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마마, 하나만 기억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씀... 하세요." "…마마는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분이십니다."
"전정국이라 합니다." "아바마마 저는 호위무사 따위 필요 없다 하지 않습니까!" "운검, 내 딸을 잘 부탁한다." "예, 전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정국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곧 왕과 수십명의 신하들이 궁을 나섰다. 공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왕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정국을 휙, 돌아본다. 정국이 공주의 눈을 마주보며 나긋나긋 말을 시작한다. "전정국이라 합니다." "그것은 아까 말씀하셨습니다." "제게 눈길 하나 주지 않으시기에 듣지 못하신줄 알았습니다." "아까 들으셨겠지만, 전 스스로 제 몸을 지킬 수 있습니다. 돌아가시지요." 공주가 새침하게 뒤를 돌아 신하들을 뒤로하고 홀로 발을 내딛었다. 그러다 얼마못가 깊게 박힌 큰 돌멩이에 비단신 앞코가 걸려 휘청이고 만다. 정국이 공주의 비명을 듣고서 빠르게 달려가 공주의 어깨를 붙들었다. "제 몸 하나 가누질 못 하시는데 제가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둘의 첫 만남이었다. 서로에게 딱히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안 좋은 인상이 박힌 것도 아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이리 커질 줄 몰랐을 것이다. //// "계속 운검님, 정국님, 해야겠습니까?" "예." "오라버니는 굉장히 쌀쌀 맞으십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굉장히 쌀쌀 맞으시다구요-" "아니 그 전에…." "아, 오라버니 말 입니까?" 호칭이 엄격하다는 것은 어렸을 때 부터 익히 알던 것이었다. 정국은 어렸을 때 부터 왕의 호위무사인 제 아비의 가르침을 받아 무술을 익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왕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과하고 정국을 운검으로 지목하였다. 저가 호위하던 왕의 딸, 공주마마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오라비라 부르다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국은 발그레한 볼로 놀란 눈을 해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찌 마마의 오라버니 입니까. 세자께서 오라버니지요." "오라버니는 이제 없습니다." 공주의 오라버니, 즉 세자는 얼마 전 침입자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 공주는 시간이 날 때면 왕의 눈을 피해 세자에게 무술을 배웠다. 호위가 필요 없다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공주는 세자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었다. 궁에서 세자의 죽음에 제일 슬퍼한 것 또한 공주였으리라. "그럼 정국 오라버니가 제 오라버니 해주시면 되겠네요." "정말 그러길 원하십니까?" "네. 제 오라버니가 되어주세요." "전 싫습니다." "……." 정국은 보름달 뜬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공주의 뒤에서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공주가 눈을 크게 떠보이며 잔뜩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주위에 얼마 없던 궁녀들은 어느새 물러갔는 지 보이지 않았다. 둘만이 달빛을 받으며 궁의 담벼락 옆에 서있다. "오라버니…." "공주." "…네." "사랑합니다." 담벼락에 둘의 그림자가 서로 입을 맞추었다. 둘 사이에 빈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만큼 가까워졌고, 이해하고 배려하게 되었다.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 "오라버니!!" "오셨습니까 공주." "또, 또! 둘만 있을 때는 말투 좀 바꾸세요." "저번처럼 그 어린 궁녀에게 들키면 어찌합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제 비녀를 주었습니다." "그럼 공주는요. 남에게 모두 주려고 하는 버릇 좀 고치십시오." "전 오라버니가 주신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전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얼마 전 정국과 저잣거리에 몰래 나가 그에게 선물 받은 것이었다. 