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로 상담을 진행할 수 있나요?" "아... 제가 해당과에 상담신청 해놓을게요. 아마 입원중인 환자라고 상담시일이 많이 늦진 않을거에요. 혹시 백현씨가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그냥 상담이라도 받으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찬열은 주치의가 출근을 하자마자 찾아갔다. 이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다면 찬열은 못할 것도 없었다. 상담신청을 마치고 진료실을 나설 때, 찬열은 묻지 말까하고 한참을 고민한 이야기를 입에서 내놓았다. "혹시... 지금 몸상태로 아이를 가질 수 있습니까?" "음... 저희 병원에서 산부인과 진료를 받아보신 적이 있으시면 차트로 확인가능한데... 정확한 사실은 정밀검사를 진행해봐야 해요. 근데 워낙 부상이 컸어서 힘들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네... 알겠습니다. 상담예약 잡히면 알려주세요." 찬열은 백현의 몸상태를 생각해서 아이는 더이상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밤의 일을 통해 어쩌면 아이를 잃은 상처를 아이를 가지면 치유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찬열 스스로도 말도 안된다고, 백현이 그러는 만큼 자신이 더욱 정신을 차려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찬열에겐 한 줄기 동아줄같았다. 많이 고단했던지 백현은 찬열이 돌아올 때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찬열은 간호사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이전에 백현의 임신사실을 확인했던 병원으로 향했다. "아, 백현씨 남편분 되시죠? 아무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정신이 없어서 이쪽에 연락을 한다는걸 잊었네요... 이거 좀 보시겠습니까?" 찬열은 병원에서 가져온 백현의 진료기록서를 내밀며 그간에 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진료기록서에는 사고당시 백현의 상태와 수술기록, 현재 몸상태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산모분이 오셔서 정확하게 정밀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 단언하기 힘들어요. 근데... 백현씨는 사고당시에 흉부골절로 아기집이 많이 손상이 갔을수도 있고 아기를 가진다 쳐도 외부장기들이 압박을 견디지 못할거에요. 그리고 임신당시에 영양상태도 안좋았고 건강이 많이 나빠졌기 때문에 더 힘들 것 같네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산부인과를 빠져나온 찬열은 미리 어머니와 약속되어 있는 일식집으로 향했다. 종업원이 안내해주는 방으로 들어가니 곱게 화장을 한 중년여성이 먼저 와 찬열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억이 모두 돌아온 찬열은 어머니를 마주보기도 싫었다. 이모든게 어머니의 탓인것만 같았다. "니가 왠일이니? 먼저 밥먹자는 말도 하고..." "..." "용건없이 안부나 묻자고 부른건 아닌것 같구나. 뜸들이지 말고 얘기해." 찬열은 김비서에게 자신이 기억을 잃은동안 어머니가 백현에게 찾아간 일을 들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상처를 줬는지 듣는 순간 찬열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자신의 어머니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다...알고계셨으면서 왜 그러셨어요." "뭘 알고 있었다는거니? 그 못배워 먹은 아이가 뭐라고 하더니?" "어머니!! 모른척 하지 마세요." "..." "백현이가 제 아이 가지고 있다는 거...아셨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모질게 대하셨어요. 기억을 잃은 동안 제가 아무리 호구병신같아도...하아..." "그래. 인정하마. 모질게 대했다는건. 근데 그 아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근본도 없는 아이가 내 손주를 가졌다는게 싫더구나. 그래서 니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몇 번 찾아가 모진 말을 해도 죽어도 너랑 헤어진단 말을 않더구나. 니가 기억을 잃고 생활에 허덕이면서 고생하는 그 아이, 일부러 모른척하고 힘들게 했다. 애초에 내가 정해준 참한 아가씨와 교제했다면 없을 일 아니었니?" "그렇게 원치 않으셨던 어머니 손주... 유산되서 없습니다. 이제 만족하세요? 임신기간 동안 너무 고생을 해서 더 이상 임신이 불가능 하답니다. 어머니는 한 생명을 죽이고 아들도 잃은 겁니다. 하아...이제 얼굴 볼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건강히 계세요." 찬열은 그렇게 뒤돌아 나갔다. 찬열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찬열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녀는 평생을 아껴왔던 자신의 아들이 뒷통수를 치는 느낌에 허망할 뿐이었다. 답답하고 울분이 차오른 찬열은 거칠게 차를 몰아 병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백현의 얼굴을 보기가 힘이 들것 같아 한동안 멍하니 차 안에 앉아있었다. 자신이 모르게 백현은 큰 고통을 떠안고 있었다. 앞에서는 지켜준다고 떵떵거렸지만 정작 자신이 한 것이라곤 거창한 말 뿐이었다. 기억을 잃기 전이든 후든 자신은 백현에게 방패가 아닌 창이었다. 그게 너무 미안했고 자신의 이기심에 혐오감이 들었다. 진심으로 사과하자고 생각을 정리한 찬열은 주차장을 나서서 입원실로 향했다. 병실엔 너무 작아져서 아이같은 백현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찬열은 눈물이 터졌다. 안타까웠고 미안함이 섞인 눈물이었다. 찬열은 백현에게 다가가 꼭 안았다. 지금이라도 고된세상에서 백현의 가림막이 되어주고 보듬어 주고 싶었다. "백현아...하아... 내가 다 미안해. 다른 말은 다 변명일 뿐이야. 너 혼자 세상에 내몰게 한것도 미안하다. 아이 잃게 한 것도 나고 너 눈물나게 한 것도 나야. 널 사랑한다는 명목하에 널 큰 고통으로 내몰았어. 바보같이 꾹꾹 참는 널 못 알아봤어. 내가 나쁜놈이고 내가 죄인이다...하아... 근데 백현아. 내가 아무리 싫더라도 네 곁에 있게 해주면 안되겠니? 우리 옛날처럼 웃고 예쁜 이야기만 하고 살자. 제발...흐윽" 찬열은 백현을 품에 안고 하소연하듯 이야기를 했다. 백현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고 찬열은 백현의 옷이 젖도록 그저 눈물만 흘리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 눈물의 침묵을 깬건 백현이었다. 오래 쓰지 않아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찬열을 가만히 달래주었다. "울지 마요... 나..찬열씨 안 싫어요." "...." 울지말라고 싫지 않다고 말하며 백현은 찬열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럴수록 찬열은 백현에게 미안함 마음이 커져서 눈물을 그칠수가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진정된 찬열이 몸을 일으키고 백현을 쳐다봤을 때 백현은 이제 괜찮다는 말을 하는 듯이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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