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한 사람이 고통 받으며 생기는 또 다른 어떤 것이 가식이나 거짓이라면 왕 욱은 결코 자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건조하고 메마르고 또 비틀려 본래를 잊은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살아남고 싶었고 지켜내고 싶었다. 태어나면서 짊어져야했던 기대와 수많은 압박들로부터 아끼고 소중해하는 모든 것들을 위해서 그는 기꺼이 인생의 상당 부분을 거짓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 욱은 관대해졌고 자상해졌고 또 예민해져야했다. 그는 끝끝내 좋은 사람, 자상한 사람으로 보여야했으니까.
“욱 황자님은 다정하시고 또 친절하시잖아요. 그래서 참 다행이에요. 기억을 잃고 만난 사람이 황자님이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 여인 사이에 놓인 한 여자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해맑고 유쾌하기만 할 것 같은 어린 얼굴은 때때로 진실하고 깊은 것을 보이기도 했다. 그 말간 얼굴이 사랑스러웠고 애절했으며 또 다른 어떠한 비틀림을 가져왔다. 몰랐으면 하고 어쩌면 알아줬으면 했다. 순진무구한 얼굴이 안심되기도 혹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왕 욱은 언제나 그렇듯 아닌 척 등을 돌렸고 해 수는 그를 보며 해맑게 미소했다. 등 뒤로 언뜻 보이는 그 미소에 그가 받쳐왔던 평생의 감정과 생각들이 가라앉았다.
1.
“황자님과 공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해 수…. 라고 했나?”
“예, 해 수이옵니다.”
“부인께서는 원체 몸이 약하시니 잘 보살펴야한다.”
해 수는 예의바르게 미소 지으며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잠시 해 수가 나간 방문을 힐끗거리다 곧 신경을 꺼버렸다. 왕 욱과 해 수 사이의 거리는 고작 그 정도였다. 그에게 해 수는 부인의 동생이었고, 해 수에게 그는 언니의 남편이었다. 어색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친밀해야 할 사이는 아니었다. 둘은 실제로도 그랬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처음이라 예의를 차렸나, 기억을 온전했기에 그랬겠지. 그 때 조금 더 친절하게 대했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 해 수가 기억을 잃기 전에 친해 질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 더 잘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때도 예의바르게 등을 돌리고 해맑게 웃었겠지.
“못 보던 아이인데…. 오라버니께서 부르셨습니까?”
“부인의 동생이다. 부인이 몸이 워낙 약하셔서 옆에서 보필하라고 불렀어.”
“그런가요. 그다지 똑 부러지지 않을 듯한데.”
“연화 너도 옆에서 많이 도와주거라. 먼 곳에서 왔으니 적응하기 힘들 거야.”
연화는 마시던 찻잔을 잠시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곧 생각을 마쳤는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살펴줘야겠죠. 조근거리는 말씨가 문득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북쪽으로 쫓겨나듯 도망치던 어느 날. 그때 그 시절. 그 순간. 그때부터 왕 욱은 언제나 추운 겨울이었다. 그래서 다가온 봄볕을 눈치 채지 못했다. 추운 하루에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이며 급급히 언 것을 녹이려고 애쓰다 보면 어느새 봄이 온 것을 알지 못 한다. 그래서 결국 봄이 여름이 되고 뜨거운 햇살을 피어낼 쯤에 그제야 제 옆에 다가온 여름을 눈치 챘다. 살포시 다가왔던 봄을 깨닫지 못한 채로.
2.
“언니, 이 것 보세요. 꽃이 피고 있어요.”
“그래, 참 곱구나.”
“그래도 언니만 하던가요.”
왕 욱은 때때로 해 수와 부인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 길을 걷거나,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을 때. 순하게 웃는 해 수와 평소보다 생기가 도는 부인이 함께 있었다. 꽃을 볼 때도 있었고, 하늘을 볼 때도 있었고, 같이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눌 때도 있었다. 평범한 일상적인 그 모습은 꽤 보기 좋아 욱은 문득 두 여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해 준 것이 없어 항상 미안하기 만한 부인이었는데. 아닌 척 그리웠을 가족을 만나 조금 더 행복했으면 했다. 욱은 둘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부인을 부축하는 해 수와 힐끗 눈이 마주쳤다. 지나가다 만나면 인사를 주고받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주칠 때 마다 욱은 조금 당황해 어색하게 웃었다. 해 수는 가볍게 웃어 눈인사를 하며 부인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욱은 조금 멍한 기분으로 방 안으로 사라진 두 사람을 바라보다, 문득, 아주 우연히, 두 사람이 들어간 방문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행복해 보이는 여자들이 비쳤다…….
왕 욱은 새삼 다시 깨달았다. 추운 그 시절을 벗어나 이제 비로소 평화롭다는 것을. 조금은 더 행복하다는 것을. 계절이 푸르른 어느 날 그는 온 몸으로 원했던 순간을 맛 볼 수 있었다.
