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랑 시리즈 ; Goodbye, Summer 下
브금 : 그대라 읽고 사랑이라고 쓴다 - 피아노포엠
Goodbye Summer의 마지막 편, 오늘 브금은 피아노.
"조금 있으면 축젠데, 누구 참가하는 사람 없어?"
"다른 반이랑 참가해도 되요?"
"음... 춤이나 노래는 된다. 혹시 하는 사람있으면 교무실에 따로 와서 얘기하도록."
아이들은 신난 눈치였다. 꺄악, 벌써부터 축제라니!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누구와 축제를 나갈지, 뭘 할지 벌써부터 고민중이였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문제집을 덮었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제집 커버가 닫혔고 조용히 샤프를 눌렀다. 벌써 12월이였다. 봄 날이 엊그제 같은 데 벌써 12월이란 사실은 실로하여금 내가 늙어간다는 걸 보여주는 듯 했다. 입가에 웃음을 띈 채 조용히 시키는 반장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친구의 재촉을 다시 떠올렸다. 3월부터 지금까지 친구는 나를 설득했다. 제발 노래 좀 불러달라고. 아니면 기타라도 치라면서. 그것도 정 안되면 피아노라도 치라며 친구가 하도 설득을 지겹도록 달달 볶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승낙을 외쳐야만 했고 친구는 그 파트너를 직접 고를 기회를 주겠다며 쓸데없는 권리를 넘겼다. 축제까지 3주가 남았다. 덜도말고 더도만 그런 기간이라서 나는 아직까지도 남녀파트너일지, 여자파트너일지 고를 틈도 없었다. 바깥풍경을 보니 차가운 바람이 솔솔 불고 그 사이간에 눈 발이 약하게 휘날렸다. 사방이 곧 뿌옇게 변하겠지. 나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주먹을 쥐었다.
종이 치고 아이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1교시만 하면 청소시간이였다. 학교 매점을 털러 간 것이 틀림없다. 나는 할 것도 없어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이왕 이런 김에 밀린 잠이나 자는게 좋겠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덮었다. 교실에는 히터가 잔뜩 틀어져 있었기에 없던 잠도 오는 판이였다. 덜그럭 거리는 책상 소리와 소곤소곤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덜컹 열리는 교실 문 소리까지 모든 것이 소음이였다. 나는 눈을 일부러 감은 채 아무 것도 듣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이런 것도 참 웃겼기에 금방 그만 두고 팔베개를 만든 뒤에 다시 잠을 청했다. 10분 뒤면 7교시 시작이다. 축제 때문에 학교 전체가 들썩이는 모습은 보기 싫지만은 않았다. 다만 좀 걸리는 것은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 때문이다. 그렇게 잘 부르는 편도 아닌데 친구가 자꾸 옆에서 부채질을 하는 바람에 자꾸 착각을 하게 되었다. 입술을 축인 뒤에 몸을 뒤척였다.
갑자기 저기, 하고 누가 내 등을 쿡 찔렀다. 잠도 오지 않던 나는 반문을 하며 금방 몸을 일으켰고 옆짝이였던 아이가 살짝 곤란한 얼굴을 지으며 교실 문을 가르켰다. 구준회가 너 불러달래.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금방 얼굴이 펴졌다. 반가웠고, 조금 보고싶었던 건 사실이였다. 그 때 봉사활동 이후로 겹칠 시간조차 없어서 인사도 못 건네는 기회가 많았다. 구준회도 나도 마주치면 꾸준히 인사는 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교실에 죽치고 앉아있었고 구준회는 아마 운동장을 점령하고 있는 터였겠지. 친구랑 얘기를 하며 운동장을 보면 구준회가 땀을 닦아내며 온갖 인상을 찌푸리고 삿대질에, 버럭 소리지름에, 거칠게 골대에 공을 박아넣는 둥 모습을 보았기에 그의 그런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구준회, 쟤 고백 받았다던데. 한 달전에 들었던 소식이 자꾸만 생각나서 떨쳐내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구준회가 인기 많은 건 인정하지만 그렇게 좋지않은 소리를 듣고있자니 내가 다 괴로웠었다. 하지만 구준회는 내게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치근덕 대며 친한 척을 많이 보여주었다.
"오랜만이다, 너."
구준회는 입꼬리를 올린 표정을 굳힌 채 나를 반겼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나는 동감했다. 우리는 거의 2주만에 본 것이 틀림없다. 추워지면서 구준회는 축구를 그닥 즐기지 않는 눈치였다. 패딩을 껴입어도 추울 날씨에 얇은 져지에다가 그 놈의 와이셔츠, 그리고 니트조끼 없는 넥타이 달랑 하나. 그의 얇은 몸이 이 추위를 견디는 것도 신기해서 나는 그닥 군말없이 그의 패션을 눈으로만 즐겼고 지나가는 여자아이들이 은근 던지는 추파를 무시하며 그는 또 다시 우리 반에 찾아온 것이다. 구준회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내 머리카락을 부비적 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어버린, 구준회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이 새삼스럽게 훅 다가와서 귀가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잘 지냈냐고, 구준회는 첫 인사를 무뚝뚝하게 건넸다. 애초부터 구준회에게 다정함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무심했다. 하지만 반전으로, 기억을 잘 하는 남자였다. 무심히 지나쳐 가도 될 그런 말을 쓸데없이 기억해서 챙겨주는 데 일색하는 것 같았지만 의외로 반은 다정했었다. 구준회다운 첫 인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웃음은 내가 느껴도 자조적같았다. 얇고 말라버린 가을에 밟는 낙엽들의 아우성을 듣는 것 마냥 나는 특감있는 웃음이 온 얼굴 신경에 느껴져서 금방 입꼬리를 내렸다. 구준회는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며 춥다는 듯이 몸을 잠깐 떨었다. 요즘 추운데 감기는 안 걸렸냐.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패딩을 정리했다. 기껏해봐야 깃 좀 세워주고, 패딩을 몇 번 펑펑 치는 게 대다수였지만. 요즘 감기 독해, 감기 걸리지마. 그는 감기라는 단어에 민감한 신경을 내세우며 짝 다리를 짚었다. 손은 여전히 져지, 아니면 바지 주머니에 푹 꽂아넣는 습관까지 내가 알고 있던 구준회의 모습과 동일했다. 알 수 없는 안도감에 한숨을 폭 쉬고 약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응, 너도. 짧은 걱정을 답례로 건네는 건 예의였다.
