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로망, 클리셰
W. 백빠
김민석; 우주대스타의 열애설
" 그래서.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건데? "
" ……제가 몇 번을 말합니까. 고의 아니라고. "
대표 앞에 놓여져있는 사진 한 장. 주차장에 세워져있는 검은색의 벤 앞, 김민석과 한유라가 마치 연인인양 입을 맞댄 채로 서있다. 김민석은 그 사진을 보며 갈기갈기 찢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진을? 아니, 그 사진을 찍은 기자 새끼를.
" 고의든 아니든, 한유라랑 키스한 사진이 이렇게 버젓이 찍혔는데 어쩔 셈이야? "
" 아, 몰라요. 기사 내고 싶음 내라고 해요. 시발, 키스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
한 1초 맞댔나. 바로 밀쳐내서 내 입에 그 여자 입술이 닿았는지 발가락이 닿았는지 느낄 틈도 없었는데 대체 그 순간을 어떻게 찍어낸거야? 김민석은 답답하고 짜증나는 이 상황에 마른 세수를 벅벅한다. 아니, 그 여자가 먼저 나 좋다고 따라다녔고, 내가 분명 싫다고 했는데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는지 내 벤 앞에서 기다렸다 다짜고짜 나한테 입술을 부벼댄건데. 그게 뭐 어떻다고, 그냥 기사 내라고 해. 꿇릴 게 뭐가 있어? 그 여자가 들이댄건데.
" 아니, 민석아. 너 지금 상황파악 안되냐? 한유라 세 달 전에 열애설 나간 애야! 공개연애 발표한 애라고! "
" 아, 그러니까 나도 왜 한유라가 자기 남친이 아니라 나한테 환장하는지 모르겠다고요. "
" 걔가 너한테 환장을 했든, 안했든 이거 기사나면 명백한 바람이야. 바람! "
아, 씨이발. 이번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김민석. 상황은 짜증 나는데, 대표 말에 틀린 말은 없고,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한유라는 세달 전 남자아이돌멤버와의 열애설을 인정하기 전까진 아이돌 원탑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사진이 언론에 공개된다면……?
민석은 무언가 포기라도 했는지, 눈을 감은 채 작은 목소리로 대표에게 묻는다.
" …그럼 뭘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
그제서야 대표는 한시름 놓인 얼굴로 민석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냈다. 우리 아주 잠깐만… 열애설 한번 내자. 김민석이 신경질 적으로 눈을 떠 대표를 바라본다. 스캔들을 잠재우려 스캔들을 일으킨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야? 언제적 사고방식이야, 그게.
" 지금 나랑 장난해요? "
" 아니, 들어봐. 니가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런 불결한 사진이 찍힌 건 사실이잖아? 이건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 사진이라고. "
" 근데. "
" 근데 기자새끼들은 인류에 대한, 아니 스타에 대한 인류애가 없어. 이걸 아주 터트리고 싶어서 안달반달일거라고, 지금. 뭐가 사실이든간에. "
" 그래서. "
" 그래서! 이것만큼 더 파급력이 있을 스캔들을 하나 만들어주자는거지. 어지간하게 퉁치려다간 씨알도 안먹히는 수가 있거든. "
대표의 침튀기는 열정적인 설득에 김민석의 심기가 잔뜩 불편해진다. 무려 7년이었다. 데뷔 이래 7년을, 열애설 한번 없이 깨끗하게 달려왔다. 물론 연애야 존나게도 많이 했고, 수많은 여자친구들의 공개연애 요구가 있었지만 단 한번도 들어주지 않고 지켜온 소중한 열애설이었다. 그런 지금, 그렇게 아껴온 첫 열애설을 구라로 꾸미자니. 분명 김민석에게도 나름의 로망이 존재했다. 결혼을 약속하고픈 여자가 나타나면, 자신의 미래를 몽땅 바치고싶을만큼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나면, 그때 사람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애설을 내고 싶은, 그런 로망. 와장창우르르우당탕다트탙ㅌ앙!!! 이것은 그 로망이 무너지는 소리이다.
