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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합작품, 긴글주의, 곰글주의*

*살짝 몇가지 부분들이 수정되었습니담/조금 달라욥*

 

 

 

[알베르토x줄리안/알줄] 마지막 임무, 그를 지켜라.

 

w. 에기벨

 

 

 

 

 

 

줄리안은 서둘러 밖을 나섰다. 실수로 알람시계를 꺼버리는 바람에 지각할 위기에 놓여버려 아침이고 뭐고 대충 옷을 걸치고 밖을 나섰다. 매일 아침 비담아파트 앞에서 따뜻한 커피와 차를 파시는 아주머니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아주머니, 한 잔요!”
“아이구, 총각. 오늘은 좀 늦은 모양이네. 얼른 만들어줄게.”


아주머니는 익숙한 듯 줄리안을 보고 중형 사이즈의 컵에 따뜻한 커피를 채워 넣고 뚜껑을 덮은 뒤 줄리안에게 건네주었다. 줄리안은 커피를 받음과 동시에 1000원을 내밀었다. 늦어서 바쁜 출근길에도 빼먹을 수 없는 아주머니의 커피는 양도 많고 맛있으면서도 천원밖에 하지 않았다.


“어? 이 로고는 뭐에요?”
“아, 그거? 내가 이래도 몇 년 동안 여기서 팔아왔는데 이름 하나 없으면 섭섭하잖어. 그래서 만들어봤지. 미연네 커피.”
“아주머니 이름을 따서 만든거네요!”
“호호, 그렇지.”


줄리안은 아주머니께 미소를 짓고 나서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을 빼먹지 않고 말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자 벌써 8시 32분이었다. 회사까지 가려면 40분은 넘게 걸리고, 출근시각은 9시까지였다. 줄리안은 손에 든 커피를 홀짝 마셨다. 아쉽지만 한 모금으로 만족하고 줄리안은 뛰기 시작했다.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5분, 뛰어서는 2분정도였다. 평소에도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덕에 뛰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고, 항상 커피를 들고 뛰기 때문에 커피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다만 문제가 있다면 줄리안이 실수로 안경을 벗고 왔다는 거였다. 너무 바빠서 아침에 안경을 쓰지 않았고, 시력이 매우 나쁜 편은 아니어서 줄리안 자신도 몰랐던 게 문제였다면 문제였을까. 줄리안은 스크린 도어에 붙어있는 안내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글자를 읽으려 가까이 다가갔을 때, 누군가와 부딪혔다.


“앗!”


커피가 엎질러져서 부딪힌 사람의 양복에 흐르고 있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살짝 험상궂은 외모를 가진 그 사람은 웃지도 않고 줄리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뜨거울 텐데, 그 남자는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이거 비싼 건데.”


 커피는 남자의 양복을 따고 뚝뚝 떨어져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줄리안은 손수건을 꺼내들고 닦으려했지만 저지당했다. 남자는 명함을 내밀고 ‘오늘 일 끝나고 봅시다.’라는 말과 함께 역을 빠져나갔다. 잠시 넋을 놓았던 줄리안은 자신이 타야하는 지하철 안내방송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 샌가 손에 쥐어진 명함에는 ‘NSM Company, CEO Alberto’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알베르토?’


줄리안은 무엇인가 익숙한 그 이름이 뭔가 찜찜했지만 생각을 접어두고 지하철에 올랐다. 역시 눈에 띄는 빈자리는 없었고, 줄리안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가는 내내 찜찜한 기분에 결국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Julain:나 오늘 출근길에 커피 쏟았다ㅠㅠ. 근데 내가 커피 쏟은 그 사람이 명함이랍시고  줬는데 이름이 알베르토야. 뭔가 익숙한데 누군지 모르겠어. 아는 사람인가?
Robin:? 알베르토?
Julian:응응, 알베르토. 누군지 알아? 비싼 양복에 쏟았다고 오늘 일 끝나고 보자더라...
Robin:헐, 방금 알베르토라고한겨? 진짜 모름?
Julian:모르니까 물어본 거잖아ㅠ


로빈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 얼굴은 오늘 아침에 봤던 그 사람이었다.


Julian:헐? 이 사람 사진 어떻게 구했어? 유명한 사람이야?
Robin:하...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이 사람이야?
Julian:사진보니까 맞는데, 왜 누군데 그래?
Robin:너 이제 망했다.
Julian:뜸들이지 말고 빨리 얘기해, 왜왜.
Robin:그 사람 유명한 조직보스임.
Julian:ㅇ?
Robin:아, 마피아라고! 마피아 보스라고!
Julian:......뭐?
Robin:가서 싹싹 빌어, 잘못했다고. 아, 바보야. 비싼 양복에 왜 커피를 들이부어!
Julian:아, 들이붓긴 누가 들이부었대! 실수로 부딪힌 거란 말야ㅠㅠㅠㅠㅠ


줄리안은 당장 지하철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안경을 쓴다거나 아니면 오늘은 커피를 사지말걸, 아니면 바보같이 안내문을 읽으려고 앞으로 뛰쳐나가지 말걸. 뒤늦게 밀려오는 후회 속에서 줄리안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손에는 반쯤 쏟겨진 커피 잔이 들려있었다. ‘이 커피 때문에…….’ 줄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빈의 말대로 싹싹 빌기만 한다면 알베르토라는 그 무서운 사람이 자신을 죽이거나-혹은 때리거나-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무리 비싼 양복이라도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진 않을 것이라며 합리화를 해보았지만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일하기 글렀다.


다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켜고 회사로 곧장 뛰었다. 왜 이 빌어먹을 회사는 문을 회전문으로 해놓았는지, 늦은 마당에 더 늦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연타하고 시계를 보자 9시 12분이었다. 하필이면 엘리베이터는 12층에 있어서 이렇게 애간장을 태우는지, 오늘은 정말 운수가 없으려나싶었다. 지옥 같던 1분이 흘러가고 땡!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줄리안은 8층을 재빨리 눌렀다. 문이 닫힐 때쯤 누군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지만 줄리안은 못 본 척 닫기 버튼을 눌렀다. 8층에 도착하고, 줄리안은 재빨리 뛰어 자신의 자리로 돌진했다.


“줄리안, 늦었네?”
“헉, 헉. 알람을 실수로 꺼버려서요.”


기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줄리안은 기욤의 옆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항상 회사에 1등으로 도착해서 늦는 사원들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장 팀장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팀장님은요?”
“아까 무슨 일 있다고 내려가셨는데?”


줄리안은 불현 듯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1층에서 누가 급하게 달려왔었는데 그게 장 팀장님이랑 비슷했던 것 같은데……. 설마, 아니겠지. 줄리안은 애써 생각을 떨쳐내려 했지만 곧 띵-하는 엘리베이터 소리와 함께 도착한 사람은 장 팀장이었다. 무엇인가 화가 잔뜩 나보이는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장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줄리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늦었다는 사실을 알려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욤 형, 제가 나중에 한우 사드릴 테니까 늦은 거 절대 알리면 안돼요!”
“당연하지.”


기욤은 엄지를 척 내밀었다. 줄리안은 기욤은 믿을 수 있겠다싶어서 환하게 웃었다. 책상에 수그려서 작게 속삭이던 줄리안은 책상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미소를 거뒀다.


“줄리안?”
“...네?”
“잠깐 이리로 와줄래요?”


하아, 줄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잠깐의 틈사이로 나를 본 건가. 팀장실로 끌려가는 줄리안을 기욤은 안타까운 듯 바라봤다. 기욤이 입모양으로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응? 뭐라고?’
‘한-우-는-쏘-는-거-다?’
‘...’


줄리안은 엿을 날릴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장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팀장 장 위안’이라는 명패가 놓인 커다란 책상 앞에 초라하게 놓여진 작은 의자에 줄리안은 앉았다. 저절로 허리가 숙여지고, 어깨가 작아지는 자리였다.


“오늘 늦었죠?”
“아, 네. 팀장님 죄송합니다. 알람시계가 고장나버려서…”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이었다. 줄리안은 조심스럽게 장위안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찌푸린 얼굴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줄리안은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1층에서 저를 봤습니까?”
“예? 아뇨, 못 봤습니다.”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뛰어오면, 열림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주는 게 예의죠, 줄리안?”
“네. 그렇죠, 그렇죠.”
“저는 예의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네네.”
“더불어 거짓말 하는 사람도요.”


줄리안이 장위안을 보지 못 한건 사실이었지만, 뛰어오는 사람을 무시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장위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썼다.


“이제 나가봐요.”


10여분이 넘는 설교 끝에, 줄리안은 팀장실을 나갈 수 있었다.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억누르고 최대한 밝게 웃으며 팀장실을 나왔다. 닫힌 문 뒤로 엿을 날리고 한 발짝 다리를 뗀 순간, 줄리안은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 했다.


“야, 줄리안!”
“윽, 나 넘어질뻔 했잖아, 로빈!”
“이 정신 나간 놈아, 그런 사람한테 커피를…읍”


줄리안은 황급히 로빈의 입을 막고 탕비실로 향했다. 로빈은 아주 쉽게 줄리안의 손을 떼어내고 말했다.


“너 안경은 어따 팔아치웠어?”
“집에 두고 왔어, 일단 탕비실에 가서 얘기해.”
“아오.”


탕비실에 도착하자마자 줄리안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로빈은 줄리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안경 벗지 말라고 했잖아.”
“그랬지. 그래서 여태껏 잘 쓰고 다녔잖아.”
“그러니까 오늘도 잘 썼어야지! 누가 네 얼굴보고 반하면 어떡하려…”
“쉿, 조용히 해!”


탕비실 밖으로 여자 사원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행히 수다 중이라 듣지못한 듯 보였다. 로빈은 답답하다는 듯 줄리안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이제 어쩔 셈이야?”
“몰라... 일단 일 끝나고 보자고 했으니 회사 끝나고 생각해봐야지.”
“아, 진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알았어.”


로빈은 시계를 보더니 가야할 시간이라고 말하며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줄리안은 커피를 타먹을까 생각하다가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리곤 그만두었다. 로빈은 다른 부서라서 사내연애하는 것을 들킬 일은 없었지만, 줄리안은 항상 조심하고 조심했다. 혹여 누가 들을세라 자신은 그런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로빈은 마구 내뱉어서 스트레스였다. 줄리안은 녹차를 타고 자신의 자리로 갔다. 책상 위에는 온갖 서류가 올려져있었다. 기욤의 자료랑 다니엘의 자료였다. ‘이게 왜 내 책상에 있지?’라고 생각할 때쯤 스친 생각.


“아, 맞다! 오늘 프레젠테이션!”


아주 중요한 발표가 있는 날인데, 오늘 준비를 하나도 못했다. 줄리안은 다급하게 시계를 쳐다봤다. 9시 47분. 발표시간은 10시였다. 줄리안은 서둘러 자료를 점검하고, 발표계획을 세웠다. 그렇지만 방대한 자료에 줄리안은 곧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0분 안에 점검하는 것은 무리였다. 줄리안은 좌절한 채 엎드렸다. 오늘 운수가 없으려고….


“줄리안, 발표 준비 다했어?”


그 와중에도 기욤은 해맑게 묻고 있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빼끔 들고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덕에 기욤은 먹던 에너지 드링크를 쏟을 뻔했고, 줄리안은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하아아.”


연습한 것이라곤 고작 3일이 전부였다. 그것도 밤에 잠깐잠깐 연습했던 거라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줄리안은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52분! 줄리안은 재빠르게 자료를 읽어나갔고, 자신의 요약된 자료도 훑었다. 뭐라도 읽으면 도움이 될 거야. 줄리안은 아주 빠르게 읽어나갔으나, 57분. 다시 엎드린 채 울었다. 난 망했어.


결국 발표는 어버버, 거리며 끝났고 줄리안은 완전히 좌절했다. 어떡해, 다니엘 형이랑 기욤 형이 열심히 만들어 준건데. 오늘은 정말 운수가 없는 날이다. 회사일도 망치고, 난 이제 짤릴지도 몰라. 줄리안은 오열 아닌 오열을 하며 동동 굴렀다. 기욤은 살짝 토닥여주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기약속도 미루고 열심히 만든 건데.


“기욤 형.”
“왜?”
“아니에요.”


줄리안은 그날 하루 종일 일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았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때우고 넋이 나간채로 모니터만 바라보는 모습에 기욤이 걱정했지만 물으면 얼빠진 얼굴로 ‘네?’만 반복하는 통에 기욤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6시. 퇴근시간이 되고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들 퇴근하는데 아직도 얼빠진 얼굴로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는 줄리안을 기욤이 흔들었다.


“줄리안, 퇴근할 시간이야.”
“네?”
“줄리안. 퇴근.”
“네?”
“줄리안!”