아, 너 그거 들었어? 그는 얼굴에 반색을 띄우며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삼백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그의 얼굴이 조금 환해보였다. 댄스동아리에서 진환이 형이랑 어떤 여자애랑 커플댄스 춘다던데. 뭐? 진환이 오빠가? 처음 듣는 얘기에 금방 목소리를 올려 말하니 그가 무안한 얼굴로 급하게 내 입을 막았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니 다른 아이들이 이상한 눈길로 힐끔힐끔 주길래 구준회는 신경질을 약하게 내며 내 팔목을 잡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야야, 이제 7교시 시작해. 그를 멈춰 세울 말을 하니 구준회는 다행히 금방 멈췄다. 오만상을 다 찡그리면서 뱉는 말이라곤, 그건 비밀이라며 전교생이 알면 자신은 진환이 오빠한테 끽- 하는 거라고 했다. 그 끽, 이 목을 긋는 행위였지만. 나는 그제서야 입을 다물고 조용히 끄덕이며 뒤늦게 자물쇠를 잠궜다.
무슨 커플댄스? 그러자 구준회는 금방 답을 내놓았다. 진환이 형이 좀 순진하게 생겨도, 할 건 다 하잖아? 구준회의 웃음은 뭔가 의미없어보였다.
"커플댄스하면 누가 생각나?"
"...설마."
"그 설마가 설마일껄."
아무튼, 이게 아닌데. 나는 갑자기 구준회의 동아리가 불연듯이 떠오른 것은 일종의 신호였던걸까. 눈을 여러번 깜빡이다가 그의 팔을 턱 하니 붙잡고 앞뒤상황 설명 없이 구준회에게 부탁아닌 부탁을 했다. 팔을 박력있게 잡고, 야- 구준회! 라고 소리높혀서 부르면 구준회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펴진다. 왜 부르냐고 묻는 그의 말에 나는 읊조리는 형식으로 대답했다. 구준회, 너 동아리가 보컬반이라고 했지라. 뭐야. 그는 내 말투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동아리 축제 때 노래 안부르는데.
"석식시간 때 나 좀 보자."
"엥?"
"부탁이 있어.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제 정신이 아닌게 틀림없어."
"아니야, 진짜 너 밖에 할 수가 없어."
"미친, 왜 하필 많고 많은 애들 중 난데?"
제발, 부탁이야. 나는 거의 무릎꿇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 모든 계약이 성립되면, 구준회 너를 위해 뭐든지 해줄꺼라고 내 이 몸 바쳐서 약속하마! 쓸데없는 자신감이였지만 구준회의 눈빛은 살짝 더 날카로워져있었다. 대체 왜 하는건데?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마 친구가 시켜서 했다고 말 할수는 없고. 나는 머뭇거리다가 구준회가 튈까봐 팔을 덥썩 잡았다. 그는 흠칫 놀라며 와이셔츠 위에 껴입은 져지를 좀더 겹쳐입었다. 왜, 왜이래. 그의 목소리가 당황스러움으로 번져나가고 있었지만 살며시 무시하고 울먹이는 목소리를 냈다. 제발, 준회야.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응?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나 진짜 이번에 너무 나가고 싶어서 그래. 구준회에게 거의 매달렸다.
준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였다. 너가 뭐 커버곡을 한다고 피아노나 기타를 한다면 내가 내 선에서는 도와줄 수는 있겠는데. 그의 얄쌍한 눈은 천천히 깜빡였고, 나는 그와 반대로 거의 크게 뜨며 팔을 흔들었다. 제에발, 준회야... 결국 쓰지도 않은 단어까지 써가며 구준회를 설득했다. 그는 황당한 얼굴에서 고민하는 얼굴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얼굴로 들어난다. 특히 구준회가 더 그랬다. 그는 싫으면 싫다고 얼굴에 드러나서 거짓말은 지지리도 못 했다. 그리고 좋아하면 얼굴근육부터 달라진다. 속으로 예쓰!를 외치며 더욱 격렬하게 협상을 시도했다. 준회야, 너 얼마전에 피자헛 신메뉴 먹고싶다고 했지. 내가 사줄께, 뭐 더 먹고싶은거 있으면 내가 물주라고 생각하고 그냥 다 털어버려! 구준회는 빠르게 시전하는 내 말에 묘한 인상을 지었다.
"그럼 말을 해봐."
"뭘?"
