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6 (19세의 끝자락을 추억할 下)
- 니니~ 하이~ 네가 자고 일어나서 이 쪽지를 보고 있을 때쯤이면 난 이미 기차 안이겠구나. 내가 누군진 바로 이 글씨체를 보고 단번에 알아챌 수 있겠지? 그래, 맞아. 난 너의 큐피트이자, ○○이의 큐피트이자.. 아, 이런 쓸데없는 말은 좀 자제해야지. 어쨌든.. 난 지금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너희 몰래 씻고.. 어제 사온 과자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지금 급하게 쪽지를 쓰는 거란다. 왜냐고? 내가 너를 위해 자리를 피해주겠다, 이거야. 어제 내가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 줄 아냐. 물론 내가 제일 신나게 논 것 같긴 하지만.. 하루종일 네 눈치만 보느라 아주 애를 먹었다고, 어? 넌 알려나 모르겠어. 하지만 알고 있겠지? 내가 너 때문에 마음 고생 심하게 했다는 거, 너도 분명 알고 있겠지! 근데 있잖아.. 아무리 단 둘이 있고 싶어도 그렇지.. 넌 하루종일 나한테 시비만 걸고.. 내가 무슨 말만 걸면 대답도 건성으로 하고.. 그거 이제 그만 좀 해줄래? 내가 모를 줄 알았다면 그건 네 착각이야. 내가, 어? 눈치가 백단이야. 괜히 놀림 당하기 싫어서 나랑 말도 안 섞으려는 거 다 알아.. 나도 대충 눈치 깠다고.. 아, 뭐지? 점점 밖이 밝아지는 듯한 이 기분.. 뭐지? 나 얼른 쓰고 나가야겠다. 어쨌든 결론은, 내가 너를 위해 친절히 기차표 시간까지 바꿔서 혼자 서울로 올라가 주겠다는 거지. 그럴 거면 애초에 왜 따라온 거냐 묻고 싶겠지만, 난 지금 존나 바빠서 그거에 대한 답변까지 해줄 여력이 없다. 남은 시간 둘이 잘 보내길 바란다. 아.. 할 말 더 있었는데 까먹었다. 이따 집 도착하면 연락해. 고맙다고 절까지 하러 올 필요는 없구.. 초코 버블티 한 잔만 사준다면 아주 고맙겠어. 그럼 난 여기서 이만 줄여야겠다. 점점 글씨가 날아가는 것 같다면 그건 네 착각이 아니야. 그래도 알아 볼 수 있으면 된 거지. 아.. 일찍 일어나서 그런가? 정신도 막 이상해지는 느낌.. 졸려.. 그럼 빠이~ -
"……."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오세훈의 쪽지였다. 노란 메모지에 꽤나 장문으로 쓰인 쪽지를 천천히 읽어내곤 망설임없이 반으로 접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분명 종이쪼가리였지만, 어디선가 괜히 오세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 제 기차표 시간까지 바꿨다는 사실에, 조금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가버리라고 일부러 눈치를 줬던 건 아닌데…. 사실 눈치를 주고자 의도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세훈이 혼자 멋대로 생각한 것이었다. 하여간 독특한 놈이다. 그래도 뭐, 고작 몇 시간 동안이라도 단 둘이 있을 기회를 얻게 됐으니, 기분은 좋았다.
