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카백] 개와 늑대의 시간 01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b/7/c/b7ce624fc078bea7b4b1424ef8136695.jpg)
L'heure entre chien et loup.
낮에서 밤으로 뒤바뀌는, 혹은 밤에서 낮으로 변해가는.
낮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둡고 밤이라고 하기엔 밝은 애매모호한 황혼의 시기.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선도 악도 모두 붉은 혼돈의 시간.
너와 내가 공존할 수 없는, 개와 늑대의 시간.
[카백] 개와 늑대의 시간
W.리플(Riffle)
01. 언덕 위의 실루엣
눈이 감겼다. 눈두덩에 붙어있는 그것은 세상 어느 것보다 무거웠다. 백현은 자꾸만 수그려지는 고개를 쳐들고 손등을 세게 꼬집었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빨갛게 부은 손등의 감각이 무뎌질때면 어느샌가 지독한 잠이 몰려왔다. 손님이 와도 백현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돈을 거슬러 주다가도 몇번이고 다시 세어보았다.
수고해요.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한쪽 손에는 담배 한 갑을 쥔 채 어깨를 두 어번 두드려주고 나간 중년 남자를 끝으로 백현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요 근래 잠을 편하게 자본 기억이 없었다. 백현은 학교가 끝나면 부리나케 편의점으로 달려와야했고 집에 돌아갈 때면 자정이 넘어 타고 갈 버스도 끊기는 시간이었다.
하긴, 있다고 해도 뛰어가면 뛰어갔지 가만히 앉아서 타고갈 지는 의문이겠지만. 백현은 필사적으로 희미해져가는 의식을 붙잡았다.
뒷머리를 벽에 쿵쿵 박았던 터라 정수리의 감각이 얼얼했다.
온도를 잔뜩 내려놓은 에어컨의 바람이 허공에서 회오리쳤다. 추워…. 백현은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에 소름이 돋아난 팔을 엇갈리게 잡으며 몸을 뒤쳑였다.
유독 추위에 많이 타기도 했지만 백현은 더위 역시 끔찍하게 싫어했다.
학교 체육시간, 한낮의 폭염에 시달렸던 생각에 편의점에 들어오자마자 에어컨의 버튼을 쉴 새 없이 눌러댔던 백현이었다.
자세가 좀 익숙해졌는지 곤한 숨소리를 내는 백현은 벽이 없다면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웅웅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려던 그 찰나.
"백현 학생?"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부르르 떨며 벌떡 일어섰다. 언제 왔는지 점장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받아내며 백현은 얼른 두 눈을 비볐다.
한숨을 내쉬며 카운터를 소리나게 두드리던 점장의 두툼한 손이 백현의 머리통으로 향했다.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어깨를 아프지 않게 주물러주는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많이 피곤한가? 그래도 근무 시간은 지켜야지. 자꾸 그러면 월급에서 깎을 수 밖에 없는데.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조근조근한 말투로 압박해오는 바람에 편의점 안의 공기가 숨을 죄어오는 것만 같았다. 다시금 삐질삐질 땀이 배어나왔다.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었다가 풀때 즈음 목 언저리를 두드리던 손이 사라졌다. 꿉꿉한 여름의 바람처럼, 허했던 속으로 더위가 밀려들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백현은 절대 대들 수 없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었다. 제 잘못이 아니어도 점장의 말에는 껌뻑 죽은 듯이 넘겨야 했다.
일단은 미성년자인 자신을 고용해주었다는 것에서 지고 들어갔다. 두번째로는 점장은 집안 사정상 편의점 알바를 해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알바에서 짤리면 안되는 것도 불가항력적이었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잔소리를 듣고난 뒤 백현은 털썩 자리에 주저 앉았다. 또 다시 피곤이 밀려왔다.
통 오지도 않다가 이럴 때만 오는 건 뭐람. 기분 나쁜 일 있으면 꼭 나한테 풀지. 백현은 카운터 아래에 있는 쓰레기통을 걷어차며 문을 열고 나간 점장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어느새 해는 지고 어스름한 잔상만이 남아 어둠과 뒤섞여있었다.
X O X O
8시 43분. 여름의 낮은 길다. 그리고 덥다.
