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저택
W.별모양곰돌이
원로 회의를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인 성규가 직접 저택을 찾아왔다. 그것도 혼자서. 아무런 통보 없이 막무가내로 찾아온 성규를 맞이한 건 성열이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원로인 성규에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고 응접실로 안내했다. 의자에 편하게 앉으며 성규는 성열을 향해 슬쩍 눈웃음을 던졌다. 그 웃음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 하는 것 같아 성열은 서둘러 응접실을 나왔다.
성규는 천천히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어두침침한 분위기. 오로지 촛불로만 불을 밝히고 이 저택 어딘가에 인간을 숨기고 사냥을 하고 있을 호원을 생각하지 참으로 가소로웠다. 이리도 인간 냄새가 진동을 하는 데 숨기고 있다니. 성규는 눈을 감고 천천히 냄새를 맡았다. 묘하게 흐르는 인간의 냄새. 아마 성규는 단 한 번 인간의 피가 섞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호원이 응접실로 들어오자 예의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서 가소로움을 느낀 호원이 흐트러지는 것 하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인간의 피가 단 한 번 밖에 섞이지 않은, 순수혈통에 가장 가까운 존재. 순수혈통만큼이나 개체 수가 적어 존재감이 대단한 녀석. 성규의 맞은편에 앉은 호원은 명수가 내온 홍차를 한 모금 했다. 성규도 호원을 따라 홍차를 마시며 슬쩍 웃어보였다.
“원로회의를 망친 것은 정말 사죄드립니다. 제가 많이 건방졌죠, 감히 순수혈통이신 이호원님께,”
“본론부터 말 해. 시간 없어.”
딱 잘라 말하는 호원의 보랏빛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본 성규가 눈을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마치 꾀 많은 구미호가 짓는 웃음처럼 간사하다. 호원은 그런 성규와 마주하는 그 시간이 아깝고 짜증이 날 뿐이었다.
“파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성규는 입술을 엄지손가락을 훑었다. 저 붉은 입술에서 어떤 독기가 가득 묻은 말이 튀어나올지...
“사죄의 뜻으로 여는 파티니 꼭 참석 부탁드립니다. 인간들과 함께 하는 파티니까요.”
“내가 그렇게 한가하게 보이나?”
“꼭. 참석 하셔야 할 텐데요.”
아차. 호원은 신중치 못 했던 자신의 말을 자책했다. 분명 그 파티는 많은 인원이 모였을 것이다. 그 중에는 강경파들의 수가 압도적일 것이며 어떤 이유에서라도 성규의 파티를 거절하지 못 하는 온건파의 인물들도 있을 것이었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꼭 가야만 했다. 성규의 파티 제안은 거부를 할 수 있으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언제쯤이지?”
호원은 말머리를 돌렸다. 이미 성규에게 자신의 실수를 간파 당했겠지만.
“다음주 일요일. 차는 제가 보내겠습니다.”
“... 그렇게 알고 있겠어.”
호원의 최종 승낙에 성규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성규가 저택을 나가고 호원은 여전히 응접실에 앉아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곤 고민에 빠졌다. 김성규는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원로 회의 때 자신을 자극했던 이유도 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독한 놈이다. 거의 몸을 못 쓸 정도로 만들어 놓았는데 빠르게 회복을 찾아오는 꼴을 보니. 어지간히 인간사냥을 한 모양이다. 호원은 완벽하게 성규의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호원이 응접실에서 나오지 않자 성종이 웅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야. 김성규가 뭐래?”
“사죄의 뜻으로 파티를 준비했데.”
“뭐? 자기가 뭐라고? 그래서?”
“김성규 잔꾀에 말렸지, 뭐.”
“안 돼. 정확한 절차를 밟고 회의 개최하라고 해. 나도 같은 원로로써 용납 못 하는 일이야.”
성종이 팔짱을 끼고 도리질을 쳤다. 반면에 호원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웃어? 이게 장난이야?”
“오히려 잘 되었지. 이참에 김성규를 아주 밟아버리겠어. 더 이상 나를 도발하지 못 하도록.”
“이호원. 진짜 안 돼.”
“됐어, 난 순수혈통이야. 그렇게 쉽겐 안 죽어.”
여유롭게 웃어넘기며 응접실을 나서는 호원의 뒷모습을 본 성종은 여전히 표정이 풀리지 않은 채 걱정만 한 가득이다. 뭔가 불안한 예감에 성종은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성종의 예지 능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이 정도로 불안한 예감은 정말 오랜만 이였다.
**
동우가 이 저택에 온 지도 한 달 가까이 되었다. 동우 자신도 몸 상태가 많이 좋지 못함을 느끼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이 가득한 곳에 살아서 그런 지 기가 빨리는 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요즘은 숨 쉬기가 힘들어 지고 계단을 오르는 것 조차도 심장이 조여와 숨을 고르는 일이 잦아졌다. 거울을 보면 얼굴이 창백해지고 입술 색이 죽어가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산다는 것에 미련은 없는데... 아픈 게 싫다. 그리고 그 모습을 스스로 지켜보는 것도 싫다.
