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한 달, 두 달 지나고 그 녀석은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꽤 긴장이 풀렸다. 그 편지의 내용도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그 녀석에 대한 생각만으로 소름이 끼치거나 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편지를 구겨넣은 서랍을 열었다. 처참하게 구겨져있는 종이를 꺼내들고 살짝 펴 읽었다. 내용은 별다른게 없었다. 그냥 미안하다는 것과 다시는 눈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것. 그래서 이제껏 보이지 않았구나, 싶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것 같아 남아있던 긴장마저 풀렸다. 짧은 변명 한마디 없는게 조금 신경이 쓰일 뿐이다. 홍정호와도 예전처럼 지내고 막상 내가 그것인 것에 대해 아는 녀석이 있으니 별다르게 바뀐 건 없지만 마음은 썩 편하다. 다행히도 입이 무거운 편인데다 나의 비밀을 혼자만 알고 싶다는 이해 안되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안심은 된다. 그렇게 한 학기가 훌쩍 지나갔다. 가끔씩 생각나긴 하지만 생각 날 때면 오히려 더 다른 일에 집중을 하고 또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는건지 조금씩 무뎌져간다.
"와. 너랑 비행기 같이 타는건 처음이네. 근데 진짜 좋다."
"조용히 해."
"일등석 처음 타봐. 돈이 좋긴 좋구나. 오, 야. 이거봐봐 좌석이 눕혀져."
"애도 아니고..."
일등석이면 한국까지 가도 힘들지 않을 것 같다며 이것저것 눌러보는 홍정호를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한국가면... 그 녀석하고 마주치려나? 나는 용하게도 한국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냥 확인을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 녀석이 한국에 잘 붙어있나. 한국에 없다면... 잘 모르겠다.
"근데 니가 왜 나랑 같이 가자고 했는지, 물어봐도 되냐?"
"아니."
"왜 같이 가자는 건데?"
홍정호는 물어봐서 아니라고 하면 듣지도 않을거면서 그 날 이후로 항상 저렇게 묻는다.
"그냥."
"이제 친구로 업그레이드 된거냐?"
"응?"
"너 영국 오자마자 나 집에서 키우는 개 취급했거든?"
"개는 말이라도 못하지."
내 말에 아오, 거리면서 오재석은 싸가지 없는게 컨셉이라지만 짜증이 난단다. 그냥 그 녀석 때문에 힘들면 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얘밖에 없는 것 같아 무작정 끌고 왔다. 일단 자기는 제주도부터 가봐야겠다 해서 나는 서울로, 홍정호는 김포로 갔다. 도착해서 내 침대에 누우니 막상 그 녀석의 집으로 가기가 꺼려진다. 난 대체 무엇을 확인하려고 온걸까? 정말 그 녀석이 여기 있기를 바라는건가? 아니면 없기를 바라는건가? 정말 내가 그것임을 들키고 나서부터는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들어가도 돼?"
노크소리와 함께 누나 목소리가 들린다. 들어오라고 했더니 누나가 살짝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런 모습을 보인 이후로 정말 누나 보기가 창피했다.
"뭐해?"
"그냥."
"그 날... 누가 그랬는지 물어봐도 돼?"
"누나."
"알았어, 안 물어볼게. 표정 그렇게 굳히지 마. 무섭다."
"미안."
"...괜찮은거지?"
"난 항상 괜찮아."
안 괜찮으면 다시 한국에 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테니까. 그냥 조금 힘들뿐이다.
"누나, 나 어디 좀 다녀올게."
"어디?"
"누구 좀 만나게."
"석영이?"
"어?"
"뭘 그렇게 놀라. 너가 한국에서 만날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아, 어, 응. 나갔다 올게..."
"그래. 너무 늦지말고."
"응."
그냥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핑계를 댄건데 그 녀석의 이름이 나오니 나온 김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익숙한 그 곳으로 돌렸다. 정말 여기는 변하지 않는구나. 아파트가 보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녀석의 집 현관문 앞에 섰다. 한참을 망설이다 초인종을 누르는데 아무도 없는지 반응이 없다.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 번 눌러도 반응이 없다. 없나?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자주 와서 앞집 사람도 아는데... 누구지?
"누구세요?"
"예?"
내가 궁금한 걸 저쪽에서 먼저 물어오니 당황스럽다.
