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보면, 꼭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과거.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잠식하고 있던 죄책감. 엄마를 향한 모든 감정을 응축시켜 놓은 일말의 연민까지도.
네 과거. 네 마음 깊은 곳까지 잠식하고 있던 죄책감. 엄마를 향한 너의 모든 감정을 응축시켜 놓은 일말의 연민마저 닮은 나를,
너는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나와 너무 많이 닮아서, 꼭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사랑할 수 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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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간의 우리는.
미성년(未成年)
준회는 마치 자기가 길을 안내라도 하는 것 마냥 앞장섰다. 그게 딱히 불만스럽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그를 뒤따랐다. 벌써 등교시간이 가까워졌는지 복도 창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준회가 뒷문을 열었다. 교실에는 소수의 아이들과 김지원이 있었다. 김지원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책장을 책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고작 열 일곱 임에도 불구하고 준회는 키가 퍽 컸는데, 예의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 김지원의 옆자리에 책가방을 퍽 하고 던졌다. 든 게 없었는지 가방은 금새 볼품없이 쪼그라들었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준회가 의자를 끌고 삐딱하게 앉은 그 자리는 내 자리였기 때문이다.
" 늦었네. "
" 뭐가 늦어 새끼야. 니가 학주 없대서 존나 일찍 왔구만 없긴 개뿔. 무튼, 학주든 나발이든 문제가 아냐. 나 이번에는 진짜 회장님한테 뒤질뻔했어, 구라아니고. "
준회의 대답에 책장을 넘기던 지원의 손이 멈칫했다. 지원은 눈을 한번 흘긋 거렸다.
" 너한테 물은 거 아니야. "
" 어? "
" 너 말고, 쟤. "
너 말고, 쟤. 그것은 분명히 나를 지칭하는 의미가 틀림없었다. 나는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구준회와 김지원이 아는 사이였구나. 생각해보니 둘은 같은 반이였지.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건 몇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둘이 친하다는 것 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것도. 구준회의 첫인상 그리고 행동을 보면 거칠다라는 느낌이 마구 들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그런 류의 거침. 반대로 김지원은, 요 얼마간 그를 보면서 내가 느낀점은. 김지원은 상당히 날카로운 애라는 것이다. 선생님께든 반 아이들에게든 호감을 주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이지만 그 뒤에 보이지 않는 날카로움. 나는 알 수 있었다. 김지원의 주변은, 그가 가진 공기는 잔뜩 날이 서 있다는 것. 그리고 나와 함께 있을 때면 그 날이 배로 더 날카로워 진다는 것도. 김지원이 내뱉은 한마디에 구준회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준회가 지원에게 대꾸했다. 너, 전학생이랑 친하냐? 여전히 시선은 책장으로 고정한 지원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그러는 너는. "
" 나야, 친하지. 쟤가 나한테 연고도 발라줬어. "
" 그래, 네 친한친구를 위해서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는게 어때? "
" 자리? 왜? "
" 네가 앉은 자리, 쟤 자리야. 지금 너 때문에 앉지도 못하고 서 있는거 안보이냐? "
지원의 말에 준회가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머쓱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준회가 나를 향해 앉으라는 듯한 제스처를 했다. 내가 다가가서 책상에 가방을 걸자 준회가 조금 옆으로 비켜서는 것이 보였다. 아 진짜 선생님 너무하네, 몇 일 학교 좀 안나왔다고 내 자리를 다른애한테 주냐. 준회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는 조금, 왠지 모를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리를 빼앗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방을 걸고 굽힌 허리를 세운 내가 준회를 올려다보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오히려 당황한 얼굴을 하는 쪽은 준회였다. 야,야 네,네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 열일곱. 딱 그 나이 대의 또래 남자아이들 만큼 감정표현에 서툴다. 그런 준회의 모습이 조금 우스워서 입꼬리를 올려보였더니, 뭐가 심통이 난 건지 내게서 시선을 피해버린다. 준회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지원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지원이 반응을 않자, 조금 더 세게 건드린다. 야,야. 김지원!
" 왜. "
" 창고 좀 가자. "
" 싫어. "
" 왜? "
" 귀찮아. "
" 아, 좀 가자고! "
" 아침부터 창고는 왜 가자고 난린데. "
" ...책상이랑 의자 가지러. "
삼 분단 맨 뒷자리에 공간이 남으니 그곳에 앉으라던 선생님의 말에도 불구하고 준회는 일 분단 맨 뒤에 앉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선생님이 저랑 김지원 떨어트려놨잖아요. 그러니까 짝꿍 안시켜줄꺼면 맨 뒤에 앉게 해줘요. 퍽 단호한 어조에 선생님은 백기를 들었다. 책상과 의자를 합쳐 들어올린 준회가 어기적거리며 내 뒷자리에 그것들을 놓았다. 안녕. 잔뜩 들떠있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다시 몸을 돌렸다. 지원이 여전히 내 책상위에 올려져있던 준회의 가방을 가볍게 던지며 말했다. 구준회, 시끄럽게 하기만 해. 준회는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일뿐이였다.