결국 기욤이 뺨을 한 대치고나서야 정신을 차린 줄리안은 기욤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요, 형?”
“퇴근할 시간이야.”
“아?”


줄리안은 시계를 쳐다봤다. 퇴근할 시간이네, 줄리안은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들고 영혼 없는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로빈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꼴을 보니 하루 종일 일도 못 했겠구만.”
“나 이제 어떡하지?”
“또 왜?”
“중요한 발표가 있었는데, 내가 다 망쳤어.”
“잘하는 짓이여.”
“팀장님한테 미움을 샀지.”
“잘하는 짓이여.”
“기욤 형한테 한우도 사야해.”
“허?”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줄리안은 비틀비틀 올라탔고, 그런 줄리안을 보고 로빈은 걱정스러운 듯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위로했다.


“정신차려, 임마.”

 

 

 

 

*

 

 

 

줄리안은 명함을 꺼내들었다. 로빈이 같이 가겠다고 하는 것을 말리고 줄리안은 택시를 탔다. ‘저 아침에 봤던 사람입니다. 일이 끝나서 연락드렸습니다.’라고 보내자 짤막하게 돌아온 답장은 장소였다. ‘NSM Cafe, 5층.’ 심플한 답변에 줄리안은 ‘네’라는 짤막한 답을 보내려다가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라고 바꾸어 보냈다. 이러면 좀 더 좋아하지 않을까?, 나를 좀 더 좋게 봐주지 않을까?


택시가 도착한 곳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예쁜 건물이었다. 카페라더니, 정말 고급스러웠다. 뻥 뚫린 유리창 너머로 두런두런 수다를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총 5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었고 줄리안은 4층과 5층은 어두운 것에 당황했다. 사람들은 3층까지만 있었고 4층과 5층은 블라인드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줄리안은 아침에도 자신을 괴롭혔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버튼을 눌렀다.


도착한 곳은 굉장히 어두웠다. 폐건물마냥 불이 하나도 켜져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뗀 줄리안 앞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 넵.”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바로 이런 느낌일까 생각하며 줄리안은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남자는 잘도 걷고 있었다. 복도 끝에는 살짝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문이 있었고, 남자는 줄리안을 그곳까지 이끈 뒤 멈춰섰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줄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무엇이 있을까, 검은 양복을 입고 늘어선 사람들? 아니면 고급스러운 소파와 경치 좋은 테라스? 줄리안은 최대한 밝게 웃으며 들어섰다. 그렇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알베르토는 책상에 앉아서-그것도 아주 평범하고 흔한 책상-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물론 뒤에 경치 좋은 유리창이 있긴 했지만, 마피아의 보스치고는 꽤나 수수했다. 고풍스러운 소파도 없었고 넓은 방 안에는 그저 책상과 책장뿐이었다. 아, 소파가 있긴 있었지만 그냥 흔한, 검은 소파였다. 줄리안은 소파에 앉을까 고민하다가 알베르토의 손짓을 보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 앞 작은 테이블에는 양복이 올려져있었다. 아직도 자신이 쏟은 커피향이 나는 양복.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요?”
“아, 아뇨, 없습니다.”
“이래봬도 여기 카페에요. 이봐, 세바스찬.”


알베르토가 책상 위에 버튼을 누르며 말하자 말끔한 웨이터 복을 입은 남자가 메뉴판을 들고 들어섰다.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반대편에 앉았고, 메뉴를 고르라는 듯 재촉했다. 결국 줄리안은 유자차 한 잔을 주문했고 알베르토는 간단하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웨이터는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뒤 빠져나갔다.


“저, 보상을 원하시는 거면 얼마 정도 드려야할까요?”
“돈으로는 해결이 안될텐데요.”
“예?”
“이거 전 세계에 딱 10벌만 있는 양복입니다.”
“허……”
“값으로 따질 수가 없는 양복이죠.”


줄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진짜 운수가 없으려고, 하필이면 전 세계에 10벌 밖에 없는 양복에다 커피를 쏟고 그것도 모자라서 범죄조직의 보스한테! 똑똑, 웨이터가 유자차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다시 인사를 하고 나갔다. 줄리안은 유자차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갈색으로 변한 와이셔츠와 얼룩진 재킷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럼 어…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음, 장기라도 파실래요?”
“예? 아, 네?”
“농담이고. 진짜 어떡하실래요?”


줄리안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유자차를 집어 들었지만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안 뜨거워요?’ 알베르토가 다정하게 물어왔지만 줄리안은 그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했다. 혀가 좀 아린 것 같기도 한데, 제가 미각을 잃었나 봐요.


“제가 월급쟁이에다가 항상 적자거든요, 아직 결혼도 못했고… 돈으로 못 갚으면 몸으로라도 때우겠습니다. 제가 젊으니까, 몸으로 하는 거면 다 할 수 있어요.”
“몸으로 때우는 거라면 어떤거?”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아…”


알베르토는 우아하게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살짝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럼, 내 애인 역할 좀 해주겠어요?”
“푸웁-, 네?”


줄리안은 먹던 유자차를 뿜어냈다. 애꿎은 양복은 노란색 유자차로 또다시 더렵혀졌고 알베르토는 얼굴을 찡그렸다. 드라이 맡기려고 했는데, 뭐하는 짓이야.


“그건 봐드릴 테니, 1년간 저랑 연애하죠?”
“왜, 왜요? 저는 남자고 아니 무엇보다 왜요?!”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요. 왜요, 싫어요?”
“어…”


‘싫으면, 돈으로 때우시던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알베르토에 줄리안은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알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로빈이 떠올랐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지? 줄리안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은 착각에 눈을 비볐다. 알베르토는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이름, 집 주소, 회사, 주민번호 다 적어요.”
“이건 왜…”
“애인끼리 기본적인 건 알고 있어야죠?”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게 너무 많네요. 줄리안은 결국 떨리는 손을 최대한 감추며 종이에 적어나갔다. 알베르토는 종이를 회수해갔고 줄리안에게 휴대폰을 내밀라고 말했다.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휴대폰에 무엇인가를 톡톡 쳐 저장했고 전화를 걸었다.


“이제 전화번호 교환도 됐네요. 그럼 내일 보죠.”
“내일 또요?”
“일 끝나면 차가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줄리안은 대기하고 있던 차에 몸을 실었다. 집 주소를 벌써 알려줬는지 기사는 말도 없이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고 집에 들어섰을 때 줄리안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으아, 오늘 하루만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줄리안이 이 모든 것이 무엇 때문에 꼬인 것인지 곱씹어봤다. 그래, 빌어먹을 알람시계 때문이었다. 줄리안은 알람시계를 박살내고 다시는 알람시계 따위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문자가 왔다.


[잘 들어갔어요, 줄리안?]


네, 빌어먹게도 잘 들어갔답니다. 인생이 꼬여가는 기분이 들어요. 줄리안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서 맥주 한 잔을 마시니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다행이네요. 내일봐요, 내 사랑]


…줄리안은 핸드폰을 집어던질까 심히 고민했다. 만난 지 하루만에, 아니 그것도 정상적으로 만난 것도 아닌데 ‘내 사랑’이라는 표현을 썼다. 알베르토,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자신과 사귀자고 한 건지 1%도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양성애자라는 걸 알고 있었나?’ 로빈과 사귀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하지만 아까의 행동을 돌이켜봤을 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로빈과의 사이는 모르는 듯 했다. 줄리안은 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여보세요, 줄리안?」
“응, 로빈. 나야.”
「어떻게 됐어? 그 사람이 해코지하든?」
“아니 그렇진 않았는데, 화내지 말고 잘 들어.”
「응, 말해.」
“그러니까.”
「응.」
“그 알베르토라는 작자가 나랑 1년간 연인이 되어 달래.”
「…」


수화기 너머로는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뒤늦게 고함이 터져 나왔다. 줄리안은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뭐라고?! 그 개자식이 너랑? 와, 도둑놈의 XX,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돈으로 안 되면 몸으로 때우겠다고 했지. 그래서 알겠다고 했어.”
「오, 마이, 갓. 넌 애인을 두고도 그런 말을 했단 말야?」
“어쩔 수가 없잖아. 그 양복이 전 세계에 10벌밖에 없는 거랬어. 돈으로 어떻게 갚냐? 그냥 1년 동안 애인인척 해주면 되는 거잖아. 우리 딱 1년 동안만 참자. 몰래 연애하고.”
「하아아…. 그래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나도 내가 한심해.”
「……1년이랬지?」
“응.”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하…. 그 변태새끼가 건드리면 전화해, 당장 달려갈 테니까.」
“알았어.”


마피아 보스를 상대로 로빈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만은, 줄리안은 알겠다고 답했다. 마음만이라도 고마웠다. 자신을 아껴주는 애인이 있어서. 줄리안은 힘든 몸을 침대에 뉘였다. 긴장이 풀리자 잠이 몰려왔다.

 

 

 

 

 

 

 

“줄리안 씨, 타시죠.”


줄리안은 여느 날과 같이 출근준비를 하고 밖에 나선 참이었다. 평소처럼 커피를 사고 정문을 나선 순간 검은 차 한 대가 자신의 앞에 멈춰섰다. 창문이 열리고 운전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줄리안에게 다짜고짜 차에 타라고 했던 거였다. 보나마나 알베르토가 보냈을 것이 분명하지만 줄리안은 묻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반가워욥.”
“아침부터…네, 반갑네요.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알베르토도 손에 커피 한 잔을 쥐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줄리안이 앉고 안전벨트까지 맸을 때 비로소 출발했다. 차는 부드럽게 굴러갔다.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건너편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줄리안은 자신이 마시는 커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커피, 안 마셔요?”
“전 원래 뜨거운 거 잘 못 마셔서요.”


게다가 이 커피는 어제 당신의 양복에 쏟은 커피이기도 하구요, 마시기가 좀 껄끄럽네요. 줄리안은 뱉지 못한 말을 담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사실 오늘은 커피를 마시지말까 고민했었는데, 결국 마시고 있었다.


“미연네 커피? 자주 마셔욥?”
“네, 매일 아침마다.”
“그 커피가 내 양복에 쏟은 커피?”
“…네, 그렇죠, 뭐…….”


줄리안은 또 다시 미각을 잃는 기분이었다. 왜 항상 맛있던 아주머니의 커피가 오늘따라 맛이 느껴지지가 않는 걸까. 줄리안은 창가 쪽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날씨는 참 좋았다. 날씨도 그리 춥지도 않고, 구름도 별로 없고, 참 좋은 날씨였다. 제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부담스러운 눈길을 주고 있는 알베르토만 제외하면 참 좋은 날인데.


“그런데 우리 호칭정리 좀 해야 하지 않겠어요?”
“호칭이요? 어떤 식으로요?”
“제가 줄리안보다 3살 더 많아욥.”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 않네요?”


마피아 보스래서 40살은 된 줄 알았건만 어쩐지 젊어 보인다했더니. 알베르토는 겨우 자신보다 3살 많았다. 3살 더 많은데 누구는 월급쟁이고 누구는 거대한 조직의 보스고…. 줄리안은 자신을 깎아내리기를 그만뒀다. 생산성이 없는 일이야!


“반말, 써도 되죱?”
“저는 존댓말 그냥 쓸래요.”
“…그럼 저도 존댓말 쓰겠습니다. 가끔가다 섞어서 쓰죱, 뭐.”
“넵.”
“……”
“……”
“그래서 호칭은 뭘로 할까욥?”
“저는 알베르토 씨…?”
“그럼 저도 줄리안 씨라고 할게욥.”


정말 빌어먹게 어색했다. 만난 지 겨우 이틀째, 호칭정리와 나이 정리를 끝냈다. 서먹하고 서먹한 느낌이 드는 알베르토 씨와 줄리안 씨라는 호칭. 줄리안은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을 겨우 억눌렀다.


“도착했네욥. 잘가욥.”
“네, 감사합니다.”


줄리안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차는 다행히도 별 탈없이 떠나갔고 줄리안은 아침부터 힘든 표정을 애써 감추고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

 

 

 

 

 

알베르토는 매일같이 줄리안의 아파트 앞 정문에서 기다렸고, 줄리안은 원튼 원치않든 그 호의에 응해야했다. 그리고 주말, 줄리안은 푹 쉬려고 계획한 일-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었지만-들이 알베르토의 문자 하나로 인해서 와르르 무너져내림을 느꼈다.


[주말에 데이트하지 않을래요?^_^]


저 깜찍한 이모티콘은 뭐람, 줄리안은 순간적으로 나오는 욕을 억눌렀다. 시간은 아침 9시 42분, 푹 자려고 했는데. 카톡도 아니고 문자라서 모른 척 잘까 생각해봤지만 후환이 두려웠다. 줄리안은 결국 짜증을 내면서 일어나야했다.


[무슨 데이트요?]
[음,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아뇨, 딱히 없어요.]


