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7 (Happy B-Day)
"아니, 생일이 바로 내일인데 아직 생일 선물을 안 샀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오세훈이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저 소리를 벌써 몇 번이나 들은 건지 모르겠다.
바다 여행을 다녀온 날 이후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조차 제대로 설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이 임팩트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김종인의 생일도 단 하루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내일로 다가와 버리다니…. 매번 생일 선물에 대한 고민을 하긴 했지만, 결국 얻는 건 없었다. 최대한 좋고 실용성 있는 선물을 주고 싶긴 한데… 막상 생각을 해보면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번 생일은 꼭 준비를 알차게 해서 알찬 선물을 주고자 마음 먹었는데, 계획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약간의 조언이라도 얻고자 일단 급한 대로 오세훈에게 연락을 하곤 함께 마트로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안그래도 무섭게 생긴 애가 인상까지 찌푸리니 정말이지 살짝만 건드렸다간 한 대 얻어맞을 것도 같았다. 귀찮다는 건 알겠지만 그렇게 대놓고 싫은 티를 낼 필요는… 없잖아.
"뭐 생각해놓은 선물은 있어? 왠지 없을 것 같지만, 일단 예의상 물어는 봐줄게."
"… 그래. 네 예상이 맞아. 없어…."
"역시 나야."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며 자화자찬을 하던 녀석이 곧이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런 녀석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뗐고, 곧이어 발이 멈춘 곳은 저번에 김종인과도 구경을 했던 향수 코너였다.
"이런 건 어때? 김종인 생김새엔 왠지 이런 검정색 향수가 딱 어울… 컥…"
손을 뻗어 가장 위 칸에 놓여있는 향수를 집어들곤 시향지에 살짝 뿌려 향을 맡던 오세훈이 작게 기침을 했다. 그리곤 다시 원래 자리에 향수를 올려놓는 녀석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이건 아닌 것 같다. 향이… 어우, 심각하게 독해."
"일단 향수는 안 살 거야."
"왜?"
"돈이…."
"… 아…."
"향수는 이번 성년의 날 때 사주려고."
"김종인 빠른년생인데 무슨. 걔는 해당 안 되잖아."
"이씨, 내 마음이지."
"… 성년의 날엔 더 좋은 걸 줘야지, 바보야."
"더 좋은 거?"
"그래. 예를 들면…, 키로 시작하고 스로 끝나는 거라든지…."
"……."
"미안."
황급히 사과를 건네온 오세훈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다른쪽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 오세훈은 다른 의미로 내 심장을 쾅- 내려앉게 만들었다. 마치 내가 김종인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때 바다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유독 내게 김종인에 대한 주제로만 말을 걸어오는 게 조금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과 내가 김종인으로 인해 알게 된 사이였으니 당연한 건가…. 단순히 그게 이유라기엔 정말이지 찝찝했다. 나를 향해 던져오는 짓궂은 농담들이 모두 김종인과 관련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단 한 번도 김종인을 좋아하는 티를 냈던 적은 없는데…, 설마 눈치 챈 건 아니겠지.
"야! 이거 예쁜 것 같아!"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오세훈에게 시선을 옮겼다. 언제 남성 의류 코너로 걸음을 옮긴 건지, 녀석은 마네킹에 입혀진 스트라이프 니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서둘러 걸음을 옮겼고, 아니나 다를까 옷을 파는 곳이라 그런지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찾는 옷이라도 있으세요?"
조심스레 물어오는 직원에게, 잠깐 구경 좀 하려구요…,라며 어색히 대답을 하던 오세훈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옷 사주는 거 어때? 여기 예쁜 거 많은 것 같은데."
"어…, 그럴까? 마네킹에 입혀진 옷 예쁜 것 같아. 김종인이랑 어울릴까?"
"어울릴 것 같은데? 뭐, 직접 입어봐야 알겠지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가만히 마네킹을 바라보았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단가라 니트였다. 워낙 몸매가 좋은 김종인이니 뭔들 안 어울리겠냐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다시금 오세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내가 입어보고 나올까?"