*
오늘은 웬일인지 유난히 일찍 눈이 뜨였다.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자기에도 애매한 시각이었고, 어차피 잠을 청하려 해봤자 잠은 쉽게 안 올 것이었다. 특히 읽으면 읽을수록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도 같은 오세훈의 쪽지를 읽어낸 이상, 잠은 다 깬 것이나 다름 없었다.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며 잔뜩 뻗친 뒷머리를 정리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 넌 아마 자고 있겠지. 간밤에 배는 안 아팠으려나. 어제 편의점에서 초콜릿이나 사탕 좀 사줄 걸 그랬나…. 머릿속엔 이런 저런 생각들이 하나둘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고, 차가운 바닥에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거실의 냉랭한 공기가 느껴졌다. 그리곤 살금살금 걸음을 떼, 곤히 자고 있을 네 방 앞으로 다가갔다. 잘 자고 있을까, 혹시 잠결에 이불을 걷어낸 채 잠을 자고 있진 않을까, 하는 작은 걱정이 샘솟아서였다. 그냥 고개만 빼꼼히 집어넣어 확인만 하고 다시 닫자 생각하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나 안에서 문을 잠가놓은 건지, 손잡이는 쉽게 돌려지지가 않았다.
"……."
순간 머릿속이 도화지마냥 새하얗게 변했다. 문을… 잠가놓고 잤구나. 아무래도 남녀가 한 집에서 같이 잠을 잔다는 건 어느 누구나 불안하다고 느낄 법한 것이었다. 비록 방은 따로 쓴다 해도….
가만히 방 문 앞에 서서 규칙적인 문의 무늬를 바라보기만 하다, 작게 웃음을 짓곤 거실에 위치한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실컷 자고 일어나. 일어나서 밥 먹고, 바다 구경하러 가자.
*
어둠만이 가득하던 방 안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따사로운 햇빛 탓에 어느새 환해져 있었다. 굳이 눈을 뜨려 애쓰지 않아도 절로 눈이 뜨였다.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어지럽게 뒤엉킨 이불을 깔끔히 정리하곤, 협탁 위에 놓여있던 빗으로 머리를 빗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정전기가 장난 아니었다. 빗으로 머리칼을 빗음과 동시에 지지직-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들이 부스스 솟아오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어젯 밤엔 역시나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마법으로 인해 살살 아파오는 아랫배와 허리 때문이기도 했고, 사소한 행동으로 내게 잔잔한 설렘을 안겨준 김종인이 그 이유이기도 했다.
엄청난 돌려 말하기의 기술을 시전했던 나였지만, 김종인은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채 주었고, 선뜻 나를 위해 편의점까지 따라도 가주었다. 사실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그런 녀석의 섬세한 배려에 크나큰 감동을 받았었다. 표현력이 부족한 탓일까, 그런 커다란 마음을 전할 만한 말이라곤, '고마워.'라는 식상한 말밖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이럴 땐 정말 억울해. 분명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을 넘어선 감정인데, 왜 쉬이 말로 표현을 못 하겠지…. 왜 그러한 감정들을 모두 내포할 만한 적절한 단어가 없는 걸까. 왜 이 세상의 언어들은… 한정적인 걸까.
한참 동안 혼자만의 생각에 갇힌 채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던 것 같다. 만약 잠이 안 오면 카톡을 보낼 테니, 보는 즉시 제 방으로 와 저를 재워달라 말하던 김종인은 금세 잠이 들어버린 건지, 30분이 지나도, 한 시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종인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기만 해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어떻게 바로 옆에 앉아서 잠을 재워줘….
"……."
작게 하품을 하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자기 전 잠가두었던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아마 잠이 많은 김종인은 아직 꿈나라를 여행 중일 테지. 오세훈은… 잘 모르겠네.
"… 어…."
"깼냐."
방문을 열고 거실로 발을 내딛자마자 보여오는 얼굴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인기척에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겨온 김종인이 짧게 말을 내뱉었다. 그런 녀석에게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녀석과 조금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살포시 앉았다.
"일찍 일어났네…."
"응, 눈이 일찍 뜨이더라."
"오세훈은 아직 자?"
"아,"
"응?"
"걔 사라졌어."
"… 엥?"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딱딱하게 말을 내뱉는 김종인을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 내게 흘끗 시선을 주던 녀석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먼저 갔어."
"… 왜?"
"… PC방이 그립대."
"오세훈답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살풋 웃던 녀석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먹으러 가자."