폰만 붙잡고있는 건지 답장은 정말 빠르게 왔다. 줄리안은 서둘러 잠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다듬었다. 느낌으로 봐서는 집 앞에서 대기 중인 것 같은데.


[그럼 시내에서 데이트라도 할까요?]
[네. 그러죠. 몇 시에 만날까요?]
[지금 당장 만나고 싶은데 너무 이르죠? 10시 30분 어때요?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차타고 데이트하기는 싫은데. 걷는 게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죠. 시내까지만 타고가요.]


대기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줄리안은 놀려줄 작정으로 아예 12시로 시간 약속을 옮길까도 생각해봤지만 생각해보니 너무 안쓰러운 것 같아서 그만뒀다. 대충 옷장에서 밝은 느낌의 셔츠와 니트를 입고, 머리를 다듬고 나자 대충 10시였다. 줄리안은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는 삭막하게도 맥주 2캔, 김치 조금, 먹다 남은 크레페 조금이 남아있었다. 줄리안은 크레페를 살짝 데워서 아침을 때우고, 완전히 준비가 끝났을 때 10시 23분이었다. 줄리안은 시계를 보면서 한숨을 살짝 내쉬고, 밖을 나섰다.


예상대로 알베르토는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모르는 척 뛰어서 가야하나?


“일찍 오셨네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욥.”
“어? 오늘은 알베르토 씨가 운전하는 거에요?”
“데이트니까욥. 아무도 없는 게 좋죱.”


줄리안은 알베르토의 옆자리, 조수석에 앉았다.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안전벨트를 매주고 부드럽게 엑셀을 밟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알베르토에 줄리안은 살짝 당황했지만. 향수냄새가 옅었다. 진하지도 않고 편안한 향수. 아무래도 오늘 데이트 한답시고 많이 꾸민 듯 했다.


“아, 갑자기 생각났어요.”
“뭔데욥?”
“오락실 가고싶어요! 오랜만에.”
“오락실? 그게 뭐에욥?”
“게임방 몰라요? 아, 모르실수도.”
“게임하는 곳?”
“대충 비슷한데, 좀 옛날 게임들요.”


갑자기 오락실에 가고 싶어진건 아니고 며칠 전부터 가고 싶어져서였다. 친구 놈이 SNS에 자기 게임하는 걸 올렸는데 옛 추억이 생각나서 가고 싶었다. 줄리안은 알베르토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을 거라고 예상하고 말하자면 특별한 이벤트 겸으로 가자고 한 것이었다.


“어딘지 설명해줄래욥?”
“저기, 저기로 가서 여기 골목으로 빠지면 되요.”


도착하자마자 줄리안은 동전을 교환하고 어린애마냥 뛰어다녔다. 알베르토는 처음 오는 오락실에 멀뚱히 서있었고, 줄리안은 알베르토를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격투 게임 앞에 선 줄리안은 동전을 넣고 알베르토를 이끌었다.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알베르토는 얼떨결에 앉기는 앉았지만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어둡고, 공기도 좋지 않고, 시끄럽고, 많은 사람들이-어린 애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오락실이었던 것인가. 그 사이에 수트를 빼입고 한껏 치장한 알베르토는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줄리안은 개의치 않고 START버튼을 눌렀고, 대충 조작법을 알베르토에게 설명했다. 조작법이고 뭐고 막 누르는 알베르토는 당연히 줄리안에게 질 수 밖에 없었고 줄리안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 알베르토 씨 진짜 게임 못하네요!”
“...처음이었어욥.”
“그래도 처음치고 잘했어요. 저를 상대로 2번이나 쳤잖아요.”
“…한판 더 해욥.”
“한판 더 하는데 이거 말고 다른 거.”


줄리안은 알베르토를 끌고 DJ 게임기 앞에 섰다.


“제가 이 게임 고수에요. 여기 랭크에 내 이름 있을걸?”


진짜였다. 알베르토는 랭킹에 버젓이 쓰여 있는 ‘JQ’를 보고 짝짝, 박수를 쳤다. 줄리안은 박수까지 칠 필요 없다며 말렸지만.


“요새는 별로 안 해서 실력 많이 죽었을 거에요.”
“보고싶어욥, 하는 모습.”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줄리안은 스트레칭을 하더니 심호흡을 하며 동전을 넣었다. 땡그랑-맑은 소리가 울려퍼지고 줄리안은 START 버튼을 힘껏 눌렀다. 알베르토도 2p로 참가했다.


“음악은 뭘로 할까나, 알베르토 씨는 처음이니까 중간난이도로!”


이 게임 역시 조작법을 대충 설명해준 줄리안은 화면에서 노트가 떨어지마자 무섭도록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알베르토는 모든 게 처음이라 박자는 물론이고, 간신히 노트를 맞추는 정도였고 줄리안은 온 몸이 게임과 하나가 된 듯 콤보를 놓치지 않았다. 결국 줄리안은 월등한 실력으로 게임을 마쳤고, 알베르토는 게임을 하다 중간에 포기하고 줄리안의 모습을 바라봤다. 줄리안은 마치 진짜 DJ라도 된 듯 날아다녔다.


“와, 줄리안 진짜 잘하네욥.”
“하하. 알베르토는 재미없었죠? 자동차 게임도 한판해요.”


그렇게 게임을 즐길 무렵, 알베르토의 전화벨이 울렸다. 한창 게임에 빠져서 즐기고 있던 알베르토는 수신인을 보고 얼굴을 굳혔고, 그에 줄리안 역시 게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알베르토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줄리안에게 게임하고 있으라고 말한 뒤 나갔다. 잠깐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알베르토는 웃으며 돌아왔고, 무슨 일이냐는 줄리안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다.


“뭐, 심각한 일은 아니길 바래요. 이번엔 총 게임 어때요?”


좀비 죽이는 게임인데, 서로의 역할이 중요한 게임이에요. 줄리안은 직접 시범을 보였고 알베르토는 총 쏘는 게임이라 그런지 금방 잘 따라했다. 줄리안은 동전을 넣었고, 게임이 시작됐다. 알베르토는 처음에는 살짝 당황하는 듯 했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좀비를 죽여나갔고, 후반에는 결국 알베르토 덕분에 보스까지 깰 수 있었다.


“와…진짜 감탄했어요. 진짜 잘해요.”
“이정도야 뭘, 항상 있…, 아니 쉬운 일이죱.”
“아, 그래요?”


알베르토는 말실수라도 한 것처럼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고, 줄리안은 대충 넘어가주었다. 어느새 오락실의 모든 게임을 다 돌 때쯤이었다.


“그런데 우리 뒤에서 졸졸 쫓아다니는 사람들은 뭘까요?”
“아. 경호원이욥.”
“아까 말할 때는 ‘데이트할 때는 둘만 있어야 된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최소한의 안전은 지켜야죱.”
“오락실에서 안전은 무슨, 게임기가 폭발이라도 하려구?”


줄리안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신경 쓰지않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래봤자 겨우 두 명이었기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쳐다봤더니 여학생들이 꺅꺅거리며 스티커사진을 찍고 있었다. 줄리안은 알베르토를 이끌었다. 우리도 저거 찍어요!


“이, 이게 뭔데욥?”
“스티커사진! 안 찍어봤어요? 꽤 재밌어요.”


뒤에 연인끼리는 다 하는 거예요, 라는 말을 덧붙이자 알베르토는 아무말없이 줄리안을 따랐다. 결국 둘은 스티커사진까지 찍게 됐다.


《정면을 바라보세요.》


“뭐해요, 포즈 안취하고!”


《하나, 둘, 셋, 찰칵!》


이상한 포즈를 취하다 말은 알베르토 때문에 첫 컷은 망쳐버렸다. 줄리안은 다급하게 다음 포즈를 취했다.


《측면을 바라보세요.》


“아잇, 어딜 보는거에요! 여기요, 여기!”


《하나, 둘, 셋, 찰칵!》


두 번째 컷은 알베르토가 이상한 곳을 쳐다보고 있어서 망쳐버렸다. 줄리안은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포즈를 취해야했다.


“이번엔 제대로!”


《위쪽을 바라보세요.》


“여기? 알았어욥!”


《하나, 둘, 셋, 찰칵!》


처음으로 제대로 찍힌 컷이었지만, 알베르토의 표정이 부자연스러웠다. 줄리안은 절망하긴 이르다며 알베르토에게 위로를 건넸고, 심기일전해서,


《정면을 바라보세요.》


《하나, 둘, 셋, 찰칵!》
《하나, 둘, 셋, 찰칵!》
《하나, 둘, 셋, 찰칵!》


자유사진 3컷은 그나마 봐줄만했다. 물론 알베르토의 표정은 여전히 썩어있고 포즈역시 부자연스러웠지만, 그래도 베스트 컷이었다.


《배경을 선택해주세요.》
《사진을 꾸며주세요.》


뒤쪽으로 돌아나간 줄리안은 펜을 들고 사진을 꾸미기 시작했고, 잘 모르는 알베르토는 멀뚱히 서있었다. 그에 줄리안은 답답하다는 듯 꾸미라고 독촉했고, 그제서야 펜을 든 알베르토는 뭐가 뭔지 몰라서 대충 그려 넣기 시작했다.


‘알베르토와 줄리안, 첫 데이트’


그리고, 화려하게 꾸며진 줄리안의 사진과는 다르게 알베르토는 글씨가 전부였다.


‘나. 너.’
‘사랑해요.’
‘이거 너무 못나왔어.’


글자가 전부였다, 정말로. 줄리안은 애써 알베르토에게 칭찬을 했다.


“와…잘했어요…….”
“그래욥?”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말로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진이 인화되어서 나오고, 줄리안은 알맞게 사진을 잘라서 알베르토에게 내밀었다.


“가져요! 어디 붙여도 되고.”
“붙일 수 있어욥?”
“‘스티커’사진이니까요. 뒤에 떼서 붙일 수 있어요.”


어디에 붙이지……, 잠깐 고민하던 알베르토는 지갑을 꺼내더니 정성스럽게 사진을 붙였다. 또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휴대폰 케이스에 한 장을 붙였다. 줄리안은 그냥 지갑에 쑤셔 넣었지만.


“첫 데이트, 나름 재밌었어요.”
“저도 새로운 경험이에욥. 스티커사진이라는 것도 처음 찍어보고.”


집에 돌아간 줄리안은 사진을 정리하다 피식 웃었다. 정말 가관이었다. 알베르토의 표정하며, 포즈하며……. 안쓰러운 수준이었다. 다음에 찍을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야지. 줄리안은 사진을 보며 한참이나 웃다가, 카톡이 온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제대로 앉았다.


Robin:Yo, 오늘 하루 종일 뭐했어?
Julian:그 알베르토 씨랑 데이트함^_^v
Robin:헐, 이 사랑스런 애인님을 놔두고 바람 핀거여?ㅠㅅㅠ
Julian:네, 그렇습니다^^
Robin:나쁘다, 너. 오늘 밤에 놀러오라고 할라 그랬는데.
Julian:무슨 파티라도 하는겨?
Robin:(끄덕끄덕)파비앙도 온댔어.
Julian:조금 피곤한데... 알써, 간다.
Robin:오키오키, 그럼 기다린다. 마지막엔 알지?
Julain:응큼한 자식.
Robin:빨리 오기나 해.

 

*

 

지친 몸을 이끌고도 파티에 가면 기운이 넘쳤다. 줄리안은 로빈의 집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주말을 즐겼다. 파비앙은 먼저 집에 갔고, 다른 프랑스 친구들 역시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로빈은 기다렸다는 듯 줄리안을 침대로 불렀고, 둘은 밤새도록 즐겼다.

 

 

 

*

 

 

 


“하아암.”
“피곤한 얼굴이네욥. 어제 뭐 했어욥?”


누가 봐도 피곤한 얼굴로 알베르토의 차에 탄 줄리안은 거의 반쯤 자다시피, 하품을 쩍쩍 해대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굳은 표정으로 줄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뇨, 그냥 뭐…….”
“어제 누구랑 놀았어욥?”
“아뇨, 집에 있었는데…….”
“아, 그래욥?”


알베르토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줄리안은 피곤한 듯 눈을 주물렀고 그런 알베르토의 표정변화를 보지 못했다. 오늘따라 알베르토의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아 보이는데, 착각인가?


“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봐욥.”


알베르토는 사진을 들이밀었다. 건네받은 줄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진은 자신이 로빈의 집에서 파티를 벌일 때 찍힌, 파비앙과 같이 찍힌 사진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로빈이 창문 너머로 같이 있는 사진이었다. 두 번째 사진은 적나라하게 찍히지는 않았어도 충분히 의심이 갈만한 사진이었다. 사진을 잡은 줄리안의 손이 떨려왔다.


“오늘 회사에 연락해뒀어욥. 어디 갈 생각 하지 마욥.”


줄리안은 본능적으로 차문을 쳐다봤다.