대표는 점점 굳어가는 민석의 표정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곤 애원모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 야아, 민석아. 딱 세 달만. 그 다음부턴 결별설 내자 응? "
" ……. "
" 나라고 너 열애설 나는게 기쁘겠니? 니가 우리회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앤데, 흠집 나는게 어디 좋겠어? "
" ……. "
"그래도, 흠집도 흠집 나름이잖아. 불륜남 보단 순정남으로 싹 포장해서. 어? 민석아아-. "
누가 보면 시팔, 대표가 너다. 어? 사고는 지가 쳐놓고… 대표는 저 완전한 甲에 빌빌 기어야하는 자신이 억울할 뿐이었다. 하지만 김민석 또한 억울하긴 마찬가지. 그렇게 꽁꽁 아껴왔던 열애설을 이렇게 허무하게,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내야한다니. 그러나 김민석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딱 세달만. 딱 세달만이야. 대표는 이제야 좀 살겠다는 얼굴로 환히 웃는다. 김민석은 자신과 열애설이 날 그 행운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 더럽게 궁금해진다.
" 그래서, 상대는 누구로 할 생각인데? "
" 아아, 잠깐만. 휴대폰에 사진 있어. "
…공범을 벌써 정했다고? 저 빌어먹을 사진이 대표 손에 들어간게 바로 어젠데, 벌써 가짜 열애설 낼 애를 정했다고? 이럴 때만 빠르긴 존나 빨라요, 여튼. 대표는 휴대폰을 몇번 토독 거리더니 민석의 눈 앞에 내민다. 어디서 본 적은 없는데, 꽤나 준수하게 생긴 외모의 여자였다. 물론 김민석이 7년동안 연예계 생활을 해오면서 알고, 보고, 사귄 여자들에 비하면 평범한 축에 속했지만 …뭐, 나름의 신선함이 있었달까.
" OOO라는 신인 여배우인데 성격이 괜찮더라고. 스물두살. 내가 잘 아는 형 소속사 애거덩. "
" 나랑 같이 사기를 치겠대? 허락은 맡은거야? "
" 야. 김민석이랑 열애설 난다는데 마다할 여자가 이 세상에 어딨냐? "
김민석은 복잡해지는 머리에 이마를 몇번 문지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다른 건 매니저한테 들을게요. 또 뵙시다, 대표님. 김민석은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며 OOO, 그 이름을 작게 중얼거려보았다. 젠장할. 이름과 나이만 아는 그 여자가 첫 번째 열애설의 주인공이라니. 하지만 그는 은근 그녀와의 만남이 기대되고 있었다.
" 괜찮아, 세 달 뿐이야. 김민석이라고 너랑 열애설 나는게 즐겁겠냐? "
" 물론 김민석도 개같겠지. 그리고 사람들이 날 꽃뱀으로 생각하겠지. 큰 건 하나 잡아서 떠보려고 난리치는 애로. "
"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
쌍놈의 매니저야, 이럴 땐 위로를 하라고. 제발! 그러게, 네가 원했던 일은 이런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렴^_^ 이런 상냥하고 다정하고 희망적인 말 해줄 수 있잖아. 솔직히 김민석은 사고라도 쳐서 열애설로 무마해야된다 쳐. 나는 무슨 죈데? 못뜬 죄? 그게 죄야? …그래, 시팔. 그게 죄지. 못뜬게 죄야.
" 야, 근데 니가 분할 입장은 아니지 않냐. 김민석은 왠 핵듣보랑 첫 열애설나게 생겼는데. "
" 아. 제발 그렇게 존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정곡 좀 찌르지 마. "
" 오히려 넌 영광인 줄 알아야 돼. 김민석이면 니가 살면서 말 한번 못 섞어볼 스탄데. "
" 평생 먹을 쌍욕 열애설 터지는 날 다 먹을텐데 퍽도 영광이겠다. "
" 내기나 하자. 실검 순위. 난 1위에 내 팔목. "
난 니가 내 매니저가 아니다, 에 내 팔목을 걸게. 너 내 매니저를 가장한 안티팬 아니야? …하긴, 내가 안티가 생길만큼 인기가 있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나는 가운데손가락을 쭉 뻗어 욕을 상큼히 날려준 후 소파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나저나 김민석은 몇 시에 온다는거야. 이것들이 매니저들끼리만 연락 주고받고 나한텐 말이 없어.
