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 오래된 수틀 / 나희덕

한여름의 이야기를 한다
아기들은 계속 태어나고 있다고
응애응애 우는 울음소리는
조금씩은 닮아 있다
혼자서 태어난 셀 수 없는 아기들의 요람이
지구처럼 흔들린다
이제 정말 안녕이라는 듯이
4월의 눈이 내린다
당신의 혀끝에서 하양은 사라지고
낯익은 차가움이 남은 지금
- 4월이야기 / 하재연

당신을 알았고, 먼지처럼 들이마셨고
산 색깔이 변했습니다. 기적입니다
하지만 나는 산속에 없었기에 내게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이 손짓해도, 목이 쉬게 외쳐도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가는 길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닦아 놓았을 그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덤불로 가리어진 그 어디쯤, 길도 아닌 저 끝에서 당신은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요
다시는 기다리지도 부르지도 않겠지요 그 산을 다 덮은 덤불이 당신의 슬픔이겠지요
- 슬픈 빙하시대 1 中 / 허연

돌에 물을 준다
멈춘 것도 같고 늙어 가는 것도 같은
이 조용한 목마름에 물을 준다
이끼 품은 흙 한 덩이 옆으로 옮겨 온
너를 볼 때마다
너를 발견했던 물새우 투명한 그 강가의
밤이슬을 생각하며 내거 먼저 목말라
너에게 물을 준다
- 돌에 물을 준다 中 / 이선자

다시 감은 두 눈에 따라 들어온 너는 한낮을 지낸 꿈이요
내가 다시 잠들어 너를 잊어도 너는 내게 흰 꿈이로다
꽃은 꿈이요
깜박 속은 게
꽃이라
- 춘몽 / 김용택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나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 바람은 그대 쪽으로 中 / 기형도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 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 하늘의 천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있어도
없어도
지금 다 지워져도
나는
너의 문자
너의 모국어로 태어날 것이다
- 문자 / 김경후

이제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소.
한때 내 사랑, 내 동반자. 내 인생의 유일한 사람.
나는 다음달에 중국으로 떠나오.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고 영원히 안 돌아올지도 모르오.
우리들의 삶은 그다지 길지 않소. 그런 삶의 마지막까지 당신을 기억하오.
- 그사람의 첫사랑 中 / 배수아

바람아, 나를 마셔라
단숨에 비워내거라
내 가슴속 모든 흐느낌을 가져다
저 나부끼는 것들에게 주리라
울 수 있는 것들은 울고
꺾일 수 있는 것들은 꺾이도록
그럴 수도 없는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서
신음도 없이 지푸라기처럼 날아오르리
바람아, 풀잎 하나에나 기대어 부르는
나의 노래조차 쓸어가버려라
울컥울컥 내 설움 데려가거라
그러면 살아가리라,
네 미친 울음 끝
가장 고요한 눈동자 속에 태어나
- 태풍 / 나희덕

내 꿈속에 밤새 꽃으로 피어 살다간 이는
내가 잠결에 그 누구를 불렀던가
못 견디게 그리워 꿈속까지 찾아가
제발 와서 살다가라고 투정부렸던가
내 꿈의 하루를 살다간 저 흔적
다 헤아리지도 못하는 쓸어버리지도 못할
나를 누가 살다간 저 붉은 흔적
내 머리 맡에 밤새 낭자하게 쏟아진 꽃잎들
- 누가 나를 살다갔다 / 김왕노

어둠과 취기에 감았던 눈을
밝아오는 빛 속에 떠야 한다는 것이
그 눈으로
삶의 새로운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 입술로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려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가을비에 낙엽은 길을 재촉해 떠나가지만
그 둔덕, 낙엽 사이로
쑥풀이 한갓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걸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아침이 이렇게 눈물겨웁다.
잘 길들여진 발과
어디로 떠나갈지 모르는 발을 함께 달고서
그렇게라도 걷고 걸어서
나 서른이 되면
그것들의 하나됨을 이해하게 될까
두려움에 대하여 통증에 대하여
그러나 사랑에 대하여
무어라 한마디 말할 수 있게 될까
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가는 개미들처럼
그 주검으로도
어린것들의 살이 오른다는 걸
나 감사하게 될까 서른이 되면
- 나 서른이 되면 / 나희덕

음악이 있어 그대는 행복합니까 세상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도 음악이 되는 저녁,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누워서 그대를 발명합니다
- 그대의 발명 中 / 박정대

가슴과 어깨가 아파. 왜 슬픔은 같은 곳에만 쌓이는지 몰라.
- 거미 여인의 키스 中

낯선 곳으로 뛰어내렸던 어제
쏟아질듯 큰 눈은 내 것이었다
눈알 태울 만한 큰 사랑을 찾아
때로는 바위 곁에서 기다리곤 하였다
끝내 죽지 않을 것 같던 그 긴 기다림도
결국 바닥이 나고
인연은 칼날
등 돌리며 쓰라렸던 날들
너를 닮은 기억이 구름이 되어
흩어지고 있다
- 구름에 기대어 / 추명희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 비오는 날에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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