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9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기)
개학. 그렇게 오지 않길 바랐던 날이 이렇게나 빨리 와버리고 말았다. 한 달 남짓 되는 겨울방학 동안 난 뭘 했더라….
일찍 일어나는 건 언제나 한결같이 힘들다. 기본 10시나 11시에 일어나던 행복한 방학 생활이 벌써부터 그리웠다. 씻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눈이 감겼다.
"……."
작게 하품을 하며 교복 와이셔츠의 단추를 잠그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양말을 꺼내들었다. 노란 도라에몽이 그려진 양말이었다. 도라에몽은 원래 파란색 아닌가…. 이 양말은 신을 때마다 짝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껴입고 나와.]
[아, 목도리도 챙겨라.]
오늘 하루종일 바람이 많이 불 거라던 기상캐스터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왠지 오늘도 까먹고 그냥 나올 것 같아 목도리를 챙기라는 지나치게 간단하고도 정 없는 문자를 보냈다. 답장을 바라고 보낸 문자는 아니었지만, 곧이어 알겠다며 물결까지 붙여온 문자 메시지가 도착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네가 귀여운 짓을 골라서 하는 걸까, 그저 아무것도 아닌 네 행동을 내가 귀엽게 여기는 걸까.
고작 세 글자에 휘어지는 물결 하나만 추가된 짧은 문자 메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다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바람도 많이 부니 교복 와이셔츠 위에 니트라도 겹쳐 입고 갈까, 생각하며 침대에 걸터앉은 채 옷장의 서랍을 열었다. 몇 개의 니트들 사이로 얼마 전 생일 선물로 받았던 니트가 가지런히 개진 채 한가운데 놓여있었다. 사실 아까워서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새 것이었다. 부끄럽지만, 선물을 감싸고 있던 포장지도 그냥 버리기 아까워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벌써 몇 번째 받는 생일 편지인지도 모르겠을 정도로 서랍 속엔 생일 편지가 차곡히 쌓여있었다. 매번 귀여운 편지지에 편지를 써주던 넌 이번에도 어김없이 귀여운 편지지에 편지를 써줬지. 귀여운 강아지 캐릭터가 그려진 노란 편지지…. 이번엔 유독 편지를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귀여운 편지지에 빽빽히 적힌, 편지지보다도 더 귀여운 네 글씨체 때문이었을까. 편지를 몇 번이나 정독했는지 모른다.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다시 읽고…. 네겐 절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비밀이었다.
*
"다녀오겠습니다."
"종인아, 오늘도 4교시까지만 하니?"
"네. 졸업할 때까지 계속 4교시예요."
"졸업식 언제지? 내일 모레지?"
사과를 깎으며 물어오는 엄마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리곤 현관 쪽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부엌으로 옮겨, 예쁜 접시에 놓인 사과 한 조각을 집어 입 안에 쏘옥 집어넣었다.
"다여오게씀미다."
입 안에 가득 찬 사과 탓에 발음이 잔뜩 뭉개졌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곤 서둘러 운동화를 신은 뒤 현관을 나섰다. 바람이 쌩쌩 불어오진 않았지만, 미세하게 찔끔찔끔 불어오는 게 살짝 짜증이 났다. 약한 세기와는 대조되게 꽤나 차가운 바람이었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
*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몇 분 더 일찍 도착해 휴대폰 게임을 실행시켰다. 배터리는 58퍼센트밖에 없었지만, 가만히 서서 멀뚱히 기다리기만 하기엔 심심할 것도 같아 게임을 실행시켜야 했다. 하지만, 이것도 내일 모레면 끝이겠지. 항상 너보다 일찍 나와 네 집 앞에서 너를 기다리고 함께 등교를 하는 게 내 일상이었는데, 졸업을 함과 동시에 사라지게 될 소소한 행복이었다. 아직 멀게만 느껴지던 졸업식이 바로 내일 모레로 다가올 줄이야.
"워!"
