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Lip balm
[잎새달 열아흐레]
: 4월 19일
달 조차도 눈을 감은 늦은 밤. 나는 오늘도 너를 잊지못해, 칠흙같은 어둠속을 헤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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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구석에 몸을 웅크리고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눈앞에는 자질구레 방안에 굴러다니는 초록색 술병들, 차마 치우지 못한 옷가지 들과, 제자리에 놓여져 있지 못한 기타, 흩어져 있는 찢어진 악보들. 나는 점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인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병나발을 불었다. 창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다 마셔버려 텅빈 병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굴리고는 손을 뻗어 또 다른 병의 뚜껑을 열었다. 병입구 까지 차있는 투명한 액체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헛웃음이 입술틈으로 새어나왔다. 미쳤다, 드디어 내가 미쳐버렸다. 실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웃으며 한쪽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김힘찬, 그거알아? 난 너로 인해 미쳐버렸어.
잎새달 열아흐레
: 4월 19일
-.....
-.....
-..여보세요?
몇년만에 전화가 왔었다. 김힘찬에게. 지난 주말, 봄을 맞아 짐을 정리하다 고등학교 졸업을 발견하고 추억에 젖어있을때 쯔음, 너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할까 라는 생각이 들때 쯔음이였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몇번이고 화면을 확인해보아도 익숙한 번호는 소름돋게도 몇년전과 똑같았다. 설레는 마음과 동시에 받기가 꺼려졌다. 왜, 너는 무슨이유로 몇년만에 전화를 하는 것일까. 전화를 받지않아 손안에서 계속 진동이 울렸다. 멍하니 내려다보며 받을지, 말지 고민했던 것 같은데, 정신차려보니 이미 받은 후였던거 같다. 그래, 이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
-..나, 결혼해.
아, 몇년만에 통화에 너가 내뱉은 한마디는 다정하게 부른 내 이름 석자, 방용국도 아니며. 자신이 결혼한다는 사실이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손에서 휴대전화를 놓칠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나에게 그런 소식을 알려주는 것인지.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석 주저 앉아버렸다. 고개를 젖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높게 달려있는 전등이 눈앞에 흐릿해졌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니, 다시 선명해졌다. 고개를 돌려 저멀리 떨어져있는 휴대전화를 보니, 이미 끊어진 전화, 그리고 남겨져 있는 문자메세지 한통이였다.
-T웨딩홀. 신랑 김힘찬. 신부 권희정. 2012년 4월 19일 오후 두시-
문자메세지를 읽어 가다, 신랑 옆에 떡하니 적혀있는 너의 이름을 보고 휴대전화를 벽에 집어 던져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터리가 분리 되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발악아닌 발악이였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본 문자는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예전, 몇년전의 너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손에 잡힐듯 잡히지 않는 한낱의 추억으로 오늘도 밤을 지샌다.
잎새달 열아흐레
: 4월 19일
'용국아!'
운동장 벤치에서 홀로 앉아 다리를 살랑이던 너가 나를 불렀다. 모두가 하교하고 남은 학교에서 나와 함께 주로 남아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오늘도 영락없이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향해 마구 손을 흔들었다. 자신과 동갑이지만 한참어린 동생 같기만한 너의 행도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늘 그랬듯이 너의 옆에 자리잡고 앉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는지 잘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하루중 이시간이 가장 좋았다. 본래 가만히 진득히 앉아있는걸 잘하지 못하던 나였다. 담소를 나누며 수다스러운 나도 아니였다. 그저 나는 너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럴때마다 접히며 웃는 눈이 사랑스러웠다. 언젠가 부터 나는 깨달았다. 내가 바뀐이유는 다 더 때문이라고, 다, 너를 좋아하게 되서라고.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런 마음을 품고 너와 이렇게 대화한다는게 괜시리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너가 마주보며 웃다가,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에 동글동글한 머리를 기대면, 나는 주춤하며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럴때 마다 너의 등뒤에는 공중에 떠있는 나의 손이 있었다. 그렇게 오늘도, 너의 어깨위에 손을 올릴까, 말까 고민하던 참이였다.
'용국아-.'
'왜?'
곁눈질로 내려다본 너는 편안하게 눈을 감은체였다. 감긴 속눈썹까지도 내눈엔 사랑스러웠다. 그때 그 철없던 시절, 나는 너게게 콩깍지가 씌워졌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커서 결혼 안할꺼야.'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바람이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오늘 따라 바람결이 부드러웠다. 나른해지는 기분에 눈을 잠시 감았다. 귓등으로 들리는 너의 목소리,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잖아.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당연하지. 라는 말을 덧붙여주며. 아직도 너의 어깨위에 손이 자리를 찾지 못해 공중에 떠있었다. 슬쩍, 모르는 척하며 어깨에 손을 올려볼까 싶던 참이였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 있는데.'