" 근데 김민석은 몇 시에 온대는겨? "
" 두시에 온대. 아직 삼십분 남았어. "
" 아, 진짜 초면에 커플 연기를 하라니 너무한 거 같애. "
인간적으로 아무리 사기열애설이라지만, 한강에서 데이트 하는 기사사진을 찍으려면 전에 한번 만나서 얘기라도, 아니 적어도 카톡 정도는 한번 해봐야되는거 아니야? 어색하게 나오면 내 탓 할거잖아 개새끼드라. 울 민서기는 자연스럽게 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쪽은 무명에 신인이다 보니 어색하네요..^^ 이럴거잖아. 대체 왜 매니저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는지 난 도통 이해가 안되네. 두 분이 커플연기 하는거세요?
뭐, 나같은 개듣보무명여배우한테는 자기 휴대폰 번호 알려주기 싫다, 뭐 그런건가? 아주 대스타 납시셨어요. 나도 너랑 열애설 나기 싫거든? …그래 맞아, 빌어먹을 자격지심이다. 뭐. 퉤.
2시에 가까워진 시침에 마지막 확인 차 전신거울 앞에 가서 섰다. 청바지와 흰티, 군모하나. 깔끔한 화장. 정말 자연스럽군. 완전 연예인 패숀. 내가 얼마나 신경써서 입었는지 김민석 당신이 알아주기나할까… ?
" 야, 두시다. 나가봐. "
" 엉. 다녀올게. "
" 아, 왜 내가 떨리냐. "
" 지랄이야. 다녀올게. "
매니저 오빠는 무슨 내가 큰 대회라도 출전하듯, 비장하게 내 어깨를 두드려준다. 오빠, 제발 나 촬영할 때 이렇게 응원을 좀 해줘봐. 무심하게 문을 닫고 나와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웃기게도… 엘레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심장이 막 떨려온다. 하긴, 김민석이면 연예인의 연예인인 수준이니까 설레는게 오브콜스인거지? 아파트 현관문 밖으로 나가자 삐까뻔쩍한 외제차가 하나 서있다. 와씨, 차 죽인다. 관음하듯 차를 천천히 훑으며 다가가 조심스레 조수석 문을 여는데, 운전석에 진짜 김민석이 앉아있다. 미친. 진짜 김민석이다. 존나 신기해.
" 안녕하세요. "
" 응, 안녕. "
진짜 김민석이라는 사실에 신기하기도하고, 기분이 이상하기도하고, 실감이 나기도 해서 들뜬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냈는데, 건조하면서도 많이 짧은 그의 인사에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뭔가 와장창 깨지는 기분. 안녕이라니, 왠 반말? 얼굴 한번 본 적 없으면서, 그래 맞아 나 쓸데없이 이런 것에 민감해. 혹시 내가 무명이라고 이러는거니(다시한번 말하지만 자격지심 맞음)?
" 왜 반말이에요? "
" …니가 더 어리잖아. "
" 그래도 초면인데요. "
김민석이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본다. 음, 이렇게까지 틱틱 댈 생각은 없었는데ㅎ 그래, 맞다고! 자격지심! 나도 실력으로 뜨고 싶고 내 스스로 일어서고 싶은데, 이런거로 떠보려 발버둥 치는 애로 보일까봐 괜히 틱틱댄거야. 그런데 김민석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웃음코드가 희한하신듯...? 그러더니 시동을 걸며 내 쪽으로 말한다. 그래도 연인인데 반말 정돈 괜찮지 않나. 나는 안전벨트를 매며, 나름 웃기려고 무리수를 뒀다. 그럼 나도 해도 돼, 오빠?
앗… 너무 갔나. 또 다시 김민석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또 나름대로 수습을 하겠다고 더 큰 무리수를 뒀다. 왜요, 그쪽은 되구 난 안돼요? 내 상황수습능력이 이 정도라는 사실이 그저 유감일 뿐이다. 다행히 김민석은 내 말에 웃으며, 아마 어이없다는 듯한 뉘앙스로, 여튼 대답했다. 해, 마음껏 해.
민망함을 추스리기도 전에 동시에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부드러운 승차감에 순간 소리지를 뻔했다. 외제차의 승차감이란 이런 것이구나… !