“뛰어내리게? 안될걸욥? 이봐, 속도 높여.”


알베르토의 명령을 받은 운전기사는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고 출근길로 막힌 도로가 아닌 외진 곳으로 가고 있었다. 줄리안은 해명하려 입을 열었지만 알베르토의 굳은 표정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절 감시한 거에요?”
“이 남자가 누군지 말해욥.”
“절 감시했냐구요.”
“얘기 안해도 전화 한 번이면 바로 알 수 있어욥. 줄리안 입으로 듣고 싶으니까 참는 거예욥.”


그 남자가 누군지, 어떤 관계인지 밝혀요. 알베르토는 낮게 그러면서도 명확하게 말했다. 줄리안은 생각하기에 바빴다.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만약에 로빈이 연인관계라는 걸 들키면 로빈은 무사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건드리지 않을까?’


“잔머리 굴릴 생각 마욥. 솔직하게 말해욥.”


알베르토의 곧은 시선은 줄리안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줄리안은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시선을 살짝 빗기며 말했다.


“친한 친구에요. 그 친구가 파티를 하재서 간 거였고.”
“친한 친구끼리 뒹굴기도 하나 보죱?”
“뒹군거 아니에요. 술 마시고 취해서 서로 멋모르고 그런 거죠.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한 짓 하지도 않았어요.”


줄리안은 입이 바싹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불안에 떠는 마음과는 다르게 거짓말은 술술 튀어나왔다. 입 하나는 복 받은 것이 분명했다. 알베르토는 여전히 줄리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줄리안. 믿어도 되는 거예욥?”
“연인이라면 믿어야죠.”
“마지막으로 한번더 물을게욥. 진짜 믿어도 되는 거죱?”
“……네.”
“…줄리안이 자초한 일이에욥.”


알베르토는 차가운 표정으로 기사에게 멈추라고 말했다. 알베르토가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부하 두 명이 차에 올라탔고 알베르토는 다른 차에 올라탔다. 알베르토의 부하는 줄리안 앞에 앉았고 운전기사는 다시 운전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어딜 데려가…”


줄리안은 말을 맺기도 전에 배로 몰려오는 아픔에 몸을 수그려야했다.


“크윽,”
“도착할 때까지 말할 수 없습니다.”


줄리안은 배를 부여잡고 앉았다. 부하 두 명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앉아있었고 줄리안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SOS, 친구든 로빈이든 누군가에게 알려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꺼내듦과 동시에 부하는 줄리안의 휴대폰을 빼앗아 조수석에 앉아있는 누군가에게 건넸고 줄리안의 유일한 연락수단이 사라져버렸다.


“연락, 통화는 안 됩니다.”
“제꺼잖아요. 돌려줘요! 악,”
“계속 말하시면, 당신을 기절시켜야 할지도 모릅니다.”


남자는 로봇과 같은 딱딱한 말투로 줄리안에게 말했다. 줄리안은 몇 번의 저항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더 이상의 에너지 소모는 하고싶지 않아졌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나마 창문이 살짝 열려있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보였다. 그러나 창밖을 보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기사는 창문을 아예 닫아버렸고 이제 검게 썬팅된 창문은 비치는 자신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다. 줄리안은 불안감에 엄지를 꽉 쥐었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차에 탄 알베르토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옆에 앉은 여자는 시비르로 알베르토의 최측근이자 비서였다. NSM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로,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해야지.”
“이런 방식으로요?”
“난 확실한 게 좋아.”
“저도 그렇습니다만, 너무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요?”


알베르토는 폰을 매만졌다. 줄리안의 휴대폰을 입수했다는 문자가 와있었다. 알베르토는 ‘조사해. 추적기도 달고.’라는 답장을 보냈다. 시비르는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일반인이에요. 이런 일은 처음 겪을 테구요. 당신을 무서워하게 될 수도 있어요.”
“조심할수록 좋은 거잖아. 살짝 겁주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
“그분이 바라신 건 이런 게 아닐 텐데요.”
“시비르, 말을 아껴.”


알베르토는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시비르의 말을 막았다. 시비르는 입을 떼려다가 도로 다물었다. 얘기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짚고 넘어가야 했다.


“애초에 애인으로 만든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건 나도 바랐던 결과는 아니야.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처음부터 거두지 그랬어요, 이제 와서 보호한답시고 가둬버리고……. 말하자면 위험에 빠뜨린 거잖아요, 애인으로 둠으로써.”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시비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저조차도 이제는 잘 모르겠네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알베르토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띠리리-


시비르의 이어폰이 울리고, 시비르는 한쪽 귀에 손을 대었다. 말을 전해 받은 시비르는 침착한 톤으로 말했다.


“방금 제이씨(JC)의 조직원 중 한명이 줄리안의 회사에 들렀다는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벌써 퍼진 거야? 조심한다고 했는데.”


알베르토는 입술을 짓이겼다. 경쟁 상대이자 위험한 적인 JC에서 줄리안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지만, 생각보다 JC는 재빨랐다. 지금 줄리안을 데려가는 곳도 사실은 며칠 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알베르토는 JC와 만남을 위해 시비르와 함께 유성빌딩으로 가는 중이었다.


“제이씨의 스파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스파이라…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그렇긴 하죠.”


시비르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염탐하는 모습이라. 알베르토는 일부러 남겨두었던 제이씨의 조직원이 정보를 넘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제거해야할 타임이군.’ 알베르토는 블레어에게 문자를 남겼다.


‘나머지 제거해’

 

 

 

*

 

 

“일어나시죠.”


남자는 줄리안을 흔들어 깨웠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몸이 찌뿌둥했다. 줄리안은 기지개를 켜려다 재촉하는 남자에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도착한 곳은 큰 저택이었다. 꽤 좋아 보이는 저택이었고 주변에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어?”


줄리안은 저택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남자는 감탄하고 있는 줄리안을 이끌고 저택으로 향했다.


“이럴 시간 없습니다.”
“으아, 잠깐만 신발 끈이 풀려…”
“들어가서 묶으십시오.”


줄리안이 신발 끈을 묶으려고 자꾸 몸을 숙이자 남자는 짜증났는지 줄리안을 번쩍 들어 올리고 가기 시작했다.


“우억, 잠깐만요, 나 고소공포증 있어!”


줄리안은 갑자기 몸이 들어올려짐과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히도 주택에 들어선 남자는 줄리안을 소파에 내려놓았고 줄리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줄리안은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알베르토가 왜 나를 여기에 데려왔을까?’


내부 장식은 화려했다. 거실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있고, 주방 역시 좋아보였다. 계단이 있는 걸로 봐서 2층이 있는 것 같았다. 줄리안은 신발 끈을 고쳐 묶고 집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줄리안이 주방을 돌고 있을 무렵 정갈하게 옷을 빼입은 중년의 사내가 들어와 말했다. 사내는 자신이 제임스라고 소개하며 줄리안을 보좌하기 위해 왔다고 설명했다. 줄리안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가 필요한건 자유라구요.


“밖에 나가도 되요?”
“안됩니다.”
“안 되는 이유가 뭐에요?”
“위험합니다.”
“제가 위험하다구요? 왜요?”
“말할 수 없지만, 위험합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셔야할 겁니다. 회사는 휴가를 냈으니 걱정 마세요. 아, 그리고 여기 휴대폰.”


제임스는 품에서 줄리안의 휴대폰을 꺼냈다. 줄리안은 휴대폰을 받아들고 대충 확인했다. 달라진 점은 없었다.


“경찰이나 기타 등등, 도움을 요청하면 줄리안 씨만 힘들어질 겁니다. 그들은 줄리안 씨를 보호할 수 없어요. 저희가 더 안전합니다.”
“무슨 싸움이라도 난거에요?”
제임스는 줄리안의 말에 답하지 않고 물러났다. 줄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갇힌 건가?’

 

 

*

 

 

 

“미안해.”


블레어는 총구를 겨눴다. 남자는 죽음을 직감한 듯 눈을 감았다. 저항의 흔적, 이리저리 널부러진 가구들 사이에서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친해졌는데, 아쉽다.”


타앙-


남자는 쓰러졌다.

 

 

 

 

*

 

 

 

 

“애인은 잘 계신가?”


처음부터 정곡을 찔러오는 말에 알베르토는 차를 들던 손을 멈칫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도 알거라 생각했는데, 시치미 떼긴가?”
“…….”


알베르토는 차를 들이켰다. 씁쓸한 맛이었다.


“자네가 우리 부하를 죽였더군.”
“스파이를 제거한 게 문제가 됩니까? 당신도 우리 조직원을 제거했으니 피차일반이죠.”
“이제 더 이상 눈치싸움은 그만두지.”


JC의 회장인 전유성은 지독히 뱀 같은 인간이었다. 그 역시 차를 들이키며 여유를 부리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베르토는 알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는 누가 먼저 꼬리를 내리느냐, 그것이 중요했다.


“우리 조직엔 아직 자네 부하가 남아있어.”
“…”
“그리고 방금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우리 조직원은 완전히 제거 당했고.”


아끼던 아이들이었는데 말이야…, 전유성은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자네도 부하를 아낄 거라 생각하네. 나는 자비를 베풀지. 그들을 돌려보내주겠어.”
“죽이지 않겠다?”
“난 자네처럼 냉철하지 못해. 여기 있으면서 정이 들었거든.”


알베르토는 전유성이 무슨 속셈인지 파악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혹시 우리 조직원들을 매수했나? 아니다, 충성심이 강한 아이들로 보내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는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알베르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 부하들은 지하에 있네. 데려가도록 하게.”

 

*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베르토는 시비르에게 지하에 있는 조직원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한뒤 차에 올라탔다. 시비르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알베르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줄리안이 있는 곳.”
“알겠습니다.”

 

 

*

 

 

 

줄리안은 거실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었다. 제임스는 현관문에서 가장 가까운 방에 들어갔고 언제든지 줄리안이 부르면 오겠다고 했다. 줄리안은 앞으로 얼마나 회사를 나가지 않아도 되는지 생각했다. ‘위험하다고 했으니 일주일은 되려나?’ 애매했다. 로빈이 걱정할 텐데, 회사 다니는 것도 로빈 덕에 재밌었고. 줄리안은 시선을 TV에 고정했지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알베르토가 들어왔다.


“줄리안?”
‘로빈이 많이 걱정할 텐데.’
“TV보네욥, 줄리안.”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할까?’
“저기, 줄리안?”
‘아, 집에서 옷 가져와야 되는 거 아니야? 짐 챙기라고 안했으니까 며칠만 머무는…’
“줄리안!”
“네?!”
“저 왔어욥.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욥?”
“아, TV가 너무 재밌어서….”


지금 광고 나오는 데…, 알베르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요?”


줄리안은 의아한 듯 알베르토에게 물어왔다. 알베르토는 잠깐 생각하는듯 하더니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말했다.


“아침에 있었던 일? 물론 화 났었죱. 그래서 말인데, 줄리안. 나한테 약속 하나 해욥.”
“뭔데요?”
“로빈이랑 많이 친하죱? 용서해줄테니 빨리 정리해줬으면 해욥.”
“…”
“약속해욥. 안 그러면 로빈이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 못하니까욥.”
“…정리할게요.”


알베르토가 오자마자 꺼낸 이야기는 로빈에 관한 것이었다. 그냥 찔러보는 것이라기에는 알베르토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확신에 차서 줄리안에게 말했고 줄리안은 받아들여야했다. 로빈과의 관계가 들켰는데도 로빈이 무사하다는 것은 알베르토가 많이 참았다는 것이었다. 줄리안은 소파에 앉은 알베르토를 바라보았다. 초조한 듯 발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제임스가 말한 그 ‘위험하다’라는 게 진짜인 것 같았다.


“알베르토, 물어볼게 있어요.”
“뭔데욥?”
“무슨 일 있는 거죠? 불안해보여요. 나도 솔직하게 말했으니 알베르토도 솔직하게 해줘요.”
“…”


알베르토는 살짝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줄리안은 끈기 있게 알베르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알베르토는 힘겹게 입을 뗐다.


“심각한 문제는 아니에욥.”


알베르토는 제임스에게 차 한 잔을 주문했다. 제임스는 즉시 따뜻한 차를 내려놓았고, 줄리안은 필요한 것이 있냐는 제임스의 질문에 괜찮다고 답했다. 알베르토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나는 경쟁조직이 있어욥. JC라는 조직이에요. 겉보기에는 건물 짓는 회사나 그냥 대기업으로 보이죠, 우리 회사처럼. 하지만 줄리안도 알다시피 나는 깨끗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회사인 NSM Company, 그리고 JC Construction 이에요.”