그런 동우를 옆에서 지켜보던 호원도 동우의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동우의 기가 정말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이 호원의 눈에도 보였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말로 성종이 ‘동우, 수명이 좀 줄었어. 우리랑 같이 살아서 그런가봐.’ 라고 했었다. 그 말에 그렇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원래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요즘 호원은 동우가 죽는다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다른 인간이 아니라 동우가 죽는다는 것. 그러니까. 동우와 헤어진다는 것. 무감각했던 헤어짐이라는 단어가 다시 자신에게 큰 의미가 되어간다.
“장동우.”
“응?”
“왜 여기 앉아있어.”
“힘들어서...”
계단에 주저앉아 호원을 올려다보며 말 하는 동우. 그런 동우를 보고 있자니 뭔가 답답하면서도 알 수 없는 먹먹함이 호원의 얼어있던 가슴을 녹이고 있었다. 호원은 동우의 옆에 같이 앉아 동우가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게 해 주었다. 얌전히 호원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 앉은 동우가 한 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 쉬는 거야?”
“그냥.”
사실 요즘 들어 호원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동우다. 호원이 옷을 입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말 하는 것, 손짓, 그리고 그 보랏빛 눈동자와 검은 머리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혈통이라는 고귀함과 품격까지. 모든 게 다 멋지고 아름답다. 그런 호원의 옆에서 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 애초에 관심이라는 것이 부담스럽고 익숙하지 않았던 동우에게 이런 관심은 정말 호화스러운 것이었다. 조근 더 칭얼거려도 받아줄 것 같은 호원이 믿음직스럽다. 엉뚱하고 잘 생긴 명수도. 말이 조금 험해도 자신을 잘 지켜주는 성열이도. 생긴 것과는 다르게 어른스럽고 믿음직한 성종이도. 다 고마웠다. 하지만 그런 고마움과는 다른 감정이 호원에게 있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동우다.
“장동우.”
“응?”
호원이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동우의 입을 맞췄다. 동우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호원을 보자 호원은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캄캄한 저택의 허공을 바라보던 호원이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다.
“사랑한다.”
“뭐?”
“내 감정은 내가 잘 알아. 정말이야.”
눈을 다시 맞추는 호원 때문에 당황한 동우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듯 뛰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고 몸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호원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우의 턱을 들어 올려 다시 입을 맞췄다. 호원이 이렇게 적극적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한 동우가 눈을 질끈 감고 호원의 맞닿은 입술을 느꼈다. 도톰한 어랫입술이 움직이며 점점 동우의 입술을 먹어가고 있었다. 긴 키스가 끝나고 호원이 동우를 안아 올렸다. 순간적으로 놀란 동우가 호원의 목을 끌어안았다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으, 아아... 내려줘. 혼자 갈 수 있어.”
“됐어.”
단칼에 거절. 그대로 호원은 동우를 방 안 침대까지 데리고 가 침대 위에 앉혔다. 괜히 부끄러워 발장난만 치고 있는 동우와 무덤덤한 호원.
“좋아.”
“뭐가?”
“너 이렇게 있는 거.”
“넌 부끄럽지도 않아? 이렇게 말 하는 거?”
“부끄러울 게 뭐 있나. 이 나이에.”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어 동우는 호원에게서 조금 멀어져 앉았다. 멀어져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동우의 머리통을 한 번 거칠게 쓰다듬은 호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원의 뒷모습을 보며 동우는 생각에 잠겼다. 호원에게는 미안하지만... 동우는 자신이 전부터 생각했던 것을 이제 해야 할 때라고 마음을 먹었다.
**
호원의 입에는 어느새 동우가 붙어버렸다. 일 때문에 바빠도 지나가던 성종에게 동우는? 하고 묻기 일쑤였고 잠시 밖에 나갈 때는 동우 잘 봐줘, 라고 성열에게 부탁했다. 장을 보러 나가는 명수에게 동우가 좋아하는 거 많이 사와. 라며 굳이 말 하곤 했다. 그런 호원의 변화를 호원을 제외한 모두는 다 알고 있었다. 특히 호원은 해가 지고 일어날 때마다 고민을 했다. 자신의 옆에서 정말 잘 자고 있는 동우를 보고 깨울 것인지 말 것인지를. 5분만 더 재울까, 아니면 그냥 깨울까. 밥 먹으려면 씻고 내려가야 하는데, 그냥 다른 애들 좀 더 기다리게 하고 더 재울까. 이런 고민을 혼자 하다 보면 어느 새 명수가 방으로 올라와 두 사람을 불렀다.
어느 날 명수가 호원과 함께 원로회의에 대한 정리를 하던 중 물었다.
“동우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어어어?”
“당황하기는.”
“시끄러워. 그냥 나약한 인간이니까 보호해 주는 거지.”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으면서도 아니라고 발뺌한다. 딱 봐도 티가 다 나는 데. 요즘 들어 조금은 부드러워진 호원이다. 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호원의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본적이 없어서 신선하기도 했고 놀리는 재미도 있고.
