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에로스가
사진 터치 후 저장하세요 “전역 축하한다. 15 복학생?” 그렇다고 곱게 나왔다는 건 아니었고. “에이씨, 제노한테 주소 다시 보내줘야겠네.” “제노?” 영 꼴은 줄만 알았던 여주가 제노의 이름에 도영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바로 옆에 서 있는 수진도 간신히 주워들을 만한 목소리 크기였다. “내가.. 려 그랬는데.. 짜증나..” “여주야, 너 취했지.” “응? 응.. 조금?” “더 마실 수 있겠어?” “그러엄.” “아이고, 됐다 야. 어차피 취한 사람 이 시간에 받아주는 카페 같은 거 없으니까. 칵테일 바나 가서 앉아있자. 그리로 부르게.” 응 그래, 여주야 너 혼자 걸을 수 있지?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찬바람을 맞으니 코 앞을 왔다갔다 하던 알코올향이 가시며 천천히 정신이 깨는 모양이었다. *** “있잖아, 제노씨 첫인상이 되게 잘생겼었다?” 가만히 있으면 좀 쎄한가 싶은 냉한 얼굴인데 내가 말을 걸면 사르르 풀려서 웃음 짓는 게 꼭 커다란 강아지 같았어. 말을 하는데 사람이 눈밭같은거야. 이렇게 하면 이 사람에게 예의를 차릴 수 있겠지? 이렇게 하면 무례하지 않게 물어볼 수 있겠지? 하나 하나 조심히 말하는 게 꼭 눈 가득 쌓인 들판을 살포시 걷는 것 같은 느낌. 수진이랑 김도영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빤해서 거기까지 말하고 웃고 말았다. 이 인간이 취해서는 왜 또 소설을 쓰고 있지 싶은거지 너네 지금. 근데 진짜 그랬단 말이야. 좀 봐줘. 직업병이야.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지금은 어려워. 뭐라고 단정지어 말하기가 참 그래. 사람이란 게 다 그렇잖아.” “그래도 범주라는 게 있잖아. 이 정도 사람은 친구, 이 정도 되면 연애 대상. 이런 거.” “나는.. 그런 거 안 만들어봐서 모르겠어.” 연애는 진작에 관둬서 주저 앉았거든. 애들은 다 자기 짝 손 붙잡고 저기 결승선까지 가서 야 우리 사귀어 하고 소리치는데 나는 벤치도 없이 길 한 가운데에 앉아서 어어 그래 하고 손 흔드는 사람이었단 말이야. 솔직히 좀, 귀찮아서. 물론 이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수진이에게 등짝이라도 얻어 맞을지 모르니까.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하는 말이 김도영의 귀로 들어가 다시 입이나 손을 통해 이제노에게 전달될 것을. 그 말은 어쩌면 내가 한 말보다 달게 포장되어 들어갈 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더 이상 이제노라는 사람과 나의 관계가 그저 친구 사이라는 말로는 포장할 수조차 없어졌다는 것을. 그런데 때로는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게 더 쉬워서,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가 되어버렸다. “어떤 사람이야? 그 이제노라는 사람. 너랑 맺는 그 사회적 관계를 떼어놓고 얘기했을 때. 객관적일 필요는 없고 그냥 사람을 이야기 할 때.” 수진이가 꽤나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서 나는 내 앞에 있는 숏을 한잔 마시며 타임아웃 시간을 가졌다. 가벼운 질의응답 같았던 술집에서의 대화와 달리 이 자리는 꼭 청문회 같았다. 간은 다 보았으니 이제 제대로 된 요리를 한 번 비춰봐라, 하는 것 같았다. 알코올이 싸하고도 뜨겁게 내 몸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좋은 사람이야. 사람이 좋다 라는 말도 잘 어울리고. 그런데 착한 사람은 아니야. 굽혀줄 것처럼 굴면서 사실은 내 의견 반, 그 사람 의견 반 그 선을 딱 지키면서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생각하는 걸 말해.” 그리고 가끔씩은 소름 돋을 때가 있어. 내가 점심을 먹을까말까 고민하고 있으면 훤히 알고 있다는 것 마냥 밥 먹었느냐고 물어보고, 입이 허전하다 싶어서 손을 뻗으면 그 사람이 준 사탕이며 초콜릿이 내 손에 잡히고, 아 이거 낯익은데 하고 무언갈 쳐다보고 있으면 사실은 이제노 그 사람이 언젠간 내게 스치듯이 말해줬던거야. 내가 주저 앉아있으니까, 이제노는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내 옆에 쪼그려 앉아서 하고, 보여주고 싶은 걸 다 내 앞으로 끌어오고, 내게 필요한 걸 다 가져다 주는거야. 연애를 하려면 저기 저 선까지 가서 우리 연애할까요? 