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8 (극과 극)
오늘은 정말이지 하루종일 기분 좋은 날이 될 듯했다. 오후 세 시, 붙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대학교에서 합격 통보가 날아왔으니 말이다. 이 놀라운 소식을 받자마자 부모님께 알렸고, 그 다음은 당연하듯 김종인에게 연락을 했다. 잔뜩 신이 나 말하는 내게 녀석은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주었더랬다.
'기분 진짜 좋아! 너 먹고 싶은 거 없어? 내가 다 사줄게!'
싱글벙글 웃으며 당차게 말하는 내 모습에 김종인은 피식 웃어버렸다. 모처럼 얻어 먹어야지. 먹고 싶은 건 많은데, 일단 만나서 정해. 제 할 말을 내뱉곤 이따 보자는 말을 남긴 채 통화를 끊는 녀석에, 입을 옷을 서둘러 골라놓아야 했다. 저번에 생일 선물을 건네주고자 만났을 땐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오늘은 옷차림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싶었다. 옷장 속에 있는 여성스러운 옷이라곤 원피스 한 벌과 치마 몇 개가 전부였지만, 상관은 없었다.
"……."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입을 옷을 골라냈다. 예전에 사놓고 두어 번밖에 입지 않은 버건디 색상의 플레어 스커트와 하얀 브이넥 니트였다. 특히 니트는 사놓고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예쁘다는 생각 하나로 구입했던 옷인데, 막상 입어보니 목 부분이 생각보단 조금 많이 파인 것도 같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다, 허전한 목을 어떻게든 보완하기 위해 서랍 속을 열어 보았다. 목걸이라도 걸어 볼까, 하며 열었던 서랍이지만, 목걸이라곤 박찬열이 선물해준 것 뿐이었다.
'미리 말하려 했는데, 수능 때문에 바쁘고 예민한 거 아니까 계속 참았어.'
'○○아,'
'좋아해.'
다시금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굳이 생각을 꺼내고 싶진 않았지만, 그가 선물해준 목걸이를 보자마자, 고백을 해오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한숨을 작게 내쉬곤 다시 서랍을 닫았다. 그리곤 김종인이 사준 틴트를 꺼내 입술에 틴트액을 톡톡 묻혔다. 시계는 어느새, 녀석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도 대략 10분밖에 남지 않은 시각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잠시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던 머릿속을 정리하곤 서둘러 반코트를 집어든 채 방을 나섰다. 그리곤 습관처럼 운동화를 신으려다 멈칫하며, 작은 리본이 달린 검정색 단화를 꺼내 신었다. 애인과 데이트라도 하러 나가는 사람 마냥 마음이 두근두근 설렜다.
*
매일 거니는 익숙한 길 위를 밟는 까만 단화. 발을 움직일 때마다 마치 나비와도 같이 팔랑거리며 춤을 추는 작은 리본. 코트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넣은 손이 시리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꽃집의 낡은 간판마저 예쁘게 보였다. 아이보리색 목도리를 두른 채 엄마의 손을 꼬옥 잡고 아장아장 걸음을 옮기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다. 도대체 애인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여성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애인이 아닌 김종인과, 데이트가 아닌 간단한 만남을 가지는 나도 이렇게 설레고 떨리는데…. 과연 애인과 데이트를 앞둔 여자의 마음은 얼마나 벅찰까. 예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딱딱한 길바닥에 발이 닿을 때마다 또각또각 들려오는 소리가 좋았다. 이왕이면 다리가 예뻐 보이는 구두를 신고 싶었지만, 아직 발이 구두에 익숙하지 않아 쉽게 삐걱거리게 될 것만 같아 포기를 해야 했다. 그저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만 있을 무렵, 갑작스레 내 발 앞의 까만 컨버스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그게 김종인이라는 건 굳이 얼굴을 확인하려 고개를 들어보지 않아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 아, 안녕."
이렇게 마주치리라곤 전혀 예상을 안 했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저 어색히 웃어보이며 더욱 어색히 인사를 해보이자, 녀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평소와는 다른 내 모습이 영 익숙하지 않은 건지, 나를 위아래로 훑던 녀석이 괜히 제 뒷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치마 입은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녀석의 반응은 꽤나 찜찜하기만 했다.
"옷이 좀,"
"… 응?"