그러나 부드러운 승차감에 감탄하길 얼마, 금새 예상했던대로 분위기가 어색으로 흘러가고 난 승차감이고 뭐고 등짝에 땀이 비질비질 났다. 사실, 딱히 그는 어색해하지않는 것 같은데 나만 어색해 죽을 지경인 것 같다. 워낙 침묵을 못참는 나라. 나는 괜히 운전하는 김민석의 옆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나처럼 군모를 쓰고 간단한 옷차림을 입은 그임에도 커플룩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건, 그의 숨겨지지 않는 연예인 아우라 때문이겠지. 그리고 문득, 정말 갑자기 지금 이 상황이 심각하게 말도 안되는 상황임이 새삼 느껴졌다. 내가 감히 슈퍼스타 김민석이 운전하는 차에 타 오빠라고 불렀다니… 미친년… 그쪽은 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 이런 봉변을 당하는 것인가요. 나도 모르게 말이 먼저 입 밖으로 나왔다.
" 근데, 저 궁금한게 있는데요. "
" 응. "
" 무슨 사고를 쳤길래 저 같은 애랑 열애설까지 내요? "
핵핵핵! 듣보인 나랑? 난 지금 김민석, 그러니까 당신한테 뭘 물어봤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기하고 놀라운데, 대체 얼마나 큰 사고를 쳤길래 그래요. 진짜 궁금하단 얼굴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빨간불인 바람에 차를 멈춘 그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본다.
" 반말한다며. "
" …이, 이따 쓸거에요. 요즘 섞어쓰는게 대세거든. "
김민석도 갑자기 공손해진 내 말투를 느꼈나보다. 갑자기 미물이 된 것 같은 느낌에 고분고분해져버린 말투. 김민석이 내 대답에 픽, 웃는다. 아까 말했듯 상황 수습능력이 상당량 저하되었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괜히 혼자 민망해 톡 쏘는 듯 말했다. 아, 여트은! 질문에 답해줘요.
김민석은 말 없이 앞을 바라본다. 어떻게 대답해야할 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 할수 없을 정도로 큰 사고인가? 하긴, 그러니까 나랑 사기열애설을 다 내지. 김민석은 딱히 대답할 생각이 없는건지 아니면 아직도 대답을 생각하고 있는건지 초록불로 바뀔 때까지도 뜸을 들이길래 그냥 내가 정리해버렸다.
" 됐어요, 대답 안해줘도 되요. 어차피 어색해서 아무거나 물어본거에요. "
사실 무지하게 궁금했다. 답을 듣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당신은 이런 사기극을 꾸며야만 하는지. 하지만 나같은 쭈구리는 알 필요가 없지, 그럼 그렇고 말고….
새벽 세시에 가까운 한강은 사람 하나 지나다니지 않았다. 김민석은 구석에 차를 세웠고, 도착하자마자 저 멀리 벤치에 이따시만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아마 지금 우리가 탄 차를 찍는 것 같았다. 아이씨, 좀 숨어서 찍어주지. 아무리 설정이라지만 그래야 연기가 더 자연스러워진다구. 김민석은 안전벨트를 풀더니, 피곤했던지 목을 돌리며 어깨를 주무른다. 시트에 한가득 몸을 기대서는 눈을 감고 내 쪽으로 중얼대듯 말한다.
" 우리 한숨 자고 찍는거 어때. "
" 안돼요, 얼굴 부어서. "
" …어차피 밤이라 사진 자세히 안 나와. "
" 그래도요. 제가 이쁘게 나와야 이 열애설에 타당성이 생기거든요. "
김민석이 눈을 감고 거의 잘듯 말듯 중얼대다, 내 말에 갑자기 푸하하, 웃음을 터트린다. 박장대소 수준이다. 웃는 얼굴이… 존나 예쁘네. 큼. 그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뭐라고?