"아, 깜짝…"
등을 살짝 치며 놀래켜오는 모습에, 사실 놀라진 않았지만 조금은 놀란 척을 해보였다. 따뜻하게 목도리를 두른 모습이 꽤나 귀엽고 기특했다.
"멍하니 서서 뭐해?"
내일 모레가 졸업식이라는 생각으로 뒤덮인 머릿속이 차분히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이제 막 로딩이 완료돼 주제곡이 흘러나오고 있는 게임 화면을 바라보다 천천히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애써 고개를 저으며 나보다 한참이나 낮게 있는 조그마한 어깨에 팔을 둘렀다.
"벌써 졸업이네, 내일 모레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네가 그저 앞만 바라보며 말을 건네왔다. 그러게. 벌써 졸업이네. 시간 진짜 빠르다. 뭐했다고 벌써 졸업이야. 머릿속에 두둥실 피어오른 말들을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론 내뱉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곤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시원섭섭하다, 그치? 뒤이어 들려온 예쁜 목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시원섭섭한 감정을 넘어섰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졸업하면 마냥 행복한 날들의 연속일 거란 일차원적인 생각만 했어. 이제 학교에서 해방되는구나. 더이상 교복을 안 입어도 되는구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구나. 아이 같은 생각만 했어. 시원섭섭하지 않아. 하나도 시원할 게 없어. 오히려 답답하기만 해. 졸업 하기 싫어. 야자를 매일 해도 좋아. 하루를 쪽지 시험으로 시작한다 해도 좋아. 학교… 계속 다니고 싶다. 너랑.
"손가락은 왜 그러냐."
"아, 이거? 어제 과일 깎다가 베였어."
"덜렁대긴."
뽀로로 데일밴드가 붙여진 검지 손가락을 바라보며 툭 내뱉듯 말했다. 많이 다쳤어? 피는? 조심 좀 하지…. 남들처럼 다정하게 걱정을 해주는 게 난 왜이리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다정하고 부드럽게 답을 해주려 해도 그게 힘들었다. 생각은 하면서 말로는 내뱉기가 어려웠다. 여자들은 다정한 남자를 좋아하겠지. 물론 너도. 난 너한테만 좋게 보이면 되는데. 네가 어떤 남자를 좋아할까. 감도 못 잡겠어.
*
오랜만에 발을 내딛는 학교였다. 제 교실로 쏘옥 들어가버리는 뒷모습을 확인하고나서야 나도 반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고, 교실을 들어서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어 보이는 오세훈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몇몇은 오늘이 개학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채 아직까지 꿀 같은 방학을 보내고 있는 건지, 교실엔 고작 절반의 학생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니까 죽겠더라. 난 내가 알람도 끄고 계속 잘까 봐 일부러 1분 간격으로 계속 울리게 맞춰놨다니까. 정확히 아홉 번째 알람벨이 울렸을 때 딱- 일어났어."
"그래."
"맞다, 나 어제 합격했다고 연락 왔다. 컴퓨터 공학과 붙음."
"축하한다."
내 자리로 와 아침부터 긴 문장들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오세훈에게, 작게 하품을 하며 대충 대꾸를 해주었다. 꽤나 시원찮은 내 대답에 녀석이 인상을 구기며 앞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애꿎은 교실 바닥을 바라보며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녀석이 크게 손뼉을 치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싸! 곧 졸업!"
"군대 잘 가라."
"… 지는 안 갈 것처럼 말하네."
"너보다 1년 늦게 가잖아."
"역시 빠른년생이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오세훈을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입대라는 커다란 관문을 코앞에 두고도 졸업이 바로 내일 모레라는 사실 하나에 기뻐하는 어리석고도 미련한 놈이 바로 내 주위에 있었다니. 전혀 소름 끼칠 일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놈이라는 건 이미 오래 전에 깨달은 사실이었으니.
"일단 군대 가기 전에 마음껏 즐겨놔야지."