"파였네."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는 건지, 다른 쪽을 바라보며 김종인이 툭 내뱉듯 말했다. 그런 녀석의 말에 황급히 시선을 내려 목 부근을 바라보았고, 서둘러 겉옷을 여몄다.
"나 추워서 너 벗어줄 옷 없어. 알아서 잘 가리든가, 아님 옷을 갈아입고 오든가 해."
"… 알았어. 잘 가릴게."
"내가 준 목도리는 어디다 팔아 먹었냐. 꼬박꼬박 잘 두르고 다니라고 사준 거야, 바보야."
"… 까먹었어."
예쁘게 봐주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사실이지만, 오히려 쓴소리를 해올 줄은 몰랐다. 옷이 파인 게 무슨 상관이람.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처럼 야하게 노출이 된 것도 아니고 살짝, 아주 살짝 파였을 뿐인데…. 그리고 목도리 안 하는 게 뭐 어때서. 감기 걸린다 해서 너한테 책임을 물으라 하는 것도 아니잖아. 감기 걸리는 건 나지, 네가 아니야. 나름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치마도 입고 나왔는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진짜 미워.
"입술 집어넣어. 뭘 잘했다고."
살짝 미간을 좁힌 채 말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뾰로통하게 내밀고 있던 입술을 황급히 집어넣었다. 서운한 게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서운할 이유는 없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예쁘게 보여봤자지. 아니,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아도, 그거에 서운해 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그저 예쁘다는 말 한 마디를 안 해줬다고 서운하게 여기는 나도 참 이상했다. 우리 사이가 뭐라고. 그냥 친구일… 뿐인데.
"… 가자. 뭐 먹을래?"
"말하는 거 다 사줄 거냐."
"… 일단 들어 보고…."
"음,"
"음?"
"팝콘."
"……."
"영화 보러 가자는 소리야."
새로 개봉한 영화가 있는데 그걸 보면서 팝콘을 먹으면 아주 맛있을 것 같다며 제법 논리정연하게 말을 해오는 녀석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단 둘이서 영화를 보러 간 지도 꽤나 오래 됐지….
"엄청 무서운 영화 보고 싶다. 김종인 겁 좀 먹게."
"뭐라는 거야. 너도 못 보잖아, 그런 거."
"물론 나도 못 보지만, 너 벌벌 떠는 모습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내 말에 김종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어깨에 제 팔을 두른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
예상대로 영화관 안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이 커플인 듯했고, 친한 친구들끼리 영화를 보러 온 듯한 학생들도 간간이 보였다. 먹고 싶은 걸 말해보라는 내 말에 당당하게 팝콘이라 말하던 김종인은 영화가 시작할 시간까지 아직 30분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옆에 앉아 팝콘을 하나씩 먹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 벌써 먹으면 어떡해! 이따 영화 볼 때 먹어!"
"자꾸 입에 들어가."
"그 느낌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오물오물 팝콘을 씹으며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피식 웃으며 내 입 안에도 팝콘을 쏘옥 넣어주었다. 맛있긴 맛있네…. 네가 왜 자꾸 먹는 건지 이해가 간다. 충분히.
"근데,"
"응?"
"오늘 치마 왜 입었어."
갑작스레 물어오는 목소리에 말문이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야 너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입었지. 절대 솔직한 이유를 말할 순 없었다. 어째 가면 갈수록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도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냥. 입고 싶어서."
"자주 안 입었잖아. 무슨 특별한 날에만 입는 줄 알았어."
"… 아니, 뭐…, 꼭 그렇지만은 않아."
괜히 얼버무리며 답하자 녀석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대답을 급히 지어낸 티가 너무 났나….
"… 이상해?"
예뻐? 라고 묻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러진 못할 것 같아, 일부러 반대로 물었다. 내 물음에 녀석의 시선이 다시금 내 옷차림으로 향해왔다. 그리곤 살짝 아랫입술을 문 채 느리게 눈을 꿈뻑이던 녀석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 그래?"
"예쁜데,"
"……."
"감기 걸릴까 봐."
마지막 말을 내뱉곤 아무렇지 않게 콜라를 한 모금 쭈욱 들이키는 김종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입 안을 가득 메운 탄산 때문일까, 녀석의 인상은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단지 예쁘다는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아까의 서운했던 감정은 싸악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듣는 말 중 안 설레는 말이 어디 있겠느냐만, 웬만한 다른 말을 들었을 때보다도 설레고 두근거렸다.