"왜 하필 나인지, 이유를 대보라고."
구준회는 자신의 팔을 잡고있던 내 손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왜 너냐고? 나는 그의 질문에 뭐라고 답을 해줘야 그가 만족할지 갑자기 아무 생각도 들지않았다. 구준회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고 차마 목구멍까지 끌어올릴만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단순히 내 친구라서? 아니, 학교 보컬반이니까? 그냥 옆에 있어서? 친하니까? 수십개의 이유가 떠올랐으나 그 중에서 장원급제할 만한 이유라곤 없었다. 잠깐의 정적동안 입안은 빠르게 말라갔고 눈동자는 요리조리 굴리는데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구준회는 끝까지 아무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반응을 즐긴다는 듯이, 긴 속눈썹을 월등히 깔아놓고 있었다. 그의 옅은 분홍빛 입술은 끝내 곧고 밝았다. 구준회는 불쾌한 반응따위도 없었다.
구준회. 나는 그의 이름을 될 대로 되라- 불렀다. 진짜 쪽팔림을 무릅쓰고 구준회에게 하는 말이였다. 집에가서 이불킥을 해도 천장에 닿을때까지 차버릴 것이다. 그리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 영원히 그 흑역사에서 살아가겠지. 구준회가 모른 척을 해주면 좋을련만 그는 정작 그럴 인간도 아니였으므로 나는 평생의 놀림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속으로 눈물을 적시며 내가 그땐 왜 그랬을까 하면서 미쳤다고 소리질러도 그 창피함은 어딜 떠나지도 않았다. 당시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까치발을 들어서 구준회의 키에 겨우 맞췄다. 그래도 큰 키에 나는 그의 어깨를 억지로 내려 내 입술과 같은 높이를 맞춰냈고, 구준회는 비틀거리며 기울어졌다.
"너랑 해보고싶어."
"...뭐?"
"노래 잘한다며. 너랑 꼭 해보고싶었어."
구준회는 화들짝 놀라며 내게서 멀어져갔다. 뭐야, 어디가! 갑자기 뛰어가는 그의 모습에 나조차 당황해서 목소리를 빽 하고 소리질렀다. 대답조차 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던지라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였다.
구준회는 뒤도 안돌아보고 대답을 크게 터뜨렸다. 생각 좀 해볼께! 기껏 정리했던 그의 머리가 망가져가고 있었다.
"아가, 잘 되가?"
한빈이오빠가 눈을 찡긋 하면서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사복으로 모인 날이라 나는 그의 사복센스에 속으로 감탄을 했다. 라운드티에 검정색 정장자켓, 그리고 생지 스키니진을 입었을 뿐인데 태가 나는 그의 모습은 실로 감탄을 자아냈다. 한빈이오빠는 학교 방송부였다. 정확하게는 방송부이자 축구부지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빈이오빠의 그녀는 없었다. 그제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아니요. 투덜투덜 거리는 말투가 뱉어져서 나도모르게 깜짝 놀랬다. 그는 살짝 눈을 크게떴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을 걸친채 능글맞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에, 뭔 일있는거야? 아, 오빠. 오빠 여자친구도 있는데 왜 이렇게 능글맞아요? 나는 그의 말을 단번에 잘라내버렸다. 한빈이오빠는 어- 하고 벙찐 얼굴로 입을 크게 벌렸다.
언니가 저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오빠랑 얘기하면 질투가 난대요. 근데, 아가. 그건 지금 이 이야기 중심이 아닌데. 나는 한빈이오빠의 그 말에 대답조차 하지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한빈이오빠는 큭큭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등을 돌려버린 탓에 한빈이오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내 귀는 달아오르고 있었고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아파왔다. 아, 미쳤어. 왜 저런말을 했담. 나는 속으로 자책하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했다. 한빈이오빠는 방송부편집 때문에 강당에 와 있었던 것이다. 이번 방송부에서 VCR을 만들었는데 자꾸 렉이 걸리더라고. 그는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중얼중얼 거리다가 내 어깨를 터억 하고 손으로 잡았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하자 한빈이오빠가 또 웃어보였다. 매번 느끼는건데 그의 웃음은 참으로 사람을 여럿 홀렸다. 나도 빠져들어갈 뻔했으니까.
준회랑 노래준비한다며. 한빈이오빠는 준회와 선후배지간이였다. 그래서 거의 터놓고 얘기한다고 한빈이오빠가 내게 말해줬었다. 중학교 선배였어, 내가. 한빈이오빠가 한 때 내게 말해줬던 말이였다. 구준회랑 친해지고나서 어찌해야할지 몰라 어버버 거릴때 많이 도와준 사람들 중 하나였다. 한빈이오빠는 장난스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팔짱을 꼈다. 너 노래 잘하는 건 어릴때부터 알았지. 그는 또렷한 눈동자에서 살짝 흐릿한 눈동자로 변질되어 있었다. 입술이 오물조물 움직이며 그는 말할 듯 말듯한 그런 말이였다. 추억을 회상하는 걸까. 근데 준회도 노래 잘해. 한빈이오빠는 팔짱끼던 자세를 좀더 풀어냈다. 중학교 때는 평타치는 수준이였지만 고등학교 때 얼핏보니까 고음도 하더라, 걔.
"뭔 노래 하는데?"
"아...오빠. 그거까지 얘기해주면 노잼이거든요."
"헐, 까였다. 너 절로가. 역시 애인이 최고지."