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양 저 선 너머 있는 사람들이랑 똑같이, 아니 그 사람들보다 더하게 굴어. 퇴고도 안되는 말들을 줄줄 뱉었다. 진심인 듯 아닌 듯 속마음인 듯 아닌 듯 알게 모르게 편집된 말들을 그렇게 풀어내었다. 취중진담이라도 하려면 본인 앞에서 하는 게 나을테지 하는 생각에 스스로 절제하게 되는 그 아슬아슬함이 있었다. 마냥 이제노의 편을 들 것처럼 굴던 김도영도 이제는 제 앞의 칵테일을 비우며 나에게 귀를 기울여주었다. 수진이 역시 나의 이야기를 그저 술자리 안주거리 삼는 아이는 아니었다. 아, 이 사이에서 취해도 괜찮겠다 싶어서 나는 웨이터를 불러 또 다른 칵테일을 주문했다. 괜찮겠느냐고 묻는 수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오늘은 마셔도 좋을 거 같아서. 말을 조금 더 많이 하고 싶어서. ‘형 나 근처 도착했는데’ ‘정확히 어느 건물인지’ ‘모르겠어서.’ 이제노의 연락이 미리보기 화면에 가득차는 걸 본 도영이 그저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나 핸드폰을 귓가에 대었다. 적어도 가게 앞까지는 마중 나가있을 생각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취해버린 여주의 시선이 본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고 웃음을 지어보였다. 쟤 저렇게 취하는 것도 오랜만에 보네. 제노야 너 성공하겠다. “너 그러지마라, 내가 지금 왜 마시는데.” 눈치는 또 빨라서. 이 자리에 곧 누가 도착하는지 알아차린 여주가 힘이 풀린 손으로 도영에게 삿대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제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어 제노야! 하며 나가는 도영이 섭섭한지 갑자기 서러워져서 옆에 앉은 수진이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나는, 나는 있지, 연애 할 줄도 모르고, 해봐야 한 달 이상을 못 가는 사람인데 로 시작한 하소연은 끝날 때쯤 보니 줏대 없이 주제가 이리 저리 휩쓸리는 취중 진담을 줄줄줄 쏟고 있었다. 김도영 이 새끼가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하면서 꿍실꿍실 도영을 씹어대기도 했다. 이제노는 무슨,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연애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보겠다고 말 한 것부터, 필시 군대를 다녀왔을텐데도 불구하고 깔끔한 가치관이나 언행까지. 저건 내 주변에서 보지 못한 류의 인간이라고. 거기까지 말하니 수진이 인상을 썼다. “너 지금 취했다고 사람을 너무 후하게 평가하는 거 아니야?” “아냐 절대애..” “야 너 지금 아까랑 말이 다르거든. 어느 쪽이 진심인데.” 여주가 한참 동안을 고민하듯이 우움.. 하고 말을 끌더니 해맑게 웃으며 둘 다!를 외쳤다. 수진이 취한 사람이랑은 정상적인 대화를 포기해야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 사이 여주가 2차 주정을 시작했다. “사실 요정이나 반인반신, 아니면 그냥 신 이런건가? 그런걸까 수진아?” 그랬더니 수진이는 여주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놓으며 판타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며 구박했다. 직업인 걸 어떡해... 하고 의기소침해 말소리를 줄이다가도 손가락을 꼽아가며 나름의 논리를 펼쳤다. “보통 그렇게 잘생기고 호감형인 사람은 판타지 영화에서 주인공이 아니란 말이야. 해리포터에 케드릭 디고리처럼. 아 트와일라잇은 제외야. 뱀파이어들은 다 잘생겼으니까. 근데 제노씨는 손이 따듯하니까 뱀파이어는 아니야.” 어이구. 수진이 기가 차서 웃었다. 환상에 빠져 사는 사람은 아니라면서 그래도 나름의 동경은 계속 가슴속에 품고 살았나 싶었다. 이제 정말 한계인 듯 꾸벅꾸벅 졸며 내려가던 여주의 고개가 갑자기 무엇을 떠올린 사람처럼 퍼득 들어올려졌다. “그 사람은, 에로스 같아.” 그리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수진이 급하게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이 조용한 바 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주목할 정도로 큰 소리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야, 김여주. 정신 차려 봐. 너 갔냐? 깨워보려고 여주의 편으로 한껏 웅크려진 수진의 어깨 위로 그림자가 졌다.
