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들어온 만큼 졸음이 밀려왔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잠옷으로 갈아 입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온도는 따뜻했지만 워낙에 추위를 잘 타는 탓에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채로 눈을 감는데, 안 그래도 아까 전까지 내 머리를 어지럽히던 누군가가 이제는 눈 앞에 있는 것 처럼 선명하게 보이며 나를 괴롭혔다.
웃고 있던 그의 모습, 그리고 짧게 귀엽다, 하고 말하던 그 목소리, 나를 보던 그 눈빛.
어떡해. 보고 싶잖아…. 자꾸만 생각나는 그 얼굴에 결국 다시 눈을 떴다. 이불 밖으로 나와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방과 다름 없는 문 앞에 조심스레 섰다. 바비는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여기가 바비의 방이기도 했고, 또 다르게 보자면 그의 사무실이기도 했다.
방 문 손잡이를 잡고 열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문을 여는 건 왠지 아닌 것 같아서 조심스레 그 방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안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들어 가도 되는 걸까? 나 노크도 했는데…. 그 방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 내밀어 방 안을 바라보니 어두운 방 안, 책상 앞에 스탠드 불 같이 작게 불을 하나 켜둔 채로 그가 앉아 있다.
서류를 보고 있는 듯 그에게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빛이 옅게 비춰진 그의 얼굴은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그렇게 문을 열고 그를 바라보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없다. 눈치 못 챈건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조금 더 연 뒤에 그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문에서부터 몇 걸음.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갑작스럽게 바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안 주무시고 왜 여기 오셨습니까. "
순간 놀래서 나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켜버렸다.
알고 있었구나. 하긴, 경호원이 이 정도 인기척도 모를 리가 없긴 했다.
들이킨 숨을 조금 진정시켜 보려는데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는 히끅,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이 꼴깍 넘어가는 느낌이 든다.
설상 가상으로 딸꾹질까지 나버렸다.
" 그냥, 히끅, 잠이… "
안 와서요.
딸꾹질을 하며 중간중간 힘겹게 답하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픽 웃는다. 그리고는 서류를 잠깐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 앉으세요. 쇼파를 가리키며 나를 앉힌 그가 어디론가 걸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따뜻한 물 한 잔을 내게 내밀었다.
" 이거 마시세요. "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민 물잔을 받아 들자 그가 내 맞은 편 쇼파에 나를 마주보고 앉아 온다. 몇 모금 목 뒤로 삼키자 조금은 딸꾹질이 잠잠해 지는 것이 느껴졌다. 괜히 그 잔을 양 손으로 꼭 쥔 채로 바비를 바라보는데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밖에 있을 때면 늘 단정하던 그와는 다르게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 넥타이도 없이 하얀 셔츠만 입은 그는 목 쪽의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있었다.
" 안 피곤해요? "
" 괜찮습니다. "
" 엄청 피곤해 보여요. "
" 아가씨는 왜 안 주무십니까. "
" 그냥 잠이 안 와서…. "
" 다른 애들 보낼테니까 재워 달라고 하십시오. "
" 그래도 잠 안 와요…. "
나 그냥 여기 조금만 있다 가면 안 돼요?
내 질문에 바비가 잠깐 멈칫하는 것이 보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잠깐 뜸을 들인 그는 그러세요, 하는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또 다시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방이라고는 하지만 침대가 있는 곳,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 그리고 간이 부엌으로 보이는 곳까지. 말하자면 이 곳은 작은 집과 같았다.
바비가 사라진 곳을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바비가 앉아있던 그 책상 앞에도 그렇게나 많은 서류가 있더니 여기, 쇼파 앞에 있는 작은 탁자 위에도 꽤나 많은 서류들이 펼쳐져 있다.
" 진짜 많다…. "
이게 다 뭘 하는 거지. 이걸 바비가 혼자 다 해?
손을 대볼까 싶다가도 왠지 손을 댔다간 바비에게 혼날 것도 같아서 손을 대진 못하고 그냥 눈으로만 바라보았다. 뭐라고 적힌 서류들 사이로 영어도 보이고, 한자도 보이고… 괜히 공부 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 머리가 띵했다.
