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07 (특별한 사람, 특별한 선물)
"… 하나, 둘, 셋…"
어느새 사탕은 세 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소파에 누워, 요샌 별로 재밌게 느껴지지도 않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사탕을 쪽쪽 빨았다. 너 주려고 산 사탕인데 내가 다 먹고 있네.
한숨을 포옥 내쉬며 리모콘으로 TV 전원을 껐다. 오렌지맛 막대사탕이 어느새 콩알만 해졌다. 콩알만큼 작아져 맛도 잘 느껴지지 않는 사탕을 억지로 깨물어 먹었다. 아침부터 밥이 아닌 사탕을 먹어서 그런지 입안이 텁텁했다.
오늘과 내일이 주말이라는 사실에 내심 고마웠다. 박찬열의 선물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던 내 선물을 대충 보완해놓을 수 있을 만한 기간이 이틀이나 생겨난 것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지금 남은 거라곤 막대사탕 세 개와 초콜릿 몇 개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상자도 좀 큰 걸로 새로 구입하고, 사탕이랑 초콜릿, 내가 좋아하는 과자도 마음껏 사야겠다.
*
"……."
제법 큼지막한 상자를 사서 안을 꼭꼭 채웠다. 여러가지 맛의 사탕과 여러 종류의 초콜릿, 그리고 젤리도 샀다. 확실히 돈이 많이 들긴 했지만 상관 없었다. 이만하면 박찬열보다 훨씬 좋은 선물이겠지.
상자 구석에 넣어뒀던 작은 편지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때 무턱대고 화내서 미안. 겉으론 안 그런 척 하는데, 나 후회 많이 하고 있어. 화해 하자는 말도 어색하고 유치해서 안 쓰려 했는데, 그냥 이번엔 쓸래. 화해 하자. 진짜 미안해. 앞으론 싸우지 말자.
"… 오글거리네."
난 왜이리 편지를 못 쓰는 건지 모르겠다. 뭐든 쓰면 다 오글거리고 닭살 돋고… 짜증나. 아쉽지만 편지-라 할 것도 없이 아주 조촐한 종이쪼가리-를 망설임 없이 찢어 휴지통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냥 이정도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월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
*
"다녀오겠습니다."
이 시간에 일어나보긴 태어나 처음인 것 같다. 조그마한 메모지에 간단한 문장을 끄적이곤 식탁 위에 붙여두었다. 아직 주무시고 계신 부모님 방에 대고 작게 속삭이듯 인사를 했다. 살다 보니 내가 아침 여섯 시에 등교를 하는 날도 있구나. 대박이다.
역시 거리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자꾸만 하품이 나왔다. 하품을 함과 동시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대충 닦아내곤 휴대폰을 꺼냈다. 다섯 시로 맞춰져있는 알람을 망설임 없이 삭제했다. 오늘을 위해 일찍 일어난 건 맞지만, 역시 다섯 시에 일어나는 건 잠이 많은 내가 할 짓은 아닌 것 같으니 다음부턴 절대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자동차 배기가스, 매캐한 담배 연기, 온갖 미세먼지들로 둘러싸여있는 도시에서도 상쾌하다 느껴질 정돈데, 과연 시골의 공기는 얼마나 상쾌하게 느껴질지 궁금했다. 나이들면 지방에 내려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아직 먼 미래지만.
*
예상대로 학교 안은 썰렁했다. 1등으로 도착한 교실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한 듯했다. 교실 열쇠는 교무실에 있지만, 지금쯤 교무실 문은 닫혀있을 것이었다. 그럼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추운 복도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버리네.
선생님이 언제 오실 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계속 기다려. 그냥 창문 넘어서 들어가면 되지.
