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인
생성시기
중국 주나라가 종주국으로 서고, 상나라가 망한 서기전 1122년 이후
유래
상(商)나라 사람이라는 뜻이다. 상나라는 하(夏)나라를 멸망시킨 탕왕이 건국한 나라로, 은(殷)나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상나라는 뒤에 주나라에 의해 서기전 1122년에 멸망했는데, 이때 주나라는 상나라를 깎아내리기 위해 수도였던 은(殷)을 나라 이름으로 불렀다. 주나라가 선 이후 상나라 사람들, 즉 상인들은 정치에서 배제되어 하는 수 없이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상나라 사람이라고 하면 곧 장사를 하는 사람이란 뜻이 되었고, 역시 같은 뜻으로 상업(商業)은 상나라 사람들의 직업이란 뜻으로 장사를 의미했다.
시치미떼다
생성시기
고려, 1231년(고종 18년)
유래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시대 때 매사냥이 성행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사냥매를 사육하는 응방이란 직소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당시 궁궐에서부터 시작된 매사냥은 귀족사회로까지 번져나가 많은 이들이 매사냥을 즐겼다. 이렇게 매사냥 인구가 늘어나다 보니 길들인 사냥매를 도둑맞는 일이 잦아졌다. 이 때문에 서로 자기 매에게 특별한 꼬리표를 달아 표시했는데 그것을 ‘시치미’라고 했다. 이처럼 누구의 소유임을 알려주는 시치미를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데서 ‘시치미를 뗀다’는 말이 나왔다.
따라서 몽골어가 들어온 최초 시기는 앞서 나온 설명대로 1231년(고종 18년)으로 잡는다.
거덜나다
생성시기
조선, 1392년(태조 1년)
유래
거덜은 조선시대에 가마나 말을 맡아보는 관청인 사복시(司僕寺)에서 말을 맡아보던 하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거덜이 하는 일은 궁중의 행차가 있을 때 앞길을 틔우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말을 타고 길을 틔우는 거덜은 자연히 우쭐거리며 몸을 흔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사람이 몸을 흔드는 것을 가리켜 ‘거덜거린다’, ‘거들먹거린다’ 하고, 몹시 몸을 흔드는 말을 ‘거덜마’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는 살림이나 그밖에 어떤 일의 기반이 흔들려서 결딴이 나는 상황을 가리킬 때 ‘거덜 나다’라고 사용한다.
그러나 사복시 자체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고려 후기에 여마(輿馬)·구목(廐牧) 등의 일을 맡아보던 대복시(大僕寺)를 1308년(충렬왕 34년)에 상승(尙乘)·전목(典牧)·제목감(諸牧監)을 병합하면서 사복시라고 개칭했다.
1356년(공민왕 5년)에는 다시 대복시로 환원되면서 폐지되었다가 1362년 사복시로 다시 설치되었다. 1369년 대복시로 고쳤다가 72년 또 사복시로 바뀌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사복시 자체는 고려 후기까지 올라갈 수 있으나 여기 근무하던 하인을 거덜이라고 불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이 어휘의 생성 시기를 조선 건국 연도로 잡았다.
도무지
생성시기
조선, 1860년(철종 11년)
유래
도모지(塗貌紙)는 옛날 조선시대에 사사로이 행해졌던 형벌이었다.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 겹으로 착착 발라놓으면 종이의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서서히 숨을 못 쉬어 죽게 되는 형벌이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된 오치문이란 사람이 울산 장대로 압송된 뒤 도모지 형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천주교 기록에 “순교 당시 그는 얼굴을 한지로 덮은 채 물을 뿌림으로써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 형벌을 받았는데, 무의식 중에 혀를 내밀어 물 묻은 한지를 뚫자 군사들이 그 구멍을 막아 질식시켰다고 전한다”고 되어 있다.