"근데, 대학 멀리 떨어진 건 좀 아쉽다."
"응?"
"나랑 너 말이야."
"… 아…."
"국문학 공부 열심히 해라. 덜렁대다 선배들한테 까이지 말고."
"…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박찬열도 국문학과라 했나."
"아니, 쌤은 국어교육과라 했어."
"하필 같은 국어네."
씁쓸한 표정을 내비치던 녀석이 내 손에 콜라를 쥐여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보니 곧 영화가 시작할 시각이었다. 한 손에 팝콘을 든 채 느긋하게 상영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녀석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뗐다. 꼭 같이 안 가고 먼저 간다니까….
*
우리 자리는 정확히 가운데였다. 먼저 들어가라며 몸을 옆으로 비켜주던 김종인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옆자리엔 녀석이 털썩 앉았고, 팝콘 좀 먹으라며 내쪽으로 통을 기울여보이는 모습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관 의자는 폭신폭신하니 편안했지만, 치마를 입은 탓일까, 약간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더워."
"덥다고? 난 추운데…."
꿈틀거리며 겉옷을 벗던 김종인이 나를 흘끗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치마가 살짝 올라가 하얗게 드러난 내 다리를 제 겉옷으로 덮어주기 시작한다.
"갖고 있어."
"……."
"치마 때문에 낑낑거리는 거, 내가 다 불편해."
툭 내뱉듯 말을 건네곤 녀석이 팝콘을 하나 집어먹었다. 그런 녀석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사소한 배려가 오늘도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곧이어, 상영 시간이 다가옴과 동시에 내부가 어둡게 변했고, 커다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슬프대."
"많이?"
"응. 오세훈이 그러더라."
"……."
"물론 과장이겠지만, 손수건도 흠뻑 적시면서 봤다는데."
"아, 누구랑 봤대?"
"혼자."
"… 혼자?"
"걔 원래 혼자서도 잘 보러 다녀."
"… 그렇구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원체 눈물이 많은 편이라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한 번도 빠짐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오세훈이 눈물로 손수건을 흠뻑 적셨을 정도라니…. 그럼 도대체 난 어느 정도일까. 쉬이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곧이어, 스크린이 환해지며 영화의 제목이 자막으로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수군거리던 소리도 신기하듯 잠잠해졌고, 모든 사람들이 영화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벌써 팝콘을 반이나 먹어버린 김종인은 속이 슬슬 느끼해지기 시작한 건지, 콜라만 한 모금씩 들이키고 있었다. 그러더니, 자세를 편하게 잡으며 마치 곧 잠이라도 잘 것처럼 느리게 눈을 꿈뻑이기 시작한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황급히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해주었다.
"자면 안돼."
"안 자."
자면 안 된다는 내 말에 녀석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그리곤 곧이어 내 쪽으로 향해오는 얼굴에, 다시 황급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주 순간이었지만 녀석과의 간격이 너무나도 가까워 숨이 턱- 하고 막혀버릴 뻔했다. 얼굴도 화끈거리는 걸 보니, 이미 토마토처럼 빨개져있을 게 분명했다. 다행히 상영관 안은 깜깜해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두컴컴하기만 한 내부를 감사히 여기며 영화에 집중을 하고자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
자지 말라는 건 영화에 집중을 하란 소리였는데,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지, 옆에선 자꾸만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면 또 눈이 마주쳐 버리게 될까 두려워 그저 입술을 꾸욱 깨문 채 화면에만 집중을 했다. 괜히 어색해지는 것도 같아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말이다.
"… 영화 안 봐?"
"보는데."
"… 안 보고 있잖아."
"보고 있어."
그저 입술을 깨물기만 하다 시선은 스크린에 고정시킨 채 녀석에게 물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답은 꽤나 모순적이기 그지 없었다. 앞만 보고 있다 해서 옆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 텐데…. 도대체 왜 자꾸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궁금은 했지만,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뚫어져라 바라봐오는 시선이 강렬하면서도 부담스러워 한 손으로 녀석 쪽을 가렸다. 아예 벽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도 딱 여기까지였다.
"미안, 안 볼게. 이제 영화 보자."