“뽀뽀는 했어?”
“당연히 했... 을 리가 있어? 어?”
“했네, 했어.”
“시끄러워.”
이제는 완전히 얼굴까지 빨개져서는 방을 나가버린다. 명수가 뒤에서 회의 정리는? 하고 물었지만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복도를 그저 따라 걸었다. 그런 호원의 기분에 따라 촛불들이 크게 일렁였다. 일렁이는 촛불들이 만들어 내는 호원의 그림자가 춤을 춘다. 일단은 당황한 나머지 밖으로 나왔는데 딱히 어디 갈 데도 없어서 정원으로 나갔다. 달빛이 비추는 아름다운 정원은 성종의 작품이었다. 혼자서 몇 십 년을 끙끙거리더니 결국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정원에 있는 작은 연못 근처 바위에 앉아 연못에 비춰진 달을 보니 마음이 좀 안정이 되면서도 또 귀가 달아오른다.
“하... 김명수자식.”
“명수가 왜?”
“아, 깜짝이야!!”
연못 옆 키 작은 나무들 사이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던 성종이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성종은 잡초가 가득 담긴 작은 바구니를 들고 호원의 옆에 앉았다. 가만 보니 김명수가 또 호원을 들었다 놨다 했나 보다. 은근히 장난꾸러기라니까.
“왜. 명수가 뭐래?”
“몰라. 건방진 자식.”
“동우랑 뽀뽀했냐고 놀려?”
“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맞구나? 뽀뽀했지? 하긴, 뽀뽀만 했겠어.”
“...시끄러워.”
괜히 심술이 난 호원이 성종이 잡초를 뽑아 담아놓은 바구니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성종이 하하 하고 웃을 뿐이다. 성종은 허리를 숙여 돌멩이 하나를 주워 연못에 던졌다. 물결을 일으키며 흐트러지는 연못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호원도 따라서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퐁- 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난다.
“정말 동우를 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그거 되게 멍청한 질문인 거 알지.”
“알아. 인간들이 만들어 낸 낭설들일 뿐이지만... 정말 내가 동우 물어서 뱀파이어로 만들어버리고 싶다.”
호원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밝게 떠 있는 달과 별들을 보았다. 이별이라는 게 무엇인지,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뱀파이어들에게는 먼 개념이다. 그래서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호원은 문득 겁이 났다. 나중에 동우가 죽고 나면 어떡하지. 눈을 뜨고 일어났는데 옆에 아무도 없을 때, 계단 청소를 하는 데 옆에서 마른 걸레도 같이 닦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밥을 먹는 데 와하하 하고 떠들고, 실수 투성이에 잘 울고 그런 동우가 이 저택에서 영원히 사라지면 어떨까. 아무렇지 않게 동우가 저택에 오기 전처럼 살 수 있을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데로 살아갈까. 그렇게 영원히.
“시간이 지나면...”
호원이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동우의 기억이 희미해질까? 백년 이백년 이렇게 더 살다보면 잊을까?”
“잊고 말고의 문제를 넘어서. 잃지 마. 동우에 대한 모든 거.”
“모르겠어. 하지만 조금은 겁이 나.”
“순수혈통 이호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차라리 성열이가 처음에 동우를 데리고 왔을 때 그냥 내보냈어야 했어.”
“아니.”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호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라도 동우를 만난 것이 더 좋다. 동우의 존재를 영원히 모르고 살았을 바에야 이렇게 짧게라도 함께 하는 편이 더 좋다고 확신하는 호원이다. 호원은 조금은 기분이 풀렸는지 목을 한 번 돌려 스트레칭을 하고는 성종을 뒤로 한 채 저택으로 다시 들어갔다. 호원의 뒷모습을 보니 조금은 쓸쓸해 보인다. 예전에 성종이 호원을 처음 보았을 때는 빈틈이 없었다. 순수혈통이라는 것이 스스로를 외롭고 그만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틈을 비집고 겨우 들어간 성종이다. 그렇게 몇 십 년을 호원에게 매달려서야 호원의 마음을 열었는데 동우는 고작 한 달 만에 하고 말았다. 역시 좋아한다는 감정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성종이다.
**
저택에 들어가니 동우의 웃는 소리가 들린다. 동우의 웃음소리는 언제나 솔직해서 좋다. 그 웃음소리를 따라가니 2층의 빈 방에서 성열과 놀고 있었다.
“뭐해?”
“카드! 같이 할래?”
“카드? 좋아.”
동우가 자리를 조금 옮겨 호원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가만 눈치를 보던 성열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낄 때가 아니네. 으흐흥~”
요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나가는 성열을 보며 동우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지만 호원은 아주 조금. 열 받았다. 이것들이 오늘 단체로 놀리기로 작정했나.
“자, 여기.”
동우가 카드를 섞어 호원에게 주었다. 카드를 받은 호원이 카드를 내려놓고 동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호원의 시선을 느낀 동우가 괜히 카드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헛기침을 한다. 노골적으로 동우를 빤히 보는 저 시선이 느껴진다. 특히 호원의 보라색 눈동자는 더욱 더 존재감을 발휘한다.
