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강국에 보기 드물던 눈이 내렸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였으나 넓은 영토 중 남쪽에 위치한 비강국의 수도는 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한 편이었기에 궐 안에서만 지내는 황실 사람들은 평생 눈을 보는 일이 적은 편이었다. 하얗게 덮인 세상에 다들 들뜬 듯 평소 법도에 억눌려 살던 궁녀들도 아직은 마냥 어린 소녀들인지라 뛰쳐나와 제각기 눈을 뿌려대기도 했고 그런 궁녀들을 혼내는 이들도 없었거니와 들뜬 탓에 전에 없던 실수를 저질러도 다들 몇 년 만에 맞는 눈에 어느 정도야 눈 감아주는 눈치였다.
1년 내내 따뜻한 날씨를 가진 완영국의 왕 힘찬은 평생 살며 처음으로 마주한 눈에 밖으로 나와 신기해하기도 잠시, 눈이 내림에 따라 더 매서워진 날씨에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들어가자, 했다. 돌아가는 길에 언뜻 본 궁녀들은 잔뜩 들떠서 자기들끼리 재잘대며 돌아다니던데, 문득 떠오른 여제의 얼굴에 설핏 웃음을 흘렸다. 그도 소녀같이 웃으며 눈을 맞았으려나. 아니면 춥다며 그 깨끗한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까지 고집스레 다문 얼굴로 까칠하게 굴었으려나. 뭔들 사랑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나 하며 천추전으로 향할 채비를 했다.
곧 미시(오후 1~3시)였다. 즉위식 이후 공식적인 황제와 부군들의 위치로, 여제가 직접 마련한 자리인 만큼 힘찬은 한껏 꾸미고자 애썼다. 마치 암컷을 홀리려 화려하게 태어난 공작 마냥 제가 입는 것들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따뜻하고 풍요로운 국가이니만큼 문화적으로 가장 발전한 완영국은 옷감이나 자수에서도 여러 나라들 중에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했다. 털장갑과 털신을 준비하라 지시하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며칠 전 즉위식을 앞두고 잔기침으로 고생하던 여제가 떠오른 듯 크기가 다른 털장갑 하나와 명주솜을 누빈 목도리를 따로 챙긴 뒤 처소를 나섰다.
"오셨습니까."
제법 살가운 대현의 인사에도 영재는 고개만 까딱할 뿐 까칠하게 올라간 눈꼬리는 내릴 생각을 않은 채 용국의 옆자리에 앉았다. 대현은 익숙한 듯 웃음을 거둔 뒤 입을 다물었고 영재는 익숙하게 그런 대현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국은 무어라 한 마디를 뱉으려다 그 대신 포기섞인 한숨을 뱉어낸 뒤 다시금 제 손에 들린 서책에 시선을 돌렸다.
"뭐야, 영재 형은 언제까지 대현이 무시할겁니까?"
"…최 부군, 그렇게 안 해도…."
"좀 조용히 해 봐. 솔직히 영재 형은 사람이 항상 이렇게 찝찝한 표정만 하고. 응?"
준홍은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아 팔짱을 끼더니 늘 굳어있는 영재의 표정을 따라하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영재도 어이없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고 준홍은 그 모습에 또 조잘조잘 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현을 향한 자연스러운 하대에 대현은 잠시 씁쓸한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다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값비싸보이는 보석이 알알이 박힌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준홍에게 다시 유한 시선을 두었다.
"이게 말이야, 저 멀리 바다 건너 불란서에서 가져온 거야. 그 곳에는 얼굴 하얗고 코 큰 외놈들이 살고 있대. 쉽게 구하지 못하는 건데, 이번에 들여온 물건들 중에 이게 유난히 눈에 띄는거야. 맞아, 어릴 적에 내가 뭣모르고 우리 폐하, 아니. 공주님 보석함을 망가뜨린 적이 있거든. 그 일이 생각이 나서…."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공주였던 여제의 어린 날에 대한 이야기들로 이어졌다. 제 장난으로길었던 머리를 자르게 되었던 이야기, 스승에게 혼이 나 제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던 이야기에서는 용국이 멋쩍은 듯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안 듣는 척 하면서도 모든 이가 준홍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준홍은 그런 관심이 기분좋다는 듯 더욱 높아진 목소리로 신나게 떠들었고, 이야기는 무르익어 공주 시절 봉긋해진 몸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될 무렵이었다.
"다들 사이좋게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여제의 목소리에 다섯 부군은 제각기 힉 하는 소리를 내며 아무 일도 없는 척 제 자리에 앉았다. 준홍의 뒤로 여제가 지나가며 잠시 서늘한 기운이 일었다. 여제와 늘 함께하는 호위무사인 종업까지 제 자리를 찾아 앉았을 때, 여제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디어 제가 이 나라의 여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저의 부군들로서 더 열심히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더불어, 다들 짐작하시듯 내년 봄이면 이 중에서 황제로 한 분이 추앙되실겁니다.
"그러니 앞으로 1년간은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마련된 처소에서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아 물론, 호위무사로 있는 문 부군은 제외하구요."
"예, 폐하."
알고 있었다는 듯 힘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여제가 힘찬과 눈을 맞춘 뒤 살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완영국은 지금 누이께서 정사를 보고 계시다지요?
그 다정한 어투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출 새도 없이 힘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저를 향해 온화히 웃어주는 얼굴이 황홀했기 때문이리라. 저를 향하는 다른 부군들의 시선들이 제법 매서웠지만 그것은 힘찬에게 중요치 않았다. 따뜻히 전하려 품 안에 숨겨놓은 털장갑에 더욱 열이 올랐다.