제 쪽을 가리고 있는 내 손 위로 갑작스레 깍지를 껴오는 김종인 탓에 순간 세상이 멈춘 것도 같았다. 깍지가 껴진 채 겹쳐진 손을 내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다시 스크린에 시선을 옮기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결코 김종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지 않겠노라 마음 먹은 나였지만,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에 녀석 쪽으로 시선을 옮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녀석의 얼굴엔 어떠한 표정도 걸려있지 않았다. 천천히 시선을 옮겨 부드럽게 겹쳐진 손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내 손 위로 김종인의 큼지막한 손이 얹어져 있었다. 손등 위로, 손가락 사이사이로 녀석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영화에 집중을 하기는 커녕, 등장인물들이 하는 말도 제대로 들려오지 않을 듯했다. 세상에 나만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같았다. 정말이지,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얼굴은 이미 빨개질 대로 빨개졌을 게 분명했다. 정말 좋고 떨리는데,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잡힌 손엔 하나둘 땀방울이 생겨나는 것도 같았지만, 이대로 있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
슬픈 영화라며 눈물로 손수건을 흠뻑 적시면서 봤다던 오세훈이 의아해지는 순간이었다. 분명 슬픈 영화인 건 맞았다. 영화가 끝이 나고 환하게 불이 켜졌을 때, 손수건이나 휴지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눈물이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방울 대신 땀방울이 하나둘 맺혔을 뿐….
상영관을 나서며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던 내 말에 김종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 녀석의 손길이 닿아있던 손등이 뜨거웠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곤 크게 심호흡을 했다. … 아까 손 왜 잡았어? 라고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겠지. 사실 김종인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한 행동일 수도 있는 건데, 손을 잡았다느니 뭐를 했다느니 괜히 나 혼자 설치고 있는 건 아닐까…. 뒤늦게야 우울한 생각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보다는 설레는 감정이 몇 배나 커 금방 잊어버리게 될 가벼운 생각이었다.
*
"재밌었지."
"어? 아, 응. 재밌었어."
"근데 안 울더라. 울 줄 알았는데."
"… 생각보단 별로 안 슬프던데?"
실은 너 때문에 영화에 하나도 집중을 못했어.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꾸욱 삼키곤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내 모습에 고개를 갸웃해보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싶던 녀석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팝콘 먹었잖아."
"그거 하나면 돼? 배 안 고파?"
"응."
"… 영화 티켓도 내가 사려 했는데."
"팝콘 샀으면 됐지. 영화는 원래 내가 보여주려 했어. 대학 합격한 거 축하도 해줄 겸."
대학 합격 통보도 받았겠다, 기분도 좋으니 영화와 팝콘을 내 돈으로 사려 했지만, 먼저 티켓 값을 제 돈으로 지불해버리던 녀석 탓에 하는 수 없이 팝콘과 콜라만 내가 사야 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김종인의 고집은 정말이지 쉽게 꺾이지가 않았다.
*
오늘도 역시나 집까지 걸음을 함께 해준 김종인에게 고맙다며 심심한 멘트를 건넸다. 나보다 한참이나 높이 있는 녀석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이다. 더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시간이 늦어질 것도 같아 이쯤에서 헤어져야 했다.
"간다."
"응, 잘 가."
가볍게 손을 흔들던 녀석이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선 녀석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후에 걸음을 떼고 싶었지만, 절대 먼저 등을 돌리지 않는 녀석 탓에 그럴 순 없었다.
마치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한 뒤 집으로 향하는 사람의 심정과도 같았다. 물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지만, 대충 느낌은 그러했다.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이런 기분, 매일매일 느끼고 싶다…. 정말.
"… 선생님?"
그저 많은 생각을 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코너를 돌았다. 이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바로 집이었다. 그러나, 코너를 돌자마자 보여오는 모습에 황급히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몇 번 본 적 있는 검정색 세단,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있는 익숙한 얼굴의 훤칠한 남자….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벽에 기댄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던 그가 내게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올수록 나도 모르게 두 걸음, 세 걸음 뒷걸음을 치게 되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뒷걸음을 치던 내 걸음도 덩달아 멈추게 되었고, 내 옷차림을 스캔이라도 하듯 시선을 위부터 아래로 옮기던 그가 씨익 웃어보였다. 항상 짓던 그런 웃음이었다.
"전화 했었는데."
"… 아, 진짜요?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그의 말에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와있었다. 세 통 모두 그의 전화였고, 문자 메시지도 두 개가 와있었다. 김종인과 시간을 보내느라 너무 정신이 없었던 나머지, 휴대폰 진동을 못 느꼈던 것이었다.