이런 요상한 말들을 내뱉으며 열심히 갈구는 한빈이오빠지만, 노래에서는 많이도 가르쳐줬다. 오빠는 썩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였지만 리듬과 딕션(발음)이 좋았기에 불가피한 랩 상황에 왕자님처럼 나타나준 존재였다. 한빈이오빠는 음악 쪽에서 거의 짬밥먹을 수준이라고 으스대며 내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하도 부정확한 발음에 노래하던 내가 엄마는 은근 스트레스였는지 한빈이오빠에게 가르침을 받으라고 떠밀어졌고 어릴 때 만났던 것이 한빈이오빠였다. 오빠는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심한 장난도 치곤했지만 나중에 와서 다 사과하고 순수한 그 시절을 즐기는 터였다. 그의 몇 가지도 안 되는 발음을 따라한 결과 놀랍게도 고쳐진 발음에 엄마는 한빈이오빠를 마음에 들어했다. 근데, 엄마. 한빈이오빠 여자친구있는데. 나중에 말해줘야겠다.
"뭘 하던간에, 열심히 해."
"네."
"준회 괜찮은 놈이야. 내가 인정한다."
"..."
"고 새끼 몇 번 뺑끼쳐도, 다 나중에 미안하다고 하는 그런 애라서 그래. 오지랖이지만 준회랑 축제 준비 잘하고."
그의 그런 말은, 뭐랄까. 조금 어른스럽다는 느낌이였다. 아, 오빠- 어른인 척하지마요. 말은 그렇게 해도 한빈이 오빠는 정말 말 그대로 '오빠'였다.
나보다 괜시리 나이 하나 먹은게 대수가 아니라는 걸 갑자기 깨닫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반문을 하며 큰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픽 웃는 그의 모습이 빛바랬다.
한빈이오빠는 어느덧 20살에 가까워지고 있었음을.
"노래 선곡이 별론데."
"그럼 니가 선곡해와."
"...어디서부터 부르면 돼."
결국 할꺼면서 저렇게 틱틱거린다니까. 축제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불평불만이 늘어간다는 건 알고있었다. 다 불안하고 잘 될거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때문에 그런거겠지. 그런 그의 모습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끝내 입가에 웃음을 새겨놓고, 나는 악보를 집어들고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구준회를 잠시 쳐다보다가 손가락으로 같이 시작해야 될 부분을 가르켰다. 여자랑 남자 화음이 여기서 만나거든? 근데 내가 해보니까 여자고음이 너무 확 튀어서 너가 헷갈릴 수 있을 거 같아. 금방 또 머쓱해하며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는 구준회가 자꾸 시선이갔다. 좀더 자세히 보기위해 몸을 움직인 구준회가 확, 가까이 오자 그의 체취가 물씬 느껴져서 잠시 말을 더듬어버렸다. 순식간에 온 탓에 버벅거리는 내 말을 느끼지도 못했는지 그는 시선을 모두 악보에만 두고 있었다. 그의 휜 목덜미가 눈 가까이 오자 반대로 내 귀가 빨개져가는 기분이였다. 야한 상상도 아닌데, 왜 구준회의 그 희고 고운 목덜미가 자꾸 눈에 띄게 되는 것인지. 아니, 이건 내가 음란하고 뭐고에 문제가 아니였다. 구준회의 예상치도 못한 행동에 또 다시 심장이 콩콩, 뛰어갔다.
여자파트가 많아서 남자파트 좀 넣었어. 너가 넣고 싶은 가사 넣어도 되고. 나는 파란 볼펜으로 여자부분이였던 곳을 죽죽 그었다. 구준회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시간을 달라는 말을 했다. 거기가 어딘데? 나는 그의 말에 볼펜을 입에 물고 대답했다. 랩핑부분인데, 여자랩핑부분이야. 그래서 꼭 굳이 필요한가 싶어서 너한테 파트준 건데 왜? 구준회의 눈빛이 살짝 얹짢아 보였다. 팔짱도 떡 하니 껴놓고, 다리도 단단히 꼰 채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는 온갖 불만이 섞여있었다. 한숨을 푹 쉬고 허리춤에 손을 댔다. 또 뭐가 불만이셔.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줄줄 내는 것이였다. 안 그래도 큰 음원효과에, 마이크가 울려서 강당을 징징 울릴텐데 바꾼 부분이 과연 애들한테 들릴지 그게 문제인 것같아. 여기가 무슨 공연하라고 마련한 전문적인 곳도 아니잖아? 시작하기도 전에 트러블이 생겨버린 것 같아서 뒷 머리를 긁적이니 그가 굳은 표정을 잠시 풀었다.
미안, 내가 이런데에 좀 예민해서. 구준회는 금방 사과를 했지만 난 전혀 화가 나지않았다. 짜증도, 언짢음도 없었다. 그저 그렇구나- 싶어서 멍 하니 악보를 쳐다보고 민망한 얼굴을 지었지만, 구준회는 자신에게 분배받은 파트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음악실에는 총 세 개의 방이 마련되있었다. 시끄러움을 대비해서 소음방지벽을 만들었고, 그 안에는 온갖 악기들이 가득 차있는 그런 방이였다. 1번방은 피아노가, 2번방은 드럼과 기타가. 3번 방은 드럼, 기타, 베이스 등을 비롯한 훨씬 다양한 방이였다. 나와 구준회는 1번 방에 들어가 있었고 입술만 톡톡 두들기면서 입 속에서 뱉지못한 노래를 중얼거렸다. 구준회가 그닥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솔직히 당황스러워하긴 했다.