들고있던 사탕상자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곤 손을 뻗어 창문을 열었다. 잠겨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창문은 쉽게 열렸다. 하필 상자가 하얀색이라 복도 바닥의 작은 먼지들이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열린 교실 창문을 바라보다 망설임 없이 올라가 넘었다. 그리곤 교실 뒷문의 잠금장치를 풀어 뒷문을 활짝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복도로 나와 바닥에 내려두었던 상자를 집어들곤 교실로 들어가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옆반 문이 열릴 때까지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야겠지.
*
코앞에 상자를 놔둔 채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북적거리는 소리에 저절로 눈이 뜨였고, 눈을 뜨자마자 벽에 걸려있는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7시 15분….
"야, 너 몇 시에 왔어? 겁나 애잔하게 왜 여기서 자고 있냐."
"6시 몇 분…."
침침한 눈을 몇 번 비비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실엔 불도 켜져 있었고, 아이들도 몇몇 보였다. 고작 해봐야 나까지 해서 총 네 명이었지만.
"미친 거 아냐? 몇 시에 일어났는데? 왜이리 일찍? 공부하려고 일찍 온 건 절대 아닐 테고…."
아침부터 앞자리에 앉아 쫑알쫑알 말이 많은 오세훈을 신경질적으로 바라보았다. 녀석은 막대사탕을 입에 문 채 얄밉게 웃어보이고 있었다. 달달한 포도 향이 미세하게 풍겨오는 걸 보니, 오세훈이 먹고 있는 사탕은 아마 포도맛일 것이었다.
"아침부터 웬 사탕이야. 어디서 났어? 교문 앞에서?"
"아니, 여기 안에 있던 건데."
앞에 놓여있는 하얀 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하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 거칠게 사탕 막대를 빼앗았다. 벙찐 표정을 지은 채 쩝쩝 입맛을 다시는 오세훈을 보자 짜증이 솟구쳤다. 녀석의 손끝이 닿아있는 상자를 억지로 빼앗아 저 멀리 두었다.
"만지지마, 새끼야."
"… 뭔데 그래? 그리고 치사하게 먹던 사탕까지 빼앗냐."
"왜 마음대로 먹는데. 너 먹으라고 가져온 거 아니라고."
"그럼 누구 먹으라고 가져온 건데? 사탕 장사하러 왔냐? 많으면서 하나도 안 주고."
불만조로 말을 내뱉는 오세훈을 매섭게 바라보다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옆반 애들도 몇 명 왔을테니 분명 문이 열려있겠지.
교실의 불은 환히 켜져있었으나 앞문과 뒷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두세 명의 남학생들이 보였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레 뒷문을 열어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여러 개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최대한 조용히 들어간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 미안."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와 수학 문제를 풀고있는 남학생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소란 피우면서 들어간 것도 아닌데 되게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그러려니 여기며 쿨하게 넘겼다. 창가쪽 맨 뒷자리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제법 널널한 책상 서랍 속에 손을 넣어보았다. 약간의 공간이 있긴 했지만 상자가 들어가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사물함 속에 넣어둬야 했다. 오늘 하루 사물함을 열어볼지 안 열어볼지도 미지수였지만, 일단은 사물함 속이 최적의 공간이었다. 책상 서랍 속에도 안 들어갈 정도로 상자가 큰 사이즈였다니…. 왜이리 큰 걸 산 거지.
상자가 크든 작든간에, 어쨌든 선물은 선물이었다. 화이트데이도 벌써 사흘이나 지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냉전 상태에서 직접 전해주긴 창피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니, 그냥 간접적인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으니 반으로 돌아가고자 다시 조용히 뒷문을 열었다. 그러다 문득, 사물함 속에 넣어둔 선물이 내가 준 것임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난 항상 작은 상자에 간소하게 사탕 몇 개만 담아 건네줬었으니, 이건 당연한 걱정이었다.
"저기, 나 펜 아무거나 좀… 빌려주라."
수학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지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샤프를 돌리고있는 남학생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말했다. 그러자 아까와 같은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듯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이 꽤나 마음에 안 들었다. 내 말을 무시하는가 싶던 남학생은 제 필통 속에서 컴퓨터용 싸인펜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하도 많이 써서 그런지 겉표면이 닳아있었다.