"어디 갔다 와? 친구랑 놀다 왔어?"
"아, 네…."
"이렇게 예쁘게 입고?"
"……."
"그렇구나."
분명 입가에 걸린 미소, 목소리, 말투는 예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그에게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분명 익숙한데 낯설었다. 내가 보고 있는 얼굴과 듣고 있는 목소리가 과연 그가 맞을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연락 안돼서 놀랐잖아."
"… 죄송해요. 휴대폰이 코트 주머니 속에 있었거든요. 진동 소리가 안 들렸어요."
"어디 납치라도 된 줄 알았어."
"… 설마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아 어색히 답을 했다. 그리곤 황급히 화제를 전환하고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너 보려고 왔지."
"… 저를 왜요?"
"왜냐니?"
"……."
"보고 싶어서 보러 온 거야."
혹시 술이라도 마신 건가, 싶어 그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선 약간의 술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거나, 말투가 어눌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극히도 말짱한 모습이었다. 보고 싶어서 보러 왔다는 말은 도대체…
"○○아,"
"… 네?"
"나 불편해?"
"……."
"아님, 내가 싫은 거야?"
"… 아니에요."
"누굴 만나고 왔는진 모르겠지만, 나 만나고부터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진 것 같아서."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어색히 웃어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다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정시 결과는 나왔어?"
"… 네, 국문학과요."
"아, 그래? 학교는 만족하고?"
"네, 만족해요.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던 그가 살풋 웃으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가 애매해, 알이 큰 그의 손목 시계 쪽을 바라보았다. 워낙 알이 커서 그런지, 은빛깔을 도는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모양까지 또렷이 보였다.
"○○아,"
"네?"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어?"
"… 뭔데요?"
대답하기 곤란한 걸 그가 질문해오면 어쩌지, 라는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열렸다. 괜한 긴장감이 엄습해오는 듯한 느낌에 침을 꼴깍 삼켰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짙은 쌍꺼풀 라인이 드러난 눈이 나를 향해왔다.
"내가 너 보러 찾아오는 거, 거부감 들어?"
"… 아뇨, 그건 아닌데…"
"……."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시면 제가 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
"… 당황스러워요."
그의 커다란 눈동자는 오로지 내 모습만을 가득 담고 있었다. 까만 동공에 비친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뭔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리고 저…,"
"……."
"… 김종인 좋아하거든요."
"……."
"지금 이 상황이랑 어울리는 말이 아니라는 거 알지만, 이건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표정이 차게 식어갔다. 웃는 얼굴과는 차원이 다른 꽤나 차가운 얼굴이었다. 웃음이 걸려있고, 걸려있지 않은 아주 작은 차이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보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환한 표정과 무표정의 분위기 차이가 누구보다도 큰 사람인 듯했다. 박찬열은.
"그런 것 같았어."
"……."
"나도 느꼈거든."
'종인이 좋은 애지?'
'넌 종인이 좋아해?'
예전에 그가 나를 향해 건네왔던 말들이 다시금 머릿속을 맴돌았다. 당시의 난 김종인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며 확실히 잡아뗐었는데…. 불과 몇 개월이 지나버린 지금, 난 그에게 지난 날과는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말을 안 해준 게 있는데,"
"……."
"내가 집착이 좀 심하거든."
"……."
"질투도 많고."
"……."
"근데 나도 그걸 이제 알았어."
"……."
"그냥 그렇다고."
"……."
"지금 이 상황이랑 어울리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건 꼭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듯 말하곤 그가 나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지나치게 냉소적인 웃음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중에 또 올게. 그땐 전화 꼭 받아야 돼. 알았지?"
"……."
"들어가."
그가 다시 한 번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그리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운전석에 올라탄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매끄럽게 이 곳을 빠져나간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는 내가 아는 박찬열이 아닌 것도 같았다. …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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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은 비지엠빨 90퍼센트인데 오늘은 왜인지 자꾸 뚝뚝 끊겨서 나오더라구요.. 어쩔 수 없이 유투브 영상으로 올립니다.. 또륵 하루만에 돌아왔어요.. 사실 이번주는 좀 널널하거든요 :) 빠르면 이번주 안엔 시즌 원 완결이 나오겠네요..! 엉엉엉 많이 기다리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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