대충 서류들을 눈으로 훑다가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 시선이 멈췄다. 결제를 위해 서명을 필요로 하는 부분에 적힌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 있는 서류에서도, 여기 있는 서류에서도, 또 저쪽에 있는 서류에서도 서명은 모두 동일했다. 흘려서 쓴 영어같은 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K… 그리고 …J? 이게 누구 서명이지.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언제 돌아온 건지 바비가 손에 이불을 든 채로 내 뒤로 걸어왔다.
" 춥습니다. 덮고 계세요. "
짧은 말과 함께 내 어깨에 이불을 덮어주는 그의 손길이 좋아서, 아직 방이 따뜻했지만 그냥 베시시 웃으며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받았다. 내 어깨 위로 이불을 둘러준 바비가 다시 원래 앉아 있던 책상 앞으로 가서 몸을 앉힌다. 작은 불만 비춘 채로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 원래 이렇게 일이 많아요? "
" 오늘은 K의 일까지 모두 맡아서 하느라 좀 많습니다. "
" K의 일을 왜 바비가 해요? "
" K가 좀 아프다고 하더군요. "
K가? 그 강철 체력 아저씨가? 나도 모르게 나온 내 말에 바비가 순간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옅게 미소를 지었다.
" 그냥 감기니까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하십니다. 근데, "
" 네? "
" 원래 다들 그렇게 아저씨라고 부르십니까? "
아… 그냥 뭐. 그게 편해서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하다가 말고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부 다는 아니고, 바비는 아니에요!
내 말에 바비가 잠깐 날 바라보다가 아까 전보다는 조금 더 크게 피식, 하고 웃음을 뱉었다. 뭐야. 이 사람 어제부터 왜 이렇게 잘 웃어 주는거야….
" 그럼 전 뭐라고 부르십니까. "
바비의 말에 잠깐 고민을 했다. 그냥 바비라고 부르는데…. 왠지 그냥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입을 꾹 다물었다가 대답 대신 괜히 다른 말을 물었다.
거기 말고 여기 와서 하면 안 돼요?
내 앞으로 오라는 말에 바비가 잠깐을 대답 없이 날 바라보다가 손에 있던 서류를 놓았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차곡히 올려져 있던 서류들 몇 가지를 챙기곤 몸을 일으켰다. 내앞으로 다가와 쇼파에 마주보고 앉은 그의 셔츠와 정장 바지가 여전히 불편해 보인다.
" 옷은 안 갈아입어요? "
" 일 다 끝나면 갈아입을 겁니다. "
" 일 할때 불편하잖아요. "
" 괜찮습니다. 저는 이 옷이 제일 편합니다. "
그리고는 아까 전에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처럼, 다시 서류를 펴서 그 일에 집중했다. 이쪽 탁자에는 스탠드가 없기 때문에 대신 방 안의 조명을 약하게 켜놓은 채로 제 일에 집중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따뜻한 물을 또 한 모금 마셨다가. 두 가지만 반복하고 있으니 조금은 졸음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하품에 크게 흐으, 하고 하품을 뱉었더니 바비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곤 날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하품을 하다 걸린게 부끄러워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헤헤, 하고 민망한 웃음만 보이는데 그가 서류에 아까 본 정체 모를 그 모양으로 결제란에 싸인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바비의 싸인이었구나….
" 지금 거기에 쓰는 거 바비 싸인이에요? "
" 네. "
" KJ… 그리고 마지막은, 어, 음, W? "
" ……. "
" KJW… 이게 뭐야. 혹시 이름이에요? "
내 물음에 바비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조금은 웃음이 가신 얼굴이지만 그래도 평소보다는 표정이 부드럽다. 어깨를 으쓱하는 그에게 조금 더 몸을 가까이 가져가선 맞구나? 하고 되물으니 그가 대답 대신 다른 걸 물어온다.