여제의 말이 끝나자 맨 처음으로 몸을 일으킨 것은 용국이었다. 끝마쳐야 할 일이 남았다며 쌩하니 가버렸고, 그 뒤를 따라 영재도 천설국의 사람이 왔다는 이유로 몸을 일으켰다. 용국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부터 시무룩한 얼굴을 하던 여제가 자신도 다음 일정이 있다며 천추관을 나섰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힘찬은 남은 두 부군에게 간단히 인사를 마친 뒤 혹시라도 그가 멀리 달아났을까 급히 달음질을 했다. 천추관을 나오자 곧 보이는 뒷모습에 잠시 멈춰서 품 속의 털장갑과 누빔목도리를 확인한 힘찬은 뿌듯한 얼굴로 여제를 부르려 입을 벙긋했고, 곧 여제에게 다가온 영재의 모습에 벌렸던 입으로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전에 없이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어보이더니 제 옆의, 천설국의 의복을 입은 이를 내어보이며 소개를 시키는 모양새였다. 천설국의 사신은 잠시 영재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며 열어보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잠시 고개를 갸웃한 여제를 대신해 종업이 그 상자를 열었고 여제는 곧 환하게 웃음지으며 상자 속에 담겨있던 털신과 털조끼 더불어 털장갑까지 꺼내보였다. 기쁘다는 듯 그 자리에서 장갑을 껴보이는 여제를 보며 영재가 다정스레 말을 건넸다.
"겨울이 매서운 천설국의 특산품이옵니다. 최근 고뿔에 드셔서 고생하시는 모습에 이렇게 준비시켰는데, 마음에 드십니까?"
평소 냉하기만 했던 영재에게 의외의 감동이라도 받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여제의 얼굴은 힘찬 쪽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힘찬은 자연히 알고 있었다. 분명 사랑스럽게 또 웃고 있을 것이라고. 오늘은 힘찬의 착오였다. 늘상 따뜻한 완영국에서 아무리 겨울의 것을 만든다 하더라도 매서운 추위에서 만들어진 천설국의 것을 이길 수가 있을까. 허탈하게 웃던 힘찬과 문득 마주친 영재의 두 눈이 다시금 매섭게 빛났다. 그러기도 잠시, 다시금 온유한 미소를 띄운 영재가 덧붙여 말했다.
"겉이 화려하면 무엇합니까, 득이 있어야지요."
도망치듯 뒤돌아 걸었다. 제 고향을 담은 듯 차가운 눈동자에 꿰뚫린 기분이 꺼림칙했다.
대현의 처소는 한 밤중에 여제의 등장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잠자리에 들려 누웠으나 황실의 광대로 살던 것이 어느 날 여황제의 부군이 되어 자신만을 위한 처소가 만들어지고 누군가를 부리는 일이 어색하기만 한지라 대현은 근 며칠간 잠조차 제대로 못 이루는 상황이었음에 밤동무가 되어 줄 여제의 등장은, 아니 어쩌면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반가운 것이었으나 곧 여제의 얼굴을 본 대현은 그 마음도 거두어야 했다.
모든 이가 내보내지고 단 둘만 남은 처소 안에서 고운 의복을 갖춰입은 여제가 흐트러짐 없는 겉모습과는 대조되도록 눈가와 코 끝을 붉히더니 독하게 물었던 입술을 놓으며 끅끅 숨을 고르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심스레 손을 뻗어 하얗게 질리도록 쥔 주먹을 두 손으로 덮어 잡자 금방이라도 울듯 울렁이는 눈이 또 안쓰러웠다.
"제 앞에서는 감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여제를 조심스레 품에 안고 도닥였다. 또 대제학께서 울리셨구나. 이제는 당연시되는 결론에 작게 한숨을 뱉은 뒤 상처받은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싶어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제 침수자리에 여제를 앉힌 대현은 자연스레 서랍장 속 낡은 손인형 몇 개를 꺼내더니 그대로 자신만의 인형극을 시작했다. 공주와 공주를 짝사랑하던 광대 그저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이제는 너무 자주 들어 질리고 싫증이 날 법도 한데 여제는 항상 그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을 그치고 샐쭉 웃었다. 대현이 유치한 인형극을 관두지 못하는 이유였다.
환하게 웃던 여제를 바라보던 대현이 천천히 눈을 맞추고 특유의 따뜻한 눈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원망하지 마십시오."
"…."
"폐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분이 현명하시다는 걸요."
그 말에 다시금 시무룩해지는 얼굴로 손을 뻗었다 멈칫하더니 그대로 손을 내려 여제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혹시라도 내 님 지저분한 제 손으로 만졌다 먼지라도 묻을까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티거입니다 |
안냥하세용 부족하기만 했던 첫 번째 글이 초록글에 오르는 영광을 맞았습니다! (빵빠레)
그치만 오늘은 제가 이래저래 바빠서인지 마음만 앞서고 저의... 똥손이... 드러나는 순간이라고나 할77ㅏ...☆ 힘찬이의 애닳는 짝사랑과 야망파 영재, 철벽인 용국이와 힘찬이랑은 좀 더 다른 의미로 애닳는 대현이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막라는 좀 더 천천히 진행될 예정!
맞아요 이상합니다 (침울)
그래도 전 글에 대해서 좋은 반응들을 생각보다 더 많이 보여주셔서 감사했어요ㅠㅠㅠㅠ
항상, 더 더 발전하는 모습 보여드리려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영원히 함께 내 사람들과 Forever with B.A.P
♥ 워더 / 코난 / 지야 / 메리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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