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민석아..."
"알겠어.무슨말인지..알아들었어"
".....달라지는거 아무것도 없어."
너는 달라지는게 없다고 했다. 내가 다리를 못쓴다고 했다. 크리스가 죽었다고 했다. 첸과 타오가 소접이라고 했다. 종대가 나를 쏜 것이라고 했다.
나는 꽤 오랜시간동안 잠들어 있었고 눈을 뜬 곳은 네가 말한 우리만의 파라다이스였다. 너는 다름없는 데일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이제 혼자서는 침대밖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루한, 난 너를 정의 내릴 수 없다. 깊은 심연에 빠져있을 때조차 너는 내게 사랑을 깨닫게 했다. 부유하는 공간 속에서 닿을 곳도 없이 어둠을 헤매일때
조차도 너는 나를 놓지 않았다. 꿈속에서조차 아니 무의식에서조차 나를 가두는 남자. 내가 가진 가장 깊은 곳까지 나를 지배하려는 남자. 아니다.
이런 말들로는 너를 나타낼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했던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너는 나를 봐왔나. 불빛이 커져 너에게 닿기 직전 나는 어떠한
환영과 마주쳤다. 아주 어린 백현이와 딱 지금의 백현이 나이와 같이 미성숙한 너의 모습. 마주친 너는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 몸부림치며 백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절망과 암흑. 그것이었다. 어느 날, 내가 너를 마주쳤던것 같기도 하다. 바닥에 주저앉아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눈물을 흘려대는 남자. 그게 너였던가. 그때부터 너는 나를 봐왔나. 도대체 가늠할 수도 없는 긴시간이 아닌가.
꽤나 무덤덤한 나의 모습에 루한은 곧 내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어 내눈위에 얹었다. 글쎄, 너의 배려인듯 싶다만 눈물은 나지 않는다.
민석은 의식이 돌아온 후 빠르게 회복했다. 수술자국도 예상보다 옅게 아물었다. 재활치료를 통해 이제는 휠체어에 앉을 수 있을만큼 제생활을 찾았다.
그곁에는 언제나 루한이 있었다. 월강의 모든 일은 세훈에게 맡겼다. 루한은 굳이 찬열의 처단을 묻지 않았다. 첸의 행방도 쫒지 않았다. 그저 민석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루한의 동의나 결재가 필요한 최소한의 서류만이 종인이 추슬러 올 뿐 이었다.
비가 내린다. 민석이 옆에서 잠른 루한이 비릿한 비냄새를 먼저 맡고 깨어났다. 큰일이다. 비가 오면 상처가 아려 민석이 많이 힘들어한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민석을 바라보던 루한은 곧 커튼을 치곤 살짝 열려있던 창문을 닫았다. 비..와요? 민석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조금."
"......"
"걱정하지마. 금방 그치게 해줄게."
여린눈은 나를 믿고 있지 않다. 앞으로 찾아올 고통에 약간은 경직된 얼굴.
오늘은 내세상이 많이 아플 것 같다.
아니, 오늘도 내세상이 많이 아플 것 같다.
소파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시내에게 다가가 옆에 앉은 첸이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봤다. 겨울비다. 비온다..작게 중얼거리는 첸의 말에 시내는
곧 창밖을 보더니 빨래를 걷어야 겠다며 베란다로 향했다. 시내는 며칠새 더욱 성숙한 아이가 되어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빨래를 걷어 하나하나
만져보던 시내는 반정도는 다시 건조기에 넣어 말리고 남은 빨래들을 가지런히 개기 시작했다.
"시내야."
"네?"
아이의 눈은 여전히 마른 옷가지들 사이에 머물렀다.
"유치원..가고 싶지 않아?"
시내는 더이상 유치원에 다닐 수 없었다. 말로는 시내의 정신적 충격을 집에서 쉬며 살펴야 한다고 했지만 쫓아 낸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의연한 아이는
고개만 끄덕일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다음날에도 시내는 유치원에 가는 시간에 맞춰 일어나 책을 읽고 영어 테이프를 듣고 낮잠을 잤으며
간식도 챙겨먹었다. 유치원에서 쓰던 교재인건지 숫자들이 꽤나 복잡하게 나열된 문제집도 다섯시만 되면 일정량을 풀곤 했다.
"안..가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친구도 많이 없는데요 뭘.."
