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로망, 클리셰
W. 백빠
김종인; 경호원과 아가씨
추운 겨울날, 비가 내린다. 검은 구름이 드리운 밤하늘 아주 작은 빗방울들이 빠르게 시멘트바닥으로 대가릴 처박는다. 쉼없이, 쉼없이. 흑과 백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잠들고 있는 것만 같은 세상. 추적추적, 쉴새없는 빗줄기에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고요한 밤에는 빗소리,그리고 빠르게 찰박거리며 달음질하는 나의 발소리만이 들린다. 온 몸이 젖어들고 입에선 하얀 입김이 새어나온다. 그러나 정신없이 앞만 보며 도망치는 내게는 비도, 밤도, 숨도 그 무엇하나 방해물이 되지 않았다.
허억, 허억. 달뜬 숨을 내뱉었다. 빗줄기에 금세 식어져 흩어가는 하얀 입김. 막다른 골목길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단단한 벽을 바라보았고, 그건 마치 내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니 운명이야, 그냥 잡혀버려. 내 얼굴이 나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내가 지금까지 도망쳐 온 길, 까마득해보였지만 너는 금세 나를 찾아내고 말것이다. 나는 중얼거린다.
싫어, 싫어, 가기 싫어… 싫어…. 나는 미친듯이 막다른 벽을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부서질리 없는 그 벽을, 애꿎은 손이 생채기로 가득해질 때까지 힘껏. 상처에서 배어나오는 피가 빗줄기에 씻겨져내려간다. 부서져, 제발, 제발…. 그러나 그 벽은 무심하게도, 부스러기 하나 없이 견고했다. 나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다본다. 빗소리 저 멀리, 찰박, 찰박, 찰박,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무서움에 차오르는 눈물.
" 싫어, 싫어… 싫어어…. "
아까보다 더 센 힘으로 벽을 쳐대기 시작했다. 모래같이 자잘한 벽돌 조각들이 내 손에 생채기 안을 파고든다. 내 손바닥에 알알히 박히는 벽돌 파편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제발 부서져버려, 부서져, 부서져… 제발 부서져… 나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다보았다. 검은 그림자가 저 까마득한 길 언저리에서 아른거린다. 벽을 치던 손이 덜덜 떨려온다. 나는 피가 흐르는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으며 옆에 있던 쓰레기 더미 뒤로 숨었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이빨이 딱딱대며 부딫치고, 나는 입술을 꾹 물며 애써 숨을 죽인다.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무릎을 꽉 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빗소리, 그리고 너의 잔인한 발걸음 소리.
" …. "
공포, 두려움, 무서움… 너는 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날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작은 희망은, 내 웅크린 몸 위로 미친듯이 떨어지던 빗방울이 더 이상 내 몸을 적시지 않게 됐을 때,완벽히 사라지게 된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박은 채,깜깜한 암흑을 바라보며 너의 숨을 느낀다. 귓가엔 여전히 빗소리가 들리지만 더 이상 그 비는 내 몸을 적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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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씨. "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커다란 우산을 들고있는 너. 날 바라보는 너의 눈빛에 숨이 헉, 하고 멎는다. 몇 번이고 몇 년이고 적응 되지 않는 네 눈빛. 작은 부분 조차 젖지 않은 네 검은색 코트의 끝자락이 바닥에 닿아 서서히 젖어가기 시작한다. 내 볼 위에 달라붙은 젖은 머릿칼을 손으로 떼어주며 넌 나즈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
결국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미 젖은 얼굴은 진한 농도로 더 진득히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커다란 우산 속, 무엇도 적실 수 없는 공간, 내 눈물이 바닥을 적셔낸다. 가기 싫어, 가기 싫어… 생채기가 가득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나는 너에게 애원하듯 말한다.
" 나,… 나 가기 싫어, 흐으, 가기 싫어, 나…. "
" …. "
" 종인아, 나 무서워…, 나, 나 가기싫어…, 살려줘, 응? "
그 철장 안에서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그 곳에서 매일을 이유없이 맞으며 아빠- 라는 사람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발로 차여지고, 밥 한번 제대로 먹을 수 없는 그 곳에, 그곳에 다시 가기 싫어, 난. 두터운 철문 안에서 사무치게 외로움을 느끼며,차라리 죽는게 나은 삶, 그거 나 싫어.
목이 메어 애원조차도 힘이 든다. 머릿 속에 그려지는 그 무시무시한 곳. 팔에 가득한 노오란 멍들이, 무릎과 배에 수없이 그어진 매자국과 상처들이 각자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돌아갈 수 없다고, 그곳으로 되돌아갈 바엔 죽겠다고. 그러나 그는 이런 날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알면서도 언제나 그랬듯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입을 연다.
