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그 어떠한 기대도, 그 어떠한 희망도 담겨있지 않아. 그저 한낱의 종이일 뿐이라고 치부해도 괜찮아.
K. 너는 지금 어떠한 모습일까. 나처럼 매일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하얀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아니면 전처럼 완벽한 타인이 되어 있을까.
네가 듣고 싶다고 해도 들리지 않고, 네가 아무리 귀를 갖다 대도 들을 수 없고, 그런 너가 이제는 외면해버려 듣지 않을 내 목소리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날아갈거야.
나는 비가 내리는 날을 증오해. 내 모든 것을 앗아간 빗줄기가 내리면 나는 그 보다 더한 피를 토하며 원망하겠지.
죽지 못해 사는 나를, 나를 데려가지 않은 그 날의 빗줄기를. 그리고 너를.
내 말라 비틀어진 마음이 먼지처럼 둥글게 뭉쳐져 너의 숨소리에 섞여 들어가길 바래. 나는 그렇게라도 너의 마음에 살테니.
내가 처음 너에게 보냈던, 그 샛노란 편지. 오직 K를 위한 편지.
이건 내가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야.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없는 편지로 남아주길 기도할게.
[오백] 수취인불명 : 노란편지 (번외: B)
W. 리플(Riffle)
달칵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연신 목울대가 움직였다. 얼기설기 맞물린 손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낮췄다.
"머리 조심하고. 천천히, 천천히. 그렇지"
등을 받치고 시트에 내 어깨를 밀어두고 완전히 다리까지 올리고나서야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혼재된 불안감이 증폭되어 내 입에선 뜨거운 숨과 함께 긴장감이 새어나왔다.
"그러게, 내가 안 나간다고 그랬잖아"
차 타는 거, 무서워. 땀이 말라붙은 내 목덜미 위로 그의 손이 올라왔다. 너무나도 크고, 포근하고, 뜨거운 그의 손이. 문질거리는 익숙한 느낌에 나는 버릇처럼 목을 움츠렸다.
괜찮아, 백현아. 괜찮아. 그는 기운이 빠진 듯 웃다가 천천히 차문을 닫았다. 밖에 표류하던 뜨거운 바람이 서둘러 차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에어컨의 바람이 나오는 곳으로 손을 길게 뻗었다. 지문을 따라 이리저리 갈라지는 바람을 느끼고 차체가 조금 흔들리는 걸 알아채곤 옆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경수야?
"응. 이제 출발한다. 아주머니한테 조심히 갔다오겠다고 인사해"
무언가 빨려가듯한 소리에 나는 어깨를 잘게 떨었다. 막혀있던 창문이 열리고 타들어가는 햇살이 얼굴에 흩뿌려졌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왼쪽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린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열린 창문 너머 그는 누군가에게 소리를 쳤다. 다녀올게요! 떨어져있는 곳에서부터 땅과 마찰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에 가만히 놓여있던 손을 급하게 잡으며 아주머니는 내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백현아 지금이라도 괜찮아. 아줌마랑 같이 있을까? 응?"
불안감이 튀어나와 내 볼을 툭툭 쳤다. 순간, 두렵다고 단정지어버렸던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나를 걱정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나는 슬쩍 입꼬리를 당겼다.
처음은 그의 손에 잡혔던 것이었지만 두번째와 마지막은 내가 되새긴 마음이었다. 더 이상 기억에 잡혀살지 않겠다 다짐했던 터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걸 내보일 첫번째 기회였다.
"아니예요. 갔다 올게요. 옆에, 경수 있잖아"
물기가 배인 목소리를 끝으로 매미가 울었다. 나는 나른하게 웃어보이곤 잡혀있던 손을 느리게 빼냈다. 다녀오겠습니다. 미끄러지듯 차가 움직이고 창문이 쓸려올려갔다. 매미 우는 소리의 잔상이 남아있었지만 차 안은 조용했다. 그는 내 손등 위에 손을 올려 손가락 사이에 그의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백현아"
괜찮을거야. 네 옆에는 내가 있으니까. 기분 좋게 웃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넘나들었다. 그래, 지금 내 옆에는 도경수가 있다.
