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한 바람이 밀려오는데 너는 아무런 미동도 없다.
창문을 닫아 달라 말을 붙이지도 못할 정도로 너는 무방비함의 중심에 서있다.
너울이 일렁이듯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잘게 흔들리고 너는 팔에 고개를 묻고 한참 동안 잠을 청한다.
고개는 운동장이 있는 저편으로 돌려놓고 고른 숨소리를 내기 위해 애를 쓴다.
뜨거운 볕에 내 온몸이 타들어간다.
내가 너를 아직 알지 못하지만 너는 나를 잘 알기 때문에.
어쩌면 무작정 정해놓은 한계선을 훌쩍 뛰어넘을지도 모르는 내 관심이, 너는 궁금한 건지도 모른다.
너는 항상 나의 반대로 고개를 돌린다. 이제껏 내가 지켜봤던 김종인은, 그렇다.
그러니까 지금의 너는. 나를 바라보지 않으려 하는거다.
손을 잡아달라, 품에 안아달라 말을 고민을 할때면 너는 나를 돌아본다.
아, 너무나 뜨거운 여름이다.
[카백] 내가 훔친 여름
W. 리플(Riffle)
훅훅 끼치는 열기를 몰아내며 교복의 소매를 한 겹 접어올렸다. 드러나는 맨살로 부딪혀오는 바람이 꽤나 끈적거려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야 변백. 너 밥 안 먹어? 왠일이래. 어깨를 툭 치며 낄낄거리는 찬열을 한껏 노려봐주고 백현은 짜증스레 샤프를 내려놓았다. 아, 진짜.
"입 좀 다물어"
앙칼진 목소리에 찬열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안 먹으면 안 먹는다고 하면 되지. 왜 성질이야. 잠깐 멈췄던 손은 다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샤프는 한참이나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책상에 걸터 앉아 동그란 뒷통수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찬열은 씩 웃으며 손으로 잔뜩 헝클어놓았다.
손가락 사이에 걸려 부벼지는 머리칼이 꼭 복슬복슬한 강아지의 털 같았다.
우쭈쭈 우리 개새끼, 언제 크누. 슬쩍 손바닥에 힘을 주어 부러 백현의 머리를 꾹 누르다가 찬열은 교실의 뒷편으로 뛰어갔다.
"밥 먹고 빵 사올게!"
내 새끼 밥은 내가 챙겨야지! 목청은 어쩜 저렇게 좋은지, 조용하게 말해도 다 알아듣는데.
고개를 돌려 잔뜩 눈을 흘기는 백현에게 신이 난 듯 손을 흔들다가 옆에 있던 세훈을 끌고 나가는 모습을 끝으로 교실은 잠잠해졌다.
운동장에서 시끌시끌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우성으로 들려왔다. 백현은 책상 깊숙히 넣어두었던 아이팟을 찾으려 손을 더듬거렸다. 그 와중에도 눈은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두 어번은 더 풀었던 수학문제였지만 빨간 색연필로 보기 싫게 그어진 삼각형이 남아있는 탓에 샤프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백현은 아이팟에 끼워져있을 이어폰의 줄을 잡으려 한참이나 손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짜증스레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아, 이건 또 어딨어. 속으로 욕을 잔뜩 씹어대다가 책상을 한번 걷어찼다.
가만히 있기에는 눅눅한 바람에 괜히 성질이 나고, 아이팟은 어디 처박혔는지 손에 잡히지도 않고, 지금쯤 정신없이 밥을 먹을 찬열을 한 대 쥐어박아주지 못한 게 괜시리 더 짜증나고. 그리고 가장 거슬리는 것은, 잔뜩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야, 김종인"
옆에서 천하태평으로 늘어져 자고 있는 종인 때문이었다. 저가 뭘 하든지 말든지, 움직이는 소리가 거슬리지도 않는 지.
종인은 3교시 시작 종이 울린 뒤부터 쭉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불러봐도, 팔을 툭툭 건드려봐도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백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곧 있으면 박찬열 때문에 공부고 뭐고 못할텐데.
샤프를 필통 속으로 넣어놓고 종인을 따라 책상에 엎드렸다.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고 책상에 눌려 엉망이 된 뒷머리가 보였다.