"네가 왜 입어?"
"김종인 사이즈 알려면 나라도 대신 입어봐야지. 물론 어깨는 내가 더 넓지만."
"……."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못 믿겠어? 왜이래. 나 고2 체육대회 때 반 애들이랑 맞췄던 축구복 닉네임도 오깨미남이었다고."
"오깨미남…?"
"오세훈 플러스 어깨미ㄴ… 아, 됐어. 못 믿겠으면 말아. 어쨌든 내가 입어볼게."
마네킹이 입고있는 거랑 똑같은 거 주세요. 직원에게 사이즈까지 또박또박 말해주며 옷을 건네받은 녀석이 탈의실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가격이 싼 편은 아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단 저렴했다. 이걸 생일 선물로 주면 좋아할까….
"어때?"
벌써 옷을 입은 건지, 오세훈이 탈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별명이 오깨미남이라더니…, 어째 니트를 입으니 녀석의 어깨가 더욱 돋보이는 것도 같았다.
"예쁘네. 사이즈는 어때? 잘 맞아? 김종인 이 사이즈로 사주면 딱 맞겠어?"
"응, 이게 딱 좋아. 아…, 내가 김종인이고 싶다. 이거 선물로 받게."
"너도 하나 사지 그래."
"내가 돈이 어딨다고. 그때 바다에서 기억 안 나? 내가 다 샀잖아."
"그건 네가 자처해서 오총무가 쏜다느니 어쩐다느니 했던 거잖…"
"일단 난 지금 PC방 갈 돈도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이런 니트에 내 돈을 투자해? 어우,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차라리 PC방을 몇 번 더 가든가, 버블티를 몇 잔 더 사먹겠어."
"이 제품 쟤가 입은 사이즈로 계산해 주세요."
쫑알쫑알 말을 늘어놓는 오세훈을 애써 무시하곤 카운터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직원이 부르는 값을 지불한 뒤, 옷이 담긴 예쁜 봉투를 건네받았다.
"수고하세요."
*
녀석의 선물을 하나 구입하자 괜히 마음 한 켠이 놓이는 것도 같았다. 일단 크나큰 짐을 하나 덜어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옷을 구입한 후에도 오세훈과 천천히 이것 저것 구경을 했고, 저도 모르게 흘끗흘끗 속옷 코너로 눈길이 향하던 오세훈은 툭 던지듯 내게 말하곤 했다.
'그냥 속옷을 살 걸 그랬나? 독특하잖아. 십대의 마지막 생일 선물로 속옷을 딱-'
'… 변태.'
'변태라니 무슨 그런 심한 말을….'
'…….'
'속옷 사이즈를 몰라서 주저하는 거라면, 걱정 안 해도 돼. 그건 이미 내가 알고 있거ㄷ…'
'아, 하지 마!'
얼굴까지 빨개진 채 하지 말라 소리를 치고나서야 오세훈은 개구지게 웃으며 장난이라는 말을 건네왔다. 정말이지,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데에 도가 튼 놈임이 분명했다.
*
아무래도 니트 하나만 딸랑 주기엔 정이 없어 보일 것도 같아, 김종인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들도 소량 사든 채 집으로 향했다. 전부터 포장지 욕심이 있었던지라, 집엔 남는 포장지들이 넘쳐났다. 최대한 김종인의 취향에 맞추고자, 여러 포장지들 중 가장 녀석의 취향과 적합한 파란 포장지를 꺼내들었다. 포장을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포장은 할 수 있었다. 아까 구입한 니트와 여러 간식거리들을 적절히 배치하곤 조심스레 포장지로 감쌌다.
"……."