X O X O
아주머니도 없이 밖으로 나온 것도, 기억에 선명한 그 날 이후 차를 타본 것도 처음이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줄어들고 매끄럽게 차가 밀려나갔다. 시골길은 끝이 난 듯 했다. 나는 한참이나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막연하게 틀어막혀있던 불안감보다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더 가야할까. 바퀴가 마찰하는 소음이 좀 더 선명해졌다.
둘이 있으면 주고 받던 도란도란한 말소리도 없었다. 어쩌면 그의 배려였다. 손을 꽉 잡아준 채 옆에 지켜주고 있다는 것으로 대신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평소처럼 밥을 먹고 서재에 앉아있다가 산책을 핑계삼아 무작정 이끌려나왔다. 숲 주위를 걷다 멈춰서서 그는 조심스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현아. 우리 밖에 나갔다올까?"
차 타고 나가야 되는 곳인데. 내가 슬며시 고개를 저으니 곧바로 어깨를 단단히 잡아왔다. 너랑 꼭 같이 가보고 싶어서 그래.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될 지 모를 것 같아서.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나, 차 못타는 거 알잖아"
조그만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내 어깨를 잡았던 손이 힘없이 풀렸다. 나는 내 앞에 가만히 멈춰서있을 그를 향해 작게 웃어보였다. 아, 여기 진짜 시원하다. 경수야 조금만 있다가 가자.
그는 내 대답을 들은 후에 더이상 대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미안함이 밀려들었지만 내 안에 갇혀있는 두려움을 밀어내는 것은 더 힘들었다. 나는 이미 불안감에 지쳐있었다.
나무에 기대어 서서 가만가만 발장난을 치다가 문득,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될 지 모를 것 같다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무슨 뜻일까.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저기, 경수야.
"…너 어디가?"
왜 어디 갈 사람처럼 말해. 나는 신발 옆에 쌓아두었던 흙을 뭉개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의 숨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멍청하게 기대어 있다가 내 주위 어딘가에 있을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한 걸음을 내딛으며 습관처럼 팔을 흔들었다. 경수야 어디있어. 경수야, 경수야! 바람에 실려 내 목소리가 숲에 울려퍼졌다. 그가 곁에 없다. 나는 덜컥 겁이 삼켰다.
왜 손을 잡아주지 않지. 내가 안 간다고 해서 화났나? 그래서 나를 버리고 갔나봐. 어떡하지, 경수 어딨지.
자꾸만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그가 내 주변에 없다는 걸 알아차린 후부터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만 계속 떠오르고 나는 손을 들어 눈물을 박박 닦아냈다.
제자리에 주저앉아 바지가 더러워질가 걱정을 하는 것도, 나무의 뿌리가 튀어나왔는지 엉덩이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 조차도 안중에 없었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백현아!"
나뭇잎에 부딪혀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끝으로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이어 반동으로 앞으로 튕겨나가기도 전에 그는 내 목에 얼굴을 묻었다.
"왜 그래. 왜 울어, 응? 무슨 일 있었어?"
"너 어디갔었어. 찾았단 말이야. 왜 나 혼자 놔두고 갔어!"
"간병사 누나한테 차 키 좀 받으려고. 미안해"
"경수야, 경수야. 나 버리고 가지마. 내가 잘못했어. 너가 하자는대로 할게, 응? 나 버리지마"
나는 그의 옷을 꽉 붙잡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결국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주먹을 움켜쥔 채 숨을 헐떡거리는 나를 어르면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는 바람소리가 등에 달라붙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버스가 달려오는 듯 했다. 그는 내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백현아"
훤히 드러났을 이마를 자꾸만 만지며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간헐적으로 껄떡거리는 숨을 삼키며 그의 부름에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나랑 같이 가는거다?"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한다면서. 푸스스 퍼지는 웃음소리에 얼굴에 뜨겁게 열이 몰렸다. 아니, 그건…. 이씨 놀리지마. 나는 아프지 않게 그의 손등을 때렸다.
그럼 너 따라갈테니까 나 버리지마. 나 놓고 어디 가지마, 경수야. 알았지? 그를 따라가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가 내 옆에만 있어준다면 더 이상을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를 안았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맞대고 배의 고동소리처럼 울렸다.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만 나는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가 없으면 나는 숨을 쉴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X O X O
뭐라고 표현을 해야할까. 훅 끼쳐오는 낯선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송진의 자극적인 향도 아니었고, 녹슨 철에서 묻어나오던 냄새도 아니었다. 뭐랄까, 토기가 올라올 것 같고. 냄새가 좀 짠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래. 비렸다. 언젠가 아주머니가 사오셨던 생선에서 끼쳐오던 비릿한 냄새였다. 나는 살풋 얼굴을 찌푸렸다. 한참이나 달려 도착한 곳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야?"