줄리안은 알베르토가 하는 말을 대충 이해하고 있었다. 워낙 그쪽에 관심이 없는지라 NSM 회사도 처음 알았고 JC 건설이 검은 조직이라는 것 역시 처음 알았다. 그저 JC 빌딩을 보면서 ‘와, 크고 좋은 건물이다’라고만 생각했었고 전국에 있는 NSM 카페나 다른 NSM 관련 자회사를 보면서 대기업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알베르토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이었다.


“어두운 일도 하는 만큼 우리는 서로 스파이가 있어욥. ‘보스가 애인이 생겼다’라는 말이 JC 쪽으로 들어간 것 같아욥. 시기도 시기인지라, 줄리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서 여기로 데려온 거예욥. 이건 안전가옥이고 트랩도 있어욥. 말하자면 여긴 내가 머무는 요새인거에욥,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머무는 요새욥.”
“아……. 알베르토에게 질문이 있는데요.”
“말해욥.”
“왜 이런 시기에 저를 애인으로 삼은 거예요?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하아아-, 알베르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하지? 지금 밝혀야하는 건가? 알베트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은 일렀다. 줄리안에게 알려주기에는, 너무 이른 타이밍이었다. JC의 움직임도 재빨랐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욥. 충동적이었어욥, 그건.”
“그럼 나랑 만나자고 했던 게 충동적인 거였어요? 그래서 내 인생은 지금 X 된 거고?”


순간적으로 나오는 욕에 줄리안은 입을 틀어막았다. 아차, 싶어서 알베르토의 안색을 살폈지만 알베르토는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다.


“난 줄리안을 보호하는 거예욥. 망치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일이 끝나면, 꼭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게 해줄게욥.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만 여기 있어줘욥. 날 믿어줬으면 좋겠어욥.”


말을 마친 알베르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나서는 알베르토의 뒤에서 줄리안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듣지는 못했다. 알베르토는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 창문 너머로 줄리안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베르토는 창문을 올렸다. 시야와 소리가 차단되자 조용해졌다.

 

 

 

 

 


“줄리안은 받아들이던가요?”
“아니, 전혀.”
“언젠가 설명해야할 거예요.”
“그 ‘때’를 기다리는 중이야. 아직은 너무 일러.”
“곧 밝혀지겠죠, 보스.”
“조직원들은 무사해?”
“네, 일리야가 모두 구출했어요.”


시비르는 알베르토가 떠난 뒤 곧장 일리야에게 연락해서 조직원들을 구출해 내고, 즉시 알베르토에게 간 것이었다. 일리야는 구출된 조직원들에게 심문을 하고 있다고 시비르가 말했다.


“보스가 말한 것처럼, 이중스파이거나 완전히 돌아섰을 수도 있어서 한동안 작전에 넣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사실, 휴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심문이 끝나면 모두 휴가 처리해. 멀리 보내버려.”
“일리야에게 바로 알리죠.”


시비르는 인이어(In-Ear)로 일리야에게 연락을 하고 말을 전달했다. 알베트로는 이마를 짚었다.


“어디 아프세요?”
“그냥…생각하는 중이야. 머리가 살짝 아파서.”
“그럴 만도 하죠. 보스, 돌아가면 좀 쉬어요. 요새 도통 쉬질 않으시니.”
“알겠어, 잔소리꾼.


시비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베르토는 정말 쉬고 싶은 듯 시트에 몸을 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베르토는 잠에 빠진 듯 새근새근 숨소리를 냈다.


“불쌍한 인생이라니까요, 보스와 그 청년, 둘 다.”

 

 


*

 

 

 


기욤은 걱정스런 눈길로 줄리안의 자리를 쳐다봤다. 줄리안이 오늘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한우를 사주겠다는 약속도 해놓고서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지. 물론 한우보다 걱정되는 것은 줄리안이었다. 기욤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팀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지금 바빠, 나중에.”
“죄송합니다, 팀장님. 그렇지만 줄리안과 관련해서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기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들어와.”


기욤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장위안은 테이블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 그러하듯 안경을 끼고서 일하는 중이었다. 장위안은 기욤이 들어와 의자에 앉을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서 손짓으로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그제서야 방황하던 기욤은 자리에 앉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큼큼, 오늘 줄리안이 회사를 오지 않은 이유를 혹시 아시는지…궁금해서요.”
“그게 왜 궁금한지 물어봐도 되겠어?”
“회사에서 제 옆자리이기도 하고…. 친하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도 아끼는 동생입니다.”


장위안은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깍지를 끼고서 잠시 고민하더니 무겁게 입을 뗐다.


“그냥…긴 휴가를 떠났다고 생각해. 더 이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렇지만 줄리안은 말도 없이 휴가를 떠날 애가 아닙니다. 팀장님도 아시잖아요.”


줄리안이 얼마나 성격 좋고 착한 애인지. 어느 날 훌쩍 말도 없이 떠날 아이가 아닌 것, 아시잖아요. 게다가 연락도 안 되는 데. 기욤은 장위안에게 끈질기게 물었지만 장위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쫓겨나듯 팀장실을 나온 기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기욤을 돌려보낸 장위안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줄리안이 또 지각을 하나 싶어서 이번엔 단단히 혼내줘야지, 벼르던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화는 ‘줄리안이 회사를 당분간 나오지 못할 것이고, 이 이상 알려고 하면 불이익이 있을 것이다’라는 일종의 협박과도 같은 짤막한 말을 남기고 끊어졌다. 무엇이 배후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세력임이 분명했고 장위안은 그 말을 지키는 중이었다. 기욤에게 말해주지 못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다. 평소 자주 웃던 기욤은 무뚝뚝하게 업무를 하고 있었다. 줄리안이 옆에 있을 때는 자주 떠들어서 자신에게 혼나곤 했는데.

 

한편 기욤은 자리로 돌아와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줄리안의 빈자리가 꽤나 큰 것 같았다. 항상 점심도 같이 먹고, 수다도 떨고, 탕비실에서 커피도 같이 마시곤 했는데. 회사에서 제일 친한 친구이자 동료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셈이었다. 혹시 어디 다친 것은 아닐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으러 갔나, 여러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래도 나오는 결론은 줄리안은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날 무정한 아이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욤은 한숨을 내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다시 일에 집중해야지. 모니터 옆에 붙은 포스트잇이 신경 쓰여서 결국 떼어 휴지통에 버렸다. 그까짓 한우가 뭐라고. 기욤은 여전히 숫자가 지워지지 않은 카톡을 확인하고 이내 폰을 뒤집었다.

 

 

 


*

 

 


줄리안은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 줄리안은 마음을 진정시키려 소파에 앉았다. 알베르토가 말한 그 안전이 보장되는 날이 언제인지, 자신과 진지한 관계를 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충동적이라고 답한 알베르토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알베르토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한편으로 느꼈던 것은 알베르토가 무언가를 숨기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줄리안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다가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자신의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카톡-


“아, 그러고 보니 돌려받았지.”


카톡을 확인하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로빈과 기욤이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제일 친한 친구라고 연락이 두절되자 걱정됬나보다. 줄리안은 먼저 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거는 도중에 보낸 카톡을 확인하자 ‘어디야, 왜 오늘 회사에 안 나왔어?’, ‘슬슬 걱정된다. 혹시 알베르토 그 XX한테 붙잡혀 있는 거 아니지?’, ‘오늘 점심에 기욤 형이랑 밥 먹었다. 형도 너 걱정하더라.’, ‘젠장. 사지 멀쩡하면 답장이라도 좀 해줘, 걱정되니까. 짧게 ㅇ하나라도 보내면 만족할게, 응?’. 줄리안은 로빈의 카톡을 읽으면서 왠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짜식이, 그래도 애인이랍시고 걱정도 해주고. 줄리안은 눈물을 조금 훔치고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달칵.


예상대로 로빈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너 지금 어디야! 너 이 XX,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지금이 몇 시냐고, 왜 이제 와서 전화 받는데! 응?! 아오! 너 돌아오면 죽는다, 어?」


으악, 줄리안은 받자마자 고성을 지르는 로빈 때문에 전화를 귀에서 떼야했다. 로빈은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고 줄리안은 로빈이 진정하기를 잠깐 기다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빈, 미안해. 다 설명해줄게.”
「너 단순히 늦잠잔거라고 하면 한 대 맞을 줄 알아.」
“하하. 그래, 네 말대로 늦잠은 아니고.”
「말해봐.」


수화기 너머로도 초조함이 느껴졌다. 줄리안은 어떻게 말해야하나 싶어 잠시 고민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로빈과의 관계를 정리해야하다니. 줄리안은 눈을 꾹 눌렀다.


“저기, 로빈. 나 걱정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런데, 꼭 해야 되는 말이 있어.”
「아니, 하지마. 듣고 싶지 않아.」
“미안해, 로빈. 우리…끝내야 할 것 같아.”
「…….」
“알베르토가 알지만 참은 것 같아. 더 이상 우리가 계속하면, 로빈 네가 위험해져. 그리고….”


줄리안은 살짝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나 당분간 여기 있어야 돼. 어디인지는 묻지마, 나도 모르니까. 로빈,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사랑해, 로빈. 그리고 정말 미안해.”
「……」


수화기 너머로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줄리안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자꾸만 상상되는 로빈의 모습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로빈이 답했다.


「……몸 다치지 말고 건강해. 그래도 우린 친구니까 무슨 일생기면 꼭 연락하고. 이만 끊을게.」


뚝-


줄리안은 눈물을 삼켰다. 수화기너머로도 로빈이 흐느끼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참아내야 했다. 고통을 견디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로빈과 함께할 수 있었다. 줄리안은 한동안 끊긴 전화를 내려놓지 못하고 부여잡고 울었다.

 

 

 

“….”


그리고 줄리안의 전화 통화를 엿들었던 알베르토 역시 착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것 참. 내가 악마가 된 것 같군.”
“이로써 로빈과의 관계는 정리된 것 같군요.”


줄리안의 폰에 도청장치를 달아놓은 것이 좋은 판단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알베르토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강제로 떼어놓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줄리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 기욤 형.”


줄리안은 다시 울리는 카톡 알람에 울음을 그치고 폰을 내려다봤다. 기욤은 이제 곧 퇴근시간이라서 다시 카톡을 보내는 것이라고 하고 있었다. 줄리안은 전화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정상적으로 말하는 게 힘들었다. 기욤은 숫자가 사라지자마자 톡을 보내왔다.


Guillaume:오늘 회사 지각이네? 얼른 와. 팀장님이 벼르고 계셔.
Guillaume:너 왜 전화도 안 받고….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아프면 팀장님한테 얘기할게.
Guillaume:뭐야, 팀장님이 방금 네가 휴가 갔다고 하던데.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파티하고 놀던 네가 말도 없이 여행을 떠날 리는 없고. 무슨 일 있는 거야?
Guillaume:혹시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톡 보면 연락 좀 해줄래? 슬슬 걱정돼.
Guillaume:내가 한국에서 가장 친한 형이기도 하고…. 걱정된다. 이제 곧 퇴근시간이야. 살아있으면 제발, 연락이라도 해주겠어?
Guillaume:어? 줄리안?
Guillaume:줄리안! 신이시여, 다행이다! 괜찮은 거야?
Julian:네, 형. 저 괜찮아요.
Guillaume: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오늘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Julian: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 저 괜찮으니까 걱정마세요ㅋㅋ
Guillaume:너 지금 어딘데?
Julian:그냥 멀리 여행 왔어요. 생각 좀 정리할 겸. 갑자기 떠나서 놀라셨죠? 저 지금 해외여행중~ 와이파이 터지는 곳 겨우 발견해서 연락하는 거예요. 여기 되게 예쁜 곳이에요. 나중에 같이 가요!ㅎ
Guillaume:...믿어도 되는 거지?
Julian:네, 형. 제가 거짓말 할 사람이에요? :D 의심하면 섭섭하죠.
Guillaume:하, 알았어. 여행 잘 갔다 오고. 갑작스럽게 떠나서 당황스럽긴 한데, 무사해서 다행이다.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해. 형이 달려갈게 :)
Julian:ㅋㅋㅋ네. 고마워요, 형. 퇴근길 조심하세요!


줄리안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착하고 순진한 형한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면 앞뒤 잴 것 없이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해외여행 중이라고 거짓말을 했으니, 찾아오는 일은 없겠지. 줄리안은 혹시 몰라서 로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로빈은 흔쾌히 거짓말에 동참해주겠다고 답했다. 줄리안은 안심하고 카톡을 껐다.


‘엄마 보고 싶다.’


줄리안은 갤러리를 눌렀다. ‘famille’ 폴더를 누르자 보고 싶은 가족의 얼굴들이 있었다. 엄마랑 같이 와인마시는 사진, 아빠랑 바닷가 놀러갔을 때 사진, 형이랑 누나랑 캠핑 갔던 사진, 가족이랑 다 같이 파티 했던 사진……. 온갖 추억들이 녹여져있는 사진들을 보자 다시 눈물이 났다. 줄리안은 또다시 훌쩍이다가 그대로 소파에 누웠다.