"뭘 어떻게 즐길 건데."
"PC방 죽돌이가 될 거야."
"그건 지금 네 모습이잖아."
"… 아, 나 그냥 학교 1년 다니고 입대할까? 아니야. 빨리 갔다오는 게 좋지."
자문자답을 하며 곰곰이 생각하는 오세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시간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따분하기 그지 없는 과목들로 가득한 수요일 시간표였다. 그러나 아무렴 상관 없었다. 어차피 시간마다 영화를 보거나 자유시간을 갖게 될 터였다.
"아, 맞다. 이따 3교시에 네가 좋아하는 거 한대."
"뭔데."
"성교육."
"……."
"미안하다."
"그거 왜 하는데. 누가 그래?"
"원래 고3 이맘 때쯤 한 번씩 한대. 아까 방송도 나왔어."
뭔 희한한 전통이 다 있네. 당장 내일 모레가 졸업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같은 날 성교육이라니. 정말이지 특이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학교였다. 대부분의 다른 학교보다 겨울방학을 늦게 시작해 개학도 꽤나 늦은 편이었고, 그로 인해 졸업식까진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아니 그것보다, 개학식에 성교육을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 잔다."
할 것도 없고, 오세훈도 대화 주제가 떨어진 것 같으니 잠이나 자자 생각하며 책상 위로 엎드렸다. 이제 이러고 잘 일도 내일이면 끝일 것이었다. 시간은 매정히 잘만 흘러갔다. 잠시만 멈춰달라, 아주 잠시만 가만히 있어달라 붙잡아 보아도 전혀 잡혀주지 않는 게 시간이었다. 이렇게 또 허무하게 흘러가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이 순간마저도 어느새 과거가 되어 있겠지.
"야, 니트 예쁘냐?"
책상 위에 엎드려있는 내 위로 오세훈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녀석을 빤히 바라보자, 덩달아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온다.
"○○이한테 생일 선물로 받은 거 말이야, 인마."
"… 아."
"예뻐? 어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뭐?"
"선물로 니트 받은 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어떻게 아냐니. ○○이가 말 안 해줬어? 그거 나랑 같이 가서 고른 거야."
"같이 갔다고? 둘이?"
"그래. 아, 뭘 또 그런 유치한 걸로 질투를 하고 그러시나~"
"……."
"걱정 마. 그렇게 여기 저기 많이 돌아다녔는데도 아무도 우릴 연인으로 안 보더라."
"……."
"젊은 신혼부부로 보더라고."
"… 미친새끼."
"농담이지."
제법 살벌하게 내뱉어진 욕지거리에 녀석이 황급히 사과를 해왔다. 재미도 없고 감동은 더더욱 없는 저런 장난을 치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 궁금했다. 큐피트라느니, 사랑을 이룰 수 있게 도움이 되어주겠다느니 온갖 원맨쇼를 보여주던 녀석은 어째 가면 갈수록 내 신경만 긁어오는 것 같았다. 그만 하라며 따끔한 소리를 해주기도 이제 지칠 지경이었다. 네가 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같이 옷을 구경하고 온 건데. … 그것도 단 둘이. 속에선 열불이 났지만, 애써 꾸욱 참았다.
"아까워서 못 입고 있어."
"… 왠지 넌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어. 옷 꺼낼 때도 보물 여기듯 막 두 손으로 이렇게-"
"보물 맞아."
"… 제발."
미세하게 인상을 찡그리곤 토하는 시늉을 해보이는 녀석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곤 다시 책상 위로 엎드려 팔에 고개를 묻었다.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솔솔 잠이 쏟아졌다.
*
그렇게 대략 두 시간 동안을 책상에 엎드려 잠으로 보냈던 것 같다. 물론 잠에서 깨어난 것도 내 의지는 아니었다. 액션 영화라도 보는 건지, 시끄러운 소리가 자꾸만 귀와 머리를 괴롭혀왔고, 더이상 잠을 잘 순 없을 듯해 억지로 일어난 것이었다. 잘 뜨이지도 않는 눈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힘겹게 바라보았다. 벌써 2교시가 끝나갈 시각이었다. 방금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시간은 꽤나 많이 흘러 있었다.