너가 같이 오자고 했던 곳이? 나는 코를 틀어막으며 그에게 되물었다. 응. 단단하게 맞물린 손을 고쳐잡으며 그는 웃음기가 배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처음 와봤지?"
여기는 바다야. 백현아, 너가 책에서 배웠다던 그 바다야. 나는 멀뚱히 서있다가 그에게 이끌려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버석버석한 모래 알갱이가 발바닥을 파고들고 나는 옹송거리듯 발가락을 오므렸다.
따가워. 못 걷겠어. 팔을 흔들며 투정을 부리는 내 어깨를 감싸며 그는 쉬지않고 걸었다.
바다가 이런 곳이었구나. 책에서 나왔던 것처럼 낭만이 있지도 않고, 분위기가 좋지도 않은데. 왜 바다에 오자고 했을까. 철썩거리는 물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떨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소리에서 선이 생기고 축축한 어느 지점에 발을 내딛자 발등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밀려들었다. 깜짝 놀라 발을 동동 구르자 옆에서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뭐야, 경수야! 이거 싫어! 차가워, 흐으"
"쉿, 괜찮아. 이게 바다야. 물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데. 괜찮아, 위험하지 않아"
조용히하고. 내 입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그는 소근거렸다. 백현아. 바닷물이랑 같이 소리도 밀려온다. 이걸 파도라고 하는데 이게 부서지면서 물이 하얗게 변해.
나는 벌벌 떨다가 그에게 매달린 팔에 힘을 풀어다. 이질적인 느낌이 익숙해지고 나는 물을 튕겨냈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이 바지 위로 튀어올랐다.
조금 더 발을 빨리하니 첨벙첨벙거리는 소리가 온 몸을 감쌌다. 재밌어? 나는 빙그레 웃으며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등으로 쏟아지는 햇빛은 뜨거웠지만 발은 차갑게 식었다.
"신기해…"
"처음엔 다 그래"
이러다 옷 다 젖겠다. 그는 내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넣어 가볍게 들어올렸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깔깔거리자 그도 나를 따라서 웃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시원하고, 차갑고, 탁 트인 기분. 막혀있던 무언가가 씻겨내린 기분.
어정쩡하게 걸어가 그는 모래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엉덩이 위로 따뜻하게 덥힌 모래의 열기가 타고 올라왔다. 나는 다리를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웃음이 터져나올것만 같았다. 그가 털썩 주저앉아 펑퍼짐해진 모래가 내 주위로 튀겼다. 나는 칭얼거리듯 그의 어깨에 고개를 내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뜨겁지만 시원하고, 청량감이 목 끝까지 들어차는 것만 같아서.
경수야. 응, 백현아. 한층 밝아졌을 내 표정에 그는 우물거리듯 대답을 내놓았다. 비릿한 냄새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바다는 어떻게 생겼어?"
끝이 없다고 그러던데. 아주머니가 그랬어. 바다는 되게 파랗대. 그렇지만 나는, 파랗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
혼자 중얼거리듯 내뱉는 목소리가 파도소리에 묻혔다. 쓸려내려간 자리에는 정적이 남아있었다. 내 물음에 대답을 해주려는듯 그는 곰곰히 생각을 하고있는 것 같았다. 바다는 말이야.
"비가 오지 않을 때 하늘의 빛깔이야. 정말 예뻐"
"…보고싶다"
나는 불쑥 튀어나오려던 말을 멈춰세우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햇빛이 녹아내려 피부는 뜨겁게 달아올라있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분이 묘했다.
"있지. 너랑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자꾸만 무언가를 바라게 되서 꼭 내가 욕심쟁이가 되는 것 같아.
"뭘 바라게 되는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는지 앞으로 퍼지던 목소리가 볼께에 어른거렸다. 뱃 속이 허했다. 텅 비어있는 곳에 고른 숨이 맴돌았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니었어. 그냥 너랑 같이 산책가고 싶다 이런 거 였는데. 더 큰 걸 원하게 돼. 너랑 같이 책 읽고 싶고, 너의 옆에 남고 싶고. 그리고…"
자꾸만 앞을 보고싶어. 큰 파도가 밀려왔는지 거세게 부서지는 소리가 진동을 만들어냈다. 나는 가만히 보이지 않는 눈 앞에 시선을 두었다.