"고맙다."
막상 펜을 빌리긴 했지만 무슨 멘트를 써야 할지 고민이었다. 편지 같은 걸 써준지도 꽤나 오래 됐는데… 뭐라고 쓰지. 아니, 애초에 편지 쓸 생각을 했던 건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결국 가장 멋없고 식상한 두 글자를 상자 뚜껑의 구석에다 적었다. '미안.' 이거면 나인 줄 알겠지. 너한테 미안할 짓을 할 사람은 나 말곤 없으니까.
*
주말 동안 녀석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나도 모르게 녀석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 학교 가면 또 마주치겠지. 이럴 땐 옆반이라는 게 참 싫었다. 마주치긴 싫어하면서 연락은 왜 기다리고 있는 건지…. 나도 참 모순적이다. 도대체 이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오늘도 혼자 등교를 했다. 녀석에게 먼저 가겠다는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다 느껴질 만큼, 혼자 등교하는 일이 왠지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필 오늘도 과외가 있는 날이었다. 그놈의 과외… 오늘 역시 숨막히는 과외가 되겠군.
*
오전 수업 내내 주말에 미처 끝내지 못한 과외 숙제를 몰래 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교과목 담당 선생님들껜 정말 죄송하지만서도 어쩔 수 없었다. 과제를 해오지 않으면 어마무시한 벌을 주겠다며 겁을 주던 박찬열쌤은, 고작 네 문제밖에 풀어오지 않은 김종인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었다. 그러니 숙제를 해가지 않아도 혼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숙제를 해가지 않는다는 건 선생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항상 웃는 인상이었다. 물론 항상 그렇다 정의를 내릴 정도로 자주 만났던 건 아니지만, 딱 보기에도 그는 웃는 인상에, 밝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닌 사람 같았다.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한 마스크를 가지고 있는 그를 보면 입가에 절로 웃음이 번질 정도로, 그는 밝은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완벽한 외모와는 다른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숙제는 마무리 지어야…
"이따 급식 먹으러 갈 때 앞뒷문 꼭 닫고 나가. 알았지?"
점심시간이 20분이나 지난 교실 안은 적막하기만 했다. 지금까지 영어 듣기를 하던 남학생이 내게 말을 건네왔다. 멍때리며 20분을 흘려보내는 동안 반 아이들은 모두 급식을 먹으러 간 듯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남학생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펼쳐져있는 국어 모의고사 문제집을 덮었다. 곧이어 남학생이 교실을 나갔고,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어제 점심시간 이후로 기분이 급격히 다운되어있던 송민희는 오늘, 4교시까지만 수업을 듣고 조퇴를 했다. 아픈 구석은 전혀 없으면서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 연기를 해보이는 모습이 꽤나 우스웠다. 어차피 송민희와 급식을 같이 먹고 싶은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조퇴를 해서 먼저 집에 가버린 것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얼굴 마주하기도 껄끄러웠는데, 오히려 더 잘 된 일일지도.
문득, 어느 누군가가 했던 '인생은 결국 혼자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 인생은 원래 혼자지. 혼자인 거야. 혼자인 게 싫고 외로워서 급식을 먹지 않는다는 건 정말이지 미련한 짓인 것 같았다. 어차피 같이 먹을 사람도 없는데 교실에서 과외 숙제나 하면서 점심시간을 때워볼까 했지만, 그러기엔 배가 너무나도 고팠다. 오늘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김급식'이라는 어플을 실행시켰다. 한 번 확인해보고, 생각보다 별로면 그냥 매점에서 샌드위치라도 사먹어야겠다.
"……."