궁의 물건들처럼 값이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공주는 궁의 모든 장신구들을 합쳐도 정국이 준 햇살이 담긴 비녀만 못하다 생각하였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넌 너무 착해." "오라버니도 너무 착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야." "정말 그것뿐입니까?" "아니. 다 말하려면 밤 새야 해." "요즘 들어 능구렁이 같아지셨습니다." "그래서 싫습니까, 공주?" "아니요. 더 좋습니다." 공주는 정국을 정말로 좋아하게 되었다. 아바마마가 돌아오는 날에는 정국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할 셈이었다. 다른 이는 안 될 것 같았다. 얼마 전 아바마마가 옆 나라 왕세자와 혼인하라 하였을 때도 며칠 내내 입에 아무것도 대지 않았다. 일종의 시위였다. 그 때까지만해도 자신은 사랑하는 이가 생기지 않을 줄 알았다. 큰 착각이었다. // "오라버니, 가지 마세요!!" "괜찮아. 빨리 올게." "아니 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돌아오기가 힙들다는 것을요…." "내가 우리 공주 보러 빨리 이기고 돌아올게." "안 돼요. 전 오라버니 없으면 안 돼요…." 아바마마에게 말로만 듣던 전쟁이었다. 수 많은 군사들이 뒤엉켜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피 냄새가 궁 내부까지 퍼져온 것 같았다. 정국의 몸에도 피가 튈까 두려웠다. 자신이 오라버니 이후로 처음 마음을 연 사람이었다. 공주는 정국의 팔을 붙잡고 목 놓아 울었다. "이제 이러면 안 돼는 나이지?" "오라버니…." "우리 공주, 이제 열일곱살이잖아. 뚝." "꼭…, 가셔야 합니까?" "내가 가야 해. 그래야 이기지. 그치?" "…꼭, 돌아오세요." 정국이 공주를 슬며시 안았다. 그러고선 신하들 쪽으로 공주를 밀어 보낸다. 공주는 멀어지는 정국의 뒷 모습을 하염 없이 쳐다보았다. 어쩌면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못했다. 공주는 한참이 지나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직접 칼을 허리춤에 차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신하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도적처럼 나온 것 치고는 오랜만에 뽑은 칼이 빛을 발휘했다. 언제쯤 정국을 만날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며 칼을 휘둘렀다. 순간이었다. 상대편의 발에 걸려 넘어져 고개를 드는 순간, 피가 묻어 시뻘건 검이 공주를 향했다. "…오라버니." "공주마마 왜 여기에 오신 것 입니까." "전…. 오, 오라버니 피가…!" "전 괜찮… 허윽." 허리 춤에서 자꾸만 피가 뿜어져나왔다. 정국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공주는 어쩔 줄 몰라 눈물만 흘린다. 정국이 떨리는 손을 들어 공주의 눈물을 닦아준다. 하지만 그의 손에 적셔진 피가 공주의 눈물이 흐르던 자리에 묻어나온다. "공주야." "말씀하지 마세요, 제발…." "전하 돌아오시면, 태형세자와 혼인해." "싫습니다. 전 오라버니 밖에 없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윽…. 내 말 들어, 좀." 정국은 몸에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공주는 정국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옆에서 공주를 알아본 군사들이 열심히 칼을 휘둘렀다. "공주마마. 제게 마음을 주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왜 자꾸 그런 말씀만 하십니까, 네?" "마지막이지… 않습니까. 천운이라면 다음 생에 다시 만나겠지요." "제발요…." "공주마마. 하나만 기억해 줄 수 있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마마는….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분이십니다." /// "아 저 그런 거 안 믿는다구요." "주님 믿고 형제 자매 모두 천국에-" "아오 제발요!" 한 여자가 얼굴에 잔뜩 짜증을 내보이며 길을 걷는다. 화가 난 건지 갈 길이 급한 건지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곧 넘어질 것 같다. 결국 끝이 튀어나온 네모난 아스팔트 모서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려 하는 여자의 어깨를 누군가 탁, 잡았다. 여자는 놀란 가슴을 부어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 "...괜찮으세요?" 넘어지던 여자를 받쳐낸 남자가 여자의 얼굴을 보고선 가슴 속 무언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낮게 중얼거리며 물어보았다. "아 저 작업거는 거 아니구요," "...저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천운이라면 다음 생에 다시 만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