"네가 보는 걸 같이 보고 싶다가도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져. 그리고, 그 끝에서 너를 보고싶어"
그래. 나는 네가 보고싶어… 경수야, 내가 욕심이 많은 거야? 응? 원해서는 안되는 걸 바라는 거야?
점점 부풀어오르는 메아리가 되어 내 목소리가 바다에 던져졌다. 파도를 낚고, 파란 물결을 낚기 위한 미끼가 되어.
처음 토해내는 진심이었다. 그의 앞에서 꽁꽁 껍질 속에 감춰두었던 내 마음을 꺼내들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 자신을 올려두었던 모래는 너무나 뜨거웠다.
"…나는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근사한 사람이 아니야"
끙차, 그는 내 옆에 가깝게 엉덩이를 붙였다.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모래도, 내 피부도, 그의 숨결도, 그와 잠깐동안 맞닿은 시간도.
"백현아. 나는, 가난해. 더 이상 갈 곳도 없어. 취직도 해야하고 그 전에 대학교 졸업도 해야해. 하지만 그러기엔 내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하거든. 돈이고, 시간이고, 열정이고 모두 다. 내 전부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 사이로 비릿한 무언가가 와닿았다. 또 다시 낯설어졌다. 나는 담담한 척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나를 보면 실망할지도 몰라. 가진 것도 없는 내가 너에게 어떻게 보일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네가 만약 눈을 뜨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네 앞에 있을 수 없어. 그는 짭짤한 바다냄새처럼 말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입이 텁텁해졌고 울컥 화가 치밀어올랐다.
"왜 그런 걸 걱정하는거야?"
"어?"
"나는, 나는 네가 어떻든 상관없어.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해! 혹시 내가 눈이라도 뜰까봐? 그럴까봐?!"
어차피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언성을 높이며 씩씩대는 내 입가가 씰룩였다. 내가 울고 있구나.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와 나조차도 몰랐던 사실을 알아채고서 황급히 두 눈가를 닦았다.
그가 한없이 받아주니 정말 철없는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짜증나면 울고, 불안하면 소리지르고. 나는 훌쩍거리던 코를 킁 풀며 그가 앉은 곳의 반대편을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그를 향한 이기심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는 내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백현아.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그것들은 결국 바다로 모이기 마련이야"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에 나는 짐짓 몸을 움츠렸다. 숲에서 들려오던 새소리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질 목소리처럼. 그는 나즈막히 속삭였다.
"지금 너와 내가 보고있는 바다도, 좀 전에 우리 발등까지 밀려왔던 바다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게 우리에게 닿았다고 해서 우리가 사라지거나 지워지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 또한 비가 되어 내리길 바래.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언제든 너를 볼 수 있잖아.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려 내 팔목을 잡아챘다. 위 아래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더러 비가 되어 내리라는 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뿌옇게 흩뿌리던 소나기처럼 전에 없이 희미했다. 내가 눈을 뜨게 된다면 내 앞에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맴돌았다.
…이제 집에 가자, 늦겠다. 그는 내 몸을 일으켰다. 괜찮다고 말리는 나를 기어코 등에 업고선 그는 작게 웃었다. 내게 남아있던 목소리도, 말들도 소멸이 된 듯 했다.
그가 걸어갈 때마다 산등성이처럼 등이 솟았다가 내려갔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피곤하면 좀 자. 나른한 음성을 붙들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눈을 뜨면 그가 사라져있을 것만 같았다. 집 앞에 있던 숲에서 처럼, 나를 홀로 두고 떠나가버릴까 그게 제일 두려웠다.
그는 나에게 비가 되어달라 했다. 어디서든 볼 수 있게, 사라지지 않게 비가 되어 내리라 했다.
나는 사라져야 한다. 아득하게 멀어버린 내 두눈처럼 어딘가로 스며 들어야 한다.
나는 그에게 싫다고 할 수 없었다. 그는, 나의 바다가 되겠다고 했으므로.