‘빨리, 정리됐으면 좋겠다.’


피곤한 듯 눈꺼풀이 무거워져 왔다. 줄리안은 폰을 손에 꼭 쥐고 잠이 들었다. 꿈에서는 가족이 나왔다. 다같이 여행을 떠나는 꿈…….

 

 


*

 

 

 


“일어나십시오.”


으윽, 줄리안은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다. 제임스가 커튼을 치고 있었다. 밤사이에 울다 잠들어서 그런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게다가 너무 일찍 잠들어서 저녁을 먹지 못했다.


꼬르륵-


“식사가 준비되어있습니다. 식탁으로 가시죠.”


울고 나면 배가 더 고픈 법이었고, 저녁도 먹지 못한데다가 향긋한 밥 향기는 줄리안의 위장을 더욱더 자극했다. 줄리안은 대충 얼굴을 씻고 나서 주방으로 달려갔다. 아침식사는 예상대로 화려했다. 게다가 요리에는 벨기에 전통음식들도 간간히 보였다. 줄리안은 자리에 앉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웨이터가 물을 따라 주며 말했다.


“곧 있으면 프렌치프라이가 후식으로 나올 것입니다.”
“예? 프렌치프라이?”
“네.”
“하하, 저기요. 프렌치프라이라뇨. 그거 벨기에 음식이니까 벨지언 프라이라고 해주세요. 아니면 감자튀김! 이런 좋은 말이 있는데 왜 굳이 ‘프렌치프라이’라는 말을 쓰는 거예요? 아침부터 화나게.”


줄리안은 식사를 하려다가 화가 나서 프렌치프라이의 어원부터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음식은 벨기에에서 처음으로 만든 건데 군인이 프랑스음식으로 오해해서 그렇게 굳어진 거라구요! 그러니까 이건 벨지언 프라이가 더 정확한 말이에요!


당연하게도, 서빙을 맡은 웨이터는 당황해서 줄리안의 말에 네, 네, 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들 프렌치프라이라고 하니까 그런 거지, 줄리안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며 해명했지만 줄리안은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앞으로는 잘 알고 말해요, 알았죠?”
“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벨기에 사람으로서 화나거든요. 이제 가보셔도 되요.”
“와, 달링. 성질이 장난 아니네?”
“아…알베르토? 언제 왔어요?”
“음, 아침 같이 먹으려고 방금 왔죱. 그런데 우리 줄리안을 화나게 한 사람이 누군가 해서 듣고 있었더니 프렌치프라이 때문에 그런거예욥?”
“아, 진짜. 프렌치프라이 아니라구요! 차라리 감자튀김이라고 해요.”
“하하, 알았어욥. 감자튀김.”


알베르토의 등장으로 웨이터는 더 땀을 뻘뻘 흘렸다. 알베르토가 그만 가보라며 손짓하자 웨이터는 안심한 듯 인사를 하고 주방을 빠져나갔다. 다음부터는 음식 메뉴를 말할 때 검색하고 해야지, 웨이터는 ‘벨기에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검색하며 중얼거렸다.


“잘 잤어욥? 눈가가 부어있네. 운 거예욥?”
“아, 아뇨! 울긴 누가 울어요! 저 원래 아침에 잘 부어서 그래요. 알베르토는 잘 잤어요?”
“저는 뭐…이런저런 생각에 좀 설쳤죱. 오늘은 줄리안이랑 있을 거예욥.”
“오늘은 한가한가 봐요? 바쁜 것도 좋은데.”
“아벨라, 오늘은 서로에 대해서 좀 더 알아가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욥.”
“위험한 것만 해결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욥.”

 

줄리안은 거의 흡입하듯이 먹으면서도 말은 잘했다. 수다쟁이의 내공이라고 해야 하나, 발음하나 새지도 않고 말하고 있었다. 줄리안이 떠드는 동안 알베르토는 겨우 스프 두 스푼을 떠먹었을 뿐이었다.


“알베르토, 얼른 먹어요. 저는 다 먹어가는 데.”
“아벨라가 말을 참 잘해서욥. 저도 빨리 먹을게욥.”


알베르토는 스프를 먹기를 포기하고 빵을 집어 들었다. 배부르게 먹는 건 포기해야겠는 걸?


“아, 진짜,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봐욥. 답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답해줄게욥.”
“어떻게 보스가 된 거에요? 항상 그런 거 보면 궁금했거든요, 막 싸움을 잘해서 이 자리에 올라갔다거나 돈이 많아서 그렇거나, 아니면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아서 후계자가 됐다거나, 기타 등등.”
“그런 게 궁금해욥, 아벨라? 음, 나는 후계자나 돈이 많았던 건 아니에욥.”
“오호!”
“…나는 이 자리에 올라섰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거에욥. 난 버려진 아이였어욥.”


알베르토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던 과거를 털어놓는 게 살짝 두려운 듯 보였다. 줄리안은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알베르토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분이 절 거둬주셨죱. 나는 그분에게 일을 배우면서 자라났어욥. 저는 그분을 아버지처럼 따랐고, 충실히 일을 수행했죱. 그렇게 자라면서 저는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었죱. 그리고 그분은 결혼도 하지 않아서 자식이 없었어욥.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을 정해야 했죱.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건 내가 되었어욥. 그분이 돌아가실 때, 저는 처음으로 펑펑 울었어욥.”

알베르토는 속에 깊이 담아두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덕에 살짝 눈물이 차올랐고, 그런 알베르토를 보면서 줄리안은 침묵으로 위로를 건넸다. 이야기를 듣는 줄리안의 눈에도 눈물이 살짝 고였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비밀을 털어놓으셨죱. 자기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다고. 지금껏 몰래 도와주고 있었는데, 자신이 죽으면 그 아이를 보살필 수 없으니, 그 아이를 지켜달라고. 그 아이는 여행 도중에 자신의 실수로 생긴 아이였지만 굉장히 아낀다고. 그리고 주소가 적힌 종이와 그 아이의 이름을 건네주고, 세상을 떠나셨어욥.”
“아…마지막으로 임무를 준 거네요.”
“네, 그런 셈이죱.”
“그 임무는 잘 수행하고 있어요? 그 아이, 잘 보살피고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잘 수행하고 있는 건지….”
“아아.”


알베르토는 고개를 살짝 떨궜고 줄리안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직은 알베르토가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줄리안은 감자튀김을 다 먹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아침식사 고마웠어요. 맛있네요.”
“아, 그래요. 저도 다 먹고 따라갈게욥.”


알베르토는 웨이터에게 차를 주문하고 2층으로 뛰어올라가는 줄리안을 바라봤다. 알베르토는 빵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띠리리-


‘시비르? 무슨 일이지?’


시비르의 전화였다. 알베르토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보스, 우리 조직원들, 그러니까 전유성에게 붙잡혔던 아이들이,」


시비르는 긴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조직원들을 죽이고 있어요. 휴가를 보냈는데 출국 확인 중에 사라져버렸죠. 반쯤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어요! 약에 취한 사람마냥.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사장실 문을 막고 버티고 있어요, 저 혼자서는 무리에요.」
“젠장, 알겠어! 바로 갈게, 시비르. 꼭 버텨내.”


알베르토는 재빨리 외투를 걸치고 제임스에게 말했다.


“제임스, 줄리안에게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 난 지금 빨리 조직으로 돌아가 봐야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알베르토를 경호하며 차에 올라탔다. 차는 곧장 알베르토의 회사로 달려갔다.


‘전유성, 이 자식. 이런 꿍꿍이였나?’


알베르토는 입술을 짓이기며 차갑게 장갑을 꼈다. 안 쓰려고 했는데, 알베르토는 총을 꺼내들었다. 배신자들에게 죽음을.

 

 


*

 

 


「치지직, 작전 성공인 것 같습니다. 신호하면 들어가겠습니다.」
“지금이야.”
「치지직, 출동하라, 치지지직」


전유성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네는 나보다 한수 아래일세.


줄리안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알베르토는 안타깝게도, ‘한명’의 스파이를 알아내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 한명의 스파이는 줄리안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전유성은 함정을 팠다. 회사에 도착해서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은 때일 걸세, 알베르토.

 

 


*

 

 

“응? 알베르토가 어딜 갔다구요?”
“예.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쳇. 오늘은 같이 있겠다면서. 알겠어요, 제임스.”


줄리안은 뾰로통해져서 계단에 주저앉았다. 2층에서 체스를 발견해서 같이 두려고 가져왔더니, 이게 뭐야? 그사이에 사라져버리고. 제임스는 차를 건네 왔다. 줄리안은 차를 손에 쥐었다.


“하아아, 오늘은 또 뭘 하고 놀지.”


다 큰 어른보고 집에 있으라고 하는 건 솔직히 말해서 지루했다. 클럽이나 가고 싶다, 줄리안은 아쉬운 듯 차를 홀짝 들이켰다. 심심해.


“그런데 제임스는 언제부터 근무한 거예요?”
“저희 아버지가 하던 일을 이어서 하는 중이죠. 저희 아버지는 현재 보스가 취임하기 전부터 근무했었습니다. 제가 일한 지는 몇 년 안됐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포스가 아주 그냥, 몇 십 년 일한 사람 같아요.”


줄리안은 차를 다시 홀짝 들이켰다. 그리고 계단에서 일어나 내려가려는데,


“어…어지러워….”
“괜찮으십니까?”
“아, 아뇨, 저 좀 붙잡아주시…”


제임스가 줄리안을 붙잡아주자 줄리안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제임스는 줄리안을 업어 아래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내에게 줄리안을 넘겼다. 사내는 줄리안의 팔과 다리를 묶고 차에 태워서 사라졌다. 제임스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미션 완수.”


그리고 제임스는 머리를 벽에 박고 계단에서 스스로 굴렀다. 그리고 기절했다.

 

 


*

 

 


“시비르, 괜찮아?”
“예? 보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멀쩡…”


사장실에 총을 들고 들이닥친 알베르토는 시비르를 보자 달려들어 포옹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비르는 어정쩡한 자세로 알베르토의 포옹을 받고 말했다.


“왜 그러세요, 보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뒤에 조직원들도 데려오고….”
“무사해서 다행이야. 네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왔어.”
“무슨 연락이요, 보스? 저는 아무 연락도 하지…. 보스, 저택에 줄리안을 혼자 두고 온 거에요?”
“네가 연락을 안 하면 누가…. 설마….”


알베르토는 재빨리 제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만 계속될 뿐 제임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젠장, 함정이야! 저택으로 빨리!”


함정인 것을 깨달은 알베르토는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고 말하며 차에 올라서는 운전기사를 밀어냈다. 알베르토는 엑셀을 세게 밟았다.


‘줄리안, 무사해야해! 마지막 임무란 말이야.’

 

 


*

 

 


「치직, 획득했습니다, 치지직」
“수고했다.”
「네.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치직」


전유성은 화면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알베르토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하하, 웃었다. 어린놈이 보스가 된다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지. 이런 함정에도 쉽게 빠질 정도라니. 흐흐흐, 전유성은 술을 한 잔 마시며 모든 상황을 모니터링 했다.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퀸타르트, 자네가 세웠던 회사도 이제 끝일세.”

 

 


*

 

 

저택에 도착한 알베르토는 문을 걷어찼다.


“제임스, 제임스! 있으면 말해! 줄리안!”


저택 안은 조용했다. 잠긴 문을 걷어차던 알베르토는 뒤늦게 알베르토를 쫓아 온 차에서 내린 조직원이 열쇠로 문을 열자 저택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리고 보인 것은 쓰려져있는 제임스였다.


“제임스?! 괜찮아?”


제임스에게 달려간 알베르토는 상태를 살폈다. 이마가 부어있었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 같았다.


“제임스의 상태를 살펴봐. 나는 줄리안을 찾겠어.”


알베르토는 말을 마치고 2층으로 뛰어갔다. 계단에는 깨진 찻잔과 체스판이 놓여져 있었다. 알베르토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줄리안은 무사할거야, 어딘가에 숨어 있을거야.


그렇지만 2층을 모두 뒤져도 줄리안은 없었다. 알베르토는 발로 탁자를 세게 걷어찼다. 그덕에 얌전히 놓여있던 화분이 떨어져 깨졌다.


“보스!”


시비르가 달려와 알베르토의 상태부터 살폈다. 알베르토의 주먹 쥔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시비르는 즉시 붕대로 알베르토의 손을 감으며 말했다.


“이 저택은 트랩이 있어요. 그 모든 트랩을 밟지 않고 줄리안을 납치했다는 건 내부에 스파이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알베르토는 허공을 바라보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시비르는 알베르토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차려요! 그분의 마지막 유언을 지켜야죠!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구요, 우리가 제거하지 못했던 스파이가 있었어요. 그 누구도 믿으면 안 돼요!”