3.
“다가오지 마세요!”
“수야!”
“부인, 무슨 일입니까?”
“해 수가…. 수가 오늘 머리를 다쳤는데. 기억을 잃은 모양입니다.”
욱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방은 굳게 닫힌 문처럼 고집스러웠다. 항상 창백했던 부인의 얼굴에는 깊은 근심과 걱정이 서려있었다. 욱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준 뒤 문을 열었다. 더 정확하게는 문을, 두려운 무지 속에 갇힌 해 수를, 그 깊은 껍질을 깨고 들어갔다. 어둡던 방 안에 빛이 들어왔고 해 수는 수그렸던 고개를 들었다. 매번 어색하게 지나가만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섞여 들어갔다. 수는 욱을 처음 봤고 욱 또한 다른 수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 알고 있던 해 수와 지금 두려움에 두 눈을 보는 해 수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건 어떤 사실이나, 추론, 생각과 경험을 벗어난 직감이었다. 욱은 저 해 수가 다른 해 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야. 겁내지 마라.”
“….”
“내가 널 이리 데려왔으니. 끝까지 도와줄 것이다.”
“….”
“이렇게 피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힘내야지.”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그는 그대로 가만히 서있었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고 또 생각하지 못 한 순간에 마주한다. 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해 수는 그 손을 잡았다. 그건 불어오는 파란, 순탄치 못한 인생, 눈물겨운 인연. 그리고 그것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4.
“욱 황자님. 고려는 밤이 참 예뻐요. 별도 많고.”
“꼭 다른 곳에서 온 것처럼 말하는 구나.”
“….아, 그, 기억을 잃었잖아요. 하하. 그래서 다 새롭고 그렇죠!”
해 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반짝이는 눈 속에 별들이 떠오르고 검은 밤하늘이 눈동자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욱은 그 눈동자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고려의 밤이지만 해 수는 더 특별한 것을 보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욱은 해 수의 눈을 보고 다시 하늘 보고, 수의 얼굴을 보다 다시 별들을 보았다. 그녀를 보면 특별하고 신비로운 세상에 떨어진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똑같은 세상에 그녀는 유독 튀었다. 그래서 같은 곳을 보다보면 욱은 그녀와 같은 곳을 보지 않을까. 생각했다.
“곧 있으면 다시 익숙해 질 거예요. 저 해 수잖아요.”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고려의 하늘은 변하지 않으니까.”
“정말…. 변하지 않고 이대로라면 참 좋겠어요.”
해 수는 아련하고 애절하고 또 그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을 잃은 그녀가 대체 무엇이 그리울까. 욱은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해 수 또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려의 하늘은 오래도록 그대로였고 둘 사이의 침묵도, 감정도, 그래서 말 할 수 없었던 비밀까지 모두 다 그대로였다.
5.
“욱 황자님, 황자님은 안 쉬세요? 은이 황자님은 맨날 놀던데.”
“은이야 아직 어려서 귀엽지.”
“에이, 그 정도면 다 커서 징그럽죠!”
“하하, 그러냐? 그럼 수야. 오늘 나와 함께 쉬러가자.”
“엑, 아니 저 황자님, 저 다미원에 일이!”
수는 들고 있던 옷가지를 놓고 욱의 손을 잡고 뛰었다. 아직 길이 익숙하지 않은 황궁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 수는 한 편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맞잡은 큰 손이, 스쳐지나 맴도는 향기가, 그립고 따뜻하고 또 너무 반가워서 해 수는 뒤 돌지 않았다. 그래서 수는 망설임 없이 욱을 따라갔다. 포근한 햇살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들 그리고 서로 피해 갈 곳 없이 다가오는 감정들. 수는 욱이 황궁 뒤쪽으로 가는 것을 눈치 챘다. 갈수록 궁녀들도 없어지고 지나가는 호위들도 눈에 띠게 사라졌다.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듯 먼지가 쌓인 별채와 큰 나무 그리고 무성한 풀잎들이 살랑거리는 어느 곳에 욱과 수가 멈춰 섰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예요?”
“낙원이란다.”
“네?”
“예전에 황궁에서 학문을 배우다가 때때로 놀고 싶을 때 이곳으로 도망쳐서 놀았단다. 처음에는 나 혼자 왔고 그 다음에는 백아와 은이도 함께 왔지. 그러고 보니 정이와는 여기에 많이 온 적이 없구나.”
“아아, 그러니까 어린 시절 황자님들 비밀기지셨구나!”
“비밀….”
“앗,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냥 혼잣말.”
수는 큰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었다. 그 순간 욱은 수와 무척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엇갈리는 듯한…. 욱은 멍하니 바람에 흩날리는 수를 바라보았다. 점점 어른스러워지는 표정은 무엇을 떠올리는 듯 아련하고 그리워졌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그리고 그 아래 해 수. 무성한 풀잎 사이로 고개를 든 수수한 풀꽃들. 왕 욱은 진정한 낙원이 어디일지 알 수 있었다.