“왜. 부끄러워?”
“뭐가.”
“부끄럽냐고. 내가 또 뽀뽀할 거 같아서?”
“...”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 하자 동우가 카드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조금 놀리고 싶었을 뿐인데 눈을 감고 호원이 키스하기를 기다리는 동우를 보니 가만히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동우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살짝 눈을 뜬 동우가 됐지? 라며 카드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한 번 더.”
“넌 우리 둘이 있을 때 왜 이렇게 능글거려? 나 잘 때 막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니야?”
“왜, 해 줘?”
“하지 마!”
호원이 동우에게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며 놀리자 동우가 호원의 어깨를 잡는다. 그대로 있는 데 동우가 결심한 듯 숨을 크게 쉬었다.
“나 할 말 있어.”
“뭔데?”
“정말 진지하게 할 말이야.”
“응, 말 해.”
잠시 숨을 돌리며 말 한 동우가 정말 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호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여기서 나갈래. 아니, 나갈 거야. 지금 당장.”
“뭐?”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 한 호원이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동우는 흔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호원의 마음을 알고 난 뒤, 그리고 호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확신한 뒤부터 동우는 계속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시한부인생인 자신에게 호원의 존재는 너무나도 감사하면서도 또한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동우는 고민 끝에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너 부담스러워. 내가 말 했잖아. 내가 삶에 미련이 없는 건 삶에 이유가 없어서라고. 그런데 널 좋아하고 너가 날 좋아해 준 뒤부터 삶에 이유가 생겼고, 죽는게 두려워졌어.”
“그래서.”
“그래서 나갈게. 미안. 도저히 이곳에 더 있다가는 정말 죽기 싫어질 것 같아. 겨우 삶에 대해 미련을 버리고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젠... 겁이 나.”
눈물이 날 것 같아 더 이상 못 있겠다. 호원의 대답은 빨랐다.
“그래. 알겠어.”
동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갔다. 동우의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고 호원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씁쓸하다는 감정만 맴돌았다. 뭐라 정리도 되기 전에 동우가 먼저 이 저택을 나가겠다고 했다. 동우의 말도 일리가 있다. 동우는 인간이고 자신과 다른 존재니까. 이해한다. 하지만...
**
가방을 싸고 저택을 나갔다. 모두에게 인사를 한 번씩 했고 동우의 말을 잘 수긍해 주었다. 아쉬워 하는 것 없이 그냥 그렇게 동우의 뜻을 받아주고 인사를 해 주었다. 마중을 나오겠다는 이들을 두고 홀로 정원을 걸어 저택의 대문으로 걸어갔다. 날이 빠르게 밝아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뱀파이어들은 빛에 약하니까. 그래도 참 오랜만에 쬐는 태양빛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잘 가라는 듯 대문도 활짝 열려있다. 전혀 미련이 없나싶을 정도로 담백한 이별이란 생각에 동우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웠다. 왠지 뒤 돌아 보면 호원이 보고 있을 것 같아 끝까지 참았다. 좋은 추억. 인생에서 유일한 사랑. 그걸 가슴에 품고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가지고 갈 것이다.
대문에 다다르는 데 갑자기 대문이 닫혔다. 깜짝 놀라 동우가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호원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완연하게 뜬 태양을 그대로 맞으며 동우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너...”
빛에 노출 된 호원의 피부에서 희뿌연 연기가 나고 있었다. 숨쉬기가 힘들어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지만 호원은 걸었다. 그저 말 없이 동우를 뚜렷하게 보면서 동우의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놀란 동우가 눈물을 가득 달고 호원을 바라보았다. 호원이 힘들어하는 게 눈에 다 보였다. 가슴이 너무 아려온다. 동우가 뭐라 말하기 전에 호원은 동우의 어깨와 머리를 감싸 품에 완전히 안았다. 태양빛으로 인해 호원의 몸에서 열기가 올라왔지만 호원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우가 호원이 안타까워 밀어내려 했지만 호원은 단호했다.
“삶에 미련이 없다고 했지. 시한부 인생인데 날 좋아하게 된 거 때문에,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때문에 죽기 싫어질까 봐 무섭다고 했지.”
“호원아, 들어가 제발. 응? 제발 들어가...”
급기야 동우가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이기적인 놈. 넌 고작 한 달만 가슴 아파 하면 되잖아. 난 널 떠나보내고 영원의 시간을 널 그리워 할 텐데. 내 생각은 안 해?”
“호원아, 호원아..”
“추억 더 만들어 줘. 내가 영원히 너 그리워해도 가슴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널 그리워 할 수 있도록.”
조용한 저택
W.별모양곰돌이
검은색 제복으로 갖춰 입은 호원이 뒤 돌아 동우를 보았다. 동우가 박수를 치면서 멋있다며 웃었다. 까만 머리칼과 까만 제복, 그에 어울리는 자수정처럼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아름답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동우는 호원에게 다가가 호원의 머리를 다시 만져주고 옷깃을 다시 세워주었다.