그의 반응은 상처가 될거라고 생각했지만, 꽤나 의기소침해진 내 모습을 보고있자니 웃겼다. 입에서 굴리던 볼펜 꼬리를 뱉어내고 뒷 장으로 넘겼다. A4라서 그런지 뒷 면은 깨끗했다. 첫 번째 문단이 시작된다는 것처럼 조금 큼지막하게 1이라고 쓴 뒤, 내 이름을 적었다. 뭐하냐. 구준회의 중고음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길래 무심히 대꾸했다. 내가 차마 삐졌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연습 1일이니까 나 느낀점 쓰는건데. 그러자 구준회가 걸터앉아있던 음악실 책상에서 풀썩 내려왔다. 그의 교복바지 섬유유연제 냄새가 퐁퐁, 풍겨와서 갑자기 찌푸리고있던 마음이 펴지는 기분에 또 심장이 콩콩 뛰어버렸다.
"나도 쓸래."
"뭐?"
"나도, 그 뭐. 느낀점 쓴다구. 볼펜 줘."
그는 부루퉁한 입술을 선보이며 건넨 볼펜을 빼앗듯이 가져가버렸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서 그 큰 등치로 잔뜩 수그린 채 적어나가는 것이였다. 그 모습을 아무런 감정없이 쳐다보니까 괜시리 찔리는지 큰 목소리로 안 보여줄거라는 거다. 어이없다. 이럴때 쓰는 말인건가. 나는 그가 보이지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온갖 오만상을 찌푸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때리는 시늉을 했다. 나쁜놈, 볼 생각도 안 했다!
[연습 3일]
"...야,"
"어, 왜."
"니 파트가 그 날 이후로- 거기서부터잖아."
"엉."
"거기서 예이예- 이거 해야돼?"
"당연한 소리를 왜 함?"
[연습 5일]
"가사 다 외웠어?"
"2절까지는 외웠는데 여기, Baby oh 거기서 부터는 고음처리 같이해야되잖아."
"차라리- 하는 부분은 따로 비워둬. 괜시리 바이브레이션 넣으면 듣기싫어하지 않을까."
"...아, 그런가."
[연습 9일]
"...아 미친, 지겨워."
"축제까지 6일 남았다."
"끝나만 봐라. 이 노래 절대 안들을꺼야."
[연습 12일]
"같이 부르는 부분 해보자. 브릿지 부분은 너가 먼저 시작."
"근데 얘 노래 부르는거 계단형식으로 부르는구나. baby oh no하는 부분 들어봤는데 부드럽게 내려가던데."
"그렇게까진 못 하더라도 부드럽게는 해볼 수 있지않냐."
[연습 14일]
"으아!!!!!!!!내일 축제다!!!!!!!!!!"
"구준회 목 막쓰지마 새끼야!!!!!!!!"
그리고, D-Day.
아, 미치겠네. 나는 여러모로 곤란해하며 무대의상을 친절히 마련해준 친구를 붙잡고 징징거렸다. 야, 욕하지마라. 급하게 준비한거니까. 그러자 친구는 대충 대답하며 내 머리를 정리해주기 바빴다. 알겠다, 이 냔아. 아무튼 너희 순서 몇 번짼데? 우리가... 16번째. 지금 몇 번째지? 6번째 시작 중이야. 그러자 친구는 온갖 정색을 다 하며 갖고있던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들었다. 좀만 더 고쳐야 될 것같다. 파운데이션은 지겹도록 발랐으니까 팩트만 해주지? 나는 질린다는 얼굴로 손을 휘저었으나 금방 잡혀버렸다. 화장을 생명으로 아는 친구는 자칫 무기로 보이는 그 화장품을 내게 들이대며 속삭였다. 여자는 예뻐야 돼. 넌 왜 그런 외모를 썩히고 있을까, 안쓰러운 냔. 친구는 혀를 차며 팩트를 열었고 화장품냄새가 코를 진득하게 찔러서 순간적으로 헛구역질을 했다. 오늘 입은 의상은 구준회와 특별히 맞춰준 것으로 우리학교 교복ㅡ우리학교 교복은 꽤나 난잡하다. 니트에, 체크스커트에, 난잡한 넥타이까지ㅡ말고 흔히들 파는 간단한 의상을 마련해주었다.
친구는 내 헛구역질의 행동에 등을 찰싹 때리면서 눈치를 주었다. 이상한 행동좀 하지마. 눈 감고, 노래나 읊어. 친구의 강제적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하였다. 구준회는 친구를 만나고 온다고 했다. 그 또한 나와 같이 맞춘 커플룩이였는데, 친구가 지독하게 좋아하면서 방방뜨는 모습을 보고 구준회는 어이없는 얼굴을 지었다. 쟤 니 친구지. 그 순간만큼은 외면하고싶어서 구준회 뒤로 숨어버렸다. 미친, 커플인거 티내냐! 친구는 울컥하는 목소리로 변해있었고 급하게 얼굴이 빨개져서 몸이 홧홧, 달아오르는 기분에 더욱 파고들었다. 간지럽다며 나를 떼어내려던 구준회는 친구의 말에 행동을 멈추고 무어라고 말 했던것 같다. 그가 그 큰 손으로 내 귀를 막아서가 문제이긴 하지만.
"멍총아, 이제 곧 우리네."