" 조금 전에 말했듯이, 다가오는 교내행사들 준비 잘 하길 바란다. 오늘 조례는 여기까지, 그리고 반장은 잠깐 교무실로 따라오도록. "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이 일사분란하게 교실 안을 돌아다녔다. 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을 뒤따랐다. 수업준비를 할까 싶어서 책상 서랍을 뒤적이는데 뒤에서 준회가 쿡 찔러오는 바람에 몸을 흠칫 떨었다. 왜? 뒤돌아서 물으니 한 쪽 손으로 턱은 괸 준회가 치아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며 말했다.
" 매점가자. "
둘 다 한 손에 빵을 든 체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역시 빵은 고구마피자빵이지. 무슨 소리야 빵은 초코소보루야. 매점 빵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 몰라? 몰라. 고작 매점을 다녀오는거였는데도 준회에게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듯 했다. 벌써 다 먹어치웠는지 입만 우물거리는 준회에게 내 초코소보루를 조금 뜯어건네니 좋다고 받아먹는다. 고구마피자에는 못미치지만 먹을 만하군. 조금 더 줘봐. 그러면서 반 이상을 뜯어가버린다. 계단을 오르며 빵을 우물거리는데 문득, 준회에게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준회야. "
" 어? "
" 너, 김지원이랑 친해? "
준회가 내게서 뜯어간 빵을 조금씩 뜯으며 말했다. 아, 부랄친구야. 적나라한 어투에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하자 푸하하 웃어버린다.
" 집안끼리도 친하고,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친구였어. 어릴 때 부터 계속 같이다녔지. 유치원이든 학교든. "
" ....그렇구나. "
" 솔직히 말해봐. 김지원 존나 싸가지없지? 가만 보면 개썅마이웨이고. "
" ....그런가. "
" 걔가 원래는 안그랬거든. "
준회의 말에 내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 어릴 때도 지금처럼 성격은 더러웠는데, 뭐라해야 되지. 지금처럼 딱딱하지는 않았어. 나보다 장난기도 더 많았고 오히려 내가 김지원을 말릴 정도였으니까. "
그것은 아주 뜻밖의 이야기였다. 준회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 중학교 3학년 올라갈 무렵이였나, 그 때부터 슬슬 애가 이상해지더니 저 모양이라니까. "
" 왜 그러는지, 물어본 적 없어? "
" 김지원은 원래 지 얘기든 집안 얘기든 안해. 나는 기집애마냥 다 털어놓는 성격인데, 쟤는 아주 어릴 적 부터 그랬어. 먼저 꼬치꼬치 묻는 것도 내 성격에 안맞고, 그냥 기다리다보면 지가 얘기하고 싶어 질 때 얘기 하겠지."
벌써, 복도 끝으로 1학년 5반이 보였다. 곧 종이 칠 때가 되었는지 아이들이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옆 쪽 계단에서 지원이 유인물을 가득 들고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나란히 걸어가던 준회가 걸음을 멈추었다. 지원과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 00이랑 매점갔다왔는데, 니가 좋아하는 카스테라는 다팔렸더라. "
" 아침부터 빵이야. 너, 아침 안먹고 나왔냐? "
" 어. 먹기 싫어서. 아, 근데 일교시 뭔데? "
" 국어. "
" 아, 좆됐다. 책 없는데! 야,야 너네 먼저 들어가라. 나 김동혁한테 가서 책 좀 빌리고 올게. "
그 말을 끝으로 준회가 재빠르게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복도에는 지원과 나. 단 둘만 남았다. 나는 조금 남은 빵이 들어있는 빵봉지를 구기며 반으로 들어가려고 발을 뗐다.
" 준회는 널 아주 마음에 들어해. "
물론, 친구로서. 그 말에 걸음이 멈추었다.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 구준회는 단순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방 보여. 그리고 자기가 좋은 사람에게는 정성을 다하지. 어릴 적 부터 그랬거든. "
" ......... "
" 그러니까, 니가 알아서 거리 둬. "
" ...뭐라고? "
" 준회는 너한테 거리같은거 안 둘 거니까, 니가 알아서 요령껏 거리두라고. "
지원이 심드렁하게 내뱉는 그 말에, 나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게 느껴졌다.