“멋져. 짱이야.”
“짱이야?”
“응.”
동우의 볼을 한 번 꼬집은 호원이 제복에 브로치를 달았다. 순수혈통을 상징하는 브로치를 달고는 동우의 볼에 입을 맞췄다. 말랑말랑한 볼 살이 그대로 입술에 느껴진다. 그 느낌이 좋아 반대편에도 한 번 입을 맞추자 동우가 베시시 웃었다.
“나도 가면 안 돼?”
“안 돼. 위험해.”
“거기 뱀파이어들만 있는 거 아니라며. 인간들도 있다면서.”
“그래도 위험해. 명수랑 성열이는 여기 있으니까 기다리고 있어.”
가고싶다... 라며 웅얼거리는 동우의 입술을 가볍게 건드린 호원이 동우를 끌어안았다. 안심시켜주려는 듯 동우의 등을 토닥이자 동우가 호원의 몸에 안겨 호원의 냄새를 맡았다. 꽃향기가 난다. 뱀파이어의 몸에서는 독특한 향기가 났는데 특히 호원의 향은 달달했다. 성종에게는 상큼한 향이, 명수에게는 장미향이, 성열에게는 은은한 향이 났다.
“호원이 냄새 좋아.”
“나도 동우 냄새 좋아.”
“인간한테는 냄새 안 나잖아. 예전에는 인간냄새 난다고 뭐라고 해 놓고는.”
“아니야, 좋아. 좋아. 좋아.”
좋다는 말을 반복하며 호원은 동우의 볼에 자신의 볼을 데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우의 말랑말랑한 볼살이 기분이 좋다. 그렇게 둘이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데 성종이 방문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둘이 떨어졌고 들어오라는 호원의 말에 성종이 들어온다. 성종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나가자.”
평소의 성종과는 달리 짧게 말을 끊고 방을 다시 나가버린다. 묘한 불안감에 동우가 호원에게 다시 한 번 같이 가자고 조르지만 호원은 단호했다.
**
성규의 걱정과는 달리 우현은 멀쩡한 얼굴로 정장을 갖춰 입었다. 세련된 남색 수트를 입은 우현과 달리 화이트계열의 제복을 입은 성규가 다시 한 번 우현을 말렸다.
“나 혼자도 괜찮다니까. 넌 그냥 쉬면 안 돼? 그러다 이호원이 눈치 채면 어떡하려고.”
“이호원의 최후를 보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어차피 오늘은 우리 쪽 사람들이 많이 오잖아.”
“그래도 위험해. 순수혈통의 힘을 무시하면 안 돼.”
“너가 옆에 있잖아.”
우현이 여유롭게 웃어넘기며 성규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했다. 뭐라 할 말을 더 찾지 못 하고 얼굴일 붉어진 성규가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걱정스러웠지만 우현을 따라 집을 나섰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계속 불안해하는 성규와 달리 우현은 정말 신난 표정으로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나 못 믿어? 그래도 나 일류 헌터야.”
“남우현, 진짜 말 안 들어.”
“쓰읍- 성 빼고 불러.”
“... 우현이.”
계속 불안해하는 성규를 안심시키려 우현이 안아도 주고 키스도 했지만 성규의 찌푸린 표정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 숨을 크게 쉰 성규가 리무진 안에서 무거워 보이는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우현이 쓰던 총이 있었다. 우현이 총을 보고 놀란 눈으로 성규를 보았다.
“혹시 몰라서... 가지고 왔어. 내가 옆에 있겠지만... 이호원이 눈치를 챌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불안해서.”
“이거...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상기된 얼굴로 성규가 준 총을 받은 우현은 오랜만에 만지는 자신의 총의 무게에 새삼스럽게 몸이 많이 약해진 것을 느꼈다. 헌터들이 쓰는 총 중에서도 우현의 총은 특히나 강한 위력을 자랑했다. 워낙 오래전부터 쓰인 우현의 총은 선대 헌터들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것이었으며 특히 순수혈통을 주로 사냥할 때 쓰였던 것이었다. 순수혈통의 피가 가장 많이 묻어 있는 총. 우현은 호원의 저주를 받은 후 급격히 몸이 약해졌었다. 거기다 총에 기를 빼앗기기 시작하면서 성규는 우현에게 총을 뺏아 감추었다. 성규가 매일 우현의 피를 마셔 저주를 약화시켜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지만 우현의 힘이 약해지긴 모양이였다. 총을 쥔 우현의 팔이 조금 흔들렸다.
“좀 무겁네.”
우현이 총을 이리저리 돌리며 무겁다고 하자 또 속상해진 성규가 우현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미안해. 내가 숨겼었어.”
“아니야. 어차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
“총알이 두 발 밖에 없어.”
“괜찮아, 충분해.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
“내가 최대한 널 보호할게. 헌터들도 같이 크루즈에 오를 거야.”
“응. 너만 믿을게, 성규야.”
“응... 나 목 쓰다듬어줘.”