구준회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마이크 하나를 건넸다. 텁텁한 커튼이 지금 빛을 막아서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구준회의 얼굴윤곽만 보여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나는 마이크를 손에 쥔 채 구준회를 가만히 들여다보았고 웅장한 음악이 울려퍼지고 학생들의 환호성이 커지는 동안 이 곳은 꽤나 조용했다. 구준회 또한 아무말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겠지. 내 숨소리가 점점 옅게 변해가고 있을 때 구준회가 입을 열었다. 야, 있잖아. 구준회는 인이어를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마이크를 잡지않은 반대쪽 손을 잡았다. 그 나름 긴장하고 있었던 건지 손바닥이 상당히 열오름을 느꼈다. 어쩌다 이렇게 축제에 서게 된건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어.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까딱였다. 네 말이 맞아. 그는 이와중에도 목관리를 하는 듯 살짝 낮게 말했다. 너 고음은 내가 뺏어간다. 갑자기 곡이 바뀌어서, 여자가 비교적 많은 파트라 조금은 구준회에게 넘기기로 했다. 특히나 고음이기에 부담스러워했던 나는 더더욱 좋은 소식이였다. 나는 그의 팔을 툭툭 쳤다.
아, 미친 치지마! 구준회는 꺽꺽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우리는 그 상태에서 동작을 멈추고 다시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래 잘 할 수 있겠지? 내 말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간지러운 노랜 질색인데 네 덕분에 더 질색이 되버렸다, 고오맙다 정말. 구준회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내 이마를 쿡쿡 찔렀다. 이윽고 15번째의 무대가 끝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의 무대가 시작되는 듯했다. 한동안 들리지않았던 사회자의 말에 경청하고자 구준회의 입을 내 손바닥으로 텁 막고는 조용히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사회자는 마이크를 잡고 쿨럭거리다가 이어 설명을 시작했다. 아-네, 앞선 무대 정말 잘봤습니다. 김동혁군의 피아노와 김수빈양의 조화로운 무대였습니다. 김동혁군도 노래를 잘하기로 소문났는데 많은 여학생들이 아쉬워하겠네요. 사회자의 농담어린 말에 반응하는 여학우들은 모두 전투적이였다. 네! 겁나 아쉬웠습니다! 목소리가 여장부뺨치는 한 여학우가 크게 소리를 쳤다. 사회자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도 노래네요. 와, 이분들은 노래 잘하기로 버금가는데 어떻게 모인건지 참 알 수가 없네요."
"봉사활동으로 맺어진 인연이라고 적혀있네요, 학번은 바로 옆 반씩이나 되가지구. 이번도 혼성듀엣입니다."
"무튼 잘 들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브닝의 전학!"
(처음브금 꺼주시고, 이 노래를 틀어주세요! 모바일은 두번째 노래를 틀어주시면 됩니당 :ㅇ!)
[아주, 오래 전부터 너를 사랑해 왔어.]
처음파트는 여자가 먼저 시작했다. 그녀는 마이크를 톡톡, 두들기면서 음향체크를 한 뒤에 입 가까이 갖다댔는데 동시에 음악이 울려퍼졌다. 피아노의 걸음걸이가 무대를 울렸고 모든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준회와 그녀를 응원했다. 우와! 예쁘다! 아마 이 소리는 그녀의 친구일 것이다. 인이어를 만지작거리다가 곧 그녀의 차례가 다가오자 익숙하게 받고는 바로 노래를 시작하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너를 사랑해왔어. 처음에는 약속한대로 무대 앞을 쳐다보았다. 관중들은 하나도 보이지않았다. 오직 빨간불이 들어오는 전광판 시계만 응시하고, 가끔씩 바닥을 보며 그렇게 긴장감을 털어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것 같아서 조심조심 노래를 하는 그녀였다.
[개구쟁이 그 표정도, 날 놀리던 모습도.]
[너무 많이 널 사랑하나봐, 하나도 싫지않아. 더 사랑스러워.]
[안녕, 안녕. 그 말은 하지마. 다른 곳에 전학가도 날 잊어서는 안돼.]
[어른이 돼도 간직할거야 너와 함께한 시간 잊지않을거야.]
[사랑해.]
준회는 노래를 하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살짝 웨이브 준 머리를 한 채 교복이 아닌, 약간의 정장스타일대로 입었다. 노래를 부르는 건 많이 보았다, 특히 남이. 하지만 매번 보는 그녀인데 이런 모습은 처음이였다. 그녀의 또박또박한 발음이 강당을 울렸고, 그녀가 노래를 할 때 남학우들의 표정이 점점 황홀해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마이크를 한 손에 쥔채 조심스럽게 노려보던 준회는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려다가 그만두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에, 노래까지 겸비한 그녀의 모습은 실로 처음이라서 눈을 어디다가 둬야될지 몰랐다. 준회의 눈은 관중들을 한 번 보다가 그녀를 보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마이크를 놓치않은 채 하나하나 열창하며 불렀다.
준회는 문득 생각이 났다. 학기초, 그녀와 처음만난 날. 복대에서 동동이와 떠들다가 무서운 선생님께 걸려서 폭탄징계를 받고 한동안 봉사활동의 노예로 살아야했던 4개월가량 어느새 친한사이가 되버린 그녀와 자신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되어버려 1년이 다 가버렸다. 봄 때 처음만나 어색해하던 사이가 여름에는 좀 더 가까워졌고, 가을에는 봉사활동을 마무리하며 해방감에 술 대신 이온음료로 대처하여 끝자락 잔을 나눠마셨다. 그리고 어느새 축제준비기간 때 납치당해버려서 억지로 부르다 싶이 한 노래를 지금이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문득 입가가 씁쓸해진 기분에 잠시 뒤를 돌았다. 준회의 뒷모습에 여학우들이 소리를 쳤다. 와아- 구준회 존나멋지다!