지금도 감겨있을 그의 눈꺼풀, 그 위의 속눈썹,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을 그의 코. 일정한 숨소리에 따라 오르내리는 등까지.
백현은 구슬 하나하나를 실에 꿰어넣듯 집요하게 종인을 쳐다보았다. 두 개의 눈은 맞물리지 않았지만 저의 것만 해도 뜨거웠기 때문에 그로써 다행이라 여겼다.
반대편으로 향한 그의 고개를 따라 백현은 운동장에 시선을 두었다. 끓어오르는 듯 올라오는 아지랑이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기만 해도 덥다.
옷깃을 팔랑거리며 슬쩍 종인의 뒷모습을 훑어보았다. 조금 길었는지,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이 와이셔츠의 깃에 닿아있었다.
머리 자르라고 해야겠다. 백현은 손을 올려 종인의 뒷머리를 조심스레 정리했다.
자꾸만 가슴이 떨렸다. 수면 위에 파동이 일어나 물결이 퍼지는 것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너는 알까"
내가 이렇다는 걸, 너를 보면 내 마음을 추스릴 수도 없다는 걸, 좀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걸. 너는 알까.
백현은 살며시 손을 떼내어 책상 깊숙히 숨겼다. 끝까지 밀어넣으니 말려있던 이어폰의 줄이 손등에 닿았다.
찾을 땐 보이지도 않던 게. 연신 아이팟만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누워버렸다.
한숨이 밀려나왔다. 후덥지근한 여름의 바람처럼 습했다. 백현은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나는 자신이 없다.
* * *
백현아, 백현아. 아득하게 밀려나있던 기억의 저편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깜하던 눈 앞에 형형색색의 불꽃이 터졌다.
정신은 돌아왔지만 감긴 눈은 떠지지 않아 부러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백현은 책상에서 급하게 얼굴을 떼어냈다.
흘렸던 땀 때문인지 책상과 떨어질 때 쩌억, 무언가 뜯어지는 소리가 귓바퀴를 감쌌다. 눈을 비비다가 미간을 찡그리니 제 앞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찬열이 보였다.
무슨 잠을 그렇게 자냐. 답지 않게. 백현은 찬열의 말에도 멍하니 앉아있다가 텅 비어있는 교실을 둘러봤다. 다 어디갔어?
"얼씨구. 수업 끝난 지가 언젠데. 애들 다 갔어"
"아…. 그래"
"집에 가자"
미리 책을 챙겨두었는지 주섬주섬 제 가방을 챙겨드는 찬열을 따라 백현은 미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썰물이 빠져나간 듯 고요한 교실에서 찬열과 단 둘뿐인 듯 했다.
에구구, 잠을 잘못 잤는지 뻐근한 목을 돌리며 백현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흠칫, 뒷문에 서있는 누군가를 향해 눈을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있는 시선을 맞받아치며 잘게 어깨를 떨었다. 종인이었다.
무심하게 저의 동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는 모습에 백현은 조금 떨떠름하게 웃었다.
"뭐야, 있었으면 인기척을 내던가. 왜 그러고 서 있어"
"너가 둔한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냐"
빨리 나와! 버스 놓친다고! 어깨에 가방 두개를 걸친 채 빽 소리를 지르는 찬열의 얼굴에 백현은 천천히 뒷문으로 걸어갔다.
문에 기대어 서있다가 저가 다가오는 모습에 옆으로 틈을 만들어주는 종인의 옆구리를 툭 치곤 터덜터덜 신발을 갈아신었다. 아, 집에 가면 또 잘 것 같은데.
"피곤해?"
발걸음을 맞추며 나란히 옆에 서는 종인을 올려다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래. 눈을 맞추려는지 자꾸만 고개를 앞으로 빼길래 백현은 바람 빠지듯 웃어보였다.
"어제 잠을 잘 못자서 그래"
그제서야 종인은 허리를 곧추펴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탁탁, 찬열이 뛰어내려가는지 운동화가 마찰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늘 그랬듯 종인은 말이 없었다. 백현이 옆에서 재잘거리는 걸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뭐라 말을 되받아주다가. 그 뿐이었다.
계단을 빙 돌아 내려오면서까지도 종인은 저가 떠드는 말에 대답만 해주다가 대뜸,
"잘 자더라, 너"
불편하면 잠도 못자는 게 낑낑거리면서. 백현은 장난스럽게 웃다가 들려오는 종인의 목소리에 경악했다.