성규는 우현이 뒷목을 쓸어주는 것을 유독 좋아했다. 우현이 성규의 뒷목을 쓰다듬어주며 진하게 키스를 했다. 적극적으로 키스를 하는 우현에 의해 얼굴이 붉어진 성규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손을 잡아주는 우현의 손을 더 세게 잡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크루즈를 보았다. 전의를 불태우며 성규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단단히 했다. 오늘을위해서 일부러 이호원의 성질을 건드렸다. 오늘이 마지막. 오늘 실패한다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 자신과 함께 하기로 결의한 다른 뱀파이어들도 죽는다. 물론 인간의 우현과 헌터들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다. 리무진에서 내린 성규와 우현은 미리 와 있는 뱀파이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뱀파이어들을 추종하는 인간들도 몇이나 있었다. 그 중에는 세계적인 기업의 CEO도 있었고 유명한 학자도 있었으며 성직자도 있었다. 그리고 크루즈 안에는 성규가 미리 심어놓은 헌터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오늘은 가장 멋진 파티가 될 겁니다.”
좀 전 리무진에서 불안해하던 모습은 사라진 성규가 자신감있게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들을 짧게 박수를 치며 파티를 준비한 성규를 찬양했다.
**
“어차피 나 한 달도 못 산다며. 가서 죽더라도 따라 갈래.”
“안 된다니까? 빨리 내려. 강제로 내려버리기 전에.”
“싫어. 호원이 너랑 같이 있고 싶다니까?”
“왜 이렇게 고집이야?”
“너 며칠 전만 해도 추억 만들어 달라며! 영원희 시간을 기억할 거라며! 그러니까 더 옆에 있고 싶다고!”
“위험하다니까?”
“싫어, 싫어, 싫어, 안가, 안가, 안가!”
발 빠르게 호원이 차에 타기 전 차에 먼저 올라타 고집을 부리는 동우를 보는 호원은 동우가 귀엽기도 하면서 기가 막혔다. 분명히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 했는데도 꼭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옆에 있던 성종도 조금 곤란한 표정이다. 데리고 가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만약의 사태라는 것이 있다.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던 호원과 동우. 호원은 나와 있는 명수와 성열을 보았다.
“혹시 모르니까. 너네들 우리 따라 와.”
“왜?”
“오케이.”
상반된 대답을 한 명수와 성열이 서로를 본다. 성열은 망했다는 표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최대한 따라 붙어 볼게.”
성열의 수긍에 호원은 동우의 옆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그 맞은편에는 성종이 앉았다.
호원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 것. 성종과 호원은 몇 차례나 동우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동우는 알겠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출발을 했고 행선지는... 항구였다.
“이호원.”
바다. 호원은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숨을 고르게 쉬었다.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거였다. 오늘 김성규는 제대로 각오를 하고 호원의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도착한 항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과 뱀파이어들이 있었다. 안내를 받으며 크루즈에 올라 파티가 열리는 홀의 문을 열었다. 본 회의의 인원보다는 훨씬 적었지만 그 만큼 인간들이 그 자리를 채우며 뱀파이어들에게 잘 보이려 갖은 아부를 떨고 있었다. 예상대로 강경파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호원이 파티장에 나타나자 그 안에 있던 모든 인간들과 뱀파이어들은 고개를 숙였다. 순수혈통을 처음 본 인간들 중 그 위압감을 이기지 못 해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호원의 존재감이란 대단했다. 성규가 그들의 사이를 통과해 호원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오늘... 기대 하지.”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성규의 말에 불편함을 느낀 성종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규는 그런 성종을 부드럽게 넘기며 웃을 뿐이었다. 성종은 성규를 잔뜩 경계했다. 배가 육지와 멀어질수록 호원의 힘은 더욱 약해진다. 성종은 불안함에 성규의 동선을 계속 살폈다.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호원의 뒷모습을 보던 동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크루즈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파티장에 있으면 존재를 들킬 위험이 크니 성종의 말대로 한 층 아래에 있는 갑판에 혼자 있고 했다. 조심스럽게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빨려들어갈 것 같다. 난간에 기대 바닷바람을 느끼던 동우는 갑자기 자신의 등을 치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뭐 해요?”
“...네?”
동우보다 키가 조금 더 큰 우현이 완전히 동우에게 밀착해 동우의 눈을 맞췄다. 자신의 뒤에는 난간이 있고 앞에는 우현이 완전히 밀착해 있었다. 곤란한 동우가 고개를 돌려 우현의 시선을 외면했다. 뱀파이어 일까? 인간일까? 생각을 하고 있는 동우를 향해 우현이 사람 좋게 웃으며 동우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장난 좀 쳤는데.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하하.”
“아, 아니요.”
“여기서 뭐 해요? 안에서 파티 재밌게 하는데.”
“아, 뭐... 좀 답답해서요.”
“답답하긴 하죠? 뱀파이어들 옆에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힌다니까요. 그쵸?”