" 가셔야합니다. "
" …. "
"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
그리곤 너는 나를 일으키려 내 손을 잡았다. 방금 벽을 치느라 생긴 상처들 때문에 윽, 하고 낮은 신음을 내니 네가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네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 같으면서도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그러더니 넌 내 손 대신 손목을 잡는다. 몸에 가득 힘을 주고 일어나지 않으려 했지만, 몇일 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로 그 빌어먹을 철장 안에 갇혀있었던 내게는 반항 따위를 부릴 수 있는 힘 같은 건 존재하지않았다. 비틀비틀, 너의 말없는 명령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너가 들고 있던 우산을 잠시 내게 내민다. 우산을 받아들자 너는 네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내게 입혀주며 말한다. 날이 많이 춥습니다.
" …. "
그리고 넌 내 앞에 앉아 등을 내보인다. 나는 네 넓직한 등을 빤히 바라보다, 이젠 더 이상 걸을 힘도 없는 내 다리를 지탱하기가 버거워 네 등 위로 쓰러지듯 업힌다. 너는 가뿐히 날 업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높아지는 공기에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비는 여전히 정신없이 내렸고 나는 한쪽 손으론 네 목을 감싸고 한쪽 손으론 우산을 들었다. 네 온도를 감쌌던 코트. 따뜻했다.
" 손, 많이 아픕니까. "
" …아니. "
내 두 다리를 잡은 네 손이 따뜻하다. 아니, 내 두 다리가 네 손보다 더 찬 것일 수도 있겠다. 몇 시간동안 나를 찾아다녔을텐데 손이 따뜻할리가 없지. 나는 그저 네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새하얀 와이셔츠 위를 눈물로 적시었다. 너는 그저 말 없이 까마득한 거리를 걸어나갈 뿐이었다. 고요했다. 한적했다. 나는 눈물을 꾸욱 눌러삼키곤 가만히 입을 연다. 그 골목길엔 무력한 내 목소리만이 잔잔히 울린다.
" 종인아. "
" 네. "
" …김종인. "
" 네, 아가씨. "
" 종인아, 김종인… 종인아…. "
" …. "
나 좀 어떻게 해줘, 나 좀 살려줘, 나 좀 도와줘. 수 많은, 하고팠던 말들을 그저 네 이름을 부르는 걸로 대신해본다. 그 차가운 곳으로 되돌아가기엔 네 등이 너무 따뜻해. 하지만 너는 아무 말이 없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날 업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 내 부름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 나는 네 목을 더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 어떻게 하면 끝이 날까. "
" ……. "
" 죽어버리면 다 끝이 날까. "
" ……. "
" 응? 대답해봐, 종인아아… "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없다. 알고 있던 일이었고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서러웠다. 나는 여전히 네 등을 적셨고 너는 여전히 말 없이 걸을 뿐이었다. 그저 골목길엔 너의 발소리와 빗소리 뿐이었다. 어차피 네 답을 바라고서 한 질문은 아니야. 그냥, 그냥… 내 맘을 알아줄 사람이 난 필요했던 것 뿐이야.
골목길 끝엔 검은색의 리무진이 깜빡이를 킨 채 대기하고 있었다. 종인은 나를 넓은 뒷좌석에 태우곤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오늘은 왠일인지 너와 나 뿐이었다. 평소엔 열명도 넘게 나를 찾으러 다녔으면서 말이다. 아마 비도 오고, 늦은 밤이라 멀리는 못갔을 거란 추측에 김종인만 보낸거겠지. 나는 뒷좌석에 편히 누워 두 눈을 감는다. 도망에 대한 벌을 받을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냥 이대로 죽으면 좋을텐데. 나는 그렇게 또 다시 지옥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지옥보다 더한 곳으로.
문득 잠이 든 나는 커다란 천둥 소리에 부스스 잠에 깼다.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니 익숙한 저택의 모습이 보인다. 비가 와서 그런가 그 풍경이 더욱 으스스하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땐 언제부터 기다렸는진 모르겠지만 내 옆에 앉아 내가 깨기만을 기다린 듯한 종인이 보였다. 평소엔 잠에서 깨기 전에 그 감옥으로 데려다놓는 그였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내 의지로 들어가라는건가.
" ...깰 때까지 기다렸어? "
" 네. "
" 왜? "
왜냐는 내 물음에 김종인은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본다. 미묘한 얼굴. 날 보며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천천히 뒷자석에서 내려 우산을 펼쳐든다. 내리십시오. ...뭔가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김종인의 커다란 코트가 내 무릎까지 내려오고, 내 손을 감춰온다. 기괴한 저택을 마주하니 위액이 올라오는 것만 같다. 토가 쏠려. 김종인은 우산을 든 채 느릿한 걸음으로 저택으로 향했고 나 또한 그의 걸음을 따른다.