별로 기대는 안 했지만, 대충 모양은 그럴싸해 보였다. 별거 아닌 선물이지만, 꼭 녀석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는 길 근처 대형 문구점에서 구입한 예쁜 종이 봉투를 살며시 펼쳤다. 그리곤 포장지로 감싼 선물을 넓은 공간 안에 쏘옥 집어넣었다. 다행히 봉투 안은 남는 공간 없이 보기 좋게 선물로 가득 찼다. 파란 리본이 달린 봉투의 끈을 슬쩍 만지작거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곤 편지지를 꺼냈다. 귀여운 강아지 캐릭터가 그려진 노란 편지지였다. 애도 아니고 무슨 그런 편지지를 사냐며 옆에서 간섭을 하던 오세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강아지나 귀여운 캐릭터를 좋아하는 김종인을 위한 선택이었다. 전혀 안 그러게 생겨선 꽤나 아기자기한 것들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다. 이런 면에선 어째 나보다 소녀스러운 것 같기도….
책상 의자를 꺼내 앉곤, 글씨가 부드럽게 잘 써지는 검은색 펜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책상에 나뒹구는 이면지 하나를 집어 펜이 잘 나오는지 확인을 하고자 약간의 낙서를 끄적였다. 다행히 잉크는 매끄럽게 나왔으며, 펜의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
첫 인사말을 뭐라고 써야 할지가 애매해, To. 김종인.까지만 적은 채 5분 가량을 멍하니 앉아있어야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쓸 말이 무수히 떠올라 생일 편지를 술술 써내려가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왠지 마음처럼 손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물론, 쓸 말이 없어서 주저하는 건 아니었다. 녀석에게 쓸 말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말을 적는 것부터 머뭇거리고 있을 건 뭐람….
안녕, 김종인. 김종인, 안녕. 어떤 게 나을지에 대해 거의 10분은 고민을 한 것 같다. 고작 생일 편지 한 장이 뭐라고 이렇게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건지, 나도 참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대략 세 시간을 투자해 여차저차 편지는 끝을 맺었고, 편지지가 구겨지지 않게 조심조심 접어 편지봉투 속에 쏘옥 집어넣었다. 중간에 실수로 틀린 탓에 화이트를 사용해야 할 상황이 생겨 얼마나 막막했는지 모른다. 노란 편지지에 하얀 화이트로 수정을 했다간 전체적으로 너무 지저분하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아쉬운 대로, 수정해야 할 부분엔 작은 스티커를 붙여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가 8시 반이었는데… 시곗바늘은 벌써 11시 반이 훌쩍 넘어버린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곧 있으면 12시…. 12시 정각에 딱 맞춰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생각하며 미리 카톡 창을 열어두었다. 작년엔 침대에 누워 대기를 타다 그만 잠이 들어버려 자정이 아닌 아침에 축하의 멘트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꼭 먼저 잠들지 말아야지….
*
11시 59분 50초를 지날 땐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내가 가장 처음으로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다는 작은 욕심 때문일까, 심장도 두근거렸다. 이번엔 작년과는 달리 12시 정각이 되자마자 간단한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데에 성공을 했다. 그러나 김종인은 일찍 잠이 들었던 건지, 대략 10분이 지나서야 답장을 보내왔다. 겉이 번지르르하게 꾸며진 답장은 아니었지만, 녀석 특유의 짧고 단조로운 답장이 잔잔하던 내 마음을 조금씩 요동치게 만들었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에 이렇게 기분이 좋을 줄이야.
"……."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김종인의 프로필 사진만 바라보고 있자니,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김종인새끼'라고 저장이 되어있던 이름이 조금은 둥글게 바뀌어 있었다. 확실히 내가 바꿔놓은 건 아닌데, 도대체 누가 내 휴대폰을 건드렸단 말인가….
'넌 내 이름을…'
'어?'
'김종인새끼가 뭐야, 김종인새끼가.'
'… 아, 그건….'
'내 마음대로 바꿔놓는다.'
'뭐라고 바꿀 건데?'
'나중에 확인해.'
벌써 오래 전의 대화였지만, '김종인새끼'가 '종인이'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확인해. 그 나중이 바로 지금이 될 줄이야…. 아니 그보다, '김종인' 세 글자도 아닌 '종인이'…. 종인이….