살갑게 웃으며 동우에게 말을 걸어오는 우현에게 경계심 없게도 동우는 헤실 거렸다. 우현과 말장난을 주고받으면서 동우는 오랜만에 만난 인간이라는 존재에 정까지 느꼈다. 우현은 동우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며 홀 안으로 들어가 칵테일 두 잔을 가지고 나왔다.
“동우씨와의 만남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우현이 준 칵테일을 한 모금 한 동우는 난간에 기대어 점점 멀어지는 육지를 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바다 냅새가 좋기도 하고. 눈을 감고 바닷바람을 느끼고 있는 동우를 본 우현은 슬며시 웃었다. 순진한 사람 같으니라고.
“으아... 이거 뭐예요?”
“왜요? 취해요?”
“제가 술이 좀 약하긴 하지만... 너무 취한다...”
“그럼 제 방에 가서 좀 잘래요?”
“우으... 그럴까아...”
자신에게 완전히 안겨 정신을 못 차리는 동우를 본 우현이 바람 빠지듯이 웃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호원은 장동우를 잡아먹으려 하는 게 아니라, 같이 살고 있는 것이라고.
**
문득 동우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은 호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 지 존재까지 느껴지지 않다니. 호원은 조금 높은 계단에 기대서서 김성규를 보고 있는 성종에게 갔다.
“동우가 안 보이는데.”
“아, 여기 파티장 안에 있으면 뱀파이어들 때문에 동우가 힘들어 할 것 같아서. 2층 갑판에 있으라고 했어.”
“그래?”
“조금 있다가 건배하고 내가 나가 볼게.”
성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호원은 계단 가장 위로 올라가 파티장 아래를 보았다. 호원이 아래를 주욱 둘러보자 파티장이 점점 더 조용해지며 모두가 호원을 올려다보았다. 호원은 잔을 높이 들었다.
“파티장에 오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 인사드립니다. 우리 뱀파이어들과 인간들이 함께 교류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모두의 노력을 위하는 바입니다.”
호원의 말이 잠시 멈추자 일제히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가 다시 잦아들자 호원은 다시 한 번 운을 띄었다.
“이 파티를 준비해 준 김성규 원로께도 감사인사 드립니다.”
호원이 성규를 향해 잔을 들자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이 성규를 보며 박수를 쳤다. 성규는 예의를 갖춰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 하고 잔을 들었다. 그리고 저 건너편에 있는 우현을 보았다. 우현이 빙글거리는 웃음으로 성규를 향해 잔을 들려 엄지를 치켜세웠다.
“자, 그럼 모두 건배-”
“건배!”
호원의 선창에 따라 잔을 높이든 인간들과 뱀파이어들이 건배를 외쳤다.
그리고 동시에 파티장 안의 유리창들이 깨어지며 완전 무장을 한 헌터들이 들어왔다. 깨지는 유리창소리에 놀란 뱀파이어들이 자신의 아우라를 조절하지 못 하고 뿜어내기 시작했고 그 기에 눌린 인간들은 숨을 쉬지 못 하고 목을 감쌌다.
“커헉- 컥!”
“사, 살려 줘... 으컥!”
순식간에 붉은 눈의 뱀파이어로 변한 이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주변에 있던 인간들의 목을 물어 뜯기 시작했다. 그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한 호원이 최대한 힘을 모아 염동력을 이용해 인간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계단을 뛰어 넘어 메인 홀 가운데로 갔다. 호원을 둘러싼 뱀파이어들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성종도 호원의 옆에 붙어 송곳니를 드러냈다. 회색빛이 강한 성종의 붉은 눈이 빠르게 성규를 찾았다. 성규는 유유히 헌터들 사이로 사라졌다.
온건파인 뱀파이어 몇이 호원의 주위를 둘러쌓다. 하지만 압도적인 수 차이와 인간의 피를 마시고 강해진 뱀파이어들은 뿜어내는 기가 달랐다. 거기다 그들의 뒤에는 헌터들이 일제히 총을 겨누고 있었다. 헌터들은 무전을 통해 사격을 하라는 우현의 명령에 일제히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피해를 줄일 것. 이상.”
호원의 명령에 온건파 뱀파이어들은 송곳니와 손톱을 드러냈다. 좁은 파티장 안에서의 싸움은 힘이 강한 뱀파이어들에게는 서로에게 방해가 되었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파티장 안에서 강하게 피 냄새가 몰려왔다. 피 냄새 속에서는 뱀파이어의 피냄새도 있었고 헌터들의 피냄새도 있었다.
“크으.., 으아아!!”
호원의 옆에 있던 온건파 뱀파이어 하나가 주춤거리더니 자신을 공격하는 헌터의 팔을 잡아 던졌다. 그리고 그대로 그에게 튀어가 헌터의 목을 물었다. 인간 사냥을 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호원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파티장을 가득 채운 피냄새에 본능이 깨고 만 것이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게다가 호원은 인간들을 보호하며 헌터와 뱀파이어와 싸우고 있으면서도 동우를 찾았다. 거기다 육지와 꽤 멀어진 탓에 호원은 갑자기 어지러움과 토기를 느꼈다.