이보다 늦은 기록으로는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천주교인들에게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라고 부르던 백지사 형을 집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대원군 시대에 포도청의 형졸들이 살인하기에 염증을 느껴 백지 한 장을 죄수의 얼굴에 붙이고 물을 뿌리면 죄수의 숨이 막혀 죽곤 했는데 이를 ‘도모지(塗貌紙)’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은 황현(黃玹)이 고종 원년(1864년)부터 융희 4년(1910년)까지 47년간의 한말의 역사를 적은 책인데, 대략 이 시기에 사사로이 행해진 형벌인 듯하다.
다만 형벌의 성격상 가문에서 사형(私刑)으로 집행될 수 있는 것이어서 이 말의 발생이 꼭 1860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끔찍한 형벌인 ‘도모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도무지’는 그 형벌만큼이나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숙주나물
생성시기
조선, 1475년(성종 6년)
유래
숙주나물은 원나라 때의 문헌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 두아채(豆芽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녹두를 깨끗이 씻어서 물에 담가 불린 뒤 항아리에 넣고 물을 끼얹어서 싹이 한 자쯤 자라면 껍질을 씻어내고 뜨거운 물에 데쳐 생강, 소금, 식초, 기름 등을 넣고 무친다고 나와 있다. 그 방법이 우리나라의 숙주나물 만드는 법과 같으니, 우리의 숙주나물은 원나라와 교류가 많았던 고려 때 들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조선시대로,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전한다.
세조 때 신숙주(申叔舟, 1414∼1475년)가 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여섯 신하를 고변(告變)하여 죽게 하자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여 이 나물을 숙주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숙주나물로 만두소를 만들 때 짓이겨서 넣기 때문에 신숙주를 나물 짓이기듯 하라는 뜻에서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어휘의 생성 시기는 신숙주가 사망한 1475년으로 잡는다.
쾌지나 칭칭 나네
생성시기
조선, 1597년경(선조 30년)
유래
우리 민요의 후렴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쾌지나 칭칭 나네”는 임진왜란이 끝나던 1597년경에 나온 노랫말로서 “쾌재라, 가등청정이 쫓겨 나가네”가 줄어든 말이다. 쾌재라(快哉-)는 ‘좋구나’, ‘시원하구나’란 뜻을 가진 옛말 감탄사이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이라 불리는 가토 기요마사(1562∼1611년)가 쫓겨 달아나는 모양을 노래에 붙인 것인데, 운율을 맞추자니 자연히 부르기 편하게 줄어든 것이다.
흥청거리다
생성시기
조선, 1503년(연산군 9년)
유래
흥청(興淸)은 본래 운평(運平)에서 나온 말이다. 운평이란 조선 연산군 때 있었던 기생제도로서, 여러 고을에서 노래와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기생들 가운데 뽑혀서 대궐로 들어온 기생을 흥청이라 불렀다.
연산군은 재위 9년(1503년) 10월에 악공(樂工)을 광희(廣熙)라 부르고 기악(妓樂)을 흥청과 운평이라 일컬었다. 여기에서 ‘흥청망청’이란 말과 함께 ‘흥청거리다’는 말이 나왔다.
궁에서 이 흥청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잔치라도 벌일라치면 그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이 대단했기에 나온 말이다.
노다지
생성시기
대한제국, 1897년 9월(고종 광무 1년)
유래
평안북도 운산 금광은 우리나라 최대의 금광으로서 조선의 금 생산량 중 총생산량의 1/4을 차지하던 대규모 광산이었다. 그런데 고종과 가깝게 지내던 미국인 앨런은 왕실과 맺은 교분을 이용하여 운산 금광의 개발권을 미국에게 넘겨주도록 고종을 설득했다. 앨런의 설득으로 고종은 운산 금광의 개발권을 미국인 자본가에게 넘겨주었다.
앨런의 중개로 운산 금광 채굴권을 독점 계약한 미국 자본가는 1897년 9월 동양광업주식회사를 세우고 미국인 감독관, 일본인 기술자, 말레이시아와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여 운산 금광을 본격적으로 개발했다.