*
바다에 왔으니 칼국수 한 그릇은 꼭 먹어야 한다는 김종인의 말에, 아침 식사는 칼국수로 때웠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칼국수라 그런지, 바로 맞은편 자리에 김종인이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불편함 따위 없이 후루룩 후루룩 꽤나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배부르게 아침 식사를 해결하곤 펜션으로 향했다.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있는 짐들을 정리하곤, 거실에 앉아 TV를 봤다. TV에선 지루하기 그지없는 다큐 프로그램과 시사 프로그램만 방영을 해주고 있었다. 가만히 네모난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꾸벅꾸벅 졸려던 찰나,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잠 좀 깨라 말하는 김종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손길에 흠칫 놀라 녀석을 바라보았고, 그런 내 모습에 곧이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나가서 바람 좀 쐬자.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깨끗한 모래 위를 천천히 걸으며 흘끗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조금도 예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일정한 간격으로 눈만 꿈뻑일 뿐, 어떠한 표정도 걸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잔잔한 바다의 소리를 들으며 아무런 흔적도 새겨지지 않은 모래 위를 좋아하는 사람과 나란히 걷는 기분이란, 정말이지 행복한 것이었다. 굳이 영양가 있는 대화를 주고 받지 않아도 됐다. 그냥 내 옆에 네가 있고, 네 옆에 내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쁘고 설렜으니….
"어째 바다 와서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네."
"……."
"앉을까."
천천히 걸음을 떼며 찰랑이는 바다의 물결을 바라보던 김종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서며 말했다. 그리곤 망설임없이 모래 위에 털썩 앉는다. 그런 김종인을 따라 두 걸음 옆에 자리를 잡아 앉았고, 살짝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내게 시선을 주던 녀석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앉곤 애꿎은 모래로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 오세훈 도착했을까?"
"궁금하면 직접 연락이라도 해보든지."
걸을 땐 서로간에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니, 무의미한 대화라도 오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머리를 굴리다 결국 떠올려낸 주제가 바로 오세훈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내 물음에 녀석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주변에 놓여있던 나뭇가지로 모래 위에 알파벳을 새기는 듯한 재미없는 행동만을 계속할 뿐….
"아, 나 궁금한 거 있어."
"응?"
"그때 물어 보려다 깜빡한 건데,"
"뭔데?"
"너 저번에 남자 향수 구경했던 적 있잖아."
"아…, 응."
"선물해줄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
"남자 향수만 구경하던 게 좀 이상해서."
"… 사촌 오빠 생일 선물 사려고 구경하던 거였어."
급히 거짓말거리를 생각해내곤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러자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아, 그래.
"또 묻고 싶은 거 있는데."
"뭔데?"
들고있던 나뭇가지를 다시 내려놓던 김종인이 바로 앞의 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그런 녀석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곤 가만히 녀석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도대체 뭐가 묻고 싶은 건데. 괜히 뜸을 들이는 녀석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저번에 나한테 물었지."
"……."
"우린 무슨 사이냐고."
"……."
"그거, 왜 물었던 거야."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질문이었다. 벌써 잊어버리고도 남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녀석은 내가 스쳐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던 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귀에 박히듯 들어온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도 애매했다. 그냥 친구 사이라 단정을 짓기엔 너와 내 사이가 너무 가깝고, 그렇다 해서 연인 사이는 절대 아닌 애매하고 복잡한 관계…. 헷갈려서였어. 넌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난 이미 너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넌 단지 나를 친구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으로만 볼까 봐 두려웠어. 상처 받을 거 각오하고 물었던 건데, 네 입에서 나온 말은 그거였지. 둘도 없는 친구….
"그냥.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궁금해서…."
"……."
"이상하게 듣진 말고…."
"……."
"그, 뭐냐… 난 널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거든…"
"……."
"근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냥 그게 궁금해서…"
"… 그래."