감자 볶음밥에 토마토소스 스파게티, 그리고 딸기잼이 발린 모닝빵이라니. 꼭 먹어야겠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시간은 고작 25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25분 안에 급식을 다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시간표를 확인했다. 하필 5교시는 체육이었다. 5교시 체육은 4교시 문학 만큼이나 끔찍했다. 음식물이 채 소화되기도 전에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뜀박질을 해야 하는 허들이라니…. 망할 허들. 그놈의 허들이 항상 문제다.
체육시간에 단 1분이라도 늦으면 운동장을 돌아야 했다. 그러므로 급식을 먹다 늦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해서는 안됐다. 그러기 위해선 미리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급식실로 향하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사물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안엔 체육복과 문제집 몇 권밖에 들어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물함 문은 살짝 열려있었다. 그게 조금은 이상해 천천히 사물함을 열어보았다. 두려움 가득한 마음을 안은 채 열어본 사물함 속엔 웬 낯선 상자가 들어있었다. 꽤나 큼지막하고도 새하얀 상자를 천천히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얀 상자의 뚜껑엔 심플하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리본도 달려있었다. 누가 내 사물함에 잘못 넣어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교실 안에 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열려 손을 뻗었을 때, 뚜껑 구석에 적힌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미안?"
지렁이 같은 글씨체로 적혀있는 '미안.'이라는 두 글자가 왠지 익숙해 보였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상자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알록달록한 사탕들과 초콜릿들이었다. 빼곡하게 담겨있는 사탕들 중엔 내가 좋아하는 콜라맛 사탕도 있었다.
미안… 이라니.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미안….
일단 지금은 이런 것에 관해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얼른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급식을 먹으러 가야 했다. 온갖 의문점들을 생겨나게 한 수수께끼 같은 상자를 다시 사물함 속에 집어넣곤 체육복을 가지고 뒷문 쪽으로 향했다. 아무도 안 볼 거라는 걸 알지만 혹시나 해서였다. 화장실까지 가서 갈아입는 건 귀찮으니 그냥 교실에서 갈아입어야지.
뒷문을 닫으려 손을 뻗었다. 왜인지 쉽게 닫히지 않는 문을 힘껏 닫으려 손에 힘을 가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문이 잘 움직이지 않아 밖을 흘끗 내다보았다.
"……."
"……."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뒷문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김종인이 바로 코앞에서 보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벙찐 상태로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너 여기서 뭐해. 왜 여기 이러고 서있어. 라고 물어볼 틈도 없이, 녀석이 먼저 입술을 뗐다.
"가자."
"……."
"밥 먹으러."
*
밥 먹으러 가자던 녀석은 급식실이 아닌 학교 뒤편에 위치한 벤치로 걸음을 옮겼다. 먼저 벤치에 앉곤 너도 앉으라며 제 옆자리를 툭툭 치는 녀석을 바라보다 머쓱히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입을 꾸욱 다문 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녀석을 곁눈질로 슬쩍 바라보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여긴 왜…."
"할 말 있어서."
할 말 있다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건데? 라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꿀꺽 삼켰다. 그저 김종인의 옆모습만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녀석이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왠지 부담스러워 황급히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녀석이 느긋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 네 친구가 나 좋아한대."
제 이야기를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도 되는 양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김종인이 참으로 웃겼다. 사실 그건 우연히 몰래 듣게 돼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김종인은 송민희의 사탕조차 받아주지 않았던 건지, 송민희 손엔 사탕이 그대로 들려있었다. 그리곤 거침없이 쓰레기통으로 사탕을 집어넣어버리던 그 모습까지 생생히 기억난다. 내 멋대로 생각해도 될런진 모르겠지만, 김종인은 송민희의 사탕과 고백을 거절했다. 아직 연애할 생각이 없는 건지, 정말 고3에게 연애란 사치라는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김종인은 송민희를 찼다. 찼다는 표현이 절적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왠지 기분은 좋았다. 기분이 왜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냥 기분이 좋았다.
"사탕도 주더라."
"근데 왜 안 받았어?"
"안 받았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 아, 그냥… 추측이지."