" …. "
우리 둘 사이엔 침묵만이 나돌았다. 나는 무슨 벌을 받게 될까. 그냥 이번에 죽어버릴까. 이번에 모든 걸 다 끝내버릴까. 어떤 모습으로 날 기다리고 있을까, 온갖 끔찍한 상상으로 내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고 그 참혹한 상상이 비극적인 결말에 다다랐을 때 쯤 대문 앞에 우리 둘은 도착했다. 이제 김종인이 열어주는 저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나는…. 절망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 …. "
그런데 너가 문 앞에 가만히 서있는다. 문을 열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문을 바라보며. 뭐하는 짓이지 싶어 김종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빗소리를 가르는 네 목소리가 웅웅 거리며 들려왔다.
" 아가씨. "
" …응? "
" 죽고싶을 만큼… 괴로우십니까. "
나는 멍하니 네 등을 바라본다. 너는 대체 무슨 의도로 무슨 목적으로 내게 그런 걸 묻는 것일까. 아무리 힘들다고 죽고 싶다고 발악을 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네가. 그러나 나는 그저 응, 하고 작게 대답한다. 나만의 조용한 마지막 발버둥,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내 작은 대답에 너는 그대로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본다. 나를 내려다보는 너의 눈길은 꽤나 복잡해보였다. 다시 한번 네 입술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도망치고 싶으십니까. "
" …. "
도망. 네 입에서는 도망, 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 두 글자에 숨이 멎을 뻔 했다. 나는 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른다. 회장이 가장 믿고 있는 너가, 온갖 발버둥을 쳐도 다시, 또 다시 나를 이 지옥으로 내모는 너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나는 아무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믿고 판단을 내려야 할 건 네 눈빛 밖에 없었다. 진실을 말하는 건 그것 하나 뿐이니까. 많이 복잡해보였고 심란해보였지만 어딘가 확고한 구석도 있었다. 나는 네 질문을 곱씹고,다시 곱씹어보다 결국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응. 도망가고 싶어. 죽음이 나의 유일한 도망라면, 그것마저 기꺼이 행할만큼.
김종인은 내 대답에 한참을 뜸을 들인다. 너는 무언가 말하기 힘들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너는 묻는다.
" …저를…, "
" …. "
" 믿으십니까. "
자신을 믿느냐고. 답은 당연히 아니, 였다. 널 믿는건 내가 아니라 회장님 뿐인 걸 잘 알잖아. 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너가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러는지. 그러나 나를 보는 네 눈빛이, 자꾸 나에게 무언가를 보내왔다. 분명한 무언가를. 수많은 고민 속 도출된 되돌릴 수 없는 결과. 그게 자꾸만 내 맘을 흔들어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너는 내게 커다란 손을 내밀며 물어온다.
" 그렇다면, "
" …. "
"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
" …. "
" 도망. "
나는 무언가 잘못 들은 얼굴로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지금 내게 함께 도망가자고 말을 하고 있다. 함께. 너와 내가 함께… 네가 내밀고 있는 큰 손은, 마치 선악과 같은 냄새를 풍겨왔고 나는 뭔가에 홀리듯, 네 손을 덥석 잡으며 대답했다. 응. 가자, 종인아. 너는 들고 있던 우산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그대로 내 손을 잡곤 다시금 차로 걸어간다. 그 걸음이 너무 빨라 뛰듯이 너를 따랐고 조수석에 날 태운 너는 운전석에 올라타자마자 시동을 걸었다.
그제서야 내가 지금 무슨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난 지금 도망을 간다. 회장이 가장 믿었던 김종인과 함께. 차는 은은한 불빛을 내며 빗 속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듯, 종인에게 말한다.
" 후회할거야, 김종인. "
" …. "
" 후회하게 될거야, 나랑 같이 가는거. "
" …. "
물론 오랫동안, 그토록 바란 일이긴 하지만 그건 소설 속에만 있는 일인 줄 알았다.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다. 우리 둘이 도망친다하더라도 우린 회장의 그물망에 금방 잡힐테고, 그땐 지금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일들을 겪어야할지도 몰랐다. 김종인 널 죽이고 나는 영원히 갇힐거야.
내 말에 김종인은 날 바라보다, 다시 앞을 보고 운전을 하며 말한다.
" 아가씨가 가는 곳이라면 저도 가야하는게, "
" …. "
" 그게 제 임무입니다. "
....푸흐. 그 말에 작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 웃음에 종인도 작게 미소짓는다. ...김종인 웃는 거 보기 힘든데. 나는 그저 웃으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래, 어떻게 되든 좋아. 난 널 믿어, 김종인. 오랜만에 느껴보는 완벽한 자유로움.
평생토록 날 가두고 있었던 철창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눈부시게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온다. 김종인, 너라는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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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Stan inst
오늘은 맨 위에 있는 종인이화보가 다 했습니다. 다시 한번 올라가서 보시길 추천.
+ 암호닉 따로 안받아여ㅠㅅㅠ 그래두 암호닉 달고 찾아오시면 기억은 해두게쑴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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