뺨을 후려갈긴 시비르의 손을 알베르토가 꽉 잡으며 말했다.


“그 스파이가 시비르, 너야? 너 때문에 회사로 가야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저도 몰랐다구요, 그건! 알베르토, 저는 당신을 가장 가까이 보좌해왔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스파이는 저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죠. 그 안전가옥은 저도 잘 알지 못해요. 몇 가지 트랩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렇다는 건 당신과 가까운 인물이면서도, 줄리안의 곁을 지키는 인물이겠죠. 그러면,”
“……젠장, 제임스였어.”


알베르토는 당장 달려 나갔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자신의 조직원들이었다. 제임스는 차를 타고 벗어난 뒤였다.


“크윽, 제임스가…배신을 했어.”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마도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 일거에요. 아버지의 동선을 밟고 싶지 않아서 JC와 접촉한 것 같아요. 그는 처음부터 스파이였던 거예요, 가장 믿었던, 믿음직한 스파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만한.”


시비르는 주저앉은 알베르토를 일으켜세웠다.


“제임스를 뒤쫓아야 해요. 그 아이를 되찾아야죠! 그분이 남긴 마지막 임무, 해내야죠!”


알베르토는 거의 이성을 상실한 듯 보였다. 시비르는 알베르토를 간신이 끌어서 자신의 차에 태웠다. 그리고 일리야에게 연락했다.


“일리야, 이판사판이야. JC를 치러 간다. 모두 소집해.”


시비르는 전화를 끊고 기어를 올렸다.


“알베르토, 이제 복수의 시간이에요.”


부아아앙-


빨간 차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 나갔다.

 

 


*

 

 


“블레어, 준비됐어?”
“드디어 원수 같던 JC를 치러가는 거야? 신난다!”


블레어는 신나서 총구를 닦고 있었다. 일리야는 조직원들에게 소집명령을 내리고 무기를 챙기는 중이었다. 블레어는 유별나게 총을 좋아했고, 총을 늘어놓고 슥슥 닦고 있었다.


“그럴 시간 없어. 대충 몇자루 챙기고 빨리 와.”


일리야는 무기창고를 나서며 말했다. 블레어는 툴툴대면서도 총을 쓸어 담아 가방에 담고 일리야를 따라나섰다.


“어쨌거나, 원수 같은 애들을 없애러가는 거니까! 두둑이 챙기면 좋지.”


블레어는 싱글벙글하며 일리야보다 앞서 뛰어갔다. 일리야는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가방은 가벼웠지만 또한 무거웠다.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만 죽이자.’


일리야는 가방을 꼭 쥐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본 뒤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을 괴롭혔다. 자신의 실수로 죽은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살인은 하지말자. 그 이후로 좌천되어 잡다한 업무를 맡았지만 일리야는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은 마지막으로 살인을 해야 하는 때였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일리야는 자신의 목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다가 탁, 소리나게 닫았다. 차에 올라타면서 목걸이를 벗고 상자에 넣었다. 블레어가 호기심을 보이며 물어왔지만 일리야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안 돼. 이번 일이 끝나면 알려줄테니까.”


일리야는 상자를 차 문 옆에 넣고 시동을 걸었다. 블레어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준비 됐지? 휩쓸어보자!”
“예!”


우렁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들 신입이라 그런지 패기가 넘쳐. 재밌는 싸움이 되겠는 걸?”


블레어는 큭큭, 웃으며 말했다. 일리야는 엑셀을 세게 밟았다.

 

 


*

 

 


“깨어나셨네, 알베르토의 애인 씨.”


목소리가 울렸다. 줄리안은 눈을 떠도 흔들거리는 시야에 머리를 제대로 겨누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제임스를 봤던 것 같은데….


“기분이 어때? 좋지 않나? 당신을 위해 준비한 마약이었어.”
“으웁, 욱,”


울렁거리는 속에 결국 줄리안은 토를 했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뒤로 살짝 물러섰다. 바닥을 닦으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친구가 좀 많이 탔나보네. 마약은 처음 해보겠지, 안 그래?”


더러운 건 질색이야, 제대로 닦아. 줄리안은 울렁거리는 속과 헤롱헤롱거리는 머리, 그리고 왠지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전유성이라고 하네. 자네 이름은 뭐, 줄리안 퀸토겠고.”
“전…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줄리안은 안그래도 욱신거리는 머리가 목소리 때문에 더 아파오고 있었다. 결국 다시 토를 하자 목소리가 물러섰다. 그리고 누군가 줄리안의 머리채를 잡고 주먹을 날렸다.


“끄윽, 끅,”
“네가 날 모르는 건 상관없어. 말대답을 바란 게 아니라네.”


자신을 전유성이라고 소개한 그 목소리는 의자에 앉는 듯, 털썩 소리가 났다.


“우리 줄리안 씨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해주면 되겠어, 알베르토의 발광하는 모습을 말이야.”


꽤나 재미있거든, 전유성은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줄리안은 그 와중에도 몇 대 더 맞아서 볼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흑, 저한테 왜…이래요….”


줄리안은 터진 입술에서 배어나오는 피 맛을 느꼈다. 여전히 잡힌 머리채가 아파왔다.


“왜냐고? 그거야 당연하지.”
전유성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알베르토의 애인이니까.”


그리고 줄리안은 명치를 세게 얻어맞았다. 숨이 컥 막히는 기분이었다.

 

 


*

 

 


시비르는 JC에 도착하기 전에 차를 세웠다. 알베르토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손에 쥔 권총을 만지작거리면서 그저 퀸타르트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분이 부탁했던 일,”


시비르는 알베르토의 손에 쥐어진 권총에 손을 얹었다. 알베르토는 시비르의 눈을 바라봤다.


“꼭 해내겠다고 다짐했잖아요.”
“….”
“그리고 지금 그분의 아이가, 저기에 잡혀있어요.”


시비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구하러가야죠, 보스.”


알베르토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권총을 내려다보고 시비르를 다시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시비르.”

 

 

 

 

 


「시비르, 도착 직전이야.」
“좋아. 우리도 진입하겠어.”


시비르는 인 이어에서 손을 뗐다. 전유성이 대비를 해놓은 것인지 두, 세 명 정도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시비르는 차갑게 총을 꺼내들었다.


“잠깐, 내가 하지.”


알베르토는 총을 겨누는 시비르를 막고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무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던 시비르는 당황해서 알베르토를 따라 나섰다. 알베르토는 이미 저만치 가고 있었다.


“네 보스에게 전해라.”


알베르토는 소음기가 달린 총을 꺼내들며 방아쇠를 당겼다. 미처 방어할 틈도 없이 경비들은 픽픽 쓰러졌고 남은 한명은 총을 꺼내다가 알베르토에게 걷어차이고 쓰러졌다.


“애인 찾으러 알베르토가 왔다고.”


알베르토에게 걷어차인 남자는 덜덜거리며 일어나서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시비르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알베르토는 어서 가자며 재촉했고, 시비르는 알베르토를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한편 일리야는 알베르토의 총격전을 목격하고 차를 세웠다. 시비르와 알베르토가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리야는 블레어에게 애들 데리고 잘 따라오라는 말을 하고 차에서 내려 알베르토에게 달려갔다.


“보스!”
“어, 일리야. 빨리도 왔네.”


뒤쪽에 블레어가 신참들을 데리고 오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싱긋 웃으며 일리야의 어깨를 두드렸다.


“애들 관리하느라 수고가 많았어, 일리야. 오늘이 네게 있어서는 마지막 싸움이 될 거야. 이 일이 끝나면 그만둬도 상관하지 않겠어.”
“고맙습니다, 보스.”


일리야는 비장하게 각오를 새기고 건물로 들어섰다.

 

 

 


“네 애인 오셨다.”


줄리안은 한쪽 눈이 부어올라있었다. 전유성은 알베르토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너를 찾으러 왔지. 우리 쪽에 벌써 경고를 했더군.”


전유성은 의자에 묶여있는 줄리안에게 다가갔다.


“줄리안, 네가 많이 소중한 모양이더군.”
“크윽, 무슨, 짓을, 하려고….”


전유성은 줄리안의 뺨을 쓰다듬다가, 세게 후려쳤다. 그 덕에 줄리안의 고개는 홱 꺾였다. 볼이 얼얼해져왔다.


“죽여 달라고 호랑이 굴에 왔는데, 잡아먹어야지.”


줄리안은 엉망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안 돼, 알베르토, 오지 마요!

 

 

 


픽-픽-.


총알이 심장을 꿰뚫고, 팔을 꿰뚫고, 머리를 꿰뚫었다.


한층, 한층 올라가면서 알베르토는 무섭게 적들을 죽이고 있었다. 시비르는 살짝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알베르토, 조금 살살해요.”
“빨리 가야해. 줄리안이,”
“우린 충분히 빨라요.”


함정을 파던 JC의 움직임은 재빨랐지만, 지금 대응하는 속도는 굉장히 느렸다. 조직원들도 듬성듬성 모여서 달려왔고, 쉽게 무너지고 있었다. 일리야를 비롯한 무리는 너무나도 쉬운 싸움에 거의 즐기듯이 해치우고 있었다.


“지원 요청한다, 크악!”


알베르토는 연락을 취하는 조직원에게 인정사정없이 총을 쐈다. 전화를 걸던 조직원은 맥없이 쓰러졌고 피가 흘렀다.


‘아무래도 너무 쉬워.’


시비르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치밀한 인간이 어째서 이렇게 허술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시비르는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는 알베르토를 제지시키고 잠시 멈춰 서서 말했다.


“다들 이건 너무 쉽다고 생각하지 않아?”
“쟤들도 이렇게 나올 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여자라서 잘 모르겠군, 싸우는 재미를 말야.”
“입 조심해, 마이클. 신입주제에 나대는 군. 작전을 바꾸겠어.”


시비르는 무리를 반으로 나누며 말했다.


“반반씩 간다. 너희는 저쪽으로, 너희는 우리와 함께 간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누어진 무리는 일리야 팀과 블레어 팀으로 나누어졌다.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말하며 시비르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몇 초 지났을까,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악!”
“아아악-”


끔찍한 비명소리가 흐르고, 정적이 흘렀다.


“너, 가서 확인하고 와.”


일리야가 끝에 있는 조직원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돌아온 조직원이 혼비백산하며 말했다.


“모…모두 죽었습니다. 트랩이었어요.”


그리고 뒤쪽에서 몰려오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시비르는 앞으로 달리라며 알베르토에게 소리쳤고, 다들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총성이 들려오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크악,”


계단에 도착하고 올라가고 있을 무렵 총성이 더 가까워져 왔다. 그리고 미처 들어오지 못한 조직원들이 문을 열어달라며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알베르토는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안하다, 잭.”


일리야는 계단 문을 막는 중이었다.


“네 부모님에게 보상을 꼭 해줄게, 잭.”
“흑흑, 대장.”
“미안해, 잭. 영광스럽게 죽어줘.”


흐느끼던 잭은 알겠다는 말을 남기고, 총소리와 함께 묻혀 사라졌다.

곧이어 문을 열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일리야를 비롯한 몇 명이 문을 막고 있었다.


“저희가 막을 동안 가십시오, 보스.”


알베르토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랐다.

문을 열고 시비르와 함께 들어섰을 때, 아래쪽에서 큰 총성이 몇 발 울리고 곧 조용해졌다. 시비르는 문을 꽉 닫았다.


“여긴, 조용하네요.”


이 층은 병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조용하고, 외벽이 하얀색이었다. 그리고 마치, 여기로 오라는 것처럼 하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알베르토는 총을 꽉 쥐고, 커브를 돌았다.
복도 끝에는 문이 있었다. 시비르는 자신이 앞장서겠다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복도 끝에 다다라 문을 열었을 때,


“시비르!”
“으윽,”


시비르는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결국 피하지 못했다. 시비르는 입구에서 풀썩 쓰러지며 말했다.


“보스, 들어가요. 저는 괜찮아요. 뒤 따라 가겠습니다.”
“……수고 많았어, 시비르.”


알베르토는 시비르에게 프랑스식 인사를 건네고 마지막으로 손을 꽉 잡았다.


“네 아들은, 꼭 찾을게.”


시비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말했다.


“나 아직 안 죽었어요. 겨우 피를 조금 흘린다고…,”


타앙-


피가 튀었다. 시비르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알베르토는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일어섰다.


“예쁜 아가씨인데, 안타깝게 됐어.”
“…예쁜 아가씨가 아니라 ‘시비르’였어.”


알베르토는 차갑게 뒤돌아섰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 셋, 그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전유성, 그리고 화면으로 보이는 줄리안이 있었다.


“…줄리안을 어쩔 셈이야.”
“그 아이를 진짜로 아끼나 보군?”