"신기하네."
"… 그치."
"그냥 받기 싫어서 안 받았어."
역시 단순한 김종인은 그 이유마저 단순했다. 그냥 받기 싫어서 안 받았어. 과연 그거 말고 더 단순한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어."
"뭐."
"혹시 내 사물함에 사탕상자 넣어놓은 거 너야?"
"아, 그거."
"……."
"봤어?"
"봤지."
"나야."
"… 네가 웬일로 그렇게 많이… 그리고 화이트데이는 벌써 며칠이나 지났잖아."
"그때 못 줘서 대신 오늘 준 거야."
"… 근데 너 얼굴은 왜 빨개져?"
알게 모르게 녀석의 얼굴이 빨개진 것 같았다. 내 착각이라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녀석의 볼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 물음에 괜히 몸을 돌리며 틱틱거리는 녀석의 반응이 웃겨 작게 소리내 웃었다.
"야, 김종인. 너 얼굴 왜 빨개졌냐고."
"뭐가 빨개져. 안 빨개졌다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왜 안 보여주는 건데? 왜 고개 돌리는 건데?"
"아, 하지마라."
"… 김종인한테 이런 면이 있었다니. 야, 종이야. 너 좀 귀엽다."
"하나도 안 귀여워. 넌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마."
쑥쓰러운지 계속 시선을 피하는 김종인이 꽤나 재밌었다. 녀석한테 저런 면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몇 년을 알고 지내왔지만, 귀엽다는 말 한 마디에 저렇게 부끄럼을 타고 어쩔 줄 몰라하는 애였다니. 정말이지 신기할 노릇이었다. 내가 알던 김종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근데 너, 그때 밥 누구랑 먹었어?"
"응?"
"교실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씹고."
"… 아, 그때."
"밥 먹긴 먹었어?"
"… 아니, 안 먹었어."
"왜?"
왜냐니. 혼자 먹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그날은 먹을 기분도 아니었으니까. 라고 말하면 또 뭐라 하겠지.
그냥 웃음으로 넘어가고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녀석이 인상을 찡그리더니 내 이마에 아프지 않게 살짝 딱밤을 주었다. 이마를 문지르며 녀석을 바라보자, 못 말리겠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밥도 굶을 거면서 내 전화는 받지도 않고. 나 그때 진짜 화났었다."
"……."
"화났었다고."
"아, 알아."
"뭘 알아."
"너 화났었다는 거 나도 안다고."
"그래서."
"그래서라니?"
"어쩔 건데."
"뭘 어째?"
"치킨."
치킨을 뭐 어쩌라는 거냐는 질문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분명 '치킨'이라는 두 글자는, 나를 화나게 했으니 네가 내 화를 풀어달라. 그 방법은 오직 치킨 하나면 된다. 치킨을 사달라.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여간 치킨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녀석이다.
상자 뚜껑에 '미안.'이라 적혀있는 것도 보았냐며 아무렇지 않게 묻는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괜히 장난기가 발동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이럴 때 아니면 김종인을 언제 놀려보겠어.
"뭐가 미안한데?"
"뭐?"
"미안하다 써놨다며. 뭐가 미안한 건데?"
김종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 얼굴이 조금은 무서워,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녀석의 눈을 가렸다.
"너만 미안한 거 아니야. 나도 미안해. 송민희한테 네 번호 멋대로 알려준 것도 미안하고,"
"미안하고."
"네 전화랑 문자 씹은 것도 미안해."
"알면 됐어."
"너는?"
"나?"
"너는 뭐가 미안한데?"
"… 난."
"……."
"무턱대고 화낸 거."
"미안해, 라고 해봐."
"했잖아."
"언제?"
"상자 뚜껑에 적어놨잖아."
"말로는 안 했잖아."
직접 말하긴 부끄러운지 계속 피하려 애쓰는 김종인을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따라 왜이리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일부턴 학교 같이 가. 또 혼자 가지말고."