[햇살이 따스한 봄이오면, 학교 앞 놀이터 그늘에서 소꿉장난, 인형놀이. 언제나 함께했지.]
준회가 노래를 시작했다. 허스키한 음성은 그녀의 얇은 목소리와 대조되어 훨씬 부각되었다. 그동안 숨기고있던 노래실력이였다. 눈을 살짝 감고 마이크를 입에 가까이 댔다. 당시 음원 속 남자목소리가 자신보다 얇아서 당황했지만 곧 몇 십일 동안 그녀의 도움, 그리고 한빈의 도움을 받아 겨우 키를 맞춰 노래를 준비했다. 준회는 노래를 부르는 내내 그녀를 흘끔흘끔 보며 도톰한 입술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지하철에서 보았던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다시한번 재확인하는 타임이라 생각하며 준회는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초반엔 준회를 전혀보지않았다. 하지만 맨 앞에 앉은 남학우가 손가락으로 옆을 가르키길래 한 번 쳐다보니, 준회가 자신을 거의 대놓고 쳐다보며 노래를 하는 것이였다. 문득 달아오르고 심장이 콩콩, 더욱 빨리 뛰는 바람에 그녀도 어색하게 준회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겨울이 녹아서 비가 오면 운동장을 함께 걸으면서 10년 후의 우리모습, 말하곤 했지.]
[함께 할 거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꿈을 주었고, 사랑도 우정도 영원할거랬지.]
더웠던 가을날, 더위와 피곤에 지쳐 자신의 어깨에 기댔던 그녀. 처음만났을 때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어색해하던 그녀.
학교에 가니 낯선 우유팩이 놓여있길래 누구꺼냐고 묻자 같은 반이였던 찬우가 어떤 여자애가 전해주었다고 하고나서 뒤를 캐보니 범인은 그녀였고.
진득하게 붙어다니며 봉사활동을 했고, 서로에게 무언가를 전해주고. 체육대회 때 전해주었던 음료수와 음식들과,
축제 노래를 준비하면서 투덜대도 군말없이 가르쳐준 그녀의 옆모습과 하얀 얼굴들.
여름방학동안 의미없이 만나도 자꾸만 마음 한켠에서 불쾌하지 않았던 그 이유를 지금에서야 인정해버렸다.
[아주 오래 널 사랑해왔어, 개구쟁이 그 표정도. 날 놀리던 그 모습도.]
[너무 많이 널 사랑하나봐, 하나도 싫지않아. 더 사랑스러워, 사랑해.]
그녀는 준회를 쳐다보았다. 자꾸만 내빼게 되었던 자신의 분홍빛 마음은 이제서야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친구가 잔뜩 치장해준 것이 득을 본 건지 준회는 계속해서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감색과 남색의 공존 눈동자를 보며 그녀 또한 추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1년가량 본 그의 모습에 푸욱 빠져버린 이 어린 마음은 한 시절의 마음으로 치부해버리려고 했던 바보같았던 자신이 지금에서야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 너를 바라봐도 가슴이 콩콩 뛰고 몸이 달아오르는데. 이 마음을 너도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한켠으로는 너가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계속해서 챙겨주었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고 그녀가 최근에 와서 더욱 헤어나오지 못했던 준회의 체취와 섬유유연제에 허덕이던 자신이 자책감을 느꼈다는 사실에 픽 웃어버렸다.
마이크에 입을 댄 채 노래를 하고 있었지만 서로 그 때의 추억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내가 그 아이를 좋아했다는 사실에 웃음을 터뜨리고, 공감을 표하며 주마등 같았던 그 풋풋한 가슴절임에 다신 느끼지 못 할 것을 아쉬워하면서 말이다.
그 뒤로 우리는 1년간 보지못했다. 너는 축제 이후 이어진 겨울방학 때, 수고했다는 말도 못하고 떠나가버렸다. 저 하늘로 가버린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선생님께 물어보아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셨기에 나는 남은 생활을 공부로만 보냈다. 극찬을 보냈던 모든 아이들의 반응에 기뻐해야하는데, 기뻐할 수가 없었다.
친구는 그 때의 영상을 내게 보냈다. 구준회가 뭐라고 씨부렁거리긴 했는데, 끝까지 봐라. 친구는 츤츤대며 이메일로 곧바로 쏴주었고 나는 그 메일을 곧 받아냈다.
하지만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자꾸 저릿해지는 마음에,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3분을 완창하고, 1분가량의 시간이 남는 타임이였음에도 나는 그 3분을 칼같이 지켜내고 영상을 꺼버렸다.
3분남는 시간은 구준회의 파트가 바로 앞에 있었고, 나는 구준회를 구준회는 나를 바라보며 굉장한 아련함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였다.
앞에 앉아있던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왜 나는 듣질 못했던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구준회에게 집중한 탓일까.
"너 아직도 영상 안봤지."
친구가 먹던 음료수를 내게 던지며 어느날 화를 냈다. 야, 너 내가 영상 끝까지 보라고 했지.