계단의 마지막 칸을 내려오면서 중앙현관에 있는 거울을 쳐다보는 종인의 옷자락을 말아쥐었다.
움켜쥔 손을 살살 흔들며 백현은 울상이 된 얼굴로 되물었다.
"진짜? 아 어떡해. 막, 내가 이상한 소리냈어?"
"아, 말이 그렇다고"
뭐야. 놀랐잖아. 백현이 입을 비죽거리며 등을 내려치자 종인이 개구지게 웃었다.
어찌나 소심한 지 혹여나 교복이 구겨질까 제가 쥐었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펴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에어컨의 서늘한 바람이 맴돌던 학교를 벗어나려 문을 열자마자 숨통을 죄어오는 뜨거운 바람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더워, 더워, 더워.
종인은 하얗게 드러난 백현의 목덜미를 쳐다보다가 손으로 감쌌다.
원래 뼈대가 얇은터라 손바닥에 두드러지는 목뼈의 마디마디를 누르며 가볍게 쓸었다. 백현은 간지러움에 어깨를 움츠리다가 목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마른 체구가 가학성을 불러오는지 좀 더 억센 손길로 목을 잡는 종인의 손을 잡으려 백현은 팔을 뻗었다. 몸 곳곳에 숨겨져있던 세포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만 같았다.
백현은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나른한 눈이 반 쯤 접혀있었다. 입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눈이 웃고 있으니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뭔가 기분이 좋으면 나오는 표정이었다.
종인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표정을 지워내고 백현을 마주했다. 네 개의 눈동자가 달려들어 한데 엉켜들었다. 어느 한 명도 피하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햇빛도 그렇고, 바람도 그렇고, 모래먼지도 그렇고. 가슴이 저만치로 밀려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게 통증이 밀려올 것처럼 쿵쿵 뛰었다.
종인은 백현에게 뭐라 말을 하려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입을 닫았다.
"아오! 버스 놓쳤잖아!"
굼벵이를 삶아먹었나! 왜 이렇게 안와! 애꿎은 제 머리칼을 쥐어뜯다가 찬열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뛰어와 이리저리 흩어진 앞머리를 정리하면서까지도 종인과 백현을 흘겨보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종인은 제 귀를 틀어막고 짜증스레 찬열을 노려보는 백현의 옆모습을 훑다가 등을 툭툭 두드리고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아, 조용히 말해도 되잖아. 나 귀 안 먹었어!
"더워 죽겠는데 또 기다려야 된다고!"
"아, 진짜 시끄러워!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분명 저가 화를 낼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빽- 소리를 지르며 으르렁대는 백현에게 밀려 찬열은 황당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맨날 소리만 박박 질러대니까 배가 꺼지지! 그래놓고서 배고프다고 찡찡 거리기만 해봐. 식충이 같은 게! 백현은 새침하게 돌아서서 종인에게 뛰어갔다.
"오냐오냐 해줬더니, 저 말버릇 좀 보소"
내일부터 교육 좀 시켜야지. 찬열은 혀를 내두르다가 정신을 차리고선 얼른 둘의 뒤를 따랐다. 펄럭이는 옷깃 사이로 땀을 식힌 바람이 빠져나왔다.
여름의 절정이었다.
* * *
노란 방지턱을 넘어선 버스가 덜컹거렸다. 퇴근시간과 겹쳐 버스는 만원이었다. 찬열이 내린 자리에는 금방 새로운 누군가가 앉았다.
사람이 많은 탓에 맨 뒷자리로 밀려 앉아야했기 때문에 정면으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던 백현이 흘끔 종인을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하는 지 종인은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좀 넘겨다 보려고만 하면 득달같이 알아채선 제 품으로 쏙 가져가는 꼴이 그렇게 얄미운 것이 아니었다.
됐다, 됐어. 백현이 빈정이 상한 말투로 바짝 붙어있던 팔뚝을 밀어내자 종인이 손목을 가볍게 낚아채 어깨를 감싸왔다. 에이, 삐졌냐?
"더워. 그러니까 좀 떨어져"
아프지도 않은지 꿈쩍을 않는 종인의 다리를 툭툭 밀어내며 백현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은 드문드문 먹구름이 섞여있었다. 곧 비가 오려나보다.