" 제가 이쁘게 나와야 이 말도 안되는 열애설이 그럴 듯 해진다고요. "
" 허. 말이 안되는 거 알면서 왜 하는데? "
" 하고 싶어서 하나, 시키니까 하는거지. 근데 내가 예쁘게 나오면 말이 된다니까? "
김민석은 골이라도 때린다는 듯 다시한번 크게 웃었다. 자, 잘생겼다. 오지게 잘생겼어. 멋있어…(심쿵) 역시 뜨는 데엔 이유가 있어, 그치? 김민석은 한번 크게 웃고 나자 정신이 좀 깨는지 기지개를 쭉 피곤 어깨를 몇 번 돌리더니 운전석 문을 열어재꼈다. 어엇, 내리는건가. 그럼 나도 내려야…
" 앉아있어. "
…에? 문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가, 그의 말에 우뚝 멈추었다. 그러자 차에서 내린 김민석이 조수석 쪽으로 걸어와 문을 열어준다. …이거 너무 시작부터 연기 아니에요? 진짜 커플들도 자동차 문까진 잘 안 열어주는데. 뭐, 이미 열어준 문. 작게 웃으며 쑥쓰러운 듯,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잡은 내 손에 깍지를 끼는 김민석. 그를 웃으며 올려다보았다. 웃는 입을 유지한채로 복화술 하듯 그에게 속삭였다.
" 슨 즈브믄 뜸츠느끄 으끄등므 흐으. "
손 잡으면 땀차니까 어깨동무 해요. 용케도 알아듣고는 자연스레 손을 빼네 내 어깨를 감싸온다. 그의 따뜻한 손이 내 어깨를 감싸고 난 연애고자라는 걸 티라도 내듯 어깨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금새 반응이 오는 심장박동. 그가 바로 내 쪽에 작게 속삭인다.
" 니가 어깨동무 하라며. 긴장은 왜 하는데. "
" …긴장은 누가 한다고 그래요? "
" 그걸 긴장이라고 그래. "
" 아, 아니거든요? "
들켰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그런가, 아니면 숨이 조금 빨라져서 그런가, 것도 아니면 빨개진 내 얼굴을 봤나. 진짜 무슨 코미디 한편 찍는 것 같다. 멀리서 보면 그냥 서로 웃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복화술로 병신 같이 대화를 하고 있으니까. 어, 근데 아까 벤치에 앉아있던 기자 아저씨 어디갔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는데 저 구석에서 우리를 신나게 찍어대고 있다. 흠, 지금 각도가 좀 내가 이쁘게 나오는 각도인 것 같은데. 이럴 때 강한 떡밥을 투척해야 기사에 지금 사진이 나가지.
" 저기, 지금 내가 좀 이쁘게 나오는 각도라. 실례 좀 할게요. "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르고는 웃었다. 최대한 예쁘게. 내 왼쪽 보조개 좀 잘 찍어주세요, 기자님. 그 각도에서 신나게 이런 저런 떡밥을 투하하고 있는데, 그런 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봐주느라 고생하고 있던 김민석이 내게 속삭인다. 야, 나 다리아파. 앉자. …마침 나도 종아리가 아파오던 참이었는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손을 잡고 벤치로 끌고간다. 벤치에 앉자, 그가 내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한다. 아, 이런거 또 떨리는데. 나. 내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사진이고 뭐고 다 떠나서 잠시 쉬어야겠단 생각이 든 나는 눈을 감았다. 주변은 조용하고, 김민석의 어깨에 기대 그의 따뜻한 손길을 받고있으니 비지니스 적인 관계이긴 했지만 조금은, 아니 조금 많이 친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 근데요… 진짜 대답 안해줄 거에요? "
" 뭘? "
" 아까…… 무슨 사고쳤냐고 물어봤던거. "
아, 그거. 김민석이 잠시 뜸을 들이다 조근조근 이야기를 해준다. 자기가 왜 이런 열애설을 내야했는지. 다 듣고나니 충격적이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김민석이 불쌍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한유라, 그거 얼굴 귀엽게 생겨서 그렇게 안봤는데 무서운 애네. 물론 김민석은 내게 한유라라고 한 적이 없지만, 몇달 전 열애설이 나간 여자스타면 한유라밖에 더있어? 세상에, 그런 개념상실이 지금 연예계를 장악하다싶이 하다니. 그리고 대표는 또 뭐야? 고의가 아닌데 이렇게 가짜 열애설을 만들게 하면 안되지! …등등, 나도 모르게 김민석의 말에 오히려 내가 더 발끈해서 주절주절 댔다.