" ..내가, 왜 그래야하는데. "
" 뭐? "
" 준회랑 친구가 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그런데 김지원 네가 왜... "
" 가깝게되니까. "
" ..뭐? "
" 그리고, 그게 싫으니까. "
지원은 유인물을 든 체, 나를 지나치려했다.
" ...똑바로 해, 김지원. "
지원의 걸음이 멈추었다.
" 가까워지는게 싫은거야, "
" ......... "
" 가까워질까봐 싫은거야. "
지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 아까, "
" ......... "
" 너. 늦었네, 라고 했어. "
" ......... "
" 내가 안와서, 걱정했니 너. "
미동도 않고 서 있던 지원이, 하. 하고 가볍게 웃음소리를 냈다.
" 걱정이라. "
" ........ "
" 내가 널 걱정한다는 생각을 하기 보다, "
" ......... "
" 내가 널 걱정할 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었어야지. "
그 말을 끝으로 지원은 반으로 들어가버렸다. 지원의 공기는 늘 날이 서 있다. 그래서 숨을 내쉬기만 해도 몸 곳곳이 베이는 듯 살이 아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등 뒤로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어쩌면, 여전히도 우리는.
미성년(未成年)
" 괜찮지? 여기 파스타 유명해. "
" 맛있네. "
몇 일 만에 만난 준회의 얼굴을 더 좋아보이는 듯 했다. 많이 먹어. 내 수저위로 피클을 올려주며 준회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새 작품 언제 들어가? 조금 더 쉬다가. 많이 쉬었으면 좋겠다. 너 작품 들어가면 바빠서 이렇게 얼굴보고 밥먹는 것도 힘들 거 아냐.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 맞다. 준회가 냅킨으로 입을 훔치며 말했다.
" 그저께 김지원 만났어. "
" 아, 그래. "
" 새끼, 많이 바쁘더라. 때문이지 재건도 더 어마어마해졌고. "
" 관심없어. "
" 우리 회장님이 나 완전 들들볶아. 김지원 반만 닮으라고. "
" 잘 좀해. "
" 여기서 뭘 더 잘해. "
나는 손에 들고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준회는 앞머리를 한번 쓸어올렸다. 피곤하다는 표정을 한다.
" 너도 알잖아. 난 회사 물려받을 생각 없어. "
원래도 낮았던 준회의 목소리가 조금 탁하게 갈라졌다.
" 내 뜻대로 안되면, 그 자리 물려받아서 아주 높이 쌓아올릴려고. "
" ......... "
" 그 다음에, 우리 회장님 죽기 전에, 공든 탑을 부술거야. 흔적도 안남을 정도로 산산조각. "
" ........ "
" 그게 내가 우리 회장님한테 하고 싶은 복수. "
" ..준회야, 이제.. "
"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묻고 싶은거지? "
" ......... "
" 글쎄, 너는 그게 됐어? "
" .......... "
" ..너도, 아직이구나. "
너는 됐어. 그 물음에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속이 답답했다.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모순적이지, 나도 하지 못하면서 너더러 강요하는 내 꼴이. 준회가 잔을 들어 물을 한모금 마셨다.
" 다들 어쩜 이렇게도 추악한지. "
" ........ "
" 그래도 난 네가 걱정이야. "
" ......... "
" 회장님 보다 더 큰 산이 앞에 버티고 있잖아. "
큰 산. 그것은 지원을 의미하는 말이였다.
" 방법이 있을 수는 있어. "
" ......... "
" 탑을 쌓고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는거지. 이 탑이 완성되면 그 순간 바로 부숴달라고. "
" ......... "
" 탑을 쌓고 있는 사람이 뭘 요구해 올지는 모르겠지만. "
준회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곤 덧붙였다. 하지만, 난 그 방법 추천 안하는거 알지? 준회를 지그시 바라보다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놓았던 포크를 다시 잡았다. 입 안으로 돌돌 감아놓은 파스타를 집어넣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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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오늘 분량폭발! 분명히 대충 틀을 잡아놓고 시작했는데, 계속 서술이 길어지는 바람에 죽는 줄 아라써여...너무 힘드러여..
전개를 보니, 완결까지 한 백만편은 남은 것 같아요. (먼산) 저번 편 댓글달아주신 독자님들 모두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정성 가득한 감상평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몰라요. ♥ 폭발적인 조회수도, 댓글수도 아니지만 전 지금도 충분히 과분한 사랑 받고있다고 생각해요.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 그리고 조만간 미성년과 함께 연재할 팬픽도 올릴 것 같아요. (커플링은 바비아이!)
예전부터 구상하고 있던건데 이제야 시작하게 되네요. 미성년에 많이 지장가지 않도록 할게요. 독자님들 다음편에서 만나요.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