녀석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축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애초에 그런 질문을 왜 했을까, 라는 후회감이 다시금 물밀듯이 밀려왔다.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단지 궁금해서 물어봤던 건데…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살다 보니 너한테 이런 말도 듣네."
"……."
"궁금할 게 뭐가 있어. 당연한 거잖아."
"……."
"나도 너 충분히 좋은 친…"
"……."
"… 좋다 생각해."
바다 쪽으로 향해있던 녀석의 시선이 내게 닿아왔다.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있다 짙은 녀석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었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씨익 웃어보이는 녀석 탓에 급히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쉴새없이 달아오르기 바쁜 얼굴이 이젠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그저 어지러이 섞인 모래들을 바라보며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을 무렵, 녀석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니까, 약속해."
"… 약속?"
"나 군대 갔다올 때까지 기다려 줘."
"… 뭘 기다려 줘?"
"제대하고 연락 하려는데 막 번호 바껴있고, 해외 나가있고… 그러지 말라고."
"아, 내가 무슨…."
"남자도 막 만나고 다니지 말고."
"……."
"내가 솔로인 이상, 너도 솔로여야 해."
"… 그런 억지가 어딨어? 넌 진짜 억지대마왕이야."
"그걸 이제 알았다면 유감이네."
"… 참나."
작게 코웃음을 치곤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심장이 반응하는 것도 이젠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익숙했다. 넌 어찌 그렇게 웃는 얼굴이… 멋있는 거야. 짙게 쌍꺼풀이 그려진 깊은 눈, 동그란 코와 도톰한 입술. 심지어, 흩날리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멋있지 않은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아무래도 콩깍지가 제대로 씌여버린 듯했다.
"내가 예상하는데, 너 대학 들어가자마자 여친 생길 걸?"
"왜."
"… 그냥. 그럴 것 같아."
"그냥 그럴 것 같은 건 뭐야. 싱겁긴."
"분명 주변에 너 좋다는 동기들이나 선배들도 넘쳐나겠지.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여자의 직감이야. 이상한 누나들이나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면 안돼. 알지?"
"내가 한두 살 먹은 애기도 아니고."
피식 웃으며 대답을 하는 김종인을 흘끗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일단 졸업을 함으로써 녀석과 만나게 될 일은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었고, 당연하듯 녀석의 머릿속에 나란 존재는 서서히 잊혀지게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면 여자친구도 사귀겠지. 나보다 예쁜 여자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는데, 대학에도 널리고 널렸겠지. 그 많은 여자들 중에 김종인 눈에 차는 여자가 과연 단 한 명도 없을까….
세상엔 네 겉모습만 보고 네게 접근을 해오는 사람들이 많아. 안 그럴 거라는 거 알지만, 그런 사람들에겐 네 마음을 조금도 안 줬으면 좋겠어. 내가 뭐라고 너한테 이렇게 참견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난 그냥 네가 좋아서… 너의 모든 것이 좋아서….
"넌 나한테 할 말 없냐."
"할 말?"
"궁금한 거라든지."
갑자기 이런식으로 물어오면, 그나마 있던 궁금했던 것도 말끔히 잊어버리게 된다. 제 무릎을 세우곤 가지런히 손을 올려놓은 채 나를 바라봐오는 눈동자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여러 생각들로 뒤죽박죽 엉켜있던 머릿속이 하얀 물감으로 범벅이 된 것처럼 말이다.
"어…."
"없구나."
"그건 아니고…."
분명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이는 김종인이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닐 것이었다. 안 그러게 생겨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삐지고 꽁해있는 녀석이라는 걸 잘 알기에, 어떤 말이라도 꺼내놓기 위해 천천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직접 말했던 적은 없는데…, 난 진짜 너한테 고마웠던 적이 믾아."