말랑한 볼을 쿡쿡 찌르던 종인이 백현의 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부풀려졌다가 내뱉는 숨이 귓가를 타고 밀려 들어오자 백현은 종인이 두른 팔을 잡아당기며 바르작거렸다.
"아, 간지러워!"
"이렇게 안하면 나 안 봐줄꺼잖아"
그치? 싱긋 웃는 얼굴에 할말을 잃어 백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선 등받이에 기대었다. 눈만 껌뻑거리고 있으니 종인도 덩달아 몸을 뒤로 뺐다.
백현은 다시금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란 차선을 넘어 반대편으로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어깨 너머 옅게 비치는 종인의 모습을 보았다.
불투명한 유리에 반사된 모습을 눈에 담으니 무언가, 자신이 꼭 훔쳐보는 것만 같았다. 기분이 묘해졌다. 몸을 뒤로 더 밀착하니 또렷한 옆모습이 보였다.
누가, 빚어놓은 것 같다. 백현은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꾹 감춘 채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내리깐 속눈썹 위에 올라탔다가, 날렵한 콧날 위에 미끄러졌다가,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파고 들었다가.
쭉 시선을 내려 제 어깨에 놓여있는 종인의 팔을 훑어보다가 문득, 종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잘 자더라, 너. 불편하면 잠도 못 자는 게 낑낑거리면서.
왜 그 순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백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내가 자는 걸 봤다는 건데. 그럼 왜 안 깨웠지?
쿵, 무언가 내려앉는 것처럼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내가 어떻게 잤더라. 종인을 쳐다보면서 잤었나? 점심시간의 상황을 돌이켜보면서 백현은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슬쩍 종인의 눈치를 보며 그 옆모습을 따라 시선을 들어올렸다. 입꼬리에 걸렸던 웃음이 사라지고 정신없이 그를 관찰하던 찰나, 종인과 눈이 마주쳤다.
흐릿한 창문 위에서 시선이 부딪히고 한참이나 백현을 쳐다보던 종인은 돌아갔던 고개를 천천히 제 쪽으로 향하도록 잡아당겼다.
단지 얼굴만 마주할 뿐이지, 백현은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도둑질을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입술을 꼭 감쳐물고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백현아"
나긋한 음성이 들려오고 고개는 땅으로 꺼질듯 더 수그려졌다. 어쩌지, 쳐다보는 걸 들켰나. 백현의 얼굴은 이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온통 창피한 것 투성이였다.
"나 좀 봐줘"
종인은 어깨에 둘렀던 손을 들어 뒷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버스는 코너를 돌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수 옆으로 익숙한 아파트의 모습이 보였다.
속도가 줄어들고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삑- 버스가 정차하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주위를 둘러보던 백현은 얼른 가방을 집어들었다. 우리 내려야 해.
헐레벌떡 제 옆으로 빠져나가 버스에서 뛰어내리는 백현을 따라 종인도 몸을 일으켰다. 푸스스 웃음이 터졌다.
애지중지 기르던 강아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꽉 붙잡아야 했다.
* * *
백현은 혀를 내밀고 헥헥거렸다. 더워 죽겠어. 자꾸만 입가가 마르는 것 같아 핥아댔더니 입술엔 침이 반질반질 묻어있었다.
빨갛게 물들어 있는 건 단연 해가 지는 하늘 뿐이 아니었다.
가로수가 잎을 늘어뜨려 햇빛을 가려주기는 했지만 눅눅한 열기는 막아주지 못햇다. 터덜터덜 걷는 발자국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종국엔 더는 못가겠다며 집까지 업어다달라 되도 않는 소리를 하다가 종인이 쳐다보자 입을 꾹 닫았다. 더워서 그래….
백현은 매미가 맞춰주는 장단에 맞춰 우는 얼굴을 내보였다.
유독 백현은 더위를 많이 탔다. 조금만 더워도 죽을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이렇게 종인에게 찡찡거리기 일쑤였다.
여름이 지나가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동안은 어떻게 버티려는지 종인은 사뭇 궁금해졌다.
얼마 안 남았잖아. 그냥 가자. 어지러워, 종인아… 오늘따라 저를 보채는 모습에 종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친구랑 다니는 건지, 애를 키우는 건지.