"……."
선생님이 틀어주신 액션 영화가 별로 재미가 없는 건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슬쩍 눈을 비비곤 화면에 시선을 옮겼다. 휘황찬란한 장면들이 순식간에 바뀌는 듯한 복잡한 효과로 인해 화면이 산만하면서도 어지럽게 느껴졌다. 역시 액션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제맛이지. 같이 영화 보러 가고 싶다. 같이 보고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또 보러 가고 싶지….
아쉽게도 이제 사라져버린 그 날의 낯선 감각을 어렵사리 떠올려내고자 왼손을 바라보았다. 한 손 안에 쏘옥 들어오고도 살짝 공간이 남던 조그마한 손을 잡았을 때의 그 느낌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설렘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손을 잡으려던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나를 가려오는 귀엽고 작은 손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나와버린 행동이었다. 네가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면서도 쉽게 놓을 수가 없었어. 손에 땀이 차도 계속 잡고 싶었어. 연인들만 할 법한 스킨쉽을 해와서 많이 놀랐지. 네 생각은 안 하고 내 생각만 했어. 내가 이렇게… 이기적이야. … 다 네가 좋아서 그래. 정말 많이.
"뭐야. 깼네."
"방금 깼다."
"영화 하니까 뭐 생각나는 거 없냐."
"뭐."
"모르는 척 하긴. 너 왜 이번엔 나한테 후기 안 말해줘? 맨날 무슨 일 있으면 꼬박꼬박 잘도 보고하던 놈이."
"내 마음이지. 굳이 너한테 계속 보고할 필욘 없잖아."
"… 충격."
꽤나 충격이라도 먹은 듯 오세훈이 입을 막으며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곤 다시 씨익 웃으며 얄밉게 물어온다.
"이미 본 영화, 또 본 소감이 어때? 괜찮았냐?"
"괜찮지 그럼."
"하여간 콩깍지가 제대로 씌여가지고…."
말은 안 했지만, 사실 오세훈과 먼저 본 적이 있는 영화였다. 같이 영화를 보고 싶긴 한데, 믿을 게 못 되는 인터넷 후기들만 보고 영화를 고르는 건 도박일 것도 같아 나름 생각해낸 일종의 꼼수였다. 이왕이면 재미있는 영화를 봐야지. 무턱대고 골라낸 영화가 재미 없으면 안 되잖아.
시험삼아 오세훈과 본 영화는 다행히 나름 재미가 있었다. 옆에 앉아 알게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보던 오세훈 탓에 제대로 집중을 못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이 영화라면 분명 너도 재밌게 봐줄 것 같다는 생각에 벅차 그날 밤은 잠도 제대로 못 이뤘던 것 같다. 이미 본 영화라는 건 상관 없었다. 수십 번 본 적이 있는 영화라도 네가 본 적이 없다면 같이 봐줄 수 있었고, 잘 못보는 공포 영화라도 네가 보고 싶어 한다면 몇 번이도 같이 봐줄 수 있었다. 이쯤 되니, 내가 생각해도 난 심각한 중증 환자임이 확실했다.
*
오세훈의 말대로 3교시는 성교육 시간이었다.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칼같이 교실 안으로 들어와 간단히 소개를 하던 보건 선생님이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보건 선생님과 안면을 트고 있을 정도로 보건실을 자주 들락이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졸업을 함과 동시에 어엿한 대학생이 될 테니 올바른 성 관념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겠다며, 절대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는 차원에서 한 시간을 마련한 것이라 했다. 취지는 좋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며 엎드려 잠을 청하거나 저들끼리 수다 떨기에 바쁜 학생들이 몇몇 보였다.
"그걸 꼭 오늘 해야 하나요? 오늘 개학 날인데….그리고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구요."