"여기 제 집인데..."
"아..."
그 녀석의 집 현관문을 가르키며 자기 집이라고 한다.
"여기 친구, 집인데..."
"아, 전에 살던 분?"
"예?"
"저 이사 온지 두 달 정도 됐거든요."
"아... 실례했습니다."
"아니예요."
이사를 갔다고? 그럼 어디있는거지? 다른 집에? 아니면 영국? 멍하니 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어디지? 어디에 있지? 날 보고있나? 그냥 날 잊고 나도 모르는 곳으로 가버렸나? 막상 없다고 하니까 이상하다. 그럼 이제 어쩌지?
"다녀왔어?"
"예."
"석영이 만나러 갔다면서 금방오네."
"바쁜 일이, 있나봐요."
아... 진짜 없어. 지금 내가 걱정하는게 날 지켜볼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인지, 아니면 더이상 내가 찾아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다. 누군가한테 물어보면 답이 나올까? 아니면 그냥 미친놈이라고 할까? 얼마 후 홍정호는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집에서 지내겠다는 홍정호를 기여코 호텔방에 넣어놨다.
"야. 뭐, 보려던 일은 다 봤어?"
"어?"
"왜이렇게 멍해? 일이 잘 안돼?"
"응, 좀."
"무슨 일인데?"
"별일은 아니고..."
"그럼 멍 좀 그만 때려라. 야, 시작한다. 이번에 지는 사람 딱밤 맞는거다."
게임이 시작하고 달그락 거리는 게임기의 버튼 소리가 난다. 예전에 윤, 아니 그 녀석하고도 종종 했었는데.
"야, 너 왜 안해?"
"어? 응? 해야지."
나도 손가락을 움직여 게임을 시작했다. 결국 정신을 빼놓은 나를 상대로 홍정호는 이겨버렸다. 그것도 5:0으로.
"자자, 이 형은 원래 안 봐주는 거 알지?"
"어..."
"이거 맞고 정신차려라."
정말 아프게 잘 때린다.
"야!"
"왜? 아프면 이기던가~"
한대 쥐어박고 싶은, 병신같은 표정을 한다. 옛날에 그 녀석도...
"미쳤구나."
강간한 놈이 뭐가 좋다고 찾는거지? 그 녀석도, 나도 단단히 미쳤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그 녀석을, 아니 윤석영을 정말 병신같게도 안 보고 살 수 없을만큼 많이 좋아한다. 어디있을지 모를 윤석영이 미치도록 보고싶다.
"야. 너 왜 울어?"
"시발, 안 울어."
"너 울거든? 미쳤냐?"
"닥치라고. 시발, 그 새끼는 왜 갑자기... 존나 짜증난다고."
"너 갑자기 욕을..."
"존나 개새끼야. 아프다고."
"미, 미안... 아씨, 사내새끼가 되서 그것 좀 맞았다고 우냐?"
윤석영 존나 못된새끼.영국으로 돌아오고 나는 평소와 같이 생활하려했다. 하지만 이미 머리속에 윤석영으로 꽉 차 멍때리며 윤석영만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사고가 날 뻔한 것도 몇번 있었고.
"are you alright?"
"yes, thank you."
"chris."
"..."
"pull yourself together."
"아..."
오늘같이. 영국친구들도 날 보면 정신차리라는 말이 대부분이다. 진짜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도서관에서 공부는 됐고 집에서 잠이나 자야겠다. 마른세수를 하며 집으로 향하는데 집 앞에 낯익은 뒷모습이 보인다. 가서 잡아야 되는데, 윤석영이 맞는지 확인을 해야하는데 왜 발이 안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이 한 걸음씩 멀어지니 내 발도 움직인다. 조금 벅차게 뛰어 잡았다.
"재석..."
"시발... 너 뭐야."
"어? 아니, 그게..."
"갑자기 없어지면... 시발, 내가...."
"재석아."
그냥 주먹에 힘을 주고 윤석영을 있는 힘껏 한 대 때렸다.
"아프네..."
"그럼 내가 니 밑에 깔리니까 여잔 줄 알았냐?"
"미안..."
"일단 따라와."
윤석영을 집으로 들이고 홍정호한테 오늘은 기숙사에 자라고 전화를 했다. 안 그러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홍정호는 너무나 흔쾌히 그래, 라고 했다.