X O X O
"오늘은 더 피곤할테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어제처럼 잘 자"
늘 그래왔듯 내 머리맡에 손을 올려두고선 눈을 감은 나를 대신하여 그는 하루의 마지막을 완성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말라는 그의 말에 서랍 깊숙히 넣어두었던 약통들도 과감하게 버렸다.
사실, 더 이상 약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내 생각에 의해서였지만. 나는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리고 아랫층에는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두 어번의 토닥임을 끝으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박자박 걷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나 싶더니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현아"
나는 눈을 번쩍 뜨고선 몸을 황급히 일으켜세웠다. 방문이 있을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왜, 왜? 볼품없이 갈라진 음성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겹쳐 울리고 슬리퍼가 바닥에 끌렸다.
"…아니야. 내일 말하자"
"왜. 너 그러고 나가면 나 잠 못잔단 말이야, 궁금해서"
김 빠진 목소리로 툴툴거리니 그는 조금 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만 웃어. 그러다 아주머니 깨면 어떡해. 나는 엄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대며 바람이 새는 소리를 냈다.
그는 조심스레 걸어와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이불 속에 놓여있는 내 손을 찾아들며 매만지는 게 영 어색했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괜찮아. 너 이러다 잠 못잘 것 같은데"
"괜찮아. 말 하려던 게 뭔데?"
불을 켜는 소리도 없었으니 어둠 속에서 소근거리고 있을 터였지만 나는 밀려오는 궁금증에 그에게 바싹 붙었다. 뭔데 그래.
"백현아. 일단 내 말 듣고만 있어"
왜 그래, 경수야.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말아쥐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터져나올 듯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치 않아 너무나도 버거웠다.
"정말 말하기 싫은데, 그래도 꼭 해야만 하니까…"
현아, 백현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더 이상 없어. 이렇게 낮부터 밤까지 너와 함께 있을 시간은. 나는 이제 너를 볼 수 없어.
"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내가 많이 미안해. 잘 살고 있던 너를 찾아와서 흔들어 놓은 것 같아서 미안하고 나 때문에 힘들어 할 너에게 너무 미안해"
곧 방학이 끝나가. 내가 아까 말했었지. 나는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졸업도 해야하고 취업도 해야한다고. 계속해서 여기에만 머무를 수 없어. 백현아, 나는 내가 책임져야하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만한 통증보다 더한 눈물이 쏟아져내릴까 무서워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틀어막았다. 누군가 내 숨통을 쥐고 흔들며 낄낄 웃고있는 것만 같았다. 뒷통수를 얻어 맞은 것 마냥 얼얼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자꾸만 이상한 소리만 골라서 하는 그를 밀어내려 손을 내저었다. 싫다. 나에게 미운 말만 꺼내는 그가 싫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하겠다"
"일주일 뒤면, 나는 떠나야 해"
"그럼 나는 어떡해. 나더러 어떡하라고. 남겨진 나는, 어떡할건데!"
"백현아"
"나는 도대체 너에게 뭐야? 너가 책임져야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렇게 무작정…"
밉다, 도경수. 나는 그의 가슴팍을 내리치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릎을 끌어모았다. 이불자락까지 끌려와 어정쩡하게 발치를 덮었다.
울음을 참아야했다. 내가 이러면, 정말 그가 떠나갈지도 모르니까. 실낱같은 희망으로 눈물샘을 닫았다. 이토록 낮은 목소리의 그도 두려웠다.
단지, 창밖에 비가 내리지 않을 뿐이지 악몽같은 어둠이었다.
"나 잘래. 졸려"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럼 왜 나를 찾아왔어? 이렇게 왔다가 훌쩍 떠나려고, 그럴려고 왔어?"
너 진짜 이기적이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해하지 못할 말만 꺼내는 그 때문에 하루종일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피곤함이 몰려왔다. 무작정 쏟아내다보니 그에게 몹쓸 말을 해버리고 온 몸에 소금기만 남은 듯 했다.
그래. 내가 그렇지. 나는 항상 남겨지는데 익숙하니까. 너가 떠나도 나는 이렇게, 또 혼자 남겨질꺼야.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그리고 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나를 떠나가버리잖아.
나는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할 운명이구나.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가물가물 눈이 감겼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독한 수마가 찾아오길 바랬다.