백현은 깜깜해진 밖을 내다보다가 훅, 하고 시야에 치고 들어오는 물체에 놀라 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깜짝이야.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한 남자의 등이 문에 부딪혀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곧이어 딸랑이는 소리가 들리고 편의점이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요… 백현은 자연스레 몸을 일으켜 고갯짓을 했다.
가늘게 눈을 뜨며 방금 들어온 손님의 형상을 대충 훑은 뒤 느리게 기지개를 켰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고 등을 돌려 냉장칸에서 음료수를 꺼내는 남자가 보였다. 많이 더웠나보네. 얼굴도 잘 안보이는 터라 백현은 이내 시선을 거뒀다.
아, 얼른 집에 가고 싶다. 으으, 뻐근한 뒷목을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내다가 백현은 고개를 이리저리 빼들었다. 유독 피곤한 날이었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다가 무심코 마주친 시선에 백현은 헙, 입을 다물었다.
편의점의 구석에 설치된 볼록거울 밑에 서있던 남자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겉표면에 송글송글한 물방울이 맺힌 음료수를 단단히 쥔 채 눌러쓴 검은 모자 아래 사나운 눈빛이 백현의 눈을 관통했다. 남자의 눈동자의 빛은 어둠에 물들어 탁했다. 검고, 뜨겁고, 짙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순간 얼어붙어 백현은 무언가에 홀린 듯 남자의 시선을 받아냈다. 무언가를 읽어내듯 백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짐승의 눈빛이었다. 서걱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빨간 핏물이 배어나올 것처럼.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백현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험상궂은 얼굴에 두툼한 점퍼를 걸친 남자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편의점을 둘러보다가 백현에게 가볍게 목인사를 했다. 수고 많으십니다.
"북부 경찰서 소속 형사 이정진 입니다. 소매치기를 쫓고 있었는데 그 새끼가 도망치다가 여기로 들어온 것 같아서요."
"네?"
여과되지 않은 말투에 지레 겁을 먹었다. 경찰수첩을 품에서 빼내 백현을 향해 들어보이는 형사의 이마가 축축히 젖어있었다. 그런 사람 안 들어왔는데. 고개를 작게 저어보이자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얼떨결에 죄인에게 취조를 하는 것처럼 백현에게 자꾸 뭔가를 캐어묻다가 경찰들은 이내 편의점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뒷머리를 습관처럼 긁적이다가 문득, 좀 전에 들어온 남자를 떠올렸다.
혹시…. 백현은 눈치를 살피며 음료수가 진열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키도 꽤 컸는데. 안 보일리가 없는데. 과자 코너 쪽 역시 눈대중으로 찾아봤지만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갔지? 좀 전까지만 해도 그 앞에 서있었는데. 빠져나가지도 못했을 텐데. 백현은 얼빠진 표정으로 우두커니 섰다. 피곤해서 눈에 뭐가 씌였나. 바람이 빠져나간 듯 무언가 허탈해졌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여기도 없네요. 혹시 보시면, 저한테 연락 좀 주세요"
위험한 놈이거든요. 좀 전에 편의점에 들어왔던 남자의 차림새를 읊어주고 명함을 건네준 형사는 멋쩍은 듯 웃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더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백현은 건네받은 명함을 만지작거리다가 대충 유니폼 주머니 앞에 쑤셔넣었다.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일에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정신이 없어.
다시금 볼록거울을 쳐다봤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 어떻게든 큰 일은 없었으니까. 백현은 어깨를 돌리며 카운터를 빠져나왔다.
X O X O
10시 28분. 백현은 꾸준히 나가는 제품의 목록을 손에 꼽아보다가 비어있는 칸을 세어보고선 재고가 쌓여있는 창고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은 준면이 형이 교대 빨리 해준다고 했으니까 정리 좀 하고 기다려야겠다.
백현은 창고의 문을 열고서 한 발자국 물러나서 벽 쪽을 더듬거렸다. 창고의 안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슬쩍 겁이 밀려왔지만 아랫입술을 깨물며 스위치를 찾으려 손을 더 뻗었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손을 원망하며 백현은 창고 안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쯤 있을 텐데….
순간, 억센 악력이 팔목을 감싸고 빨려가듯 백현은 창고 쪽으로 쑥 들어갔다. 잡아먹히듯 끌려가 중심을 잃은 백현은 뒷쪽에 층층이 쌓여있는 상자에 부딪혔다.