시시콜콜한 애인인줄 알았더니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가? 전유성은 와인을 벌컥 들이켜고 말했다. 알베르토는 전유성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 알베르토를 위협했다.


“아니, 그러지 말게. 여기 와서 앉아.”


전유성은 총을 겨누는 사람을 저지했다. 그덕에 남자는 조금 물러섰지만 여전히 남자는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전유성의 반대편으로 걸어가 앉았다.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거야, 뻔하지. 안 그런가?”


전유성은 알베르토에게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알베르토는 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조직의 붕괴.”
“껄껄, 맞네. 이 이상 세력이 커지면 나도 부담스러워서 말일세.”


퀸타르트도 참 복이 없지, 길거리에서 주운 애가 자기가 세운 조직을 망하게 하리라고 예상이나 했겠어? 전유성은 농을 지껄였다. 알베르토는 잔을 든 손이 떨렸다. 그분의 이름이 저 더러운 입에서 나오다니.


“퀸타르트 씨를 모욕하지 말아주세요. 제 은인입니다.”
“은인이면, 은혜를 갚아야지. 이게 무슨 꼴인가, 애인 하나 때문에 조직이 휘둘리는 꼴은.”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죽어줬으면 좋겠네.”


알베르토는 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권총을 부여잡았다.


“그런데, 자네 애인을 보니까 재미가 생겨서 말이야.”


알베르토는 눈을 부릅떴다. 전유성은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줄리안이 있는 곳에는 폭탄이 있지. 앞으로 5분 뒤면 터질 거야. 선택권을 주겠네. 줄리안이 죽거나, 자네가 살아서 조직을 계속 이끌어가거나.”


전유성은 일종의 모험수를 둔 것이었다. 알베르토가 진심으로 줄리안을 사랑한다면 대신 죽을 것이고, 죽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자신에게 위험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재미난 게임을 좋아하는 전유성은 자신의 판에 모험수를 둠으로써 게임을 더 위험하고, 재미있게 만든 것이었다.


“선택하게. 줄리안은 저기, 문 보이지? 저 안에 있네.”


모니터에 떠있는 줄리안의 의자 아래에는 폭탄이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저 폭탄은 무게에 민감하네. 의자에서 누군가 일어서고 10초가 지나도록 다시 앉지 않으면 바로 터지지. 그리고 저 방은 10초안에 나올 수 있는 크기가 아니네. 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줄리안을 구하려면 자네가 죽어야한다는 뜻이지.”


전유성은 껄껄 웃었다.


“그리고 자네가 죽으면, 줄리안을 무사히 보내주겠네. 당신의 조직원들도 모두.”


전유성은 리모컨을 조종해 다른 화면을 틀었다. 그곳에는 피를 흘리고, 다친 자신의 조직원들이 있었다. 많이 다쳤지만 죽지는 않았다. 블레어는 멀쩡하게 살아있었고, 일리야는 오른팔을 다쳤지만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보스.”


알베르토는 일리야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일리야. 괜찮아 보이네.”


그 말에 일리야 역시 피식 웃다가 고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알베르토는 고개를 돌려 전유성을 바라봤다.


“폭탄은 몇 분 남았지?”
“이제 2분 30초정도. 선택했나?”


알베르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줄리안이 갇혀있는 문으로 다가서자, 안쪽에 줄리안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알베르토는 문을 열었다.

 

 

 

 

 


“줄리안, 나야.”
“으, 알베르토?”


알베르토의 목소리에 줄리안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줄리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부어 터져서 피가 흐르는 입술, 붉게 부은 볼, 퉁퉁 부은 오른쪽 눈. 알베르토는 조심스럽게 줄리안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줄리안은 아픈 듯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날 구하러 온 거에요?”
“그래. 널 구하러.”
“저 사람말로는 여기에 폭탄이 있대요, 얼른 나가요, 알베르토.”


알베르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줄리안의 결박을 풀었다. 다리에 묶인 밧줄을 풀고, 왼손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그리고 오른손의 결박을 풀고 일어나려는 줄리안을 다시 앉히며 알베르토가 말했다.


“일어나면 안 돼. 일어서면 터지는 폭탄이야.”
“네?!”


그 말에 놀란 듯 줄리안은 도로 앉았다. 그럼 어떻게 빠져나가요? 줄리안이 눈을 크게 뜨고 물어왔다. 알베르토는 힘겹게 운을 뗐다.


“줄리안. 이제 와서 말하는 게 미안해, 나를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를 거둬주셨던 분의 이름은 존 퀸타르트야. 그리고 그분의 숨겨진 아들의 이름은,”


알베르토는 어리둥절해하는 줄리안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줄리안 퀸타르트야.”
“…줄리안?”


내 이름이랑 똑같네, 우연의 일치인가. 줄리안이 중얼거렸다. 알베르토는 어느새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줄리안 퀸타르트를 나는 뒤에서 도와왔어. 그러다가, 욕심이 생겨버린 거야. 내 임무는 보호하는 거였는데, 사랑에 빠져버렸거든. 그래서 줄리안을 보호하지 못했어. 위험에 빠뜨리게 만든 거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됐어.”


말을 마친 알베르토는 줄리안을 밀어내고 의자에 앉았다. 바닥에 내팽겨쳐진 줄리안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알베르토에게 다그쳤다.


“알베르토, 그럼 내가, 내 진짜 이름이,”
“넌 벨기에의 어떤 가정으로 보내져서 길러졌어. 그 가정은 퀸타르트 씨의 은퇴한 조직원이었고, 크리스 퀸토씨였지. 너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분이 아빠라고 생각하며 자란거야. 네 진짜 이름은 줄리안 퀸타르트야.”


알베르토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줄리안 역시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알베르토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 이제 어서 나가. 내 마지막 임무는 너를 지키고 살리는 거니까. 폭탄이 곧 터질 테니, 얼른!”


그러나 줄리안은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줄리안은 울면서 알베르토에게 다가갔다.


“알베, 르토, 알베르토,”
“얼른 나가! 줄리안 퀸타르트, 어서!”
“흑, 흑, 고마, 워요, 알베르토, 잊지 않을, 게요.”


줄리안은 알베르토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눈물을 닦아줬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

 


“사랑하면 안 될 사람을 사랑해서 죄송합니다, 퀸타르트 씨.”


벌은 죽어서 달게 받겠습니다. 알베르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폭탄이 터졌다.

 

 

 

 

 

 

 

*

 

 

 

 


 
 
“줄리안!”
“로빈!”


어느새 해를 돌아 다시 겨울이 되었다. 밖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줄리안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로빈이 카페에 들어서며 줄리안을 반겼다.


“와, 진짜 춥다.”
“그러게.”


줄리안은 미리 시켜놓은 핫 초코를 마시며 말했다. 로빈은 자신의 앞에 있는 라떼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시간은 귀신같이 맞춘다니까. 나 올 줄 어떻게 알고 미리 시켜놓는 거야, 매일.”
“너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도착하는 시간은 다 알지.”


줄리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로빈은 추위에 붉어진 얼굴을 라떼 잔을 볼에 대고 녹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꺼내 줄리안에게 내밀었다.


“어? 여권 이름표?”
“오다가 네 생각나서 샀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아, 그건 어떻게 알았어?”
“네 니콜라스한테서. 섭섭하게, 나한테 먼저 말하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조직보스가 사라져버린 NSM은 퀸타르트의 아들인 줄리안이 물려받았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결국 로빈에게 들켜버려서 로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로빈은 적잖이 놀라면서도 줄리안을 위로해줬다.


“너 니콜라스랑 너무 친해지는 것 같아.”
“그럼 나랑 자주 만나던가! 너보다 니콜라스랑 만나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아.”


로빈은 삐진 척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줄리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바빠서 미안. 아무튼 너는 프랑스로 돌아갈 생각 없어?”
“가족도 없는데 뭘. 혼자 계시던 아버지가 결국 돌아가셨어.”


로빈은 씁쓸하게 말했다. 줄리안은 로빈의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나마 프랑스에서 혼자 암 투병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슬프지 않아?”
“나를 애초에 좋아하시지도 않았는데 뭘. 젊은 나이에 담배나 피워대니 일찍 죽는 거지.”


로빈은 그립지 않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실은 무척이나 가보고 싶었을 거였다. 줄리안은 벨기에에 같이 가자며 로빈을 꼬드겼다. 로빈은 결국 못이기는 척 알겠다고 답했다.


“가는 길에 프랑스에 들려서, 너희 아버지도 한번 보고.”
“…그래.”

 

 

 

 

줄리안은 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알베르토가 죽고 나서 NSM의 모든 곳은 가봤지만 딱하나 가보지 않은 곳이 있다면, 바로 알베르토가 머물던 이곳이었다. 차마 알베르토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사장실은 조직을 정리하고 본부도 옮길 겸, 청소가 한창이었다. 줄리안이 들어서자 청소하던 사람들은 인사를 하고 나갔다. 줄리안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알베르토가 앉았었고, 우리 아빠가 앉았었던 자리.’


줄리안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알베르토는 자신보다 3살이 많았고, 아마도 아버지는 키울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서 알베르토를 애지중지 키운 것 같았다. 자신의 아들처럼. 그러다가 ‘나’를 떠올리고는 조사를 지시해서 찾아냈고, 마침 나는 어머니가 죽어서 고아원으로 보내질 참이었다. 그리고 나는 크리스 퀸토의 가정으로 보내져서 키워졌다. 아버지라고 믿으며.
줄리안은 테이블 옆에 무수히 쌓여있는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한 장의 서류는 붉게 강조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자세히 쳐다봤다. 웬 여자?

그리고 읽어내려 가던 줄리안은 황급히 종이를 들고 문을 나섰다.

 

 

 

 


‘시비르 데이아나’

‘아들 찾음, 로빈.’

 

 

 

*

 

 

 

 

“시비르.”


시비르는 병실에 누워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알베르토가 줄리안 대신 죽고, 시비르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죄책감으로 시비르는 줄리안을 ‘모른 척’ 했다. 그녀의 충성심은 퀸타르트보다는 알베르토에 가까웠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걷지 못한다.


“당신의 아들을 찾았어요.”


그리고 항상 줄리안의 말을 듣지 않았던 시비르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줄리안의 눈을 쳐다봤다.


“만나러 가시겠어요?”


시비르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줄리안,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엄마 찾았어. 살아계셔.”
「그러니까, 그게 무슨…소리야.」
“만나면 알아, 지금 당장 비담공원으로 나와.”

 

 

 


*

 

 

 

줄리안은 조용히 안락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신이 어린 시절, 자랐던 이곳은 이제 자신밖에 없었다.
크리스 퀸토 씨는 이사를 가버려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살고 있던 이 집을 사고, 청소를 말끔히 하자 꽤나 옛날과 비슷해졌다.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아빠.”


줄리안은 탁자에 놓여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어린 시절 많이 읽었던 책, ‘집 없는 아이’였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줄리안은 책을 뒤적거렸다. 슬프게도 펼친 페이지는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죽는 장면이었다. 줄리안은 페이지를 넘겨서 마지막장을 읽었다.


‘잃어버린 아들 레미를 다시 찾아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줄리안은 책을 덮었다.
알베르토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말하던 모습도.

 

이탈리아어로 사랑해가 뭐였을까.

 

 

줄리안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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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우와유ㅠㅠㅠㅠㅠㅠㅠㅠ넘재밌오요♡♡♡♡이런건진짜연재물로하면좋을텐데ㅜㅜㅜㅜㅜㅜㅜㅜ완전취저입니당♡♡
9년 전
에기벨
저도 쓰고나니까 너무 긴거같아서 연재물이었으면 아마 완성도가 더 높아지지않았을까, 싶네용. 마이너합작을 기회로 조직물 처음써봤는데 취저라니 감사해여ㅠㅠㅠ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ㅇ,ㅇ
9년 전
독자2
너무 잘 봤어요!
9년 전
에기벨
긴글인데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ㅠㅠㅠㅠ
9년 전
독자3
헐 이미 충분히 완성도 높은데요..? 시비르와 로빈의 관계가 밝혀지는 장면에서 소오름! 재밌게 잘봤습니다!
9년 전
에기벨
오오..칭찬감사합니다 ㅠ_ㅠ 제가 다시 읽어보면서 조금만 더? 다듬거나 내용추가했으면 더 완성도 높았을것 같아서요..'ㅁ' 소름까지..하핫; 좀 길었을텐데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해요!
9년 전
독자4
헐...알줄ㅠㅜㅜㅜㅠㅠㅠㅜ알줄이마이너였군요ㅠㅠ어쩐지 제가 줄리안총수를 엄청좋아하는데 하나도 없던이유를 알겠네요ㅠㅠ진짜 이 글 너무 좋습니다 작가님 사랑해여ㅠㅠㅠㅜㅠ사실 마지막에 알베살아있기를 기대했는데 아쉬워요ㅠㅠ
8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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