지 투정을 부리는 건지 정의 내리지 못할 정도의 말투로 내가 처한 상황을 알렸다. 울상을 지으며 신고하는 동안 녀석은 날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난 녀석을 향해 미친 소리를 내뱉었다.
“지금이라도 무서워서 도망가기만 해봐. 내가 너 콩밥 먹이고 만다.”
정작 무서운 건 난데. 어쨌든 경찰이 빨리 와주길 바라며 놈과 대치중인 나는 나도 모르게 현관문 바로 앞에 서있었다. 이건 살기 위한 본능이었다. 녀석은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녀석은 키가 컸고 체격도 다부졌다. 힘으로 밀어붙이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녀석이 세발자국만 더 걸으면 현관문을 열고 아파트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리라 마음먹었다.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간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니. 녀석에게 콩밥을 먹이기 전에 일단 내가 살아야지. 남자가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아 진짜 누구신데 저한테 이러세요!!”
무서움에 발을 방방 구르며 눈을 감고 외쳤다. 진짜 지금이라도 소릴 질러야하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걸까. 자취를 반대하던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 조심, 또 조심한다고 했던 맹세를 잊은 지 너무 오래됐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잠금 장치 하나 더 달아 놓을 걸. 저번에 사려고 했던 호신 용품도 좀 제 때 사고.
“누구냐고?”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나는 오만상을 쓰며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멀쩡하게 생겨가지구 저한테 왜 그러세요오...”
“기억을 못할 수도 있다더니 진짜군.”
어둠 속에서 남자의 조소는 선명히 보였다. 기억을 못해? 내가? 대체 뭘? 남자가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손이 조금씩 떨려와 주먹을 꽉 쥐었다. 생긴 걸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더니 남자가 내뱉는 말은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는 돤전히 딴 판이었다.
“여기선 나를 악마라고 부르던데.”
“악마?”
악마라고? 시커멓게 생기긴 했는데 누가 봐도 사람 형체였다. 갑자기 긴장이 탁 풀렸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변태 새끼인 줄 알았는데 그냥 미친놈이었어. 이웃 주민 중에 정신 관련 장애를 가진 분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경찰이 오면 알아서 가족에게 데려다주려나.
“저기……. 집이 어디세요?"
나름 용기를 내어 물은 질문에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3층?”
“전에 같이 살았잖아.”
“같이 살아요? 우리가?”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전개인데.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자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 마음에 조그만 평화가 찾아왔다. 잘 견뎠어. 장하다. 정여주.
“나 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갑자기 남자는 자신의 얼굴을 내 눈 바로 앞으로 들이댔다. 숨이 턱 막혔다.
“맞는데.”
남자는 혼자 읊조렸다. 목소리가 슬프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남자가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처연했다.
“맞는데. 왜 기억을 못하지?”
녀석의 독백은 이어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잠시후, 초인종이 울렸다.
남자는 생각보다 순순히 경찰차를 탔다. 여전히 좀 슬픈 눈을 하고서.
***
눈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난 입을 떡 벌렸다. 학교를 가기 위해 문을 연 순간 다시 마주한 남자였다. 그 변태 과대망상증 환자.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얼굴을 구겼다. 가까이서 본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벽에 손을 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눈만은 정확하게 날 보고 있었다. 내 눈동자를 꿰뚫어보는 듯한 그 눈빛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며칠 전에 정신 병원에 입원시킨 남자가 다시 우리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남자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시 해.”
남자가 내뿜는 이상한 분위기에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 바닥으로 치닫 듯이 어두운 모습이었다. 그래도 남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던 건 그 날 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두려움에 어두워 보이는 게 아니라 남자가 우울해보여서. 날 보는 눈에 많은 감정이 담긴 것 같았다. 뒷걸음질 치는 나를 따라 남자는 안으로 들어오며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하자고."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허락도 받았으니 다시 해보자.”
“허락? 나 허락 안했는데?”
“우선 잠 좀 자고.”
남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침대로 가 노란 이불 위에 누웠다. 남자는 제 집보다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돌아버리겠네. 그 날 경찰서에서 그렇게 흐지부지 끝내는 게 아니었다. 증거가 있든 없든 무조건 강경하게 나갔어야 했어. 아니다. 그 정신 병원 전화번호가 뭐였더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든 순간 남자가 눈을 팍 뜨더니 내 핸드폰을 움켜쥐고는 부쉈다. 부쉈어. 핸드폰을. 한 손으로. 내 입이 또 한 번 떡하고 벌어졌다. 남자는 별 거 아닌 듯 다시 잠을 청했다. 남자가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누우며 몸을 뒤척이는 그 때, 깨달았다. 남자가 몸을 움직일 때 마다 묘한 느낌이 몸을 스쳤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그 느낌의 원인을 찾은 순간, 발 밑에서부터 소름이 쫙 끼쳐왔다. 두려움에 남자가 있는 침대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없다. 없어. 저 남자. 그림자가 없다고.
감사합니다♥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