"알았어."
"밥도 같이 먹고."
"알았어."
"집도 같이 가."
"알았어."
알았다는 대답을 함과 동시에 5교시 예비 종이 울렸다. 종이 울리자 제 손목시계를 흘끗 바라보며 당황한 기색을 내비추던 김종인이 내 머리칼을 잔뜩 흩뜨려놓았다. 5교시는 체육인데… 5분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 난 점심도 먹지 못했다.
"… 야, 우리 아직 점심도 안 먹었잖아."
"난 사실 별로 배 안고파."
"… 난 고픈데…. 오늘 맛있는 것도 나온단 말이야."
"뭐 나오는데?"
"스파게티랑…"
"내가 스파게티보다 맛있는 거 사주면 되잖아."
어영부영 나를 달래던 김종인이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웃음으로 넘어갈 생각인가 본데, 난 치킨을 얻어먹을 생각이다.
5교시는 사회문화라며 벌써부터 졸려하던 김종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식을 먹는 건 고사하고, 아직 체육복으로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이 참으로 난감했다.
"너 얼른 준비하고 나가. 체육한테 깨지기 싫으면."
"아,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근데 오늘도 과외 있는 날인가?"
"응. 너 숙제는? 다 했어?"
"내가 했겠어?"
"… 아니."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는듯 작게 헛기침을 해보이던 녀석이 내 머리 위에 제 손을 척- 하고 얹어놓았다. 5교시가 시작하려면 대략 3분 정도 남았을 것이었다. 녀석과 노닥거리고 있을 여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헤어지기가 싫었다. 이런 말을 김종인에게 직접 했다간 녀석은 소름끼친다며 토하는 시늉을 해보이겠지만, 정말 사실이었다.
"오늘 석식 먹냐."
"뭐 나오는데?"
"몰라. 안 봤어."
"그럼 먹고 가자."
"그럴까. 근데 나 과외 하기 싫어."
"왜?"
"박찬열 보기 싫어."
"왜? 찬열쌤이 너한테 안 좋은 소리 했던 적도 없잖아."
"어쨌든 싫어."
제법 단호하게 말하는 김종인을 바라보며 살풋 웃었다. 하필 나보다 키도 큰 게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맨날 실실 웃고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걔 진짜 이상한 놈 같아. 내가 숙제도 제대로 안 해갔는데도 웃고 있었어. 착한 척 하는 건가? 이미지 관리? 옆에서 또 자신만의 연설을 늘어놓는 김종인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5교시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경쾌한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했다. 분명 체육선생님에게 대판 깨질 것이라 예상하며 불안해하는 나와는 달리, 녀석은 느긋해 보였다. 이럴 땐 저런 여유로움이 정말이지 부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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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난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아야 했다. 인정머리 없는 체육선생님은 정말 칼 같으신 분이었다. 제가 정한 룰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운동장을 도는 내내 기분은 한결 홀가분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선물과 예상치 못한 사과를 받았다. 김종인은 결코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 예상이 또 한 번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김종인은 내 예상과 빗나가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내 느낌은 그랬다.
화이트데이가 벌써 며칠이나 지나버린 오늘이지만, 화이트데이 못지 않은 달달함과 포근함이 느껴지는 하루 같았다. 마치 오늘이 화이트데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오늘 하루는 계속 기분이 좋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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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설이네요 :~) 다들 떡국 드셨나요? 전 오늘 점심에 떡국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네요..☆ 그리고 저 정말 놀랐어요.. 전 글 추천수가 3이라니.. 감덩감덩.. 이렇게 잘 안 보이는 곳에서 감동주시는 독자분들 누구세요ㅠㅠ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참, 제가 암호닉에 관한 언급을 너무 안 했던 것 같아요.. 전 항상 열려있으니 아무때나 마구마구 신청해주셔도 좋아요! 저도 여러분들과 소통하고 싶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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