어깨와 사이가 가까워진 손은, 순간 멈추었다. 그러고는, 그냥 벤치를 묵묵히 잡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않았다. 그럼 그 사람이랑 결혼 하면되지. 하지만, 떨리는 나의 목소리까지 숨길수는 없었다. 너는 그 작은 입술로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난, ..할수없어.'
'왜?'
축 처진 모습.
'남자끼리는 결혼 할수 없잖아.'
더 움추러드는 어깨. 너의 그 말에 괜히 내 기분까지 울적해졌다. 고백도 하지 않은, 용기도 없는 주제에 나는 너와 어디까지를 상상한 것일까.
'나는 남자 좋아해.'
순간, 심장박동수가 빨라졌다. 애써 담담한척하지만 내 어깨에 머리를 부비고 있는 너가 알아챌까 두려웠다. 혹여나, 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건아닐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너, 방용국.'
그 말을 끝으로 너는 어깨에 기댄체 울었다. 몸을 돌려 어린 아이처럼 울고 있는 너를 감히, 내가 감싸안으니 내 품을 파고들었다. 품에 안긴 너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내가 좋다며, 사랑한다며. 목놓아 울었다. 나는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 어깨가 더 축축히 젖어들어갔다. 코끝이 빨간체로 엉엉 울고 있을 너가 그려졌다. 나는 가만히 낮은 목소리로 너를 불렀다.
'힘찬아.'
너는 대답대신 더 울음소리를 냈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고마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줘서. 사실..''
사실 나도 너를 좋아해, 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벙어리만 된듯 입만 벙긋거렸던것 같기도 하다. 너의 울음이 그칠기세도 보이지 않는데, 나는 그런 한마디로 하지 못했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한마디를 뱉으면 나의 감정이 너에게 들켜버린다는 사실이 싫었던 건지도 모른다.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꽁꽁숨기는 걸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ㅡ, 내 한마디가 너에게 더 독이 될거라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더 세상을 원망하고 삐뚤어질까봐. 내가 좋아했던, 너의 순수함 이 사라질까봐. 나는 그래서 주어담을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좋아한다고 말해버리고 같이 세상을 원망하는게 더 낫다고 생각될만큼, 내가 내뱉은 말은 어리석었다.
'커서 나 잊고, 결혼해.'
좋은사람 만나서, 꼭 결혼해야되. 이 말을 들은 너는 내 가슴팍을 주먹을 쥐어때렸다. 별 아프지도 않은 세기였다. 가만히 맞고 있었다. 나중에는 울면서 자신이 때린 곳위에 손을 올리더니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때려서 미안하다고, 때려서 미안하니까. 그런말 하지말라며 말하고는 내 셔츠 깃을 잡고 힘없이 흔들었다. 내 앞에 온통 눈물 범벅인 너의 얼굴이 보였다. 맞은 가슴은 오른 쪽인데, 왜 왼쪽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잎새달 열아흐레
: 4월 19일
너의 결혼식 날은, 너의 생일 날이였다. 차마 내 눈앞에 턱시도를 입고 깔끔하게 서있는 너를 볼수 가 없어서 침대에 누워 이불머리끝까지 덮어 놓고 잠에 들려고 갖은 노력중이다. 애써 잠든 꿈에는, 그렇게 보기 싫었던 턱시도 입은 너가 서있었다. 너는 나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눈빛속에는 말로 형용할수 없는 것들이 가득채워져있었다. 한참 우리는 서로를 지켜보았다. 다시한번 너가 나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순간, 혼자 울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나가던 너의 마지막 모습이 겹쳐졌다. 그때의 미소와 똑같았다. 불안했다. 지금 말하지않으면 너가 평생내곁을 떠나갈것 같았다. 또 바보 처럼 어리석게 널 둘순 없다. 손을 뻗었다, 너를 향해서. 그때,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유유히 걸어와 너에게 팔짱을 끼었다. 힘찬아! 내가 널 크게 불렀다. 다시한번 나에게 미소지어주었다.
'사-,'
넌, 나의 말이 다끝나기도 전에 그 여자와 함께 사라졌다. 아아, 힘없이 입술사이로 나오는 '-랑해.' 두글자, 흔적없이 사라진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떠도 너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미소짓던 너의 모습이 보고싶다. 수없이 되새기고 떠올려도, 다시 한번 손을 내밀어 뻗어보아도 멀리사라져 버린 너는 잡히지 않는다. 다시 너를 만난다면 말할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의 두눈을 마주하며-,
사랑한다고.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