" 아가씨 여기서 주무실 겁니까. "
" 음… 여기서 자도 돼요? "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잠깐 뜸을 들였다가 조심스레 묻는데, 그는 참 단호하게도 안 된다고 대답해 온다. 칼 같이 거절해오는 그의 대답에 치, 하고 작게 칭얼대곤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KJW라는 그 이니셜에 대해서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관둬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더 물어도 대답 안 해주겠지, 저 사람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물어봐야지.
다시 일에 집중하는 그를 바라보는데 조금씩 밀려오던 나른함이 또 다시 밀려왔다. 일 하다 말고 힐끔, 날 바라보는 바비의 눈길에 괜히 졸린 모습을 보이면 다시 방으로 돌아가라고 할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했더니 그가 피식 웃곤 손에 쥔 서류를 내려놓았다.
" 졸리세요? "
졸리면 가서 주무세요. 늦은 밤이라 그의 말투가 조금은 부드럽게 가라 앉았다.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또 다시 새어나오는 하품을 막을 길이 없다. 짧게 하품을 하곤 잠꼬대를 하듯 웅얼거렸다. 오빠는 언제 자게요….
졸림에 웅얼거리다 말고 순간 헉, 하고 입을 막아버렸다. 나 방금 오빠랬나? 진짜? 나… 방금 뭐랬지? 오빠? 순간 놀라서 바비를 바라보자 바비도 굳은 채로 날 바라보고 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바비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눈이 휘어져라 웃던 그가 웃음을 잔뜩 머금은 목소리로 내게 물어온다.
" 방금 오빠라고 하셨습니까. "
웃는 그의 모습에 순간 뭔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오빠 맞긴 맞잖아요…. 사라질 듯 점점 작아지는 내 목소리에 바비는 대답 없이 웃기만 한다. 저렇게 웃으니까 내가 더 부끄럽잖아….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으, 하는 소리만 내고 있는데 바비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왜요…? "
그를 올려다보고 왜요, 하고 물으니 그가 짧게 답했다. 자러 가셔야죠.
그의 말에 그가 덮어준 이불을 내 몸위로 덮어 내 얼굴 위까지 뒤집어 썼다. 그리고는 안 갈 거에요, 하고 고개를 숨긴 채로 내뱉는 내 말에 바비는 여전히 웃었다. 그만 좀 웃으란 말야. 부끄러움에 얼굴로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갑자기 느껴진 붕 뜨는 느낌.
날 이불과 함께 통채로 안아든 바비가 걸음을 몇 걸음 옮기더니 어딘가에 조심스럽게 날 내려놓았다. 이불 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밖을 바라보니 아까 같이 앉아있던 그 쇼파에서 조금은 떨어진, 그의 침대 위에 와있다.
" 주무세요. "
" 저 여기서 자요…? "
" 가기 싫으시다면서요. "
" 그건 그렇긴 한데, 제가 여기서 자면 바비는 어디서 자요…. "
내 말에 바비가 씩 웃었다. 그리고는 내 몸을 덮고 있던 흐트러진 이불을 바로 정리해 주더니, 그 손으로 내 얼굴을 가린 앞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겨 준다. 부드러운 그 손길에 가슴이 떨려서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멍하니 그의 얼굴만 바라보는데 바비가 살짝 몸을 굽히더니 내게 눈을 맞춰온다.
" 제 걱정은 말고 주무세요. "
진득하니 눈을 맞춰오는 그. 그리고 다시 웃음을 지으며 휘어지는 그 눈. 그리고 장난기 가득 담은 그 말투.
" 오빠는 저기 가서 잘테니까. "
얼굴로 열이 확 오르고, 금새 붉어졌을 게 뻔한 내 얼굴이 생각나 이불을 얼굴 위로 덮었다. 눈만 빼꼼히 내놓은 채로 그를 바라보니 그가 픽 웃곤 내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그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 더 이어온다.
" 좋은 꿈 꾸세요. 아가씨. "
♡
자주 못 올텐데 가려니까 발이 안 떨어져서 완성하고 가는 아가씨 3화!
사진은 웃는 지원이에요
다들 좋은 밤!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