생각해보니 난 지금껏 김종인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줬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늘 김종인, 종이야, 이런식으로 불러왔을 뿐, 종인아…, 라며 다정하게 불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지 않던 게 습관이 됐던 탓일까, 막상 다정하게 불러보자 마음을 먹고도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
오늘은 여러모로 잠이 쉽게 오지 않을 듯했다.
*
두근두근. 이상하게도 자꾸만 심장이 빠르게 콩닥거렸다. 내가 선물을 받는 것도 아닌데, 뭐 대단한 선물을 전해주러 사는 것도 아닌데, 괜히 두근거렸다. 마치 고백이라도 하러 나가는 사람의 심정과도 같았다. 너무 떨려서 다른 생각엔 집중도 하지 못할 법한….
생일인데 저녁은 가족과 보내야 할 테니, 일부러 약속을 오후 5시 쯤으로 잡았다. 그냥 선물을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집 앞으로 나오기만 하라는 내 말에 녀석은 거절을 했다. 굳이 우리집과 가까운 공원을 언급하며 거기서 만나자 말하던 녀석은, 그 와중에도 나를 배려해준 것이었다.
사실 짧게 만났다 헤어질 것이니, 무슨 옷을 입고 나갈지에 대해선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김종인에게 연애감정이라는 걸 품어버린 이상, 사소한 이유로 잠깐 만나는 것이라 해도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주 잠깐 만나 편의점이나 마트에 들린다 할지라도 치마를 입고 싶었고, 전해줄 게 있다며 잠시 나와보라 하는 그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머리엔 자연스러운 웨이브를 넣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김종인과의 약속 시간까지 30분이 채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옷차림을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사실 원피스를 입을까 생각했지만, 분명 녀석은 예쁘게 봐줄 것이 아니었다. 추운데 웬 치마를 입고 나왔냐며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
*
기나긴 고민 끝에 결국 선택한 옷은 원피스가 아니었다. 이럴 거면 거울 앞에 서서 원피스를 이리저리 왜 대보았을까, 라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선물 하나 전해주러 가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고 나가는 것도 이상한 것이니….
약속 시간에 1분이라도 늦지 않기 위해 일부러 집을 일찍 나섰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 머리카락을 온통 헤집고 지나가자마자 원피스를 입고 나오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치마를 입으면 안 되지. 그럼 그럼….
김종인과 만나기로 약속한 공원은 고작 5분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좀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던 탓일까, 약속 시간보다 5분이나 일찍 도착해 버렸다. 이렇게 김종인보다 일찍 도착해 녀석을 기다려 보기도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짧아져 오후 5시만 되도 살짝 어두웠다.
선물이 담긴 봉투가 구겨지지 않게 살며시 벤치에 앉았다. 페인트 칠이 거의 벗겨진 하얀 벤치가 꽤나 낡아 보였다. 벤치엔 군데군데 학생들이 새겨놓은 듯한 낙서들이 있었고, 크나큰 나무에서 떨어진 듯한 약간의 나뭇잎들도 살포시 놓여있었다.
"아악!"
벤치에 놓여있는 나뭇잎들을 치우고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그와 동시에 벤치 뒤쪽에 서있는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게 소리치며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고, 적잖이 당황한 듯한 김종인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왜 놀라고 난리야. 나 아무 것도 안 했어."
"아, 왜 뒤에 가만히 서있는데! 왔으면 말을 했어야지…. 언제 왔어? 방금?"
"실은 아까 도착했어. 근데 네가 안 보이길래 한참 찾다가…."
"그니까 날 찾았으면 말을 했어야… 아, 진짜 깜짝 놀랐잖아."
"뭘 이런 거에 놀라고 그래."
오렌지맛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있던 녀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녀석을 흘끗 째려보곤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곤, 가만히 앞만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녀석의 손에 생일 선물이 담긴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와 동시에 김종인의 시선이 하얀 봉투로 향했고, 그런 녀석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자니 괜히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만 같아 혀로 입술을 축였다.