사진 터치 후 저장하세요 “안녕하세요. 이제노라고 합니다.” 살짝 웃으며 인사를 해 놓고도 눈은 여주만 바라보고 있었다. 수진이 여주의 어깨를 한 팔로 그러쥐고는 마주 인사했다. 그리고 눈짓으로 상황을 대충 보이며 어설프게 웃었다. *** 눈을 뜨자, 나는 내 자취방에 곱게 누워있었고, 침대 옆 작업용 책상에는 내가 언젠가 숙취해소를 위해 마신다고 말했던 초코우유가 쪽지를 붙인 채 서 있었다. ‘당신에게, 에로스가.’ 여주는 급하게 핸드폰을 찾아 들어 밀린 연락들을 쭉 내려보았다. 영양가 없는 연락들 속에 눈에 띄는 이제노 라는 이름. 일어나면 연락 달라는 그 메시지를 읽고도 여주는 엄지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씹었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지. 다행 아닌 다행은 취해서 헤롱거린 게 아니라 아예 뻗어버린 덕에 말 실수를 할 일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니지, 내가 말 실수를 안 했으면 어떻게 제노 씨가 에로스라는 말을. 여주의 머릿속이 한 껏 복잡해졌다.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기 직전까지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다시 한 번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 ‘저 일어났어요.’ 1 ‘어제 데려다주신거 제노씨에요?ㅠㅠ’ ‘언제 오셨어요..’ 첫 메시지를 보내고 두 번째 메시지를 타이핑 하는 동안 확인하는 이 속도를.. 오늘만큼은 원망하고 싶었다.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핸드폰을 침대 위에 올려두고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을 뒤로 하고 옆으로 다시 누운채로 연락을 계속했다.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면, 속이 너무 쓰려서 우유로 손이 뻗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겉면에 붙어있던 노란색 포스트잇은 책장 한 구석에 옮겨 붙었다.
“우유는 마셨어요?” 제노의 회사가 있다는 건물 입구에 기대어 서 있던 여주에게 인사말 대신에 약간의 웃음기를 섞인 말이 건네졌다. 아스팔트 바닥을 툭툭 차며 기다리고 있던 여주가 화들짝 놀라 올려다보자 일을 막 마친 차림의 이제노가 웃고 있었다. “아, 네. 감사해요 진짜. 어제 내가 너무 많이 마셔서.” “괜찮아요. 대신 오늘 저녁 사준다면서요. 나 비싼 거 얻어 먹을 건데?” 아 뭐에요 저 입금 된 건 또 어떻게 알고. 제노가 이끈 분위기를 여주가 따라서 장난스럽게 풀며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아직도 안 가고 있어?” 제노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툭 튀어나오더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이쪽은 누구..?” “안녕하세요. 제노씨 친구 김여주라고 합니다.” 아아 이 분이 그. 무언가 안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인 그는 여주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제노가 친구사이 치고 살뜰하게 챙긴다고 했더니 친구 사이로 남기엔 아까운 사람이라 그랬나봐요.” “형,” “우유는 마셨어요?” 제노의 회사가 있다는 건물 입구에 기대어 서 있던 여주에게 인사말 대신에 약간의 웃음기를 섞인 말이 건네졌다. 아스팔트 바닥을 툭툭 차며 기다리고 있던 여주가 화들짝 놀라 올려다보자 일을 막 마친 차림의 이제노가 웃고 있었다. “아, 네. 감사해요 진짜. 어제 내가 너무 많이 마셔서.” “괜찮아요. 대신 오늘 저녁 사준다면서요. 나 비싼 거 얻어 먹을 건데?” 아 뭐에요 저 입금 된 건 또 어떻게 알고. 제노가 이끈 분위기를 여주가 따라서 장난스럽게 풀며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아직도 안 가고 있어?” 제노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툭 튀어나오더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이쪽은 누구..?” “안녕하세요. 제노씨 친구 김여주라고 합니다.” 아아 이 분이 그. 무언가 안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인 그는 여주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제노가 친구사이 치고 살뜰하게 챙긴다고 했더니 친구 사이로 남기엔 아까운 사람이라 그랬나봐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