지루하다는 듯 책상에 엎드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어느 남학생이 불만조로 소심하게 내뱉었다. 그저 가만히 웃고만 있던 선생님이 남학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 아는 내용이면 네가 나와서 설명해볼래?"
"… 아, 제발요…."
"그리고, 너희들한테 개학이 그리 중요한 날이었나? 개학이라 해서 뭐, 평소랑 다를 바 없잖아?"
"… 그래도요…."
작게 어깨를 으쓱이던 그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겨왔다. 꽤나 말끔한 인상을 지닌 그가 나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왜 자꾸 내게 저런 의미 모를 미소를 지어오는 것인지가 궁금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그가 다시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어차피 대학 가면 다들 여자친구 사귀고, 남자친구 사귈 거잖아. 물론 지금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건쌤 말이야. 왜 자꾸 널 쳐다보면서 말씀 하시냐. 슬쩍 눈치만 살피던 오세훈이 내게 살며시 물어왔다.
"몰라, 새끼야."
"… 넌 인마…, 네 평소 말버릇이 이렇게 험하다는 걸 ○○이가 알아야 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오세훈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숨 쉬지 마. 땅 꺼진다."
"휴우우-"
어째 청개구리를 능가하는 듯한 녀석은 내 말에 한숨을 더욱 크게 내쉬었다. 하여간 매를 버는 녀석이다.
*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학교에 온 후로 계속 잠만 자느라 못 봤으니, 몰래라도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망설임 없이 향한 옆 반은 앞문과 뒷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불도 다 꺼져있는 걸 보니, 아마 영화를 보고있는 듯했다. 아쉽지만 창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교실 안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창가쪽 맨 끝 자리에 앉아 일정한 간격으로 눈을 꿈뻑이기만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쉬는시간 종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영화를 보고 있다는 건, 영화가 너무나도 재밌어 쉬는시간까지 이어 보자는 몇몇 학생들의 요청 때문이겠지.
"… 아, 뭐야."
창틀에 팔을 기댄 채 교실 안을 훑어보는 데에만 정신이 팔리려던 찰나, 두세 장 정도 되는 프린트물로 갑작스레 내 머리를 살짝 쳐오는 누군가로 인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어루만지며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뒤를 돌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한 명찰이었다. 김준면.
"선생님이 먼저 교실을 나가시면 그때 일어나야지, 인마."
"아…, 죄송합니다."
"주요 과목 선생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혼을 내듯 제법 딱딱한 어투로 말을 하던 그가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금 말을 건네왔다.
"아무리 여자친구가 보고 싶었다지만, 우리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자."
"네?"
"너, 아까 내가 말한 내용 똑똑히 새겨 들었어? 집중 안 하고 있었던 건 아니고?"
"… 집중해서 들었어요."
"그래. 뭘 배웠지?"
"… 여자의 침묵은 예스가 아니다."
"또?"
"여자가 머뭇거리는 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집중 열심히 했네."
"……."
"명심해. 알았지?"
"근데 왜 저한테…"
"내가 너희 반에서 애인 있는 애를 너밖에 몰라서."
"애인이요?"
"그래. 곧 졸업인데 좋겠네. 여친이랑 놀러 다니지만 말고 영어 공부도 좀 하고 그래."
그가 말갛게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저번에 보건실에서도 그렇고, 그는 자꾸 내게 애인이 있다며 확신이라도 하듯 말을 해왔다. 물론 그게 사실은 아니었지만, 굳이 해명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이런 오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좋으면 좋았지, 결코 나쁘진 않았다. 이렇게나마 너랑 사귀는 사이일 수 있다는 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했다. 언젠간 현실이 되겠지. 머지 않아 현실로 다가오겠지. 머릿속으로, 마음 속으로 되뇌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건실 안 내려가세요?"
"4교시는 여기서 교육해야 하거든."
"아."