“쿨럭,”
“이호원!!!”
“하아... 젠장.”
피를 토해 낸 호원이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일단은 김성규를 먼저 찾아야 한다.
**
파티장밖으로 나온 성규는 우현에게 받은 방 키를 가지고 방으로 갔다. 이호원의 힘이 많이 약해졌더라고 순수혈통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성규다. 생각지도 못 하게 동우가 자신의 손에 떨어졌다. 아마 파티장안은 엉망이 되어 있겠지. 몇 백 년 동안 이호원의 명령에 의해 인간의 피를 맛보지 못 한 뱀파이어들은 이성을 잃을 것이다. 거기에 혼란스러워 할 이호원을 생각하니 성규는 벌써부터 흥분이 되었다. 하지만 침착할 것. 성규는 침대에 얌전히 누워 깊게 잠이 든 동우를 보았다. 우현이 먹인 최면약에 이렇게 쉽게 걸릴 줄이야. 성규는 동우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든 성규가 동우를 안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이호원에게 멋지게 복수를 할 생각이 떠올랐다.
천천히 걸어 피냄새가 진동을 하는 파티장 안을 보았다. 피를 토하고 있는 호원과 그 옆에 붙어 힘겹게 싸우고 있는 성종이 보인다. 성종 역시 힘이 드는 모양인지 눈에 띄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 틈에 인간들은 구명보트와 조끼를 입고 발 빠르게 크루즈를 탈출하고 있었다. 이 바다 한 복판에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 지. 하여튼 인간들이란- 성규는 난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향해 비웃은 성규가 염동력을 이용해 구명보트를 다 뒤집어 버렸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니 참 우스꽝스럽다. 성규는 동우를 안아 올린 채로 호원을 향해 기를 뿜었다. 성규의 기를 느낀 호원이 고개를 돌려 성규가 있는 쪽으로 보았다. 성규를 본 호원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김성규!!!!!”
호원은 순식간에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놀란 성종이 호원을 따라가려 하지만 호원의 기가 옆에서 사라지자 그 자리에서 힘이 풀려 쓰러지고 말았다. 서서히 감기는 두 눈동자가 검은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성종이 쓰러진 것을 발견한 헌터들이 천천히 총을 겨누며 성종을 둘러쌌다.
**
갑판으로 나간 호원은 성규를 노려보았다. 본성을 드러내지 않던 호원의 눈동자가 붉게 변해 있었고 송곳니가 날카롭게 섰다.
“어때?”
“...”
“화나지?”
“닥쳐.”
“이호원. 날 풀어주던 그 때 기억나?”
“좋은 말 할 때 동우 넘겨.”
“그때 그랬지. 뱀파이어가 사랑한 인간의 최후를 지켜보라면서 우현이에게 저주를 내렸어. 하지만 말이야. 저주가 아니라 바로 죽였어야지. 어정쩡하게 저주나 내리니까 이런 꼴 나지, 안 그래?”
“허튼 짓 하지 마, 김성규.”
“뱀파이어가 사랑한 인간의 최후는. 이런 거야, 이호원.”
말을 마친 성규가 몸을 돌려 바다 쪽을 보았다. 그리고 동우를 안고 있던 팔을 난간 밖으로 뻗었다. 호원이 깜짝 놀라 뛰어갔지만 이미 동우의 몸은 성규에게서 떨어져 거친 파토 속을 향하고 있었다. 성규가 만족했다는 듯 몸을 돌렸다. 호원의 절망에 빠진 표정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호원은 성규의 옆을 지나쳐 순식간에 난간을 뛰어 넘었다. 놀란 성규가 다시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호원을 보았다. 호원은 아슬아슬하게 동우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그대로 바다 속으로 빠졌다. 멍하게 바다 쪽을 보고 있던 성규의 옆으로 우현이 다가왔다.
“히야- 장난 아닌데?”
“설마... 이런 식일 줄이야!”
저주를 풀기 위해선 저주를 건 자의 피가 필요하다. 혼란스러워진 성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난간을 꽉 잡은 성규의 힘에 의해 난간이 조각나며 부러졌다.
“다... 다... 내 실수야... 내가... 잘 못 했어, 우현아...”
“괜찮아. 이호원은 살아. 쉽게 죽지 않아. 언젠가는 나타날 거야.”
“우현아... 너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라면... 나는... 나는...”
“괜찮아. 성규야. 난 괜찮아. 이호원은 반드시 와.”
우현이 성규의 손을 잡았다.
“일단 이성종을 생포했으니까. 이호원은 올 거야. 그 때 복수하자. 응?”
부드럽게 성규의 뒷목을 쓰다듬으며 다독이자 성규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성규의 눈동자는 만연하게 붉어져 있었다. 성규는 우현을 따라 다시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펼쳐진 피의 향연에 웃음만 나온다. 이호원이 그렇게 몇 백 년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 고작 몇 분 사이에 다 깨어졌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쓰러져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성종이 보였다.
--------------
다음은 짧게 외전을...하핳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와 아이유 가수 갤럽 1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