"들여다 보지도 못하게 포장지로 꽁꽁 감싸놨네."
"집에 가서 혼자 봐. 별거 아니지만…."
"돈 많이 쓴 건 아니지."
"에이, 아니야. 걱정 마."
씨익 웃어보이던 녀석이 손을 들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에 한 번 두근, 녀석의 입가에 환히 걸린 미소에 또 한 번 두근. 정말이지, 김종인이 옆에 있으면 내 심장은 남아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고마워."
"……."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고맙다는 말로밖에 표현을 못하겠어."
"……."
"몇 개월 동안 박찬열한테 국어 과외를 받았는데도 이래. 역시 수업에 집중을 안 했어서 그런가."
"… 생일 축하해."
"……."
"종… 인아."
목 끝까지 차오른 단어를 결국 입 밖으로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뱉자마자 후회를 하긴 했지만, 저의 이름을 성 떼고 불러오는 나를 빤히 바라봐오는 김종인의 모습에 그러한 후회감마저 싸악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그냥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 당황했겠지. 당황했을 거야. 또 어색해지겠네….
"종인아?"
"… 뭐가."
"방금 뭐라 했어."
"들었잖아."
"종인아, 라고 했어?"
"… 응."
"웬일이야. 너 설마 여기 안에… 뭐 이상한 거 넣은 건 아니지."
봉투 속을 살펴보기 시작하며 김종인이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 녀석에게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아니라며 정색을 해보이자, 그제서야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봉투 속에 들어있던 노란 편지봉투를 꺼내보인다.
"이거 지금 읽어봐도 되는 거지."
"… 아니거든? 집에 가서 읽어. 뭐 그리 급하다고…."
"종인아, 집에 가서 읽어."
"……."
"이렇게 말해 봐. 그럼 집에 가서 읽을게."
"… 그냥 지금 읽든지."
한 번 내뱉고도 후회했는데, 그 민망한 걸 두 번 다신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떨구었다. 모래바닥 위를 기어다니는 개미들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웅얼거리듯 말하자, 옆에서 녀석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해보라니까 못해."
제 손가락으로 내 볼을 톡톡 건드려오는 녀석의 행동 탓에 더욱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 저렇게 내가 설렐 만한 행동만 골라서 하는 걸까. 혹시 나한테만 이러는 게 아니라 다른 여자들을 대할 때도 그러는 건 아닐까…. 왠지 모를 찝찝함이 느껴졌다.
"궁금한 거 있어."
"뭐."
"너 이런 거…,"
"이런 거?"
"막… 머리 쓰다듬고, 볼 건드리고… 이런 거 말이야."
"……."
"… 다른 여자애들한테도 그래?"
말을 뱉자마자 또다시 후회감이 밀려왔다. 난 왜 항상 이미 말을 해놓고 후회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깊게 생각을 안 하고 그냥 내뱉어서 그런 건가…. 아닌데, 늘 나름 길게 고민하고 말을 꺼내는 건데…. 유독 김종인에겐 말을 조심해서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느껴졌고, 꽤나 조심하고 있다 생각은 하면서도 자꾸만 후회를 했다. 그게 무슨 이유 때문인진, 이러한 감정의 주인인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말했잖아. 아는 여자애 너밖에 없다고."
"… 솔직히 못 믿겠어."
"왜."
"……."
"내가 그렇게 신뢰감 떨어지게 생겼냐."
"아, 그런 뜻이 아니라…."
"근데 진짜야. 나 우리반 여자애들 이름도 절반은 못 외워. 원래 사람 이름 기억하는 걸 잘 못하는 것도 있지만."
"……."
"왜 묻는데, 이런 건."
꽤나 진지하게 물어오는 모습에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황급히 대화 주제를 바꿔보고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꾸만 방금 전의 주제와 관련된 쪽으로만 생각이 닿았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냥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물었다.