"너 안 보면 후회한다에 내 엑소를 건다."
"...미쳤어?"
"그만큼 후회안 한다고. 내 소중한 엑소를 건다는데 너 안보면 뒤져."
친구가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수능이 끝난 직후여서, 나는 도무지 할 일도 없었기에 집 앞 편의점을 어슬렁거리다가 곧 집으로 돌아갔다.
벌써 1년이 흘렀다. 축제날도, 고생했던 봉사활동도, 함께있던 시간들도, 만나던 여름방학의 시간들도, 봄에 급작스레 만났던 그 공간들도.
컴퓨터를 켰다. 핸드폰을 키자마자 무시무시한 카톡으로 당장보라며, 인증샷 안날리면 넌 헤드샷이라고 꺄륵꺄륵소리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징징거려서 어쩔수 없이 컴퓨터를 켰다. N드라이브에 넣어두었던 그 축제영상은 벌써 시간으로 1년 전-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었다. 나는 일단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이윽고 곧바로 온 카톡에는 보고나서 울지말라는 친구의 답장이였다. 뭔 개소리지. 나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ㅇㅇ'라고 보낸 뒤에 핸드폰을 던졌다. 침대위로 안착한 휴대폰을 본 뒤에 어쩔 수 없이 떨리는 손길로 그 영상을 내려받기했다. 밑 팝업창에 다운로드가 완료되었다는 창이 떴고, 열기버튼을 움직이지도 않던 손으로 눌렀다. 그러자 잠시 기다리더니, 파악 뜨는 1년 전의 그 영상이 다시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알던 3분은 같았다. 항상 같은 패턴, 항상 같이 보는 얼굴, 항상 듣던 목소리와 창법, 그리고 이 때쯤 돌아줘야지- 싶으면 몸을 도는 나와 이 때쯤에 시선을 회피하는데, 하면 시선을 그제서야 회피하는 그 모습도 다 기억해내는 내 속마음에 나조차도 놀라워했다. 턱을 괸 채 어두운 방 안에서 이어폰을 꼽고 그 영상을 보고있는데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그만 끄고싶었으나 나도 슬슬 그 1분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 애드리브가 이어지고, 구준회의 애드리브도 이어졌다. 너를 사랑해- 하고 내 목소리가 끝으로 노래가 완전히 마쳐지자 모든 학생들이 박수를 보내며 너무 잘부른다는 극찬을 보냈다. 앵콜- 앵콜- 하는 선동적인 움직임도 있었으나 우리는 그때 그 것만 하고 내려오기로 약속했기에 급하게 무대를 나갔다. 아쉬워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서 푸웁,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냥 앵콜할걸 그랬네.
그렇게 20초가 지나갔다. 달각, 달각 거리던 소리가 들리고나서 갑자기 어떤 외딴곳이 펼쳐졌다.
[어, 음...아, 아.]
어떤 남학생이 목 발성을 체크하며 교복바지가 비춰졌다. 하얀 와이셔츠에, 니트조끼는 전혀입지 않고 넥타이만 간단히 갖춘 모습. 얇고 긴 하얀 손가락이 몇 번 왔다갔다 거렸다.
[...됐다.]
[안녕.]
화악 하고 비춰진 모습에 인상을 찡그리고 밝아진 밝기에 순식간에 욕이 튀어나왔으나 자세히 바라보니, 내가 그토록 의문을 가졌던 그 아이가.
[나 구준회야.]
그래, 거기에 구준회가.
구준회는 멀끔한 얼굴이 전혀아니였다. 좀더 뚜렷한 외모에, 살은 잔뜩 빠져있었고 모자를 쓰고있었다. 초췌한 인상에 나도모르게 손을 모니터에 갖다대자 느껴지는 차가운 촉감은 내 앞에 구준회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구준회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머리카락을 부비적거렸다. 방황하던 눈동자가 몇 번 요리조리 굴러다녔다. 구준회야, 잘지냈어? 그는 다시한번 통성명을 하며 불편했던 자세를 고쳐앉았다. 좀 더 키가 큰 느낌이였다. 골격은 완전히 성인의 티를 내고 있었다. 1년전의 그 모습과는 다른, 구준회가.
[잘지냈어?]
[너가 이 영상을 보고 있을 때는 과연 언제일까, 바로 봤을려나.]
아니, 그러지 않았어. 못 했어.
[미안해, 내가 없어서 많이 당황스러웠겠다.]
[너에게 말하지 못 했던 상황이 있었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 제목도 마침 전학이더라, 그치.]
[가사를 봤는데 나도모르게 읊조리고 있길래, 나도 좀 이상했어. 야, 이거 되게 어색하다.]
[나 구준회가 이런거 잘 안찍는데 너 땜에 찍는거다, 영광스러워해라.]
뭐래, 개소리는 여전한건가.
[잘 있는거 맞지? 여긴 어디게.]
[여긴 너가 모르는 곳이야.]
[갑작스럽게 떠나서 미안해.]
[너한테 느꼈던 감정을 전해주려고 이렇게라도 메세지를 남긴다.]
준회야.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멍청아.
[끝까지 함께해줘서 고마웠고-]
내가 끝까지 보지 못했던 이유가.
[보고싶어.]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나도 보고싶어.
[이젠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되어버렸네, 우리.]
[정말 말도 없이 떠나서 미안해.]
[다시 만나자, 꼭.]
[아프지마.]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 |
[좋아했어, 정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