그동안 내가 김종인으로부터 받았던 것들에 대한 고마움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관심 없는 척, 무신경한 척을 해보이며 무심히 챙겨주는 모습이 좋았다. 내가 지나가듯 흘려서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모습 또한 감동이었다. 일말의 감정 없이 머리가 시키는 대로 행동을 했던 거라 해도 좋았다. 그런 행동으로 인해 녀석에 대한 내 감정만 점점 커져갈 뿐이었지만서도, 상관은 없었다. 그냥 이런 설렘, 이런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좋달까….
이것 저것 하나하나 다 챙겨줘서 고마워. 네게 설렘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나한테 왜 고마워."
"……."
"남들처럼 다정하지도 않고, 너 보면 장난만 걸잖아."
다정하지 않아도 그게 너니까 고마운 거야. 다정하지 않아도, 너라면 좋아.
"그건 인정."
"뭐야."
"어쨌든 고마운 건 맞아. 다른 반인데 급식도 같이 먹어주고…"
"……."
"틱틱대긴 해도 내가 말하는 거 다 받아주고…"
"너 어디 가냐. 이민이라도 가?"
"아, 뭐라는 거야…. 아니거든?"
"아님 말고."
"그냥. 고마워. 이것 저것 다…."
"……."
"곧 졸업이네. 진짜 실감 안 난다."
"좋아?"
"… 별로."
"나도."
"넌 왜? 예전엔 빨리 졸업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렀었잖아."
"너랑 학교 계속 다니고 싶어."
"……."
"너 놀려먹는 게 내 삶의 낙 중 하난데, 대학 가면 자주 못 만나잖아."
작게 하품을 하며 말하는 김종인을 바라보다 배싯 웃어보였다. 그리곤 뒤이어 들려오는 녀석의 말에 어색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자주 만나.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 씹으면 너희 집 앞에서 땡깡부릴 거야. 연락 좀 하라고."
"너야말로…."
말끝을 흐리며 답하자 개구지게 웃으며 내 이마에 딱밤을 준다. 가자. 시간 얼마 안 남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녀석이 말했다. 엉덩이에 묻은 모래들을 털곤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녀석을 따라 걸음을 뗐다. 그렇게 바다에서의 1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렀고,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기차 안은 제법 한산했다. 여행을 다녀온 듯한 4인 가족, 예쁜 추억을 만들고 다시 현실로 향하려는 듯한 한 쌍의 커플, 그리고 나와 김종인…. 그게 다였다. 어김없이 창가 쪽은 내 자리였고, 먼저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나 눈이라도 오려는 건지, 하늘의 색은 탁하기만 했다.
"종이야, 날이 흐려."
시선은 창밖에 둔 채, 옆자리에 앉은 녀석에게 말했다. 종이야! 하늘이 검은색이 됐어! 김종인, 밖이 까매. 김종인, 비가 올 것 같아. 예나 지금이나 녀석에게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한결 같았다.
"하늘이 슬픈가 봐."
어렸을 땐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곤 했다. 하늘이 슬픈가 보네. 밖이 어두워졌어. 하늘이 슬프지 않게 해달라며 마음속으로 기도도 했던 적이 있다.
슬쩍 고개를 끄덕이곤 창문에 호호- 입김을 불었다. 투명하던 유리창이 입김으로 인해 뿌옇게 변했다.
"안 피곤하냐."
"그냥 살짝…. 넌?"
"난 졸려."
"… 잠만보."
투덜대듯 내뱉는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오기 시작했다.
"도착하면 깨워."
"도착할 때까지 잠만 자게?"
"중간에 깰 수도 있고."
너 자면 나 혼자 심심한데…,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꾸욱 삼켰다. 피곤하다니 어쩔 수 없지. 그냥 아무 말 없이 이 상태로 창밖만 구경을 해도 좋을 듯했다.
"아."
"응?"
"사진 안 찍었네."
"사, 사진?"
"바다에서 기념 사진 하나도 안 찍었잖아."
"… 까먹었어, 새까맣게."
그저 입술을 깨물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녀석이 제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지금이라도 찍을까. 바다가 배경은 아니지만."