"그럼… 나한테만 하는 행동이라 치자."
"……."
"너 그런 거, 아무 감정 없이 하는 거지?"
"뭐?"
"그, 그냥… 아무 감정 없는데 머리 쓰다듬어주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
"…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물론 난… 전혀 아니지만, 괜히 그런 행동에 설레하는 여자들이… 있단 말이야."
"……."
"넌 감정 없이 그냥 하는 행동이라 할지 몰라도… 그걸 받는 사람은 이유없이 설렐 수가 있거든."
"……."
"얼마나 마음이 심란하겠어. 실컷 떨려하고 마음 졸이고 있는데, 정작 상대방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니…."
"야."
"… 응."
"난 지금 네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 그냥, 앞으론 그러지 말라고. 대학도 들어가는데 괜히 다른 여자들… 기대감 갖게 만들지 말라는 거야."
약간의 거짓조차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네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이상, 나한테 행동하는 것처럼 다른 여자들을 대하지 마. 괜한 기대감 갖게 만들지 마…. 실은 은근히 피어나는 질투심이기도 했다. 네가 나를 대하듯 다른 여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나도 모르게 욕심을 부리는 것이었다.
"왜 멋대로 판단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
"난 감정 없는 사람한텐 관심도 안 가져."
"……."
"네 생각 만큼 그리 나쁜 놈 아니라고."
"……."
"… 좋은 놈도 아니지만."
낮게 말을 내뱉은 김종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녀석이 건네온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건지, 감히 예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해온 걸까. 도무지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봐오는 모습에 시선이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안 와? 밥 먹으러 가자."
"… 저녁 가족이랑 안 먹어?"
"너랑 먹으려고 나온 거야. 부모님한텐 말씀 드렸어."
"……."
"빨리 와. 안 오면 그냥 놓고 간다."
투덜대듯 말하는 목소리가 한적하고 조용한 공원 안에 울려퍼졌다. 그냥 놓고 가겠다며 겁을 주는 녀석에게 고개를 젓곤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나를 기다려주는 건지, 일부러 느리게 걸음을 떼며 들고 있던 선물 봉투의 리본을 만지작거리던 녀석이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겨왔다.
"이거 풀렸어. 다시 묶어 줘."
봉투 끈에 달려있던 파란 리본이 풀려 추욱 늘어져 있었고, 녀석이 내게 말해왔다.
"그냥 신발끈 묶듯이 리본 묶으면 돼."
"네가 예쁘게 잘 묶잖아. 얼른."
아이처럼 투정을 부려오는 모습이 귀여워 작게 웃음이 터졌다. 집 안에서 막내라 그런지, 항상 느끼는 거지만 녀석은 알게 모르게 귀여운 구석이 많았다. 저는 잘 모른다 해도….
생일이니 제가 쏘겠다며 먹고 싶은 걸 말해보라는 김종인에게, 최대한 저렴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답을 해주었다. 그저 선물만 전해주고 헤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내 예상이 시원하게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저녁까지 같이 먹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십대의 마지막 생일이었다. 벌써 생일을 몇 번째 챙겨주는 건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우리가 오래 알긴 오래 알았구나. 축하해. 내년 네 생일도, 그 후의 네 생일도, 언제나 함께였으면 좋겠어. 생일 축하해, 김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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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좀 빨리 온 것 같네요 :) 이틀 만인가요? 어느새 시즌 원도 고작 세 편을 남겨두고 있어요 여러분.. 좋은 걸까요..? 우리 답답한 고구마들.. 도대체 언제쯤 행쇼를 하련지.. 시즌 원만 끝나면 후딱후딱 갈 거예요. 걱정 마세요! 는 무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제가 더 걱정이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시즌 원은 오로지 '썸'을 주제로 쓴 글이었으니.. 후회는 없.. 지 않아요 사실.. 흡... 그래도 다들 이렇게 저와 함께 달려와 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행쇼만을 기다려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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