누군가 백현의 어깨를 세게 잡아채 벽 쪽으로 밀어붙이는 동시에 창고 안에 불이 켜졌다. 등 뒤에 맞닿는 스위치 때문에 욱신거렸지만 백현은 눈을 꼭 감았다. 갑자기 켜진 불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얀 형광등의 불빛이 두 사람 사이에 파고들었다. 일정한 숨소리가 귓가에서 부서졌다. 백현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누군가 불빛을 등지고 서있어 짙게 음영이 드리운 채였다.
"어, 아까 그…."
편의점에 들어왔던 남자였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을 잘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앳되어 보였다. 체격은 백현보다 좋았지만 분위기도 그렇고 나이도 어림잡아 한 두살은 비슷할 것 같았다.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의 윤곽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백현은 눈을 내리깔며 누군지 알아채려 애를 썼다. 땀에 젖어들어가는 백현의 앞머리가 남자의 모자에 걸렸다.
턱선을 타고 올라가 입술을 시작해 코와 눈으로 이어지던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시선이 올곧이 맞닿았다.
백현의 눈이 전에 없이 커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자는 어버버거리는 백현의 입을 잽싸게 틀어막고선 가슴을 맞대어왔다.
남자는 차분했다. 터져나올 것 같은 심장소리가 들릴까 백현의 볼이 붉어졌다. 에어컨 바람이 새어들어오지 않는 창고 안은 눅눅했다.
"조용히 하자"
가볍지 않은 목소리가 창고에 울려퍼졌다. 잔뜩 습기를 머금은 듯 눅눅한 숨결이 목덜미 위로 쏟아졌다.
놀고있던 다른 한쪽 손이 백현의 유니폼을 뒤지기 시작했다.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집어 놓아 결국에 형사가 주고간 명함을 찾아냈다. 남자의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갔다.
"착하네. 말도 잘 듣고"
신고도 하려고 그랬나봐, 응? 명함을 훑어보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백현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타들어갈 것 같은 눈길. 입에서 새어나온 웃음이 백현의 이마에 간질거렸다.
백현은 입을 틀어 막고 있던 손을 잡았다. 너무나 뜨거웠다. 입술을 덮은 손이, 맞닿은 가슴이, 그리고 내려다보는 눈빛이.
아까처럼 빤히 백현의 얼굴을 쳐다 보다가 남자는 천천히 손을 걷어냈다. 백현은 불규칙적인 숨을 몰아쉬며 완벽하게 벽에 기대어 섰다. 어차피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제 앞은 남자에 의해 막혀 있었다.
"신고, 안 해"
그러니까 이제 가. 지친 듯 한숨처럼 터져나온 말에 남자는 작게 웃었다. 비웃는 것도 아니고 재밌는 걸 본 아이처럼 그렇게. 백현의 가슴팍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남자는 백현의 어깨를 다시 밀쳤다. 스위치가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창고 안을 가득 채우던 불빛이 사라졌다. 검은 잉크가 물에 풀어지듯 머리 위에서부터 암흑이 두 사람을 뒤덮기 시작했다.
"개같이 생긴 게"
남자는 백현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다가 손에서 떼어냈다. 백현이 했던 것처럼 한숨을 따라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다음에 또 마주치면 그때는….
눈꼬리를 지분거리는 손가락이 얄쌍했다. 한참을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남자는 느리게 뒷걸음질을 쳤다. 백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문을 마주선 채 두 손을 올려보였다. 항복의 표시. 무엇을 뜻하는 지 알 수 없는 행동에 긴장감이 스물스물 배어들었다.
"갈게"
다시는 보지 말자. 멀어지는 거리만큼 희미한 음성이었다. 적막과는 확연히 차이가 두드러졌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에서 잠금장치가 풀리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창고 안으로 빛이 쏟아져내리기 전에 그림자 하나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엇박으로 부딪히던 두 개의 숨결에서 하나가 사라졌다.
백현은 멍청하게 서있었다. 다리에 힘이 쭉 풀려 미끄러지듯 벽으로 붙었다. 잔뜩 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늘어져선 굳이 몸을 일으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김종인"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래, 남자는 김종인이었다.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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