"……."
"예쁜 짓 좀 해봐."
"… 뭐?"
"사진 찍게 포즈 좀 취해보라고."
"무슨 포즈를…."
"정해줄까."
나름 진지하게 말을 내뱉던 녀석이 씨익 웃으며 살며시 내 손을 잡아왔다. 순간적으로 닿은 감촉에 놀라기도 잠시, 잡은 손의 검지 손가락만을 펼치게 만든 뒤 조심스레 내 볼 쪽으로 향하게 해주는 녀석의 행동에 웃음이 터졌다.
"이러고 찍어."
"이게 언제적 포즈야…."
"불만이냐. 더 이상한 포즈로 바꿔줘?"
"… 치."
일정한 속도로 눈을 꿈뻑이던 김종인이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네모난 화면엔 검지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는 듯한 어정쩡한 포즈를 취해보이는 나와, 그런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고 있는 김종인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찍는다. 녀석의 한 마디가 허공에 내뱉어졌다. 찰칵- 소리와 함께 이번 여행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 찍혔다.
*
새근새근- 옆에선 김종인의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졸리다더니 잘 자네. 진짜 졸렸나 봐.
"……."
흐리던 하늘은 어느새 점점 탁하고 칙칙한 색으로 변해갔다. 하늘에선 아주 조그마한 눈송이들이 미세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에 작은 물방울들이 하나둘 맺혀오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눈송이지만, 분명 살갗에 닿으면 금세 녹아버리겠지.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오늘따라, 아니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곤히 잠만 자는 김종인을 흘끗 바라보다 다시 또 한 번 한숨을 뱉었다. 짝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답답하고 힘든 것인지 몰랐다. 도대체 많은 연인들은 과연 어떻게 사랑을 이룬 걸까. 나처럼 짝사랑을 하다 기적적으로 사랑을 이룬 사람도 있을까. … 그건 정말이지 희박한 가능성일까.
너와의 친구 사이마저 깨기 싫어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겠다는 게 얼마나 슬프고 착잡한 일인지, 너는 알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너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오랜 친구가 아닌 그냥 친구였다면 어땠을까. 내가 너에게 가까이 다가서기가 적어도 지금보단 쉽지 않았을까.
예전의 난, 네가 그저 좋은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게 나만의 생각이 아닌, 너만의 생각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좋다 느낄 만한 여자를 네가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이젠 어떤 좋은 여자도 난 양보를 못할 것 같아. 내가 네 옆자리였으면 좋겠어. 어째 너에 대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아. 넌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연애,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는 여자친구…. 네 연애 상대가 나일 수는 없는 걸까. 네 여자친구… 내가 하면 안 되는 걸까.
"……."
생각을 하면 할수록 우울했다. 나도 모르게 눈가에 가득 차오른 눈물을 대충 소매로 닦아내곤 애꿎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작은 눈송이들이 여러 개 뭉쳐 제법 큰 눈송이를 만들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로 인해 창문이 자꾸만 뿌옇게 변했다.
욕심은 나지만, 욕심 내지 않을게. 네가 남자친구로 곁에 남든, 친한 친구로 곁에 남든… 상관 안 할게. 그냥 옆에만 있어줘.
우리 오래 보자, 김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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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인 것 같은 이유는 왜죠..? 사실 목요일에 오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서야 오게 됐네요. 죄송합니다. (꾸벅) 아 그리고.. 럽뮈롸잇! 드디어 우래기들.. 컴백을 했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노래 왜이리 좋은 거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취향 저격.. 탕탕탕☆ 종인이 머리 색은 왜이리 예쁜 거며..... 준면이는 01년생이 확실하다죠? 헣ㅎ허허... 저녁 시간인데 다들 밥은 드셨나요? 전 치킨으로 때우려구요..☆ 다들 맛있는 저녁 드세요! 꼭 밥 드셔야 합니다. 저처럼 치킨으로 때우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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