" 아니 사람이, 응? 둘 다 어떻게 그래? 민석씨만 억울한거죠 이건! "
" ……. "
" 와, 나같으면 진짜 책상 뒤엎고 난리 한번 쳤다. 민석씨가 착해서 그래요, 나같았으면 아주, 그냥 다 죽었지. 어휴. "
" 너라도 알아줘서 고맙다. 속이 시원하네. "
" 응? 아… 맞아, 알아주는 사람도 하나 없죠? 톱스타도 외롭긴 마찬가지네. "
" 그러는 너는 이거 왜 하는데. "
저요? 저는…… 갑자기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치이익- 하고 식어버리는 기분이다. 나는, 나는… 괜히 우울해진다. 물론 김민석도 알고 있을테지만 그런 구린 이유를 내 입으로 말해야한다는게. 그래도 사람이 가는게 있으면 오는게 있어야겠지? 말하기만 하고 못 들으면 얼마나 불공평해. 나는 최대한 담담하다 싶은 말투로 이야기했다.
" 그냥…… 저는 무명이고, 기회는 없고, 잘난 것도 없으니까 이런 걸로 어떻게 띄워보려고 사장님이 시킨거죠. "
" 무명이고 기회가 없는 것까진 그렇다쳐도, 잘난게 왜 없어. "
" 딱히 없죠. 연기를 미친듯이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예쁜 것도 아니고, 다 그냥 그래요. 내가 못나서. "
" …. "
" 나는 제 힘으로 해보고 싶었는데, 그냥 연기가 좋아서 배우를 하고 싶었던건데 뭐… 어쩌다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
" …. "
" 저야 뭐 꿈만 같죠. 민석씨같은 대스타랑 열애설도 나보고. 좋아요, 나는. "
김민석이 날 빤히 바라본다. 아씨, 쓸데없이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억지로 꾹 눌러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는데 김민석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웃는게 예뻐. …네? 별안간 잘못 들었는 줄 알고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자, 그가 눈을 마주하기 뭐했던지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며 말한다. 아까 니가 내 목에 손 두르고 웃을 때, 좀 놀랬어. 예뻐서. 지금까지 본 여자들 중 제일 순수하게 웃어, 니가.
그냥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고마워요, 대답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당황하는 눈치로 묻는다. 야, 왜 울어.
" 그냥…… 그런 말 듣는게 처음이라서요. "
" …. "
" 고마워요. "
김민석은 말 없이 나를 안았다. 이 역시 저 구석에 있는 기자에겐 신나게 찍히고 있을 것이다. 나를 품에 안는데, 왜 자꾸 그렇게도 눈물이 나는지. 새벽이라 감성세포가 콸콸 쏟아나오나봐.. 서럽다는 듯 울먹이는데 잡고 있던 손에 뭔가 따뜻하고 말캉한게 잠깐 닿는다.
…입…술?
" 위로의 의미. "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는데, 다른 쪽 손으로 내 놀란 눈을 가린다. 가려진 시야 사이로 김민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연인인데 손에 뽀뽀했다고 놀라면 안되지. 이 모든게… 지금 사진으로 찍히고 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동시에 기분이 묘해졌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오고 머리가 멍해진다. 이건 연기인걸까, 당신의 진심인걸까.
새벽 다섯시가 넘어서야 기자 아저씨는 봉고차를 타고 떠났고 그제서야 나와 김민석은 차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그제서야 쪽팔림이 물밀려오듯…. 아, 김민석 앞에서 울다니 그게 무슨 추태야? 우리는 고작 비지니스적 관계고, 연인을 연기해야하는 사이일 뿐인데 내가 아마추어같이 감성에 치우쳐 울어버리고 말았다. 김민석은 내가 한심할지도 모르겠다. 구질구질해보일지도 모르고… 아, 개쪽팔려. 문득 아까 그의 손등뽀뽀가 떠올랐다. 이야, 확실히 나랑은 달라. 어떻게 그런 스킨쉽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거야. 심장 폭팔하는 줄 알았네. …그래도 그렇게 내 속을 누군가에게 말하니 조금은 속이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조수석에 타자마자 손으로 눈물을 벅벅 닦았다. 아까 그의 입술이 닿은 손등으로는 못닦겠고, 손바닥으로. 아직도 눈가에 더덕더덕 붙어있는 눈물. 운전석에서 그런 날 물끄러미 보고 있던 그가 어디선가 휴지를 꺼낸 내게 내밀었다.