이미 이곳에서 광산을 개발하던 조선인 광산 주인과 광산 노동자들은 강제로 쫓겨났다. 이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살던 조선인 농민들도 쫓겨났다. 이곳에서는 미국인 광산 관리인이 조선인 농민을 두 차례나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지만 그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인 관리들은 조선인이 광산에 접근하면 금을 훔치려 한다고 하여 무차별 총질을 했으며, 이때 “No touch!” 하던 말이 변하여 ‘노다지’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철조망에 ‘No touch!’라고 써놓았는데, 이것이 금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으로 와전되면서 노다지란 어휘가 생겼다고도 한다.
미국은 운산 금광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당시 미국인 감독관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1897∼1915년 사이의 금 생산액만 약 4,950만 원이었다고 한다. 이 금액은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금액으로, 그 무렵 한강철교 공사에 든 비용이 약 40만 원이었다고 한다. 또한 1910년 당시 조선 정부가 일본에 진 빚이 4,500만 원이었으므로 얼마나 큰 돈인지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미국은 1897년부터 1936년까지 운산 금광에서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을 채굴했고, 당시 1,5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미역국을 먹다
생성시기
대한제국, 1907년 8월 1일(순종 융희 1년)
유래
1907년 8월 1일 오전 11시, 서울 동대문 밖 훈련원에 맨손 훈련을 한다고 병사들을 집합시켜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군부협판 한진창이 ‘군대해산 소칙’을 낭독했다. 일본 헌병들이 중무장한 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계급장을 떼고 약간의 돈을 받은 뒤 강제 해산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실 근위부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參領)은 격분하여 권총 자결했다. 격분한 병사들은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남대문 밖 일본군 주둔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도리어 78명이 전사했다. 조선군 부대는 완전 해산되어 국내외로 의병이 되어 흩어져버렸다.
이때 ‘해산(解散)’이란 말이 아이를 낳는 ‘해산(解産)’과 소리가 같아 ‘해산’ 때 미역국을 먹는 풍속과 연관지어서 이 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해산하라는 명령에 “그럼 우리더러 미역국이나 먹으란 말이냐?”는 식의 자조 섞인 말투였을 것이다.
요즘에는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시험에 떨어졌을 때 쓴다.
을씨년스럽다
생성시기
대한제국, 1905년 11월 17일(고종 광무 9년)
유래
을씨년은 1905년 을사년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을사조약으로 이미 일본의 속국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당시, 온 나라가 침통하고 비장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조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17일 이후로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는 표현을 쓰게 되었다.
그·그녀
생성시기
일제강점기, 1919년경
유래
‘그’나 ‘그녀’가 3인칭 대명사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세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그’ 대신에 ‘궐자(厥者)’를, ‘그녀’ 대신에 ‘궐녀(厥女)’라는 말을 썼는데, 신문학 초창기에 김동인 등이 ‘그’와 ‘그녀’라는 3인칭 대명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영어 ‘He’를 번역한 것인데, ‘She’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쓰기가 마땅치 않자, 일본어 ‘かのじょ(彼女)’를 직역해서 썼는데 그것이 바로 ‘그녀’이다. ‘그녀’의 뒤에 주격 조사 ‘는’이라도 붙으면 ‘그년’이라는 욕과 발음이 비슷해지니 썩 마땅한 대명사는 아니다.
김동인은 “이광수조차 ‘이러라’, ‘이더라’, ‘하도다’, ‘이로다’ 등을 그대로 사용할 때 내가 주도한 「창조」 동인들이 이를 모두 ‘이다’, ‘한다’ 등으로 대체해버리고 ‘했다’, ‘이었다’ 같은 과거형 어미까지 만들어 사용했다. 게다가 조선말에는 없었던 He, She 등의 대명사를 쓰기 위해 ‘그’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했으니 이것은 모두 「창조」의 공으로 생각만 해도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어휘가 꼭 김동인 혼자만 쓴 것은 아닐 것으로 본다.
이 어휘의 발생 시기는 그가 언급한 대로 1919년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발간한 시점으로 본다. 이해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했다. 김동인은 이밖에도 언문일치를 실천한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한국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인 유길준의 『서유견문』 서문에 ‘언문일치’ 주장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뒤 이인직 등의 신소설과 최남선, 이광수를 지나 김동인에서 완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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