"초등학교는...한국에서 갈거야?"
"...그러고 싶지만..."
얼마전 집으로 우편이 왔다. 더이상 시내가 국내에 머무를 수가 없다는 내용으로 중국으로 속히 돌아가라는 독촉장이었다. 여섯살 난 아이에게 날아온
경고문이었다. 보호자도 없이 아이의 추방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중국에 할머니가 계세요."
"..중국에?"
"근데..저를 별로 안좋아하세요..."
시내가 크면 중국에 있는 집에 보내라고 했던게 이것때문이었을까.
"돌아가신 엄마를 미워하세요."
"...."
"그래서 저도..."
말하며 웃는 아이의 얼굴에서는 더이상 들어찰 곳도 없는 슬픔이 있었다. 빨래를 모두 정리한 아이는 곧 크리스의 방으로가 그의 옷들을 옷장안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순간도 빠짐없이 그는 우리 생활안에 존재했다. 밥을 먹을때도 그의 상까지 함께 차렸다.
시내가 중국으로 떠날때 옆에 있어주고 싶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이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민번호도 없는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남의 이름과 삶을 빌려 살아왔기에 정작 내이름으로는 그 흔한 편지 한 장 붙이지 못한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나라로의
출국도 불가능하다. 아이는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이제는 다시 책을 펴들고 소파에 앉았다. 시내가 만일 중국으로 떠나 내가 여기 혼자 남는다면..
글쎄, 더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
악몽을 꿨다. 총에 맞던 그날의 꿈을.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어 겨우 통증을 잊으려 든 잠이었는데 다시 깨고 말았다.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루한은 내옆에
웅크린채 잠들어 있었다. 내가 잠들고 난후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기 전에 먼저 눈을 뜨고 있으니 피곤할 것이다. 간만에 깊이 잠든 그를 깨우고 싶지 않다.
옆에 놓인 휠체어에 몸을 옮기려는데 쉽지가 않다. 항상 루한이 안아들어 생활하기에 집안에서는 휠체어 자체를 쓸 일이 없었다. 그런데다 오로지 팔의 힘
만을 이용해 몸을 옮기려니 안그래도 땀에 젖었던 얼굴이 이제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래도 절대 소리는 내지 않는다. 크게 숨을 쉬지도 않는다.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 밀려오는 고통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바닥에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그가 잔뜩 깔아놓은 푹신한 카펫때문에 떨어질때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파서가 아니다.
결국 눈을 뜨고 만 그가 보여서.
앞으로 알마나 많은 날을 그는 깊게 잠들지 못하고 나를 보듬을까.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을 그의 품에 안겨 설움을 삼켜야 할까.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을그는...
나 대신 견디고 아파야 할까.
말없이 나를 안아들어 다친곳은 없는지 살피던 그가 혼자 침대에서 벗어나느라 땀에 잔뜩 젖은 내 셔츠를 만지며 말했다.
"...우선 샤워하자 민석아. 감기 걸리겠다."
나를 안아든 그의 손이 떨린다. 알 수 있다, 지금 너의 심정이 어떤지. 깊은 잠에 들었을때 나는 너의 사랑을 깨달았다. 이젠 알 수 있다.
얼마나 찢어지는 속을 부여잡고 속으로 울고있을까.
아, 불쌍한 남자. 그는 우는 법을 잊었다.
그는 내앞에서 내가 아닌 모든것을 잊는다.
욕조에 나를 앉히고는 비누칠을 해주던 루한이 곧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크리스마스야 민석아."
"....."
"뭐할까 그날?어디 가고싶은데 없어?"
"......"
"이제 너 비행기타도 된다니까 홍콩에 가도 되고."
"...홍콩.."
"거기에 별장이 있어. 축제에 가면 재밌을거야. 너무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에 테라스가 있거든."
반응을 보이는 내게 루한은 조금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한다. 크리스마스라....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루한."
"응. 아직 몸도 안좋은데 비행기타는건 좀 그런가?그럼.."
"하고싶은게 있어."
"뭔데?뭐든지 하자. 민석이 니가 원하는건 뭐든지."
정말이지. 그럼..나 말한다?
"죽고싶어."
나를 정성스레 문지르던 손이 멈췄다.
"크리스마스날에..."
백현이가 보고싶다. 그리고 나서..
"나 좀 죽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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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이 완결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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