꼼짝없이 저에게 뒷목이 잡혀 풀이 죽어있는 모습에 종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선뜻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며 편의점 안으로 백현을 끌고 들어갔다.
딸랑이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에어컨 바람을 쐬자마자 해맑게 웃는 백현의 얼굴이 발갛게 익어있었다.
종인은 힐끔,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변백현. 너 처음부터 이럴려고 그랬지. 내, 내가 뭘! 백현은 바락 대들다가 빨빨거리며 편의점을 헤집고 다녔다.
더워, 더워, 더워. 중얼거리는 소리가 과자코너에서 튀어나왔다. 흩어진 앞머리를 정리하며 종인은 주위를 둘러봤다.
편의점 안은 계산대를 지키고 있는 알바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무조건 쭈쭈바야! 알지? 신이 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리는 노랫소리와 섞여들었다. 언제 다 돌아봤는지 삐질삐질 흘렸던 땀을 닦으며 백현은 종인의 옆에 섰다.
아 알았냐고오. 옷깃을 잡아 당기다가 닫혀 있는 냉동칸 안을 가리키며 칭얼거리는 목소리에도 종인은 말없이 허리를 숙여 종류를 골랐다.
냉동칸을 열고 뒤적거리던 종인이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꺼내더니 문을 닫고 계산을 하려 계산대 앞에 섰다.
어어, 저가 말하던 것과는 다른 종류를 집어드는 모습에 백현은 당황하며 종인의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나는 쭈쭈바 먹을 꺼라니까?"
"됐어. 너도 스크류바 먹어"
"왜! 나 다른 거 먹을래"
"얻어 먹는 주제에 말이 많다"
잔돈 받아와. 등을 떠밀려 알바생이 건네주는 거스름돈을 받아오는 백현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그 와중에도 종인이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들며 봉지를 짜증스레 뜯기는 했지만.
이거 싫다니까, 하여튼… 뭐가 그렇게 싫은 지 연신 꿍얼거리는 백현의 모습을 밉지 않게 째려보다가 종인은 수고하세요, 인사와 함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또 다시 햇빛이 쏟아져내렸다. 우르르, 양 떼처럼 몰려든 더위에 혹시 아이스크림이 녹을까 냉큼 입안에 밀어넣은 백현이 헤실헤실 웃었다.
"그거 싫다면서"
"아이, 그건 그거고…"
으하, 시원하다! 달달한 딸기향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쪽쪽 소리를 내는 모습이 영락없는 꼬맹이였다.
손가락으로 막대를 빙빙 돌리던 백현이 종인의 팔을 툭, 건드렸다. 뭐야.
"고맙다고"
싱겁긴. 종인은 바람 빠지는 듯 웃었다. 백현이 메고 있던 가방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며 터벅터벅 걷는 걸음이 가벼웠다.
강아지마냥 쫄래쫄래 뒤를 따라오는 백현을 끌어다 옆에 두니 그제서야 얌전히 아이스크림을 물었다.
새의 부리처럼 입은 어찌나 짧은지. 곧이 곧대로 주면 받아 먹는 법도 모르고.
백현은 종인이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는 것이 마냥 좋은 건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한 입을 크게 베어무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오물거리는 입술이 침을 바른 것처럼 붉었다.
쳐진 눈이 웃고 있는 걸 보며 종인은 점심시간의 백현을 떠올렸다.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더웠는지 비적비적 흘린 땀자국, 그 와중에도 하얀 얼굴.
어쩜 그렇게 곤히 자는 지.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기 무섭게 우당탕거리며 찬열이 백현을 쫓아 들어와도 한번 든 잠은 깰 줄을 몰랐다.
시끄러워, 임마. 애 자니까 이따가 끝나면 와라. 훠이훠이 찬열을 내쫓으며 종인은 백현의 등을 토닥였다.
종인이 4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잠이 깼다는 것은 백현은 몰랐다. 움직이면 땀나고, 밥 먹으러 가기도 귀찮아서 누워있었다는 걸 알면 노발대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가 귀찮아서 종종 밥을 거르는 것처럼 백현 역시 밥을 자주 걸렀다.
더위에 약해 밖으로 나가는 걸 힘들어 하는 것도 있었고, 한번 문제집을 잡았다 하면 끈기인지 집착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집중하는 성격 탓도 있었다.