"니가 뭐라고 숨어? 잘못은 너가 했잖아. 그럼 와서 무릎 꿇고 싹싹 빌어야지, 새끼야."
내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시발. 너 때문에 내가... 후... 너 어쩌려고 날 강간한거냐? 죽을 때까지 나 약에 취하게 해서 그렇게 섹스하는 장난감으로 만들게?"
"그런 뜻 아닌 거 더 잘 알잖아."
"미친새끼. 넌 존나 미친새끼야. 너는 항상 내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해. 그거인 거 들키기 싫었는데 너는 결국 알아버렸고 나는 니 밑에서 여자마냥, 자존심도 없는 그것인 마냥 앙앙거렸고. 나는 좋다고 니꺼까지 핥아댔지."
"잘못했다고 하면... 받아줄거냐?"
"더 맞고 싶냐?"
"차라리 때려라."
"미친새끼."
"미안..."
저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
"시발, 더 짜증나는 건 너보다 내가 더 미친새끼..."
"...어?"
"됐다. 이제 꺼져."
"어?"
"나가라고. 내 집에서."
"어..."
조용히 내 눈치를 보고 나간다. 그리고 그제야 다리가 풀린다. 찾았다. 윤석영을 찾았다. 정말 짜증나게도 웃음이 난다. 진짜 미친새끼는 나구나. 오재석 존나 미친새끼. 그 날 이후로 윤석영은 내 눈에 자주 밟혔고, 집도 알게 됐다. 조금씩, 조금씩 윤석영과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리고 예전같이 지낼 수 있게 됐다.
"저녁 먹고 가라."
"응."
윤석영을 우리집으로 불러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밥을 한참 먹다가 윤석영이 날 뚫어져라 쳐다본다.
"왜?"
"묻어서."
라며 손을 뻗어 닦아주려는데 그 손길이 가까이 오늘 걸 보고 움찔거렸다. 안 먹으려는 나에게 억지로 약을 먹이려는, 목을 조르는 손 같아서, 피해버렸다. 윤석영의 표정은 굳어버렸고 살짝 붕 떴던 분위기는 가라 앉아버렸다. 내가 괜히 미안해져 입술을 살짝 물었다.
"미안."
"천천히 하자. 아직은 힘든 것 같다."
"정말 미안."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표정 때문에 또 입술 잘근잘근 씹어버렸다.
"입술..."
"어?"
"입술 씹지마. 피나."
손을 올려 입술을 훑으니 피가 묻어나온다. 그제야 아랫입술이 아려온다. 진짜 정신을 못차리는구나. 그렇게 체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기여코 설거지를 하겠다는 윤석영을 뒤로하고 화장실로 가 이를 닦았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아직도 설거지를 하고 있어 부엌쪽으로 갔다. 살짝 멍 때리며 기계적으로 설거지 하는 윤석영을 보고 그냥...
"어..."
그냥 안아주고 싶었다. 뒤에서 안으니 닦고있던 컵을 놓쳤다. 다행히 깨지지 않았는지 떨어지는 소리만 날 뿐, 깨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아닌가? 윤석영의 두근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안 들렸나?
"재석..."
"나 너 좋아한다고."
"재석아."
"그런 표정하지마. 잘못은 너가 했는데 내가 잘못한 것 같잖아."
"미안해."
"그 미안이라는 말도 지겹다."
고무장갑을 빼고 몸을 돌려 자기도 날 안는다.
"미안해, 정말."
"알면 됐다."
"잘해줄게."
"당연하지."
"너가 꺼지라고 하면 꺼질게."
"진짜로?"
"아니. 이건 좀 자신없다."
"병신."
---
드디어 길게길게 끌었던 알파베타오메가가 끝남요ㅠㅠ
지금까지 봐준 독자분들! 모두모두 감사해요!
특히 암호닉으로 절 항상 반겨줬던 분들ㅠㅠ
번외편은 하나 쓸까 생각 중이구요~
이번편이 길이가 애매해서 두편으로 나눌까 하다가 마지막편이니까 좀 길게..
해피엔딩으로 초큼 허무하게ㅋㅋㅋㅋㅋㅋㅋ
새드엔딩으로 갈까 싶다가도 제가 생각한 새드엔딩으로 가려면 더 꼬여야할 것같은데 그게 또 힘들어서엉엉
다시한번 독자분들 감사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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