쉬는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앞문과 뒷문이 굳게 닫혀있는 교실을 가리키며 그가 답했다. 더이상 할 말도 없고, 들을 말도 없어 꾸벅 인사를 하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를 싱숭생숭한 기분이 느껴졌다.
*
지루하기만 하던 학교에서의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 홀딱 흘러가 버렸다. 4교시는 보건 선생님의 화려한 말솜씨로 진행이 된 성교육 시간이었다. 좀 뜬금 없긴 했지만, 어찌 됐건 좋은 취지로 진행이 된 것이었으니 상관은 없었다. 오늘도 역시나 칼 같은 종례로 제 할 말만 딱딱 전하고 반을 나서는 선생님께 인사를 하곤 복도로 발을 내딛었다. 김종인의 반도 마침 종례를 마친 건지, 하나둘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이밍도 참 좋지. 곧이어 뒷문이 열리며 여러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뒷문으로 나오겠거늘 생각하며 일부러 뒷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김종인이 아닌 오세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안녕."
"김종인은?"
"이야, 역시 김종인부터 찾네."
오세훈의 능글맞은 어투에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짓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기만 하던 녀석이 슬쩍 뒤를 돌아보곤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안녕. 난 먼저 간다."
뒷문이 아닌 앞문으로 나와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김종인의 모습에 살풋 웃음이 나왔다. 저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곧이어 녀석의 시선이 내게 향해왔다.
"언제 마쳤어."
"나? 방금."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이 가자며 말을 붙여왔다. 목도리 매. 나가면 추워. 뒤이어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서둘러 목도리를 꺼냈다. 급히 목도리를 두르려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녀석이, 내 손에 들려있던 목도리를 꽤나 무심한 손길로 빼앗아갔다.
"나 봐봐."
저를 봐보라는 말에 살짝 몸을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목도리의 모양을 잡던 녀석이 곧이어 섬세한 손길로 내 목에 목도리를 매주기 시작했다. 살짝살짝 볼에 스치듯 닿는 부드러운 손길에, 괜스레 마음이 떨렸다.
"끝."
예쁘게 목도리를 매준 녀석이 한 마디를 내뱉곤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가만히 넋을 놓은 채 그 웃음을 바라보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김종인은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 아무런 표정이 걸리지 않은 딱딱한 얼굴도 좋고, 잔뜩 찡그려진 화난 얼굴도 좋아하는 나지만, 역시 김종인은 웃는 얼굴이 가장 예쁘고 멋있다. 둥그런 눈매가 휘어지면서 그리는 예쁜 곡선, 도톰한 입술이 환히 벌어지면서 보이는 하얀 치아….
"왜?"
가만히 김종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지금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겨울인지 여름인지조차 파악하는 게 헷갈리게 되려던 찰나, 갑작스레 나와 눈을 맞추며 물어오는 녀석 탓에 마치 방금 꿈에서 깨어난 것과도 같은 느낌을 맛보게 되었다. 갑작스레 닿아버린 시선에 어쩔 줄 몰라하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웅얼대듯 말했다.
"… 새삼 잘생겨 보여서."
"뭐라고?"
"… 아니야, 아무 것도."
괜히 쑥쓰러워져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궁금한 걸 못 참는 녀석이 다시 물어오면 꽤나 곤란해질 것도 같아서였다. 너 잘생겼다고. 이 한 마디를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언제쯤 자연스러워질까. 과연 언제쯤…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익숙해질까.
한없이 설레지만, 결국 남는 건 애매함과 답답함 뿐인 우리 사이는 과연 언제쯤… 발전이 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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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만에 돌아왔네요. 이번주에 완결이 나긴 할 것 같아요 :) 시원섭섭하지만.. 더욱 발전한 사이도 봐야죠, 우리..! 지난 글이 초록글에 올랐더라구요!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한없이 부족한 글이지만 많은 사랑 주셔서 전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ㅠㅠㅠㅠㅠㅠㅠ 그냥 감사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 감사하고 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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