"네가 싫어"
"…잘자, 백현아"
그의 목소리를 끝으로 점멸하는 밤이 찾아왔다. 어제와 오늘의 사이에 남겨진 기억들이 내 착각이 되길 바라면서.
X O X O
저, 백현아. 잘 먹었습니다. 저 혼자 올라갈게요. 토막이 난 말이 공중에 부유했다. 의자를 뒤로 빼고 나는 조심스럽게 걸어가 계단의 난간을 잡았다.
엉망이 된 머릿속에 손에 힘이 풀렸다. 중심이 흔들려 휘청하는 사이 발이 엇갈렸는지 금방이라도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지만 어쩐지 나를 받쳐주는 손길에 나는 한 계단 위로 오를 수 있었다.
"조심해야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다정함이 녹아내린 그 음성.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나를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그는 전과 다름없이 행동했고 타들어가는 속은 나 혼자만 가진 것만 같아서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외로움에 점철되어 내 자신을 빗 속에 가두었다. 그래야, 그가 떠나도 덤덤해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미안한 마음은 아니라 애써 지우며 나는 그를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모진 말을 내뱉고 나니 그를 대하기에 불편한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속으로 손가락을 접어가며 날짜를 세었다. 일주일, 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올곧이 펴져있던 손가락이 하나씩 접혀질 때마다 울컥울컥 초조함이 튀어나왔다.
상상해왔던 모습을 지워내는 연습이었다. 그를 떠나보내야할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 더 이상 울지 않는 것, 그리고 그를 빨리 잊는 것.
두 손이 한 손으로 바뀌고 검지 손가락만이 시간을 지켜낼 때 비로소 표정까지 지울 수 있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소란스러움이 정리가 되고 주방 아래에는 말소리가 끊어진 듯 했다. 곧이어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벽을 타고 올라왔다.
나를 부르기를 기다렸지만 들키지 않게 텀을 두고 문고리를 돌렸다.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계단까지 이어졌다. 나는 땀이 비적비적 배어나오는 걸 감추려 부러 힘을 꽉 주었다.
말라있던 입술을 축이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떨궜다. 그동안 해왔던 연습은, 모두 쓸모가 없었다.
제멋대로 빠져나오는 감정을 어쩌지도 못한 채 나는 계단 위에 서있었다.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 코가 시큰거렸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발바닥을 울리면서 누군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때마다 내 입에서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대로 정신을 놓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데. 들어주는 사람이 없네"
그가 바로 앞에서 웃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턱에 간질간질한 웃음이 묻고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듣고있으면 금방이라도 귀가 멀것만 같았다.
독해지기로, 마음먹었잖아. 나는 열쇠까지 채워 저만치 밀어둔 마음을 모른척하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결국 가는구나"
"또 만날 날이 오겠지"
"너는, 정말…"
좋은 말을, 몸 건강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욕심을 부리고 싶은데.
"나는 또 다시 나를 경멸할꺼야"
"변백현"
"그렇게 부르지마"
숨소리가 볼 위에서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온 신경이 빳빳하게 굳어 나는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려 손을 뻗었다.
너가 사라지는 그 순간부터 내 불완전함을, 내 멀어버린 두 눈을, 하루종일 예민하게 곤두선 내 모든 감각을 경멸하게 되겠지.
서서히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처럼 곧이어 두 귀가 멀게 될거고. 두 다리와 두 팔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되겠지. 전신이 마비되는 것처럼.
"나는 더 이상 며칠이 남았는지 손가락을 접어보지도 않을거고, 창문을 열어놓고 버스가 덜컹거리며 달려오는 소리를 기다리지도 않을거야"
모진 말과 달리 내 손은 그의 얼굴에 닿았다. 덜덜거리는 손으로 턱을 쓸어보고 콧대를 만져보고 가만히 입술에 손을 갖다댔다. 뜨겁고, 뜨거워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열기가 가득했다.
"이제 갈 시간이야"
"너를 만나기 전 3월의 변백현이 될거야"
"아주머니 기다리셔"
"그리고 너는…"
마룻바닥이 삐걱거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여덟번째 칸. 그 불완전함 위에 서있는 우리.
"변백현이 없으면 숨도 못 쉬는, 7월의 도경수가 되길 바래"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형체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그의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늘 말하던 진한 눈썹이 어떤지, 두툼하게 튀어나왔다던 목젖이 어떤지.
"안녕. B"
그는 내게 안녕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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