" 기자는 내가 울린 줄 알겠다. "
" …그쪽이 울린 건 맞잖아요. "
" 그럴 생각은 없었어. "
" 원래 울릴 생각하고 울리는 사람 없거든요. "
" 그냥 오빠 탓 아니었다고 말해주면 얼마나 좋아. "
눈물을 닦아낸 휴지를 고스란히 접어 손에 쥐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를 힐끔 보며 말했다. …오빠 탓 아니에요. 김민석이 작게 웃는다. 괜히, 빌어쳐먹을 세상에 해야 할 투정을 그에게 한 것 같아서, 그리고 받아 줄 의무가 없음에도 꽤나 친절하게 받아주고 위로까지 해준 그에게 미안하고 고마워 조금 더 말을 덧붙였다.
" 그리고 고마워요, 위로해줘서. "
" 연인사이에 그정도는. "
" 진짜도 아니었잖아요. "
김민석은 말 없이 날 바라보다 시동을 걸었다. 나는 안전벨트를 매며 물끄러미 차 밖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으로 가는 동안 내내 우리 둘은 단 한마디도 없었지만 딱히 어색하거나 뻘쭘하진 않았다. 침묵을 더럽게 싫어하는 나 조차도. 그냥, 그냥…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는 것 같았달까. 나는 정말 꿈이라고 해도 할 말 없는 오늘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스타 김민석의 차를 타고, 그와 말을 하고, 위로를 받고, 안겨 울고, 손등에 뽀뽀를 받고… 이거 몰카 아니야? 집 가면 이경규 나올 것 같애.
점점 우리 집에 가까워져올수록 아쉬움은 커져만 갔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오늘이기에. 비록 내일이면 나와 그는 연인으로 대서특필 되어 사람들 입에 한없이 오르락 거리겠지만 정작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인터넷 뉴스로나 접하고 3개월 뒤면 자동으로 결별설이 흘러 아무사이도 아닌 사이가 될 것이다. 뭐, 별 수 있겠어. 애초부터 그러자고 만난 사이인데. 나는 옆에 김민석을 잠깐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님 아무 생각이 없는지 앞만 보며 운전중이다. 하긴, 프로답지 못하게 잔정에 얽힐 그런 아마추어는 아닐거야. 그래, 하루 연인처럼 잠깐 데이트 했던 것 뿐이야. 아무사이도 아니야. 아무사이도.
어느덧 차는 달려 우리 집 앞에 도착했고 최대한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려 도착하자마자 오늘 즐거웠어요, 안녕히 가세요- 라고 얼른 간단하게 인사하며 차 문을 열었는데, 오는 동안 한마디도 없었던 그가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더니 자기 휴대폰을 내민다. …? 응? 영문 모를 얼굴로 김민석을 바라보는 나.
" 어떻게 그냥 가. 매정하네. "
" …네? "
" 번호. "
지금 번호 달라고 그러는거야? 김민석은 역시 프로라고, 잔정에 얽히는 아마추어 아니라고 나 혼자 이러는거 한심해죽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민망하다, 야.. 일단 그의 폰을 받아들어 내 번호를 찍는데 지금 이게 꿈인지 생신지 잘 모르겠다. 번호를 찍어 그에게 내밀자 내 쪽으로 전화를 건다. 내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을 울리며 그의 번호를 반짝하고 띄워낸다. 전화 왔어요, 하며 액정을 보여주자 종료 버튼을 누른 김민석이 내게 말한다.
" 사기 열애설이 정 싫으면, "
" …. "
" 진짜 열애설로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고. "
…에? 진짜…열애설? 입을 벌리고 김민석을 쳐다봤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다섯 번은 더 되감기한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 나, 김민석한테 대…쉬… 받은거야? 지금? 웃기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어떤 감정표현을 먼저 해야할 지 몰라 일단 그냥 웃었다. 그쪽이 내가 웃는게 제일 예쁘다고 했으니까.
" …그럼…, 우리 일단 오빠동생으로 시작해요. "
" 괜찮네. "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삼개월 후 결별설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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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Love me right
저는 왜 이렇게 단편 쓸 땐 연재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을까요ㅠㅅㅠ? 막상 연재하면 잘 하지도 못할거면서....☆
내 우주는 전부 내 사랑이 독자님들...(부끄)♡
+ 암호닉은 따로 받고 있진 않지만 자주 오시는 분들은 닉네임처럼 사용해주세여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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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파 혹시 원하시나여ㅠㅅ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