6.
“오라버니, 돌아가셔야해요. 이곳에 계셔야 할 오라버니가 아니잖습니까.”
“날이 춥다. 들어가자 구나.”
“들어가자고요? 어디로요? 어디로 가잔 말씀이세요. 어디를 가도 날은 춥고, 시녀와 시종들은 동상에 걸려 생살을 잘라야합니다. 황후님은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계세요. 여기서 도대체 어디로 가야합니까?”
온 몸을 싸매고 또 싸매도 추운 바람은 몸을 타고 뼈 속으로 들어왔다. 항상 부드럽고 강인하기만 했던 연화는 눈물을 삼키며 애원했다.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그래서 왕 욱의 죄악이었고 결국엔 나락이었다. 수많은 시녀와 시종들이 동상에 걸렸고 급히 온 길에 황후님의 몸은 점점 더 약해져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멈춰 설 곳이 없었다. 밤이든 낮이든 눈앞이 시커먼 것은 마찬가지였고 추운 것은 변하지 않았다. 북으로 또 북으로. 왕 욱을 둘러싼 모든 것은 엉망이 되어갔다.
“오라버니.”
“…….그래, 가자. 돌아가자. 연화야 다시 송악으로 가자.”
처음부터 모든 것이 엉망은 아니었을 텐데. 엉망 이 전에 그래도 온전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왕 욱은 그곳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추운 날씨에 몸이 얼고, 메마른 대지에 생이 황폐해 질 때에 그 모든 온전함은 사라져버렸다. 그는 몇 년을 지나서도, 돌아온 황궁에서도 그 온전했던 시절을 떠올리지 못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그는 자의든 타의든 경계선을 넘었고 그 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차가운 북으로 쫓겨나듯 도망치고 죽을 고비를 넘어 돌아왔을 때. 왕 욱은 서늘함을 넘어 따스한 사람이 되었다.
마치 추운 밤을 가로질러 찬란히 떠오르는 아침의 해처럼.
7.
“보고 싶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리웠다.”
“슬픈 일이 네요.”
“사랑한다.”
“하지만 이젠 아니셔야 할 겁니다.”
8.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왕 욱은 때때로 회상했다. 처음으로 원했던 건 진실한 사랑, 솔직한 마음, 자유로운 하루 같은 소소하고 인간적인 것들일지도 몰랐다.부인과 함께 있노라면 평화와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 길고 힘들고 험했던 모든 여정을 지나 얻은 한 조각의 평화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해 수와 있다면 어느 샌가 잊고 있던 자유와 즐거움 진정으로 원했던 것들 속에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는, 왕 욱은 태어나길 본디 그렇게 태어나서,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소소한 것들을 잠시 외면하고 인간적인 것들에게서 등을 돌려야만 했다. 순수하고 여리고 아름답고 곱다란 어느 한 저녁에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것처럼. 우린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것에 상처를 주고 다시 스스로 상처받고 그렇게. 다시 외면하고.
평생을
그리하여
그렇기 때문에
감히, 내가.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질문 하나에 수많은 갈등이 오갔다. 진실히 원했던 그 한가지와 평생을 원했던 한 가지. 왕 욱은 고민했고 갈등했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는 사실 메마른 사람이라 다정하지 못했고 겁이 많아 모든 것을 다 포기 할 수 없었다. 현명하다 생각했던 머리는 가장 단순한 선택을 했다. 반짝이고 빛나는 곳. 성자는 진실을 꿰뚫어보나 망자는 어리석으니.
왕 욱은 진실을 꿰뚫어 보면서도 어리석은 것을 선택했다.
“황제를, 그 자리를 원한다.”
그렇게 진실은 뒤로 사라지며 외면한 마음 사이로 해 수가 스쳐지나갔다. 간절히 원해 스쳐지나가다. 이것이 왕 욱과 해 수의 전부였다. 왕 욱의 전부였다. 볼썽사나운 끝말이었다.
9.
“황자님, 어디로 가십니까?”
“원한다면 갈 수 있느냐?”
“황자님이 원하신다면.”
“그렇다면 부디 낙원으로 가자.”
허나 말발굽은 감히 낙원에 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를 맴돌았다.
0.
그리하여 네가 없는 세상, 낙원은 어디에 있는가?
**
원래 이런 스타일로 글 안쓰는데 잘 썼으려나 모르겠다ㅠㅠ 다음에는 그냥 내 스타일대로 써올게! 혹시 뾰들 중에서 이런 실력이라도 괜찮다면 보고 싶은 커플이나, 글 있으면 써조! 나 완전 사약러라 요해, 원해, 백해, 은해, 백소, 연화수 다 안 가려! 그냥 원하는거 있으면 적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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