아, 오늘은 후자였고. 매끄러운 종이 위에 잘 깎은 흑연이 맞닿아 사각거리는 소리가 빈 교실에 들려오는 걸 반주삼아 종인은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와도 백현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와하하-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에 습관처럼 아이팟을 찾았을 거고, 그것도 못 찾아서 제 성질을 못이겨 책상을 걷어찼을테지.
종인은 보지 않아도 그려지는 백현의 모습에 짐짓 웃음을 참았다.
"야, 김종인"
말갛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종인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여태껏 잠을 자는줄 알았는지 이유 모를 한숨을 내쉬다가 백현은 저를 따라 책상에 눕는 듯 했다.
왠일이래, 학교에서는 잠 안 자면서.
종인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있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다가 순간, 가느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닿았다.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백현의 손길에 가슴이 간질간질거렸다. 창문 틈 사이로 햇빛이 사선으로 쏟아져내렸다.
책상과 부벼졌던 뒷머리를 정리해주는지 백현은 손가락을 구부려 여러번 쓸어내렸다. 종인은 다시금 침을 삼켰다.
너는 알까. 더듬거리는 음성의 끝에 망설임이 묻어있었다. 종인은 주먹을 가볍게 말아쥐었다. 눈가가 가늘게 떨려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백현의 손가락이 떨어지고 옷자락을 들썩이는 소리가 들렸다.
종인은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다시 잠을 청해야할 것 같았다. 잠이 올지는 의문이었지만.
흥얼거리는 노래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린 종인의 눈이 입에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물고 있는 백현에게 향했다. 하얀 얼굴에 두드러진 입술이 오물거렸다.
"백현아"
그렇다면, 너는 알까. 종인은 익숙하게 백현의 볼을 매만졌다. 물음이 가득한 얼굴로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지만 대답을 대신 삼켜냈다.
네가 등을 돌린 틈을 타서 그 하얀 얼굴을 정신없이 눈에 담는다는 걸, 너는 알까.
내 핸드폰 속, 잠을 자고 있는 너의 모습을 담아놓은 게 들키기라도 할까봐 가슴을 졸이는 걸 너는 알까.
눈이 마주치기 직전에 모른 척 고개를 돌려봐도 너가 나를 바라 본다는 걸 알아차려버렸는데. 그래서 더 눈길이 가는 지도 모르는데.
이 마음이 어떤 것인지, 너는 알까.
"아이스크림 묻었어"
칠칠맞긴. 종인은 백현의 정수리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가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 자국을 닦아냈다. 백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발그스름한 빛으로 물들었다.
이렇게나 티를 내면서. 달아오른 얼굴엔 노을이 머물러있었다. 아무래도 스크류바를 선택한 건 신의 한수임에 틀림없어.
종인은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보다가 빙긋 웃었다.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담장 아래에 마주선 두 개의 입술이 얽혀들었다.
가볍게 떨어졌다가 진득하게 틈을 좁혔다.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의 막대기가 땅에 뒹굴었다.
노을이 번진다.
* * *
너와는 반대로 돌린 고개에서 아쉬움이 묻어난다.
몰래 훔쳐보는 그 얼굴이 귀여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위가 밀려들어 홍시처럼 붉어진 양 볼 위에는 부끄러움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잠을 청해보았지만 어쩐지 너의 앞에서는 그 깊은 수렁에 떨어질 수조차 없다.
나를 좀 봐달라, 그렇게나 말을 건네도 너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려버린다.
뜨거운 볕에 내 온몸이 타들어간다.
내가 너를 아직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너를 잘 알기 때문에.
자꾸만 고민하는 네 마음이 궁금해 먼저 다가서도 괜찮을까, 그 한가지 생각에 시간을 보낸다.
너는 수업시간에 절대 잠을 자지 않는다. 이제껏 내가 지켜봤던 변백현은, 그렇다.
그러니까 지금의 너는. 나를 향해 뛰어들기 전 마지막 고민을 하는 거다.
언제든 뛰어들어도 좋다.
이렇게, 너를 향해 항상 팔을 벌리고 있으니.
* * *
너는 왜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
그야,
지금은 너무 뜨거운 여름이니까.
* * *
내가 훔친 너의 여름 完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